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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차훈이 잠이 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진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피피픽!
정진호는 조심스럽게 차훈의 몸 몇 군데에 손을 짚었다. 수혈을 짚은 것이다.
‘그놈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반드시 알아야 한다. 내 짐작이 사실이라면 큰일이니 어서 가보자.’
정진호의 눈이 파르스름하게 빛났다.
침상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소리를 내지 않고 문을 열어 밖으로 나온 정진호는 다시 문을 닫았다.
팟!
정진호의 신형이 흐릿해지며 문 앞에서 사라졌다.
그는 경비병들의 눈을 피해 철조망을 넘었다. 높이가 3미터에 달하는 철조망을 나는 새처럼 넘은 그는 어둠 속에 신형을 감춘 채 소장실이 있는 곳을 향했다.
소장실 근처에 다다른 그의 신형이 다시 한 번 날아 철조망을 넘었다.
슈슈슉!
정진호의 손에서 뭔가가 날아가 경비를 서고 있는 자들의 품을 파고들었다.
투투투!
무너지듯 경비병들이 쓰러졌다.
끈이 떨어진 목각 인형처럼 그 자리에 쓰러지는 경비병들을 뒤로하고 정진호는 소장실로 들어갔다.
비서실을 지나서 소장의 침실로 향하던 정진호가 흠칫하며 멈춰 섰다.
‘으음, 기다리고 있었군.’
소장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모두가 깊이 잠이 든 시간에 일어나는 기척이라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정진호는 천천히 집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책상에 앉아 있는 소장이 보였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으십시오, 사형.”
“그러지.”
책상을 마주하고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기에 자리에 가서 앉았다.
“날 속였더군.”
“속이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녹령을 모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으음, 그놈이 사형께 말을 했던 모양이군요. 광산에서 처리를 해야 했는데, 모두 제 불찰입니다.”
수용소 소장, 김형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으며 녹령을 발견한 장석을 광산에서 죽이지 못했음을 자책했다.
“사람 목숨을 그리 쉽게 생각하다니, 역시나 네놈은 변한 것이 전혀 없구나.”
“후후후, 이제는 세상이 변했습니다. 살아남으려면 저도 어쩔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사형.”
“벌써 십오 년이다. 네놈의 욕심은 어디까지냐?”
“너무 뭐라고 하지 마십시오. 이제 슬슬 끝나가니 말입니다.”
“끝날 때라고 했느냐?”
팟!
의자에 앉아 있던 정진호가 갑작스럽게 출수했다. 섬광과 같이 뻗어 나간 손이 김형식의 울대를 노렸다.
팅!
미처 피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진호의 손은 김형식의 울대를 뚫지 못하고 허무하게 튕겨 나왔다.
파팟!
배불뚝이 같은 모습과는 달리 김형식의 행동은 무척이나 빨랐다. 그대로 몸을 떠올려 책상 위를 넘더니 뒤로 밀려 나간 정진호를 공격했다.
퍼퍽!
불룩한 배와는 달리 날렵한 그의 두 다리가 교차하며 정진호의 가슴을 쳤다.
“크윽!”
신음을 흘리며 주저앉은 정진호를 보며 김형식은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네, 네놈이!”
“후후후, 내상을 입은 몸으로 무리를 하면 안 되지요. 지금까지 사형이 무서워서 그냥 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이대로 계시다가 조용히 가시라고 기회를 드렸는데, 정말 실망입니다. 제 호의를 무시하시다니 말입니다.”
김형식은 눈을 부릅뜬 정진호를 향해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후우, 기어이 놈들과 손을 잡았구나.”
“후후후, 여전하시군요. 바로 알아내시다니 말입니다. 맞습니다. 방금 전에 사형을 공격한 무공이 바로 합마공입니다.”
“합마공이라니, 네놈이 진정 사문을 배신했구나.”
“배신이요? 후후후, 사문이 날 위해 해준 것이 뭡니까? 그리고 저는 한 번도 사문이라고 여긴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으음…….”
“후후후, 저를 거두어주셨으니 오늘은 그냥 보내 드리도록 하지요. 하지만 이번 한 번뿐입니다. 조용히 계시다가 선사들이나 뵈러 가세요, 사형.”
“크흐흑, 나는 비록 이렇게 네놈에게 당했다만, 먼저 가신 선영들께서 네놈을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마음대로 해보세요. 죽은 귀신들이 어떻게 할 수 있나 말입니다. 하하하하!”
정진호는 웃음소리에 기분이 나빴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분을 삼켜야 했다.
‘천박한 놈. 네놈의 그 쓸데없는 자신감이 비수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정진호는 웃고 있는 김형식의 모습을 노려보다 곧바로 집무실을 나섰다. 김형식은 자신의 말대로 밖으로 나서는 그를 잡지 않았다.
