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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날카로워지는 연아의 목소리 위에 촬영 감독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둘 좀 더 밀착해 보자.”
“아, 네.”
휘가 대답하며 망설임 없이 팔을 뻗어 연아의 허리를 척 끌어당겼다. 둘의 시선이 가까이 닿고 몸이 밀착되자 또다시 카메라 플래시가 연달아 터졌다.
“아주 좋아! 연아는 좀 더 자연스럽게 웃지?”
“네.”
연아는 대답하면서도 입맛이 썼다. 여전하네, 정말……. 짧지만 엄연히 사귄 적이 있음에도 지극히 태연한 태도의 휘가 얄미워 연아의 입술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웃으라니까? 휘 앞이라 긴장했어?”
“아, 아니에요. 그런 거.”
자존심이 상한 연아는 억지로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상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귈 때도 이러더니 똑같아.
매혹적인 휘의 마스크를 흘끔거리며 연아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휘와 사귀게 되기까진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의외로 쉽게 작업에 넘어와 준다 했더니, 사귀면서도 휘는 자신에게 아예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게 무척 자존심이 상했는데 지금도 자신의 자존심을 긁는 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무감한 휘의 얼굴을 보니 자신과 사귀었던 걸 잊고 있었다는 게 그냥 해 본 말이 아닌 진심인 것 같았다.
정말 뻔뻔하기 이를 데 없다니까. 내가 왜 이 남자를 아쉬워해서…….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는 연아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자존심이 상해 휘와 헤어진 뒤 일부러 다른 남자들과 연이어 스캔들을 뿌려 댔다. 그 남자들과 실제로 연애를 했으면서도 막상 휘를 보니 또 탐이 났다.
특히 저 빠져들 듯한 눈빛을 보면…… 어떻게 안 넘어갈 수가 있겠어?
연아는 비록 연기 중이지만 자신을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는 휘를 보자 몸이 달아올랐다.
“컷! 좋아. 30분 쉬고 의상 갈아입고 콘셉트 바꿔서 찍읍시다!”
컷 소리와 함께 연아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휘에게 슬쩍 귓속말을 했다.
“휘. 있잖…… 어엇!”
휘는 무슨 거머리라도 붙은 듯 곧장 연아를 떼어 놓고 돌아섰다. 그 바람에 높은 힐을 신고 있던 연아가 중심을 잃고 풍선 인형처럼 허우적거렸다. 겨우 몸을 바로 세우고 고개를 들자 휘는 이미 저만큼 성큼성큼 가 버린 후였다.
“뭐야? 정말!”
연아가 멀어지는 휘를 보며 짜증스럽게 입술을 깨물었다.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정석이 휘에게 물었다.
“형. 이결아 씨 말인데요.”
“누구?”
스마트폰 게임에 빠져 있던 휘는 정석의 말에 일순 신경이 그쪽으로 옮겨 갔지만 일부러 무심한 말투로 물었다.
“이결아 씨요. 형이 노예…….”
“아아. 걔. 왜?”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휘가 되묻자 정석이 눈치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형 일에 참견하려는 건 아닌데…… 정말 괜찮을까요? 아무리 보안이 철저한 건물이라고 해도 자꾸 집에 드나들면 기자들이 의심할까 봐서요.”
사실 휘는 워낙 알 수 없는 행동을 많이 해서 이번에도 순순히 시키는 대로 계약서를 작성해 주긴 했다. 하지만 솔직히 속으로는 스타라는 양반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장난도 정도가 있는 건데 이건 너무 심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별게 다 걱정이다. 의심 안 하게 하면 되지.”
“아, 그럼 계약 해지하게요?”
휘가 드디어 정신 차린 건가 싶어 정석이 안심하려는데 휘가 휴대폰에서 슥 시선을 들어 올렸다.
“미쳤냐?”
“그, 그럼 왜…….”
휘의 싸늘한 시선에 정석은 움찔해선 물었다.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옮긴 휘가 입술 끝을 휘어 올렸다.
“따로 생각해 둔 게 있거든.”
엇? 저 사악한 미소, 부, 불길한데……. 정석이 왠지 불길해지는 기분을 훠이훠이 내쫓으며 다시 물었다.
“그게 뭔데요?”
“넌 몰라도 돼.”
“아니 전 매니저니까 알아야 하지 않을…….”
“몰라도 된다고 했다.”
“아, 네…….”
할 수 없이 대답하면서도 정석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휘는 몹시 즐거워 보였다. 이상하게도 휘가 즐거워 보일수록 자신이 고단해지는 일이 많았기에 더 불안했다.
생각이라니……. 형이 좋은 쪽으로 뭔가 생각할 리가 없는데. 차라리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 줬으면!
이상한 사고를 칠 바에야 그게 훨씬 나았다. 정석은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한 기운을 애써 무시하며 차를 몰았다.



