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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02. 새치기당하는 여자


“어? 너 왜 그렇게 얼굴이 부었어?”
아침에 마주친 결아의 얼굴이 띵띵 부은 것을 본 루리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아, 아니야. 아무것도.”
결아는 루리의 시선을 슬쩍 피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실은 어젯밤, 노예가 된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 일기장에 마구 화풀이를 했다.

「20XX년 8월 XX일
나쁜 사람!
그 잘난 콧대도 멀쩡해 보이던데 굳이 노예 계약서까지 쓰게 할 필요 없었잖아!
그냥 장기를 팔아서라도 돈을 줘 버릴까? 그런데…… 내 장기를 팔면 과연 1억 원이 나올까? 안 나오면 어쩌지?
흐엉! 나쁜! 나쁘디나쁜!! 에라이! 확 계단에서 자빠져 버려라!
노예라니…… 내가 노예라니이이이이!」

이렇게 분노의 일기를 휘갈기다가 결국 서러움이 복받쳐 이불 안에 뛰어들어서 밤새 울었다. 밖으로 표출하지 못하는 성격의 결아에게 일기란 최소한의 감정 표출 도구였다. 그래서 가끔 보면 데스노트같이 음침하게 되어 버릴 때가 있지만, 어쨌든 그녀의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었다.
“언니 나 먼저 씻을게.”
루리에게는 자초지종을 설명할 수 없어 대충 둘러댄 결아는 황급히 욕실로 향했다. 그러자 루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득달같이 쫓아와 다다다 쏘아 댔다.
“결아 너 또 <동물농장> 봤지?”
“안 봤는데…….”
“그거 보지 말라니까 또 말 안 듣고. 맨날 불쌍하다고 오열하면서 왜 자꾸 그런 걸 봐?”
“아니 안 봤다니까.”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분명 저번 주에도…… 어? 야!”
확신에 찬 루리의 끊임없는 잔소리를 막으려 결아는 욕실 문을 잽싸게 닫았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결아가 거울을 보고는 흠칫했다.
“헉, 깜짝이야. 나잖아?”
결아는 거울을 유심히 쳐다봤다. 퉁퉁 부어 툭 튀어나올 것 같은 도전적인 눈두덩이가 참으로 볼만했다.
“완전 괴물이 따로 없네. 개구리도 아닌 것이, 붕어도 아닌 것이…….”
씁쓸하게 옹알거린 결아가 차가운 물을 틀어 한참 세수를 했는데도 상태는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안 되겠어, 중얼거린 결아는 할 수 없이 욕실에서 나와 주방으로 향했다. 냉동실에 늘 상비되어 있는 얼려 놓은 숟가락 두 개를 빼서 눈에 척 댔다.
“아, 시원해……. 역시 부은 눈 가라앉히는 데는 숟가락이 최고라니까.”
결아가 익숙한 시원함을 음미하고 있는데 루리가 우당탕거리며 뛰어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결아야 언니 갔다 올게! 문 잘 잠그고 있어!”
“아, 언니! 지갑이랑 휴대폰이랑 다 챙겼어?”
“그럼, 그러엄.”
운동화에 발을 이리저리 구겨 넣으며 대충 대답하는 루리를 미심쩍게 보고 있던 결아가 숟가락을 들고 다가갔다.
“언니 맨날 놓고 다니잖아. 또 빼놓지 말고 다시 봐 봐. 빠뜨린 거 없나.”
“없어, 없어. 갔다 올게!”
루리가 허둥지둥 현관문을 열고 나서자 결아가 몸을 돌렸다. 그런데 3초도 지나지 않아 닫혔던 문이 다시 벌컥 열렸다.
“아차! 결아야, 언니 책상 위에 USB 좀 주라! 빨랑!”
“거봐. 잘 챙기라니까.”
결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루리 방으로 종종 달려갔다. 난장판으로 어질러진 책상 위에서 익숙하게 USB를 찾아 들고 나가려는 순간, 침대 위에 뒤집혀 있는 빨간 지갑이 눈에 들어왔다.
“언니도 참. ……어어?”
지갑을 주워 드니 그 아래 깔려 있던 루리의 휴대폰이 떡하니 나타났다. 하나도 안 챙겨 놓곤 다 챙겼다고 하고, 으이구. 결아는 또 방송국에 불려 나가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얼른 그것도 챙겨서 루리에게 전해 줬다.
“고맙다. 결아야!”
계단을 쿵쾅쿵쾅 내려가는 루리의 뒷모습을 보며 결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 신기하다니까. 휴대폰이고 지갑이고 다 까먹어도 용케 일에 필요한 USB는 안 까먹다니.”
하긴 저 정도의 집중력이 있으니까 버젓한 지상파 라디오 피디가 된 거겠지. 루리는 원래도 일에 대한 의욕이 과하게 넘쳤지만, 피디가 되어 처음 단독으로 맡은 프로가 승승장구하고 있는 지금은 완전히 에너지 풀가동 모드였다. 이루리라는 이름과 꼭 맞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언니가 결아는 한편으로 참 부러웠다.
“언니는 이루리라의 이루리고, 난 이겨라의 이결아인데……. 난 왜 이기지 못하고 늘 이 모양이지? 언니랑 딱 반만 섞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결아가 돌이킬 수 없는 유전자 분배 법칙을 습관적으로 탓하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 사노라면~ 언젠가는~ 바앍은~
“엄마야!”
급작스러운 벨소리에 깜짝 놀란 결아가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평소 식구 외에는 스팸전화가 고작인 결아에게 저 벨소리는 매우 불길했다.
호, 혹시? 설마 아침부터 노예로 부려 먹겠다고 전화하진 않…… 헉. 왜 항상 설마는 사람을 잡는 것인가.
“여, 여보세…….”
― 늦어.
“네?”
휘의 짜증스러운 목소리에 결아의 어깨가 반사적으로 흠칫거렸다.
― 받는 게 느리다고. 앞으로 내가 전화하면 3초 안에 받아.
“맨날 휴대폰을 손에 쥐고 살 수는 없잖…….”
결아의 필사의 옹알이를 무시한 휘가 바로 말했다.
― 차 보낼 테니까 30분 후에 나와.
뚝.
어어? 이번에도 휘는 자기 할 말만 하고 쿨하게 전화를 끊었다. 끊긴 전화기를 들고 결아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나쁜! 이 남자는 늘 이런 식인가 봐. 인기 있는 연예인들은 성격이 나쁘다더니……. 아,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는 않겠지. 험담해서 죄송합니다.”
자신이 모든 연예인을 싸잡아 비난했다는 생각에 결아는 얼른 사과했다.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머리까지 조아리며 사과한 결아는 물끄러미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노예에게 거부할 수 있는 권리란 없겠지?”
피할 수 없는 일은 즐기라던데 이건 도저히 즐길 수가 없을 것 같아 결아는 우울했다. 에효, 한숨을 포옥 내쉰 결아가 퉁퉁 부은 붕어눈을 두드린 뒤 일어섰다.