내상이 도진 상태지만 모습을 감춘 후 경비병들의 시선을 피해 곧바로 철조망들을 넘은 정진호가 막사로 돌아왔다.
막에 들어와 벽에 등을 기대고 자리에 앉은 정진호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크으윽, 내상이 다시 도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시간이 얼마 없다.’
간신히 회복한 내력이 뒤엉켜 버리고 내상이 더욱 깊어졌다. 며칠을 넘기기 힘들 것 같았다.
‘동귀어진이 무서워 가만히 있었지만, 그놈의 성격이라면 다른 방법으로 손을 쓸 거다.’
사제였던 김형식은 누구보다 잔인한 성정에 심계까지 깊었다. 최후의 한 수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냥 놔둔 것이지, 결코 봐준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며칠 내로 하려고 했던 것이니, 오늘 끝내 버리자.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
친우의 손자이자 제자인 차훈에게 남겨줄 것이 많았다. 때가 되지 않아 감추어놓은 것들이다.
이제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동안 준비해 왔던 대법을 시행할 순간이었다.
‘후후후, 기고만장해라. 내가 녹령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네놈의 패착이 될 것이다.’
세상에 없던 특이한 기운들이 뭉쳐져서 만들어진 것이 녹령이다.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처럼 나타난 녹령은 자신도 비밀리에 모으고 있었다.
내력이 없어도 녹령만 있으면 차훈을 변화시킬 대법을 시전할 수가 있다.
모든 것을 전할 수 있으니 사문의 맥이 끊어지지 않고 전해지는 것이다.
‘눈앞에 두고도 이 아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이상, 네놈의 헛된 꿈은 반드시 무너질 것이다.’
차훈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철저히 숨겼다.
자신의 제자라는 것이 알려지면 가만두지 않을 자이기 때문이다.
막사에 들어올 때 이외에는 작업을 하러 가며 마주치는 것도 자제할 만큼 남처럼 행동을 해왔다.
막사에서 생활하는 차훈 또래의 아이들을 모두 열두 명이니 제자를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차훈이 가진 내력 자체가 은잠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 지금까지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덕분에 마주하는 일이 많은 데도 불구하고 김형식은 차훈의 내력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문의 대법을 사용할 수는 없다. 검증은 되지 않았지만, 그것이라면 놈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것이다.’
사문에서 전해지는 대법을 시전하게 되면 특성상 김형식에게 들킬 확률이 높기에 정진호는 다른 대법을 시전하기로 했다.
한국전쟁 당시 중국군의 동태를 살피다가 만주 오지에서 얻게 된 대법이라면 충분히 차훈을 감출 수 있기 때문이었다.
‘차훈아, 미안하지만 이제부터 네 기억과 능력들을 봉인해야겠구나. 놈이 알게 되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때가 되면 알아서 깨어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가기만 한다면 너는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내상이 도진 상태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워질 수 있는 상황이라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차훈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전해야 한다.
결심을 굳힌 정진호는 빠르게 차훈의 옷을 벗겼다. 잘 먹지 못해서 말랐지만, 아주 탄탄한 몸매다.
우드득!
정진호는 손가락을 물어뜯었다. 이상하게도 뚝뚝 떨어져야 할 피가 손가락 끝에 맺히기만 했다.
정진호는 인상도 찌푸리지 않고 맺혀 있는 자신의 피로 차훈의 몸에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복잡해 보이는 도형과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차훈의 몸에 들어차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문자나 그림들은 손가락으로 그렸다고는 믿을 수 없도록 아주 작았다. 마치 깨알처럼 몸 위에 그려지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물감의 재료가 피인 그려지는 색들은 모두 녹색이라는 점이었다. 어느새 녹색의 그림과 글자들이 차훈의 전신을 뒤덮었다.
‘이제 1차 마무리만 하면 된다.’
한참을 그린 정진호는 차훈의 몸을 살핀 후, 이마에 뭔가를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붉은색의 그림이 그려졌다.
‘후우, 이제 됐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모두 끝나자 정진호가 입으로 무엇인가를 중얼거렸다.
번쩍!
놀라운 괴사가 아닐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녹색의 광망이 정진호의 눈동자에서 쏟아져 차훈의 이마로 스며들었다.
“헉! 헉!”
한참을 쏟아지던 광망이 멈추고 정진호는 창백한 안색으로 숨을 헐떡였다.
거친 숨을 토하면서 정진호는 차훈을 바라보았다. 온몸에 그려놓았던 그림과 글자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후우, 성공했구나.’
그동안 준비를 해왔던 것이 마침내 성공했다.
‘크으, 이제 길어야 사흘 정도다.’
정진호는 대법이 끝난 후 거칠어지는 호흡을 통해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내상으로 인해 온몸에 흩어져 있던 내력까지 강제로 뽑아 대부분 전이시켰다.