#03. 잠자는 야수의 코털을 건들다


정석은 부디 아무 일도 없길 바랐지만, 휘는 회사에 돌아오자마자 소속사 대표에게 폭탄을 던졌다.
“저 새 코디 구했어요.”
“아, 그래? 누구?”
회사 수입의 일등 공신인 휘를 금이야 옥이야 아끼는 GN엔터테인먼트 금대호 대표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응? 새 코디? 형의 새 코디를 왜 매니저인 자신이 모른단 말인가. 정석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휘를 바라봤다.
헉. 저 얼굴은…… 크, 큰일이다.
묘한 미소를 띠고 있는 휘를 본 순간 정석은 자신의 불안이 현실화되는 것을 느꼈다. 휘가 저런 얼굴을 할 때 상황이 좋게 흘러갔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이결아라고 있어요.”
소파 위에 않은 휘가 여유 있게 긴 다리를 꼬며 말했다.
“응? 그게 누군데? 우리 회사 애야?”
대호는 여전히 함빡 웃는 얼굴로 휘를 보며 물었다.
“뭐든 시키면 한댔으니까 잘할 거예요.”
“뭐든 시키면 한……다고?”
대호는 불길한 뭔가를 느꼈는지 미소를 지은 채 이게 뭔 소리냐는 시선으로 정석을 쳐다봤다. 그러자 정석은 자연스럽게 그 시선을 피했다. 먹이사슬처럼 치열하게 쫓고 쫓기는 시선을 무시한 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세한 건 정석이한테 들으세요. 전 배고파서 그만 가 보겠습니다.”
“혀, 형. 나도 같이…….”
휘가 휘파람을 불며 문 쪽으로 걸어가자 정석이 허둥지둥 따라 일어섰다.
“어딜 가려고?”
“엑.”
대호가 어림없다는 듯 정석의 뒷덜미를 잽싸게 낚아챘다. 도주에 실패한 정석이 사색이 되어 잡혀 있는 동안 휘는 유유히 사장실을 빠져나갔다.
“어서 설명해 봐. 지금 떨어진 폭탄이 뭔지. 뭐든 한다니, 설마 휘 녀석 자기 열성팬한테 코디 시키려는 거냐? 그런 거야?”
“아, 아니 그러니까 그게…….”
대호가 정석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어 댔다.
“빨리 말하지 못해?!”
정석은 대호의 격노를 받아 내며 휘가 사라진 문을 원망스럽게 쳐다봤다. 왜 맨날 일을 벌여 놓는 건 형인데 뒷감당은 늘 내 차지냐고!

결아는 또다시 휘의 호출을 받고 정석이 운전하는 차에 앉아 있었다. 노예 생활은 생각보다 힘들진 않았다. 물론 그 큰 집을 청소하는 일은 꽤 고된 일이라 어깨에 피로 곰이라도 얹고 있는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라도 때울 수 있다면 그깟 청소쯤이야. 결아가 스스로 의지를 다지는 사이 어느새 휘의 집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럼 올라가 봐요.”
정석이 주차장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보안키를 눌러 주자 결아가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태워다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니 뭘요, 제 일인데요. 하하하…….”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온 정석을 올려다보던 결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기…… 몸이 어디 안 좋으세요? 얼굴이 안 좋으신데.”
“아니, 그것도 제 일 때문입니다. 하하하하하……. 어서 올라가 보세요.”
“아, 네, 네.”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타라는 듯 정석이 손을 휘이휘이 내젓자 결아는 얼른 올라탔다. 문이 닫히자 정석은 후우,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휘가 떨어뜨린 폭탄을 수습하느라 회사에서 대호에게 내내 볶이다 왔으니 정석도 피로 곰 너덧 마리가 어깨 위에 올라와 있는 기분이었다.
아까 회사에서 정석의 설명을 들은 대호는 뭔 코피 낸 것 정도로 그렇게 할 것 있냐고 투덜거리긴 했지만, 휘의 성격을 잘 아는지라 달리 방법은 없는 듯 보였다.

‘어쩌겠냐. 지가 하고 싶다는 대로 하게 해 줘야지. 배알 꼴리면 또 촬영 펑크 내고 집 안에 틀어박힐 텐데.’
‘그럼 그냥 형이 하라는 대로 해요?’
‘그래야지 별수 있냐. 이상한 소문 안 나게 네가 잘 막아 둬. 어차피 세 달이면 계약 끝난다며. 휘 성격에 그 전에 지겨워질 수도 있을 거고.’
‘네. 그렇긴 한데…… 어쨌든 최대한 신경 쓸게요.’

