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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어? 냉기 어린 목소리에 결아가 슬쩍 눈을 떴다. 눈앞에서 휘가 싸늘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너, 제정신이냐?”
“그, 그럴, 그럴 리가 없겠죠! 죄, 죄송합니다!”
휘의 냉랭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결아가 얼른 소리쳤다. 토마토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필사적으로 사과하자 휘가 쿡, 하고 비웃더니 물러갔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신랄한 목소리에 결아는 창피함에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인할……게요.”
이 무서운 눈에 순간 홀릴 뻔하다니……. 내가 미쳤지. 결아는 민망한 기분에 얼른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두 손으로 종이를 공손히 내밀었다. 그걸 휙 낚아챈 휘가 계약서를 훑어보더니 빠르게 사인을 휘갈겼다.
아아, 정말 미친 소리를 해 버렸어. 어쩌지?
결아가 땅바닥을 파서 기어 들어가고 싶은 처참한 심정으로 보고 있는데 사인한 노예 계약서를 그가 테이블 위로 가볍게 날렸다.
“이 정도로 용서해 주는 걸 다행으로 알아. 네가 문으로 뭉갠 이 얼굴로 한 해에 벌어들이는 광고료만 해도 위약금의 수십 배는 되니까.”
“감사……합니다.”
결아가 시무룩한 얼굴로 휘가 던진 계약서를 바라봤다. 종이 위에 연예인과 자신의 사인이 나란히 있는 걸 보니 왠지 무척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뭐 해?”
“……네?”
결아가 멍하니 보고 있던 계약서에서 고개를 들자 휘가 한쪽 눈썹을 추켜올리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볼일 끝났으면 재깍 가야지 남의 집에서 뭐 하고 있냐고.”
“아! 죄, 죄송합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파다닥 일어선 결아는 얼른 엘리베이터 쪽으로 달려갔다. 이 집에 들어온 뒤로 가장 빠른 행동이었다.
“…….”
휘는 결아가 빛의 속도로 달려가 엘리베이터에 타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호구]라고 저장되어 있던 이름을 바꿨다.
[노예]
새로운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휘의 입술 끝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결아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니 아까 데려다줬던 정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래다줄 테니 타요.”
“괜찮…….”
“사양 말고 타요. 길도 모르잖아요.”
결아는 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사양했지만 정석이 차 문을 열어 줬다. 그러고 보니 허둥지둥 나오느라 집에서 지갑도 챙겨 오지 않았다는 게 그제야 떠올랐다.
“감사합니다. 그럼 염치 불고하고…….”
결아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 조수석에 올라타자 정석이 차를 출발시켰다. 집으로 향하는 동안 결아는 어두운 얼굴로 창밖을 바라봤다.
노예라니……. 우리나라에 노비 제도가 사라진 지가 언제고, 태평양 건너 미국에도 노예 제도가 사라진 지가 언젠데…….
언니 때문에 방송국을 드나들며 연예인과 그런 식으로 마주친 것도 처음이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계약서까지 쓰게 되어 버리자 결아는 정말 우울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죄가 있으니 뭐라 말도 못 하겠고, 휘의 냉랭한 분위기가 사람을 꼼짝없이 만들어 버려 결국 노예 신세가 되어 버렸다.
결아가 우울하게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데 정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표정이 왜 그래요?”
“……네?”
결아가 그새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온 눈을 하고 있자 정석이 의아하게 쳐다보고는 말했다.
“형이 뭐라고 했기에 표정이 그런가 해서요.”
“아…… 그냥 좀 그런 일이 있었어요.”
차마 자신이 노예가 되어 버렸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결아가 두루뭉술하게 돌려 말하자 정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올 때도 꼭 팔려 가는 사람 표정 같던데.”
저 팔린 거 맞아요. 계약서 한 장에…… 문 하나 잘못 열었다고 노예 신세가 되어 버렸…….
서러운 기분이 북받친 결아는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는 것을 느끼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결아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석은 전방을 보며 제 얘기만 하고 있었다.
“좀 신기해서요. 우리 형이 부르면 모든 걸 팽개치고 따라나서는 게 보통 여자들의 반응인데, 결아 씨는 전혀 다른 것 같달까.”
“전 연예인은 좀…….”
“연예인 싫어해요?”
정석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싫다기보다는 어, 어렵고 긴장되고……. 어쨌든 그다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대예요.”
“특이하시네.”
결아는 땀이 밴 손바닥을 꼬옥 쥐며 말했다.
“제가 좀 소, 소심하거든요.”
“아아, 그건 딱 봐도 그래 보여요. 근데 뭐 사람이 소심할 수도 있고 그렇죠.”
“그 정도가 아니라…….”
“네?”
“아, 아니에요.”
