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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4장 GTV 앵커 한아영, 납치당하다(2)


‘재미없군. 뭐, 게임상이니까 잔인하게 나가는 거지.’
“어라? 분명히 마취 가스를 살포했는데 비명을 지르네. 뭐, 다음!”
이번엔 경호원 쪽으로 다가갔다. 아영과 경호원을 떼어 낸 후 데네브는 마찬가지로 지팡이를 겨눴다.
번뜩!
경호원은 제대로 마취되지 않았는지 눈을 번뜩이며 데네브를 노려보았다.
“이런! 마취가 안 되었군요. 그냥 단번에 보내 드리죠, 그럼.”
뽁!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경호원의 머리가 옆으로 굴러 갔다. 로그아웃당한 사람들은 그대로 회색의 재로 변해 날아가 버렸다.
“자, 여러분에게 깜짝 퀘스트를 내 볼까요?”
데네브는 여전히 장난기가 섞인 말투로 카메라를 보면서 말했다.
“일명 ‘극악무도한 마법사에게 잡힌 공주를 구하라!’인데…… 어떤가요? 이쯤이면 감이 잡혔죠? 예, 그렇습니다. 전 이분을 납치할 거랍니다! 핫핫핫!”
사람 좋게 웃는 데네브의 모습은 사악하기 그지없었다.
“제 상태가 몬스터화이다보니 유저를 잡아야 경험치가 오르더군요. 그런데 유저들을 들어오게 하기는 싫고 문 안에서 잡는 것도 지겹답니다. 그래서 유저들이 오게 만들어야 하는데, 마침 좋은 인질이 제 발로 왔군요. 유명한 연예인인가 보죠? 뭐, 나랑 상관없지만……. 몬스터에게 잡힌 유저는 로그아웃하거나 자살해도 다시 접속할 때 몬스터에게 잡힌 곳에 접속되죠. 여러분들이 못 구하시면 이분은 저와 이 방에서 약 10개월 이상 보내셔야 한답니다. 크크크크. 남자 유저 분들, 그건 싫죠? 그럼 어서 오세요! 전 현실 시간으로 내일 오후 7시쯤에 접속해서 여러분들을 문밖에서 기다리도록 하죠. 마침 새로운 병기를 개발해서요. 저를 이기신다면 제가 가진 보물들과 희귀한 금속을 드리죠. 그리고 여기 잡혀 있는 ‘공주님’을 구하는 영광이……. 크하하하하! 참고로 저를 죽이지 말고 잡으시길……. 죽이면 저의 아이템은 받아도 연금술로 만든 희귀한 금속은 못 얻으니까요. 제 몸은 소중하답니다. 그럼 전 이분을 데리고 들어갑니다! 시청자 여러분, 내일 오후 7시예요! 안 오시면 저와 10개월 정도 지내거나 그냥 연금술 만들 때 쓰도록 하죠. 아다만티움이라고 하는 마계의 금속을 아시죠? 그거 만들려면 사람을 산 채로 용광로에 넣어서 만들어야 되거든요. 절망과 고통, 분노를 느끼면서 죽어야 암흑의 금속이 나오거든요. 그럼 내일 봐요, 핫핫핫핫!”
데네브는 아영을 안고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나와서 철퇴로 카메라를 부숴 버렸다.

‘…….’
한가영은 이 장면들을 빠지지 않고 계속 보고 있었다.
“대체 저건 뭐야!”
한편 카오스 사에서도 난리가 났다.
“오 부장님! 이건 뭐라고 해야 될지…….”
“강 실장……. 방금 사장실에서 전화가 왔네.”
“예?”
“그 유저가 말한 대로 깜짝 퀘스트를 하라는 지시라네. 사장님은 이번 일이 무척 마음에 든다고 하신다더군. 운영자들은 경거망동하지 말고 그냥 자신이 할 일만 하라는 지시라네.”
“하지만요, 부장님! 잡힌 여자가 한아영이라고요! 이미 TV, 인터넷 사이트, 저희 홈페이지는 아까 그 일 때문에 난리가 났다고요!”
“그러니까 그러는 거야.”
“예?”
“이번에 아주 좋은 이벤트가 될 거라는 말이야. 덕분에 우리 에르메키아 월드는 좀 더 사람들에게 알려지겠지. 데네브라는 유저가 연금술사가 될 때부터 나는 그를 주시해 왔어. 아주 재미있는 녀석이더군. 이번 기회에 ‘극악무도한 마법사’로부터 ‘공주’를 구하는 ‘용사’ 이벤트를 하라는 지시야.”
“나 참, 유치하게……. 그런 흔한 동화책 이야기를 누가 좋아한대요?”