그나마 지금까지 막대한 내력이 내상을 진정시켜 주고 있었는데, 이제 급속도로 번지고 있다.
‘내가 이런 상태라는 것을 그놈이 절대 알아차려서는 안 된다. 껄끄러운 것은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니 놈이 손을 쓸 때까지만 버텨야 한다.’
정진호는 며칠간만 버틸 수 있도록 잠력을 격발시켰다. 최소한 5일이면 김형식이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타타타탁!
정진호는 심장 주변에 있는 혈들을 짚었다.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으나 개의치 않았다.
‘후우, 살 것 같구나. 이제 좀 쉬자.’
잠력을 격발시킨 정진호는 쓰러지듯 차훈의 옆에 누웠다.
차훈이 잠이 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진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피피픽!
정진호는 조심스럽게 차훈의 몸 몇 군데에 손을 짚었다. 수혈을 짚은 것이다.
‘그놈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반드시 알아야 한다. 내 짐작이 사실이라면 큰일이니 어서 가보자.’
정진호의 눈이 파르스름하게 빛났다.
침상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소리를 내지 않고 문을 열어 밖으로 나온 정진호는 다시 문을 닫았다.
팟!
정진호의 신형이 흐릿해지며 문 앞에서 사라졌다.
그는 경비병들의 눈을 피해 철조망을 넘었다. 높이가 3미터에 달하는 철조망을 나는 새처럼 넘은 그는 어둠 속에 신형을 감춘 채 소장실이 있는 곳을 향했다.
소장실 근처에 다다른 그의 신형이 다시 한 번 날아 철조망을 넘었다.
슈슈슉!
정진호의 손에서 뭔가가 날아가 경비를 서고 있는 자들의 품을 파고들었다.
투투투!
무너지듯 경비병들이 쓰러졌다.
끈이 떨어진 목각 인형처럼 그 자리에 쓰러지는 경비병들을 뒤로하고 정진호는 소장실로 들어갔다.
비서실을 지나서 소장의 침실로 향하던 정진호가 흠칫하며 멈춰 섰다.
‘으음, 기다리고 있었군.’
소장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모두가 깊이 잠이 든 시간에 일어나는 기척이라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정진호는 천천히 집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책상에 앉아 있는 소장이 보였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으십시오, 사형.”
“그러지.”
책상을 마주하고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기에 자리에 가서 앉았다.
“날 속였더군.”
“속이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녹령을 모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으음, 그놈이 사형께 말을 했던 모양이군요. 광산에서 처리를 해야 했는데, 모두 제 불찰입니다.”
수용소 소장, 김형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으며 녹령을 발견한 장석을 광산에서 죽이지 못했음을 자책했다.
“사람 목숨을 그리 쉽게 생각하다니, 역시나 네놈은 변한 것이 전혀 없구나.”
“후후후, 이제는 세상이 변했습니다. 살아남으려면 저도 어쩔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사형.”
“벌써 십오 년이다. 네놈의 욕심은 어디까지냐?”
“너무 뭐라고 하지 마십시오. 이제 슬슬 끝나가니 말입니다.”
“끝날 때라고 했느냐?”
팟!
의자에 앉아 있던 정진호가 갑작스럽게 출수했다. 섬광과 같이 뻗어 나간 손이 김형식의 울대를 노렸다.
팅!
미처 피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진호의 손은 김형식의 울대를 뚫지 못하고 허무하게 튕겨 나왔다.
파팟!
배불뚝이 같은 모습과는 달리 김형식의 행동은 무척이나 빨랐다. 그대로 몸을 떠올려 책상 위를 넘더니 뒤로 밀려 나간 정진호를 공격했다.
퍼퍽!
불룩한 배와는 달리 날렵한 그의 두 다리가 교차하며 정진호의 가슴을 쳤다.
“크윽!”
신음을 흘리며 주저앉은 정진호를 보며 김형식은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네, 네놈이!”
“후후후, 내상을 입은 몸으로 무리를 하면 안 되지요. 지금까지 사형이 무서워서 그냥 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이대로 계시다가 조용히 가시라고 기회를 드렸는데, 정말 실망입니다. 제 호의를 무시하시다니 말입니다.”
김형식은 눈을 부릅뜬 정진호를 향해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후우, 기어이 놈들과 손을 잡았구나.”
“후후후, 여전하시군요. 바로 알아내시다니 말입니다. 맞습니다. 방금 전에 사형을 공격한 무공이 바로 합마공입니다.”
“합마공이라니, 네놈이 진정 사문을 배신했구나.”
“배신이요? 후후후, 사문이 날 위해 해준 것이 뭡니까? 그리고 저는 한 번도 사문이라고 여긴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으음…….”
“후후후, 저를 거두어주셨으니 오늘은 그냥 보내 드리도록 하지요. 하지만 이번 한 번뿐입니다. 조용히 계시다가 선사들이나 뵈러 가세요, 사형.”
