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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그날 이후 그 여자는 잊었다. 하지만 잊었던 여자를 다시 본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의 점심시간이었다.
휘는 당시 함께 드라마를 했던 감독과 방송국 앞 식당에 앉아 있었다. 그때 가게 문을 열고 야구 모자를 쓴 여자가 들어왔다. 단발머리 여자는 ‘나 무지 겁 많아요!’라고 외치고 있는 듯한 커다란 눈을 가지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그 큰 눈을 휘가 예리하게 쳐다봤다.
왠지 낯이 익은데?
낯이 익는다고 생각했지만 어디서 봤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방송국 근처니 같이 일했던 촬영 스태프거나 작가 정도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여자는 주저주저 식당에 들어오더니 근처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주문을 하기 위해 아주머니에게 몇 번 손을 들었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지 못할 정도로 소심하게 들고 있었기에 한참이나 무시당했다.
‘뭘로 줄까?’
결국 주문을 받으러 먼저 테이블로 온 아주머니에게 여자는 모기만 한 목소리로 주문을 했다.
‘서, 설렁탕 두 개…… 주세요.’
들릴 듯 말 듯 아주 작은 목소리를 들으니 머릿속에 무언가 떠오를 것 같았다. 어디서 봤지? 분명 어디서 본 것 같긴 한데…….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아 휘의 미간이 바짝 좁혀질 무렵, 어떤 여자가 달려오더니 그 여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미안, 결아야! 기다렸지?’
‘괜찮아. 별로 안 기다렸어.’
결아? 역시 아는 여자가 아닌 모양이군. 이름이 생소한 걸 보니.
휘는 관심을 접고 감독과의 대화에 집중하려 했다. 그런데 나중에 온 여자의 목소리가 워낙 커서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었다.
‘어? 그런데 왜 선짓국 시켰어? 너 선짓국 못 먹잖아.’
음? 그러고 보니 저 여자가 시킨 건 설렁탕이었는데 저 테이블에 있는 뚝배기엔 뻘건 국물이 담겨 있었다. 설렁탕이 선짓국으로 변신하는 매직……일 리도 없고, 뭐야? 잘못 나온 건가?
그때 그 여자가 아주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 그냥 시켜 봤어. 어서 먹자, 언니. 바쁘다면서.’
아, 그 새치기! 그 순간 생각났다. 몇 주 전엔가 행사장에서 봤던 내리 새치기만 당하던 여자.
‘목소리 큰 여자가 있나 했더니, 이루리 피디네?’
시끄러운 소리에 시선을 돌려 본 감독이 맞은편 여자 쪽을 보며 말했다. 휘가 감독을 힐끗 바라봤다.
‘감독님 아는 사람이에요?’
‘뭐, 잘 알진 못하는데 라디오 쪽에선 유명해. 아주 열정이 장난 아니거든.’
‘아아.’
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여자들 쪽을 주시했다.
‘거봐. 먹지도 못할 거면서 왜 이런 걸 시켜? 다른 거 먹을래?’
‘아, 아니야. 그냥 이렇게 김치에다 먹어도 맛있어. 하하…….’
여자는 선짓국엔 손도 대지 않은 채 맨밥에 밑반찬으로 나온 김치만 얹어 먹고 있었다.
‘참 피곤하게 사네.’
‘응? 뭐라고 했나?’
저도 모르게 나온 소리에 설렁탕을 먹고 있던 감독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휘를 바라봤다.
‘아, 아닙니다. 갑자기 생각난 사람이 있어서요.’
‘그래?’
감독이 자기한테 한 말이 아니라니 안심한 얼굴로 다시 설렁탕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휘가 말했다.
‘가끔 보면 일부러 세상 피곤하게 살려고 작정한 사람들이 있는 것 같잖아요. 감독님은 그런 사람들 보면 무슨 생각이 드세요?’
‘흠…… 글쎄. 내 주변 사람이면 답답하겠지만 어차피 남 일이니까. 허허.’
감독은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하긴, 그렇겠죠. 남 일이니까.’
어깨를 으쓱인 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여자 쪽으로 향했다. 언니라는 여자는 선짓국을 뚝배기째 들고 마신 건지 그새 그릇을 비우고는 휴대폰을 들고 일어서고 있었다.
‘아! 네! 부장님. 네? 아니, 그럴 리가……. 섭외는 제가 한 게 아니라서요. 지금 바로 가서 알아볼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화를 끊은 루리라는 여자가 부랴부랴 가게를 빠져나가며 소리쳤다.
‘결아야! 언니가 바빠서 먼저 간다! 집에 가서 보자!’
‘아, 응. 수고해.’
혼자 남은 여자는 곧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카운터로 향했다. 카운터로 가자 직원이 친절한 얼굴로 말했다.
‘맛있게 드셨나요? 설렁탕 두 그릇, 만육천 원입니다.’
‘만육천…….’
여자의 시선이 벽에 붙어 있는 메뉴판으로 향하자 휘의 시선도 절로 그쪽으로 움직였다.

