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1화
9장 엘프가 되다(2)


‘어라?’
“너 화 안 났어?”
―음? 화났냐고? 그게 퀘스트 보상이니 어쩔 수 없잖아. NPC 따위가 사랑해 봤자 게임인데 뭐.
“그…… 그런가? 근데 걘 평생 나랑 붙어 다닐 작정인 것 같은데?”
―상관없어. 어차피 NPC잖아.
“어……. 응, 알았어. 그럼 끊자.”

“그래, 끊어.”
아영이 핸드폰을 닫았다.
“뭐래? 정말로 엘프가 됐대? 거짓말 아냐?”
아영의 언니 가영이 아영에게 물었다.
“진짜야. 현이는 나한테 거짓말 안 해.”
“그 현 군을 또 TV에 나오게 해서 시청률 올리려고 하는 건 아니겠죠?”
아영의 경호원이 눈빛이 변한 가영을 보고 말했다.
“나 참. 언니, 그런 짓 하지 마.”
“하지만 요즘 우리 GTV의 경쟁 채널인 온라인넷에 시청률을 빼앗기고 있어. 그걸 타개하기 위해서는 뭔가 획기적인 특종이 필요해.”
“그래도 현이는 이제 안 돼. 현이는 내 남자 친구이니까.”
“쳇!”
투덜거리는 가영을 뒤로하고 아영은 창문 밖의 야경을 보았다. 이곳은 해운대에 있는 호텔이었다. 하지만 엘프가 된 현이의 모습을 상상하느라 아름다운 야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떤 모습이려나? 보고 싶다. 모든 일을 취소하고 달려가고 싶어. 조금만 기다려, 현아. 내가 갈게. 그리고 나한테 달라붙는 유승주를 좀 떼어 내 줘.’
현이의 얼굴이 떠오르자 아영은 웃음이 나왔다.

“자아…… 이제는 지난번에 계획한 총이나 만들까?”
데네브는 접속한 즉시 엘레나네 집을 나와서 마을의 대장간으로 갔다.
“총이 뭐야? 먹는 거야?”
엘레나가 데네브를 따라오며 물었다.
“아, 그거? 먹는 거는 아니고, 음…… 활보다 더 빠르고 강한 무기야.”
“진짜?”
“응.”
“나도 만들어 줘!”
엘레나가 데네브의 팔에 매달리면서 떼를 썼다.
“아야! 알……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매달려. 팔 아퍼.”
“헤헷, 고마워. 그럼 수고해! 그동안 난 계곡에 가서 수영이나 할래!”
데네브의 말이 끝나자마자 엘레나는 팔을 놓고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데네브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엘레나가 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이 동그랗고 길쭉한 쇠 막대 2개랑 기타 다른 이상한 모양의 쇠붙이들을 만들어 달라고?”
대장간의 대장장이 엘프가 데네브가 그린 설계도를 보며 말했다.
“네.”
“뭐, 정령을 이용하면 간단히 만들겠지만, 도대체 이건 뭔가?”
“가르쳐 드릴 수 없어요. 가격은 완성되면 정해 주세요.”
“일족끼리는 돈을 안 받는다. 그냥 해가 질 시간에 찾으러 와. 그때까지 만들어 놓을 테니까.”
‘아싸!’
데네브는 대장장이 엘프에게 살짝 웃어 보이고는 대장간을 나왔다.
“총열과 부품은 됐고. 총신은 내가 만들어야지.”
데네브가 만들려고 하는 총은 부싯돌식 화승총이었다. 현대식 총은 너무 복잡한데다가 그런 게 나오면 판타지 세계가 붕괴될 거라는 생각에 일부러 약한 총을 제작하기로 했다.
“총신과 개머리판은 미스릴로 제작해야지. 오랜만에 책 좀 펴 볼까? 파이어 볼트.”
엘레나네 집에 돌아온 데네브는 냄비에 불을 붙인 후 석회석과 철 덩어리를 넣고 미스릴을 만들기 시작했다. 미스릴 제작은 지극히 간단했다. 녹은 철에다가 초록색을 띠는 광물인 공작석을 넣으면 끝이었다.
퍼엉!
“완성이다!”
완성되자마자 데네브는 미스릴 녹은 물을 형틀에 부었다. 시간이 지나 미스릴이 굳어지자 망치로 형틀을 뜯어냈다.
깡! 깡!
“감정.”