“만약에 자신이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 마법사를 물리치고 아름다운 여자를 구한다는 것은 남자들에게는 아주 멋진 일이야. 게다가 그 여자가 모든 남자들이 좋아하는 한아영이니 너도나도 달려들 거야.”
“호오, 그럴지도 모르죠.”
“이미 사장님이 GTV 채널과 전화 통화 중이네. 혹시…… 어쩌면 한아영 양이 자신을 구해 줘서 고맙다고 안아 줄지도 모르지. 흐흐.”
“아악! 그건 안 돼요!”
강 실장은 결심했다. 자신도 이 이벤트에 참가하겠다고. 운영자가 이벤트에 나가는 건 금기이지만 회사에서 짤리는 한이 있어도 꼭 참가하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나중에 오 부장에게 걸려서 게임상에서 죽도록 맞은 안타까운 이야기가 전해졌다. 이렇게 해서 카오스 사는 다시 조용해졌다.

“으……음.”
게임상의 한아영은 잠에서 깼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여긴 어디?”
이상한 곳이었다. 한쪽의 절반은 온실로 되어 있었고, 나머지 한쪽은 여러 가지 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또한 오이, 당근 같은 야채류도 심어져 있는 텃밭과 잔디가 깔린 곳도 있었다.
아영이 있는 곳은 가장 구석진 곳으로 바닥의 잔디 위에 가구들만 놓여 있었다. 옆에는 흐르는 샘물이 있었다. 천장에는 라이트 마법이 켜져 있어서 아주 밝았다. 그냥 보면 아주 아름다운 동산 같았다.
“아, 일어나셨군요.”
“아…….”
아영은 목소리가 난 쪽을 보았다. 아까 들었던 목소리였다.
“안녕하세요, 한아영 양, 아니 아이디가 뭐죠? 본명을 부르자니 뭔가 이상해서…….”
아영이 앞에는 훤칠한 키에 웨이브진 단발머리, 잘생긴 이목구비, 창백한 피부, 그리고 반짝이는 붉은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은 쟁반에 찻잔 세트를 들고 서 있었다.
아영의 대답이 없자 그가 다시 말했다.
“데네브라고 합니다, 한아영 양. 이 동굴에서 퀘스트 때문에 사는 비운의 연금술사죠. 다시 묻죠. 아이디가 뭐죠?”
“아, 예. 아리시아입니다.”
“좋아요, 아리시아 님. 차 한 잔 어떠세요?”
“아, 감사합니다.”
아까와는 딴판인 데네브의 모습에 아리시아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아주 잘생겼다.’
이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혹시 그게 본모습인가요?”
아리시아가 데네브에게 물었다.
“예. 눈 색깔을 빼면 본모습입니다만?”
“나이는?”
“열아홉.”
“어머나! 동갑이군요.”
‘뭐야? 이 사람은?’
데네브는 꼬치꼬치 자신에 대해 캐묻는 아리시아를 보면서 불쾌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밖으로 표출하지는 않았다.
“어디 사세요? 어느 학교 다니세요? 또…….”
데네브는 심문을 당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예의 바르게 답해 주었고 불편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 잘 말해 주었다.
“와! 차 맛이 좋군요. 무슨 차인가요?”
“자스민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거죠. 여기서 구하는 데 약간 애를 먹었지만 겨우 구했습니다.”
“그런데 제 경호원이랑 카메라맨 아저씨는요?”
아리시아는 경호원과 카메라맨이 없다는 걸 알고 데네브에게 물었다.
데네브는 아주 온화하게 웃어 주었다.
아리시아는 그 모습에 얼굴이 빨개졌다.
그리고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
“제가 죽였습니다만?”
“예?”
“마취 가스를 살포한 다음, 지팡이로 로그아웃시켜 드렸습니다. 카메라맨은 장이 파열되게 해서 없앴고, 경호원은 목을 잘랐습니다.”
“설마…….”
아리시아는 순간 자신이 들어오기 전에 만났던 유저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순간 붉게 물들었던 얼굴은 금방 창백해지더니 점점 푸른빛이 돌았다.
“나…… 날 어쩌실 건가요?”
아리시아는 순간 손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면서 물었다. 지금 생각하는 게 ‘어떤 쪽’으로 흘러갔다. 이 사람은 나랑 ‘응응’ 하기 위해 살려 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에르메키아 월드는 초현실감을 구현한 게임이기에 그런 짓도 가능했다.
청소년이면 청소년용 캡슐을 사용하여 만약에 누드를 보았을 경우 전부 백색 처리하게 되어 있었고, 그런 짓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기능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아영이 들어간 캡슐은 방송사 사람들의 공용으로 성인용이었다. 게다가 데네브가 경품으로 받은 캡슐도 성인용으로 캡슐을 줄 때 나이를 확인을 안 한 카오스 사의 실수였다.