결아는 뒷말을 삼키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정석의 의아해하는 시선을 비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제가 가진 콤플렉스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 말까지 해 버리면 스스로가 너무 한심할 것 같기도 했으니까.
“어쨌든 너무 걱정 말아요.”
“네. 고맙습니다.”
정석이 신경 써 주듯 말하자 결아는 작게 대답했다. 창밖에는 올 때처럼 무심한 풍경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는 듯한 도심의 길거리 풍경을 보다 보니 오늘 있었던 일이 너무도 비현실적이라 다 꿈인 것만 같았다.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은……. 이제 난 노예 제도가 사라진 21세기에 신개념 노예가 되어 버린 거야.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남자의 노예.
결아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정석 몰래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을 훔쳤다.



이태원 고급 바 안쪽 깊숙한 자리에 앉은 세 명의 남자에게 홀 내의 모든 여자들의 시선이 쏠려 있었다. 하나같이 자석처럼 남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미남인데 그런 남자가 셋이나 모여 앉아 있으니, 아무리 어두운 자리라 해도 번쩍번쩍 빛을 발했다.
“휘, 너 오랜만에 기분 좋아 보인다?”
칵테일 잔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휘를 재영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래?”
휘가 입술 끝을 말아 올리자 재영은 더욱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재촉했다.
“불어 봐. 뭔데? 뭔가 대박 작품이라도 들어온 거야?”
“휘가 그런 걸로 기분 좋아할 타입은 아니지.”
현석이 울림 좋은 저음의 목소리로 무감하게 말하자 재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휘를 봤다.
“그럼 뭔데?”
“글쎄.”
휘가 입술 끝을 말아 올리더니 칵테일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휘의 얼굴을 보고 있던 재영과 현석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쟤 표정 보니까 정말 뭔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러게. 나 쟤 저런 표정 지을 때마다 불안해. 또 뭔 사고 칠까 봐.”
“내가 왜 사고를 쳐. 쓸데없이.”
휘가 느른하게 말하며 칵테일을 마셨다.
그때 그들이 앉아 있는 자리 쪽을 흘끔거리던 여자들이 숙덕거렸다.
“휘랑 걔네 맞지?”
선우휘는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외모의 소유자이며, 최근 출연한 드라마 두 편에서 재벌 3세 역으로 연속 홈런을 쳤다. 두 드라마 모두 50%에 근접하는 시청률을 올려 ‘시청률 깡패’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그 선우휘와 누나들의 하트를 훔쳤다는 귀염상의 아이돌 출신 강재영, 목소리 좋고 지적인 이미지의 현석이 사적으로 친해 이 가게에 종종 나타난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인 모양이었다.
“맞네, 맞아. 세상에! 진을 치고 있던 보람이 있네. 선우휘를 실물로 영접하다니!”
“어쩜 얼굴도 정말 작다. 무슨 남자가 나보다 작은 것 같아.”
“배우들은 확실히 다르긴 하네. 시선 확 끄는 것 봐. 자리로 가 보면 안 되나? 쟤네도 술 먹고 있으니까 좀 유할 것 같은데.”
주변이 점점 더 시끄러워지는 것을 느낀 현석이 눈짓을 했다.
“여기서 더 못 먹겠는데. 나가자.”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일어서는 현석을 따라 재영도 미련 없이 일어섰다. 휘까지 일어서자 다른 테이블에서 아쉬운 탄식들이 터져 나왔다.
“벌써 가나 봐.”
“아, 기회였는데……. 아쉽다.”
가게를 빠져나가는 그들 뒤에서 여자들의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빠르게 가게를 빠져나와 대기시켜 놓은 차에 올라타자 자고 있던 정석이 푸드득 일어섰다.
“생각보다 일찍 나오셨네요?”
정석이 벨트를 매며 묻는 말에 재영이 투덜거렸다.
“더 마시고 싶어도 주변이 소란스러워져서 그럴 수가 없었어. 맘 편히 술 좀 마실 수 없나? 그냥 봐도 모른 척해 주면 안 되냐고.”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이지. 인기 없어지면 얼마든지 마실 수 있을 거다.”
현석의 말에 재영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건 그렇다만……. 그런데 휘, 너 정말 뭐야?”
“뭐가?”
창밖을 보고 있던 휘가 슥 고개를 돌렸다. 재영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이상하잖아. 평소였으면 제일 짜증 냈을 녀석이 싱글거리고, 오늘 왜 이렇게 즐거워 보이는 건데? 정말 말 안 해 줄 거냐?”
“나한테 관심 끄지. 집착도 과하면 피곤해져.”
휘가 시크하게 말하자 재영이 인상을 팍 썼다.
“잘난 척은……. 아, 그나저나 너 다음 분기 드라마 나갈 거라면서?”