“그럼 올라가 봐요.”
“아…… 네.”
오늘은 정석이 휘의 집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보안키만 눌러 주고 차로 가 버렸다. 멀어져 가는 정석을 아련하게 보고 있던 결아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괜찮아. 쫄지 말자. 쫄지 말자!
굳건히 의지를 다졌건만 청아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모든 결의는 삽시간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왔냐?”
열린 문 사이로 악마 같은 주인님이 서 있었다. 한여름인데 추울 정도로 냉방이 잘되는 집에 있어서 그런지 휘는 루즈한 코발트블루 색상의 니트에 블랙 진을 입고 있었다. 무, 무서워……. 어제도 봤는데 휘는 여전히 무서웠다.
결아가 돌처럼 굳어 있자 이온음료병을 든 휘가 매끈한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왜 대답을 안 해.”
“아, 죄송합니다.”
결아가 퍼뜩 놀라 사과하자 못마땅한 얼굴로 빤히 보고 있던 휘가 인상을 썼다.
“하루 사이에 얼굴이 왜 그렇게 부었어? 라면 먹고 잤냐?”
“아뇨…….”
“못 봐 줄 정도네.”
으윽, 노예 계약서 때문에 밤새 오열하느라 얼굴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라구요! 차마 그 말을 내뱉지 못한 결아가 속으로만 옹알거리고 있는데 문득 휘의 시선이 느껴졌다.
휘가 시선을 고정한 채 점차 다가오자 결아가 흠칫해선 고개를 뒤로 뺐다.
“왜, 왜요?”
“뭐랑 닮았는데…….”
휘가 결아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관찰하듯 바라봤다.
“닮았다니, 뭐…… 뭐랑요?”
휘가 가까이 다가오자 결아가 거북이처럼 목을 넣고 점차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휘는 그런 결아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거리를 좁혀 왔다. 이건 너무 가깝잖아! 결아는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자꾸 그렇게 눈깔 없는 석고상같이 생긴 얼굴 들이밀지 말라구요!
산소 결핍에 걸리기 직전 휘가 물러났다.
“……아닌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휘가 자신의 결 좋은 웨이브 머리칼을 손으로 대충 흐트러뜨리며 몸을 돌렸다.
“너, 뭐 할 줄 알아?”
“네? 뭘요?”
휘가 앞서 걸어가자 결아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의 뒤를 졸졸 따르며 되물었다.
“노예로 부려 먹으려고 해도 할 줄 아는 게 있어야 부려 먹을 거 아냐. 요리나 청소 같은 거 잘해?”
휘가 소파에 느른히 앉으며 결아를 쳐다봤다. 그의 시선이 날아오자 결아는 커다란 눈동자를 옆으로 데굴 굴려 시선을 피했다.
“어…… 그냥…… 보통은요.”
“해. 그럼.”
“네?”
결아가 되묻자 휘는 태연히 이온음료를 한 모금 마시더니 이어 말했다.
“청소하라고. 마침 가사도우미를 잘라서 청소할 사람이 없거든. 청소 도구는 저쪽 다이닝룸 안에 있어.”
응? 그러니까 이 집을…… 청소하라고 부른 건가? 결아가 퉁퉁 부은 눈을 최대한 크게 뜨고 멍하니 보고 있자 휘가 인상을 팍 썼다.
“안 들려?”
“아! 네, 네. 할게요.”
퍼뜩 제정신을 차린 결아가 얼른 대답하고 뒤돌아섰다. 그렇게 종종거리며 거실을 가로지르던 결아가 슬쩍 뒤돌아봤다. 소파 위에 앉아 있던 휘는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휴우…….”
어디로 사라졌든 잠시 해방이다. 결아는 그제야 잔뜩 긴장했던 몸에 힘을 빼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그런데 무슨 집이 이렇게 넓어?
지금까지는 휘 때문에 무서워서 제대로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자세히 둘러보니 과연 톱스타의 집답게 엄청나게 넓고, 넓었으며…… 넓었다. 끝이 보이지 않게 긴 복도로 이어진 거대한 공간을 보다 보니 결아는 절로 기가 질렸다. 대체 방이 몇 개며 복도가 몇 개로 뻗어 있는 건지. 무슨 미로도 아니고…….
“이런 집에 살면 당연히 가사도우미가 필요하긴 하겠구나. 청소부로 부려 먹을 생각이라면 차라리 다행이지, 뭐.”
결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안심한 얼굴로 다이닝룸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다이닝룸 안 어디에 청소 도구가 있는지 한참 헤맸는데 슬라이딩 도어로 나뉜 공간에서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집이 넓어서 다행이야. 청소만 하고 있어도 하루가 금방 가겠어.”
게다가 청소하고 있으면 저 남신이라 불리는 생명체와 마주칠 일도 그다지 많을 것 같지 않았다. 이렇게 청소만 하다 세 달이 후딱 지나 노예 생활이 끝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정말 좋겠는데. 후후.”
결아는 나름 긍정적인 상상을 하며 고급 조명이 달린 복도를 무선 청소기로 슥슥 밀고 나갔다.