게임상에서 강제적으로 행할 경우, 영구 게임 정지인 데다가 게임사 측에서 법원으로 곧장 고발을 하는 등의 사후 안전장치가 강구되어 있어 지금까지는 그런 일이 없었었다.
하지만 아리시아가 생각하기엔 이 늑대(?)는 감옥에 가는 걸 감수할 근성 있는 녀석으로 보였다. 왜냐면 얼굴만 보면 자신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지게 할 정도로 호감형이지만, 동굴 속에 사는 이상한(?) 녀석이기에 그런 편견이 들었다.
“핫핫핫! 그런 짓은 안 합니다. 제가 미쳤다고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그저 아리시아 님은 인질입니다.”
데네브는 웃으면서 아리시아의 생각을 일축시켰다.
“인질이요?”
“예.”
“제가요?”
“그렇습니다만, 나중에 인터넷을 확인하세요. 전 이제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하거든요. 그럼 로그아웃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내일 오후 7시에 들어오셔야 해요.”
차를 다 마신 데네브는 온갖 이상한 기기들이 있는 책상으로 가 버렸다.
아리시아는 이중적인 데네브의 성격에 감을 못 잡은 채 어안이 벙벙해져 데네브를 쳐다보았다.
“저기요…….”
“왜 그러십니까?”
“그것들은 뭐예요?”
데네브가 앉아 있는 책상 위에는 온갖 튜브와 삼각 플라스크가 널려 있었다. 그 안에서 여러 가지 색깔의 약물이 데워지고 섞이고 걸러진 다음에 마지막으로 주둥이가 긴 호리병 속으로 들어갔다.
“손님을 환영하기 위해 만드는 선물이지요.”
“그게 뭔데요?”
“니트로글리세린을 아십니까?”
“힉! 니트로글리세린이라면?”
“예, 액체 폭약이죠. 아주 강력한…….”
“가…… 가까이 오지 마세요!”
아리시아는 데네브에게서 멀리 떨어지면서 말했다.
“핫핫핫! 걱정하지 마세요. 이것은 안전한 것이니까요. 기존의 니트로글리세린이랑은 아주 다른 거니까요. 이것은 약한 충격에 폭발하지 않아요. 호리병이 깨질 만큼 강력한 충격이 있어야 폭발합니다.”
“저…… 정말이요?”
“그럼요, 괜찮아요. 이리로 오세요.”
“그…… 그럼.”
아리시아는 조심스럽게 데네브에게 다가갔다.
데네브가 옆에 의자를 마련해 주었다. 데네브는 약물이 들어 있는 약통에 이상한 약초를 갈아서 넣고 알코올램프로 가열하고 튜브를 연결하느라 손을 바삐 움직였다.
“힘들지 않으세요?”
아리시아는 구경하는 것도 지겨워 물었다. 데네브가 작업한 지 어느덧 한 시간이 지났다.
“아, 아직 안 가셨나요? 전혀 안 힘듭니다.”
하지만 데네브의 머리와 얼굴에서는 땀방울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손을 움직여 댔으니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안 힘들긴요. 이봐요.”
“괜찮습니다. 이제 좀 있으면 100병을 채우니까요.”
“저녁이나 먹을까요? 공복도가 떨어져 가는데…….”
“차려 드리죠. 이제 막 100병을 채웠으니까요.”
“아니, 그러실 것까진…….”
“인질이 인질범에게 밥 차리라고 하는 거 봤어요? 인질범이 주는 거지.”
마지막 호리병의 마개를 닫은 데네브가 가구들 가운데에 있는 화덕으로 가서 작은 냄비를 올리고 물을 담았다.
“파이어 볼트.”
야구공만 한 작은 불꽃의 구가 냄비 밑 장작에 닿자 곧 불이 붙었고, 얼마 후 물이 끓기 시작했다. 물이 끓는 동안 데네브는 아이템 창을 열어 도마에 돼지고기, 양파, 당근, 피망을 썰고 완두콩 통조림을 꺼내서 뜯었다. 물이 팔팔 끓자 데네브는 그 재료들을 전부 냄비에 넣었다. 거기에 갈색의 향신료에 파슬리 가루도 뿌려 주는 마무리 센스까지 보였다.
‘꽤나 가정적인 사람이네.’
아리시아는 능숙하게 요리를 하는 데네브를 보고 감탄했다.
‘저런 남자에게 시집가면 와이프는 참 편하겠네. 아니지, 내가 무슨 생각을!’
아리시아는 혼자 얼굴이 붉어진 채 도리질쳤다.
‘물을 떠야겠군.’
아리시아는 물병에 물이 떨어진 걸 보고는 물통을 들고 샘물로 갔다.
“앗! 그 물은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