[미스릴 ―연금술 제작―
자연적이 아닌 연금술로 생산된 금속.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금속 중에 하나다. 일반 철보다 질량에 비해서 가볍다(약 1/2).
제작자가 무엇을 위해 모양을 내서 만들었는지 용도를 알 수가 없다.
제작자:데네브]
“괴로 안 만들어서 그런가? 용도를 알 수가 없다니……. 아무튼 이제 총열과 부품만 오면……. 아니지, 총알이랑 화약을…….”
“데네브 님.”
“아, 레오나르도 님.”
레오나르도였다.
“데네브 님은 정령과 계약 안 하십니까?”
“정령이요?”
데네브는 밖에서 어린 엘프들과 놀고 있는 물, 불, 땅, 바람의 정령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데네브도 엘프가 되면서 정령을 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귀찮아요. 정령이 생기면 아주 편리한 부하 하나 생기는 거라서 좋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어요.”
“네?! 그…… 그런……. 금방인데, 지금 하죠?”
“지금 무기 만드는 것도 힘드니 다음에 하죠. 아, 오신 김에 저 좀 도와주세요. 가서 솜을 되도록 많이 가져와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레오나르도가 나가자 데네브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거, 식객이 집주인을 너무 부려 먹는 거 아냐? 핫핫핫.”
레오나르도가 솜을 가지고 오자, 데네브는 황산과 질산을 5대 5로 섞은 혼합물을 솜에 적셨다. 면화약을 만들 생각이었다.
흑색 화약은 총에 쓰이는 건 적합하지만, 연기가 심한데다가 재료인 숯은 엘프 마을에서 구하기가 불가능했다. 엘프는 나무를 잘라 태우는 것을 나무를 죽이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거기다 ‘타고 남은 나무의 시체’를 또 태우는 것은 ‘나무를 두 번 죽이는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숯을 만들거나 쓰는 행위를 금지하였다.
게다가 또 다른 재료인 유황은 타면서 금속을 녹슬게 만들었다. 그래서 유황이 들어간 화약을 자주 쓰면, 총의 부품이 쉽게 녹슬기 때문에 관리하기가 매우 까다로웠다.
“엘프가 되어서 가장 안 좋아진 게 바로 나무를 자르거나 태울 수 없는 거야.”
데네브가 작업을 계속하면서 투덜거렸다.
적신 솜을 물과 함께 끓여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갈아서 걸죽하게 만들었다. 다음에 젖은 상태에서 화승총의 약실과 똑같은 크기로 면화약을 덩어리로 만들어서 말렸다.
“슬슬 해가 지는군. 대장간에 가서 재료를 받아야겠어.”
“데네브!”
엘레나가 놀다가 집으로 들어왔다.
“아, 잘 왔어, 엘레나. 대장간에 가서 내가 주문한 것들 다 받아 와.”
“칫, 오자마자 이게 뭐야?”
“너도 총 갖고 싶다고 했잖아. 얼른 가서 받아 와. 안 그러면, 안 만들어 줄 거야.”
돌아온 엘레나를 곧장 부려 먹는 데네브였다.
엘레나는 데네브에게 도끼눈을 날리고 대장간으로 가 버렸다.
“가지고 왔어.”
조금 뒤, 엘레나가 한 아름 안아서 가지고 왔다.
“수고했어. 총 조립할 건데, 엘레나, 도와줄래?”
“싫어.”
“칫.”
엘레나가 거실에 누워서 빈둥빈둥 시간을 때우는 동안 데네브는 옆에 앉아 조립하기 시작했다.
“이런! 백과사전이랑 인터넷에서 어정쩡하게 봐 가지고는 조립하기가 힘들다니까.”
고생 고생해서 1시간 만에 겨우 한 자루를 완성했다.
[이름을 정해 주십시오.]
“이런 무기는 이름도 정해야 하는 건가? 음……. 엘프의 화승총.”
[이름이 정해졌습니다.]
“감정.”
[엘프의 화승총 ―제작―
제작자 엘프가 새로운 무기를 만들기 위해 제작한 무기. 사용 방법은 제작자만 안다. 철을 제련한 곳이 신성한 숲이라 숲의 가호가 새겨져 있다. 또한 미스릴로 만들어져 있어서 질량에 비해 가볍다.
무게:60
공격력:?????