설렁탕 8,000원
선짓국 6,000원

그걸 물끄러미 보던 여자의 얼굴에 잠시 고민의 빛이 스쳤다. 동시에 휘의 눈에도 흥미로움이 스쳐 지나갔다.
자, 어떡할래?
즐거운 마음으로 구경하려는데 찰나의 고민이 끝났는지 여자가 조용히 지갑에서 지폐 두 장을 꺼내 내밀었다.
‘여기…….’
‘네, 거스름돈 사천 원입니다.’
저 멍청이가!
휘의 인상이 자기도 모르게 팍 구겨졌다. 그게 뭐 어렵다고 말을 못 해? 하긴, 새치기를 그렇게 당하던 여자인데 어련할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휘는 목에 뭔가 걸린 듯 답답한 기분이었다.
‘안녕히 계세요…….’
여자는 나가기 전 다시 한번 메뉴판을 힐끔 보더니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가게를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본 휘가 낮게 중얼거렸다.
‘다행이네요.’
‘음?’
설렁탕을 다 비운 감독이 무슨 소리냐는 듯 묻자 휘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제 주변 사람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 답답한 사람이.’
‘아아. 뭐, 그렇지.’
감독이 대수롭지 않게 끄덕이자 휘는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지나가는 그 여자를 바라봤다. 여자는 아쉬움이 담긴 눈빛으로 가게를 한번 올려다보더니 자신의 머리를 주먹으로 콩콩 때렸다.
바보 같긴. 이제 와서 후회하면 뭘 하냐.
정말 보고 있으면 절로 답답증을 불러일으키는 여자였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묘한 호기심도 생겼다. 이 세계에 있다 보니 주변엔 늘 화려하고 자기주장 강한 여자들만 있었다. 안 그런 척해도 어떻게든 튀고 싶어서 안달한 여자들만 겪다 보니, 저렇게 소심한 여자가 신선한 면도 있었다.

“그땐 속을 그렇게 답답하게 만들어 놓더니, 내 코를 뭉개 버렸단 말이지.”
과거에서 빠져나온 휘가 러닝머신 위에서 몹시 매혹적이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겁먹은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결아의 표정을 떠올리니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삑.
작동을 중단시킨 휘가 즐거운 얼굴로 러닝머신에서 내려왔다.

휘가 체력 단련실로 들어간 이후 결아는 좀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무서운 사람이라도 눈앞에서 안 보이면 그만이라지 않은가. 혼자 청소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하니 조금 기운이 났다.
그 남자가 다시 나타나기 전에 빠릿하게 움직여 어서 청소를 끝내고 가자!
그렇게 생각하며 복도를 열심히 닦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어?”
놀란 결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랬더니 눈앞에 타월 하나만 허리에 걸친 휘가 떡하니 나타났다.
“으아악!”
“으아악?”
휘는 물기 젖은 머리칼을 푸르르 털다가 자신의 벗은 상체를 보고 결아가 내지른 비명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이 예술적인 상체를 보고 낼 소리냐?”
꾸준히 체력 관리를 해 온 덕에 가오리 갑빠와 초콜릿 복근을 장착한 자신의 상체를 자랑스럽게 드러내며 휘가 말했다. 결아는 몹시 충격을 받은 얼굴로 시선을 바닥으로 수직 낙하 시켰다.
“왜, 왜 그렇게 헐벗고 다니시는…….”
“내 집에서 내가 편하게 다니는 게 어때서?”
음? 휘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어쩔 줄을 모르고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진 결아의 모습이 꽤 재미있었다.
조금 놀려 줘 볼까?
입술 끝을 말아 올린 휘는 머리를 떨구고 죽어라 바닥만 보고 있는 결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슬금슬금 다가가 옆에 떡하니 선 휘는 모른 척 그대로 있었다.
“아, 아무리 집이라지만 그래도…… 으아아악!”
옹알거리며 고개를 들던 결아는 바로 옆에 있는 휘를 발견하고 기함하듯 비명을 내질렀다.
뭐야? 못 볼 거라도 봤어? 예상했던 대로 과하게 놀라는 모습이긴 했지만, 막상 펄쩍 뛰며 뒷걸음질 치는 결아를 보자 휘는 저도 모르게 기분이 나빠졌다.
“그, 그럼 전 마저 청소를 해야 해서……!”
결아가 청소기를 들고 냅다 거실로 내달렸다. 원래는 저쪽 복도까지 청소할 생각이었는데 당황한 나머지 유턴을 해 버렸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휘는 조각 같은 탄탄한 근육질 상체를 드러낸 채 멀어지는 결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진심으로 도망가냐?”
그의 얼굴이 못마땅하게 굳어 있었다.