그 시간, 휘는 헬스 기구들을 배치해 둔 체력 단련실에 있었다. 흰 티셔츠에 짙은 회색 트레이닝 바지로 갈아입고 러닝머신 위를 일정한 속도로 달렸다.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쉴 때마다 티셔츠가 쫀득하게 근육 잡힌 가슴에 찰싹 달라붙고, 완벽하게 균형 잡힌 탄탄한 근육질 육체에 땀이 맺혀 있었다.
삑삑삑. 휘가 러닝머신의 버튼을 눌러 속도를 줄였다. 그러고는 빨리 걷기 정도의 속력을 유지하며 거친 숨을 진정시켰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쿡.”
새까만 눈이 커다래져선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라니. 조금 전의 결아를 떠올린 휘의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저 여자를 처음 본 건 방송국 근처 이벤트 응모권 추첨을 하는 행사장 앞에서였다. 그날 정석이 살 게 있다며 밖으로 나가는 바람에 휘는 잠시 세워 둔 차 안에 앉아 있었다. 창밖에는 딱히 시선을 끌 만한 특별한 일은 없었다. 추첨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득시글거릴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흔한 풍경 안의 한곳을 휘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의 끝에 닿은 것은 작은 체구의 여자였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 야구 모자를 쓴 채 응모권을 두 손에 고이 든 여자는 시선을 끌 만한 이유가 전혀 없어 보였지만,
‘……세 번째군.’
확실히 이유는 있었다. 저 어처구니없는 광경이 이유라면 이유랄까? 여자는 아까부터 계속 새치기만 당하고 있었다. 휘의 눈에 띈 것만 해도 벌써 세 번째.
‘쯧, 선착순 추첨에 새치기를 당하면 어쩌자는 거야?’
긴 줄이 그 여자에게만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새치기를 여러 번 당하고도 아무 말 못 하고 서 있는 여자를 보고 있는 게 답답하긴 했지만, 무료함은 잊게 해 주니까 그냥 보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형.’
정석이 허둥지둥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괜찮아. 뭐 심심하진 않았으니.’
‘다행이네요.’
예상과 달리 휘가 성질을 부리지 않아 안심한 정석이 얼른 차를 출발시켰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휘가 힐끗 창밖을 바라봤다. 백미러로 보이는 그 작은 여자가 점차 멀어졌다.
새치기만 당하는 여자라.
……어?
여자의 모습이 작아질 때쯤 어떤 건장한 아저씨한테 또 새치기를 당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
‘왜 웃어요?’
휘가 헛웃음을 흘리자 운전하던 정석이 이상한 듯 물었다.
‘한심해서.’
‘네? 제, 제가요?’
‘너 말고.’
‘형, 역시 제가 늦게 와서 기분이 상했죠? 어쩐지 너무 쿨하게 넘어간다더니…….’
‘아니라니까.’
아니라고 했는데도 정석은 의기소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휘는 더 설명해 주기도 귀찮아져 의자 시트에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