방어력:1,200
마법 방어력:700
내구력:300
특수 능력:숲의 가호로 20% 확률로 마법 공격 무효화. 공격력은 발사되는 금속에 따라 달라진다. 엘프만 착용 가능. 엘프 이외의 다른 자가 착용하면 튕겨 나감.]
“에르메키아 월드에서는 아직 엘프 유저가 없으니까 사용할 수 있는 유저는 나밖에 없군.”
덥석!
“어라?”
엘레나가 데네브가 만든 화승총을 빼앗았다.
“이건 이제 내 거! 수고했어, 데네브.”
“너……. 에휴! 얌마, 엘레나. 네가 사랑하는 인간이…… 아니, 엘프가 땀을 흘리면서 만든 것을 그렇게 강제로 빼앗냐? 가져가면서 나한테 뭔가 해 줘야지.”
데네브는 화승총을 조립하느라 땀을 많이 흘리고 있었다.
엘레나는 심각하게 고민하더니,
“음…… 그러면, 수고의 의미로 뜨거운 사랑의 키스 해 줄까?”
‘어이…….’
“그거 말고, 다른 거.”
이번에는 엘레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그러면, 그 뜨거운 몸을 이끌고 나와 함께 침대로 가서……. 아이 참, 부끄럽게……. 데네브도 은근히 응큼하네.”
“크아아악! 그게 아니잖아! 시원한 냉수 한 사발 가지고 오라고! 그렇게 눈치 없어?”
“칫, 뭐야! 겨우 그거였어?”
아깝다는 표정을 짓는 엘레나였다.
‘어이어이. 뭐냐? 그 표정은?’
“시원한 녹차 타 줄게. 조금만 기다려.”
“그래, 얼음도 동동 띄워 줘.”
엘레나는 부엌으로 가 버렸다.
“에휴…… 여기에 계속 있으면 뭔가 일어날 게 분명해.”
데네브는 엘레나의 뒷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엘레나도 경국지색이지. 아름다운 얼굴에 키도 크고. 칫, 나보다 더 커. 말하기 뭣하지만 발육도 잘 되어 있고. 그걸 따지면 아영이는 키도 작고 발육은 더디지만, 커다란 눈망울 덕분에 귀여운 소녀 같은 얼굴이라서 엘레나에게 기죽을 필요는 없지. 키 작은 게 더 귀여워 보여. 성격은……. 음…… 엘레나는 선머슴이지. 지 오빠에게 들어 보니 사고를 많이 쳤더군. 엘프 남자들을 패고 다닌다고 하니……. 훗훗훗! 그러니까 또래들 중에서 유일한 노처녀지. 그때 침낭 사건 아니었으면 본모습을 보지 못했을 거야. 반면에 아영이는 뭐랄까…… 좀 소심하다고 할까? 그래도 용기를 내면 강한 여자지. 뭐, 그게 아영의 스타일이니까. 공주 스타일……. 흐흐흐. 그 덕분에 많은 대한민국의 남성들에게 사랑을 받는 거겠지. 그런 여자애한테 고백 받은 난 뭘까나? 장점이 있으려나? 오히려 아영이에게 부담되지 않나?’
꽈악!
“아야야야야. 뭐……뭐야?”
엘레나가 데네브의 볼을 꼬집었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차가운 녹차 타 왔어. 얼음을 동동 띄워서.”
‘동동’이란 단어에 힘을 준 엘레나는 대나무로 만든 컵을 내밀었다.
“고마워 엘레나. 수고했어.”
쭈욱.
[차가운 정령수의 차를 마셨습니다. 더위가 가십니다. 피로가 풀립니다. 마음에 평온함을 느낍니다.]
“호오…… 이것은…….”
마시는 순간 풀의 향기가 나면서, 입 안에 남는 청량함을 느낀 데네브는 엘레나를 보았다.
“녹차라고 했지만, 사실은 정령수의 잎에서 딴 차야. 아주 좋지? 내가 만들었어.”
“대단해……. 이렇게 좋은 차가 있을 줄은…….”
엘레나의 차에 힘입어서 데네브는 이번에는 30분 만에 조립을 완성할 수 있었다.
“수고했어.”
엘레나가 데네브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휴우…… 다 엘레나의 차 덕분이야. 고마워.”
“고맙긴. 그럼 이제 자자. 밤이 늦었어.”
“아…….”
얼마나 밤이 깊어졌는지, 엘프들의 집들은 전부 불이 꺼져 있었다.
“그럼 잘 자. 좋은 꿈꿔.”
“응, 데네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