결아는 야심한 시각에도 잠들지 못하고 침대 위에서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본 남자의 몸이 선우휘라니……. 세상에. 정말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런 일이?
믿기 어려운 아까의 일을 떠올리며 중얼거렸지만, 어찌 된 일인지 자신의 뇌는 안구로 인식한 휘의 탄탄한 견갑골과 올록볼록한 식스팩 복근을 스캔을 뜨듯 머릿속에 세밀하게 입력하고 있었다.
“헉! 무, 무슨 짓이야! 당장 안 지워?!”
결아가 이불 속에서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게 다 그 남자 때문이야! 그런 조각 같은 몸매로 야성미를 흩뿌리고 있으니 어찌 뇌에서 자동 입력 장치를 가동시키지 않을 수가 있느냐고? 하긴. 연예인이 괜히 연예인이겠어? 그렇게 완벽한 얼굴과 퍼펙트한 몸매 정도는 갖춰 줘야 인기 있을 수 있는 거겠지…….
“그러고 보니 신기하네. 겉보기엔 그냥 쭉쭉 길고 말라 보였는데 어디에 그런 옹골찬 근육이 숨어 있었던 걸까? 이래서 사람은 벗겨 봐야 안다는…… 헉! 내가 지금 무슨 소릴!”
결아는 잘 익은 토마토 같은 새빨간 얼굴로 버럭거렸다. 그런데 이 몹쓸 뇌가 당장 잊어버려도 시원찮을 판에 자꾸 그 남자의 몸을 무한 리플레이 시키는 것이 아닌가. 이를테면 팽팽한 대흉근이라든가, 짱짱한 견갑골이라든가, 옹골찬 식스팩이라든…….
“이놈의 뇌가 음란마귀에 씌었나! 안 돼! 그만! 그만 떠올려!”
결아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는 새우처럼 몸을 팔딱팔딱 뒤집어 댔다. 하지만 아무리 떨쳐 내려 해도 그 남자의 몸이 밤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휘의 몸이 떠오를 때마다 심장은 쫄깃하게 조여들고 얼굴에선 열이 올랐다 내려갔다 하고 손에는 식은땀이 나고, 순진한 결아에게는 정말이지 괴로운 밤이었다.



팡! 팡!
역삼동에 마련된 거대한 세트장에서 연신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신형 스마트폰 광고 촬영장에서 콘셉트 화보를 찍고 있는 모델은 요즘 한창 잘나가는 배우 선우휘와 조연아였다.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선우휘는 말할 것도 없고, 조연아는 예쁜 얼굴과 상큼한 매력으로 최근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을 맡아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다.
“자, 시선 처리 아래로, 그렇지! 좋습니다!”
휘는 격식 있는 오팔컬러의 슈트를 감각적으로 소화했다. 모델 같은 비율로 서서 웨이브 진 연갈색 머리칼을 멋스럽게 넘긴 채 익숙하게 카메라를 응시했다.
“예술이네, 예술이야. 내가 먹을 떡은 아니지만 정말 군침 도는 남자야. 안 그러냐?”
모니터에 비치는 휘의 자태를 보고 있던 여자 스태프들에게서 절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말해 봐야 뭣 하겠어요. 아무리 성격이 네가지 없다지만 저 얼굴이라면 뭐, 그까짓 싸가지 정도야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죠.”
“하긴 저 완벽한 외모에 그 정도 흠이 없으면 오히려 매력 없지. 나 나쁜 남자 좋아하거든.”
흐뭇하게 웃는 스태프의 얼굴에는 욕망이 너울져 있었다. 그 보습을 본 다른 스태프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치. 휘가 우리 같은 일반인에게 관심이나 있겠어요?”
볼멘소리가 들려오자 흐뭇하게 웃던 스태프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니까 그림의 떡이라는 거 아냐. 아, 누가 나가서 떡 좀 사 와라.”
“떡은 갑자기 왜요?”
“아주 목 턱턱 메이는 떡. 그거 휘 먹이고 물 건네주면서 말 좀 붙여 보게.”
“어머, 그거 좋은 방법인데요?”
“그치?”
낄낄거리며 농담을 하면서도 여인네들의 시선은 휘에게서 떠나질 못했다.
그때 휘의 옆에서 그림 같은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던 연아가 고개를 기울이며 슬쩍 귓속말을 해 왔다.
“의외네.”
“뭘?”
휘가 연아 쪽을 힐긋 쳐다보고는 다시 카메라를 주시하며 물었다. 그가 각도를 바꿔 카메라를 볼 때마다 플래시가 요란하게 터졌다.
“이 광고, 내가 여자 파트너라 안 찍는다고 할 줄 알았는데.”
연아가 시선은 카메라에 향한 채로 은근한 목소리로 말하자 휘가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왜?”
“왜라니, 그야……!”
발끈해서 말하려던 연아가 얼른 주위를 둘러보고는 소리 죽여 속삭였다.
“우린 사귄 적이 있잖아.”
“아아. 그랬던가?”
휘의 무심한 목소리에 연아가 하얀 이마를 찌푸렸다.
“……그랬던가, 라니?”
“잊고 있었어.”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