“드라마? 영화 할 거라더니?”
현석도 의아한 시선으로 보자 휘가 머리칼을 성마르게 쓸어 넘겼다.
“말도 마라. 그거 때문에 지금 아주 피곤해.”
“회사에서 드라마 하래?”
재영의 물음에 휘가 한쪽 눈썹을 추켜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면 내가 왜 또 드라마 대본을 보고 있겠냐. 지금 이 타이밍에 치고 나가야 된다나 뭐라나.”
“그래서 그렇구나. 들리는 소문에 요즘 물 좋은 시나리오들 다 너한테 간다더라. 지금 돌고 있는 시나리오 중에서 선우휘 거치지 않은 배역이 없다고 하니까.”
“하긴 연달아 대박 터뜨렸으니 너네 대표 눈이 돌 만도 하지. 그래서, 드라마 할 거야?”
“……생각 중이야.”
휘가 짧게 말하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평소 자신이 원하지 않는 건 절대 하지 않는 걸로 유명한 휘였다. 하지만 이번엔 소속사 대표가 워낙 완강했다. 더욱 짜증스러운 건 들어오는 시놉 대부분이 재벌 3세 역이라는 거였다.
이미 드라마에서 여러 번 비슷한 역할을 했으니 이번엔 영화 쪽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서 배우로서 폭 넓은 필모그래피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회사에서는 휘가 지금 한창 인기 있는 이미지를 계속 고수하려고만 들었다.
……어쩌라는 거야. 아예 재벌 3세 전문 배우로 낙인찍히라는 건가.
작품 선택권에 있어서 본인에게 유리한 조건의 계약이 아니라 회사 측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혼자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휘가 피곤한 얼굴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집 안에 들어온 순간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주머니!”
“에그머니!”
소파에 늘어지게 누워 거대한 벽걸이 TV를 보고 있던 가사도우미 아주머니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버, 벌써 왔어요?”
아주머니가 민망하게 웃으며 얼른 TV를 끄자 휘는 시베리아 북풍의 찬기가 스며든 차가운 시선으로 쳐다봤다.
“제가 청소 끝나면 재깍재깍 돌아가시라고 했을 텐데 또 드라마 보고 누워 있어요?”
“아니, 호호호. 여기 TV가 워낙 좋아서 나도 모르게 자꾸만 보게 되네. 호호호호.”
솔직히 청소하러 오는 집이라지만 꼭 영화 같은 인테리어에 전망이 좋은 이런 집에서 그냥 청소만 하고 가긴 아쉬웠다. 그래서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창에 서서 엘레강스하게 커피도 한잔 마시고, TV도 보고 하는 것이 어느새 아주머니의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 그럼 난 이만 갈게요.”
휘의 표정이 워낙 살벌해 아주머니는 얼른 가방을 챙겨 슬금슬금 나가려고 했다. 그때 등 뒤로 휘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이제 오실 필요 없습니다. 오늘까지 일한 건 계좌로 보내 놓을 테니까.”
“네, 네?”
허둥지둥 나가던 아주머니가 흠칫 놀라 뒤돌아봤다. 그러자 휘가 차가운 얼음 석상처럼 위압적으로 선 채 다시 말했다.
“아주머니 새로 뽑을 거니까 올 필요 없단 뜻입니다. 그럼 안녕히.”
“아, 아니 이렇게 갑자기…….”
당황스러운 얼굴로 보고 있는 아줌마에게서 먼저 몸을 돌린 휘가 식당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냉장고 문에서 스위치를 누르고 얼음과 스파클링 워터를 받아 벌컥벌컥 마셔도 짜증이 가시질 않았다.
“기분 더럽게.”
휘의 눈썹이 예리하게 모여들었다. 평소 자신의 영역에 타인이 들어오는 걸 끔찍이 싫어했기에 가사도우미를 구하는 데도 특히 까다로운 편이었다. 사십 대 이상 기혼자에 한정해서 모집해도 어떻게 알고 왔는지 팬들이 변장을 하고 찾아오기까지 했다.
“그래도 아주머니니까 봐줬더니, 이젠 주인 없는 시간에만 청소하고 나가라는 룰까지 어겨?”
아주머니가 청소만 하지 않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집 안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굳이 말을 하지 않은 건 다시 가사도우미를 뽑는 것이 번거로운 데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처음부터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집에서 무슨 짓을 하든 내가 오기 전에만 나가라는 생각이었는데…….
휘가 까드득거리며 분노의 얼음 씹기를 하고 있을 때, 문득 머릿속으로 억울한 강아지 같은 까만 눈망울이 휙 지나갔다.
“……아, 그래. 그게 있었지.”
탁. 빈 물컵을 소리 나게 내려놓은 휘의 눈빛이 은밀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