연예기획사에서 최고의 갑은 잘나가는 연예인이다. 고로 대표인 대호 역시 별다른 도리는 없었다. 대호와의 대화를 떠올린 정석이 간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부디 세 달이 무사히 지나가야 할 텐데.”
하지만 이 세 달이 무척 길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자 정석은 습관처럼 위장약을 꺼냈다. 자신이 빨리 죽으면 이건 다 휘 때문이라고 중얼거리며 위장약을 삼킨 정석은 비척비척 차로 돌아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결아는 본능적으로 숨을 멈추고 있었다. 어제 봤던 휘의 식스팩이 머릿속에 아른거려 올라오는 사이 자기도 모르게 긴장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어? 오늘은 없네?
그런데 웬일로 오늘은 이 악마 같은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휴, 다행이다. 오늘은 없구…….”
“왔냐?”
“헉!”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오던 결아는 휘의 목소리에 움찔했다.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밤새 머릿속을 어지럽혔던 휘가 서 있었다. 그것도 탄탄한 가슴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두툼한 샤워가운을 걸친 채로.
또 옷을……! 덜 마른 머리칼을 한 채 자신을 보고 있는 조각남을 결아가 화르륵 붉어진 얼굴로 올려다봤다.
“뭐 해? 왔으면 청소하지 않고.”
“아…… 네, 네! 그렇죠. 처, 청소해야죠!”
퍼뜩 놀란 결아가 휘의 곁을 쌩하니 지나쳐 다이닝룸으로 달려갔다. 날다람쥐처럼 빠르게 다이닝룸으로 도망친 결아는 바닥에 주저앉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숨을 몰아쉬었다.
“헥, 헥. 까, 깜짝이야…….”
슬쩍 벌어진 앞섶 사이로 비친 맨살은 그야말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남자다운 근육질 가슴과 그 아래로 슬쩍 내비친 탄력적인 늑간근과 복직근이…….
“으아아! 저 남자는 왜 사람을 불러 놓고 저리 헐벗고 있는 거야? 노출광인가?”
물론 자기 집에서 자기 맘대로 입고 있겠다면 할 말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저런 차림은 지나치게 심장에 좋지 않다고!
“에잇, 잊어버리고 청소나 하자.”
결아는 괜히 얼굴을 뜨겁게 만드는 휘의 자태를 머릿속에서 억지로 밀어 내며 청소기를 들고 나왔다.
그런데 휘가 방금 전의 그 차림 그대로 소파 위에 느른히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움찔한 결아가 청소기를 들고 빠르게 몸을 돌리는데 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노예. 이리 와 봐.”
“네, 네?”
결아가 머뭇거리며 돌아보자 휘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이리 오라고.”
결아는 얌전히 청소기를 내려놓고 다가갔다.
“왜……요?”
가까이서 보니 휘의 벌어진 샤워가운이 더욱 자극적이었다. 결아가 차마 휘에게 시선을 둘 수 없어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데 휘가 인상을 찌푸렸다.
“사람이 앞에 있는데 딴 데 보는 건 어디서 배운 예의야?”
“아, 죄송합……니다.”
결아가 마지못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휘가 소파 위에서 한 손을 머리에 괴고 섹시한 포즈로 누운 채 결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람을 불러 놓고 누워 있는 건 또 무슨 예의람.
결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시선 둘 곳이 없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두툼한 로브 사이로 보이는 남자답고 탄력적인 허벅지 근육이 머릿속을 팽글팽글 돌게 만들었다. 자신의 특기인 양 눈깔을 양쪽으로 빼기 신공을 펼쳐 보였지만,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한곳으로 다시 집중해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특히 로브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는 것이 몹시 신경이 쓰였다.
“무슨…… 일이세요? 저는 어서 청소를 시작해야 하는데…….”
결아가 어서 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장소를 벗어나기 위해 침을 삼키고 말하자 휘는 들고 있던 대본을 테이블 위로 툭 던졌다.
“넌 앞으로 내 가사도우미 겸 코디야.”
딴 데를 보던 결아의 눈이 놀라서 절로 휘를 향했다.
“코디요?”
“그래. 내가 깜빡하고 말을 안 했는데, 가사도우미를 자르기 전에 코디도 잘랐거든.”
휘가 태연한 얼굴로 말하자 결아의 까만 눈망울이 크게 흔들렸다.
“저, 전 그런 거 해 본 적이…….”
“시키는 건 뭐든 한다고 계약서에 써 있을 텐데.”
“아니, 그래도…….”
“왜? 싫어?”
휘가 서늘한 표정으로 묻자 결아의 동공이 급격히 흔들렸다.
“그, 그런 건 그러니까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하는 거잖…… 헉.”
휘가 웨이브 진 옅은 갈색 머리를 푸르르 털며 소파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그와 거리가 가까워져 맨살이 더 잘 보이자 결아는 퍼드득 놀라 얼른 시선을 돌렸다.
휘는 그대로 선 채 삐딱하게 결아를 내려다봤다.
“노예로서의 본분을 망각하지 마라.”
“……네.”
휘가 차갑게 말하자 결아는 시무룩한 얼굴로 뒤돌아섰다. 여기서 청소만 하는 걸로 곱게 노예 기간이 끝나길 바랐건만……. 역시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나 봐.
결아는 깊은 탄식을 흘리며 청소기를 들고 비척비척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