“크흐흑, 나는 비록 이렇게 네놈에게 당했다만, 먼저 가신 선영들께서 네놈을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마음대로 해보세요. 죽은 귀신들이 어떻게 할 수 있나 말입니다. 하하하하!”
정진호는 웃음소리에 기분이 나빴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분을 삼켜야 했다.
‘천박한 놈. 네놈의 그 쓸데없는 자신감이 비수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정진호는 웃고 있는 김형식의 모습을 노려보다 곧바로 집무실을 나섰다. 김형식은 자신의 말대로 밖으로 나서는 그를 잡지 않았다.
내상이 도진 상태지만 모습을 감춘 후 경비병들의 시선을 피해 곧바로 철조망들을 넘은 정진호가 막사로 돌아왔다.
막에 들어와 벽에 등을 기대고 자리에 앉은 정진호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크으윽, 내상이 다시 도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시간이 얼마 없다.’
간신히 회복한 내력이 뒤엉켜 버리고 내상이 더욱 깊어졌다. 며칠을 넘기기 힘들 것 같았다.
‘동귀어진이 무서워 가만히 있었지만, 그놈의 성격이라면 다른 방법으로 손을 쓸 거다.’
사제였던 김형식은 누구보다 잔인한 성정에 심계까지 깊었다. 최후의 한 수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냥 놔둔 것이지, 결코 봐준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며칠 내로 하려고 했던 것이니, 오늘 끝내 버리자.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
친우의 손자이자 제자인 차훈에게 남겨줄 것이 많았다. 때가 되지 않아 감추어놓은 것들이다.
이제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동안 준비해 왔던 대법을 시행할 순간이었다.
‘후후후, 기고만장해라. 내가 녹령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네놈의 패착이 될 것이다.’
세상에 없던 특이한 기운들이 뭉쳐져서 만들어진 것이 녹령이다.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처럼 나타난 녹령은 자신도 비밀리에 모으고 있었다.
내력이 없어도 녹령만 있으면 차훈을 변화시킬 대법을 시전할 수가 있다.
모든 것을 전할 수 있으니 사문의 맥이 끊어지지 않고 전해지는 것이다.
‘눈앞에 두고도 이 아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이상, 네놈의 헛된 꿈은 반드시 무너질 것이다.’
차훈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철저히 숨겼다.
자신의 제자라는 것이 알려지면 가만두지 않을 자이기 때문이다.
막사에 들어올 때 이외에는 작업을 하러 가며 마주치는 것도 자제할 만큼 남처럼 행동을 해왔다.
막사에서 생활하는 차훈 또래의 아이들을 모두 열두 명이니 제자를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차훈이 가진 내력 자체가 은잠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 지금까지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덕분에 마주하는 일이 많은 데도 불구하고 김형식은 차훈의 내력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문의 대법을 사용할 수는 없다. 검증은 되지 않았지만, 그것이라면 놈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것이다.’
사문에서 전해지는 대법을 시전하게 되면 특성상 김형식에게 들킬 확률이 높기에 정진호는 다른 대법을 시전하기로 했다.
한국전쟁 당시 중국군의 동태를 살피다가 만주 오지에서 얻게 된 대법이라면 충분히 차훈을 감출 수 있기 때문이었다.
‘차훈아, 미안하지만 이제부터 네 기억과 능력들을 봉인해야겠구나. 놈이 알게 되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때가 되면 알아서 깨어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가기만 한다면 너는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내상이 도진 상태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워질 수 있는 상황이라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차훈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전해야 한다.
결심을 굳힌 정진호는 빠르게 차훈의 옷을 벗겼다. 잘 먹지 못해서 말랐지만, 아주 탄탄한 몸매다.
우드득!
정진호는 손가락을 물어뜯었다. 이상하게도 뚝뚝 떨어져야 할 피가 손가락 끝에 맺히기만 했다.
정진호는 인상도 찌푸리지 않고 맺혀 있는 자신의 피로 차훈의 몸에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복잡해 보이는 도형과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차훈의 몸에 들어차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문자나 그림들은 손가락으로 그렸다고는 믿을 수 없도록 아주 작았다. 마치 깨알처럼 몸 위에 그려지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물감의 재료가 피인 그려지는 색들은 모두 녹색이라는 점이었다. 어느새 녹색의 그림과 글자들이 차훈의 전신을 뒤덮었다.
‘이제 1차 마무리만 하면 된다.’
한참을 그린 정진호는 차훈의 몸을 살핀 후, 이마에 뭔가를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붉은색의 그림이 그려졌다.
‘후우, 이제 됐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모두 끝나자 정진호가 입으로 무엇인가를 중얼거렸다.
번쩍!
놀라운 괴사가 아닐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녹색의 광망이 정진호의 눈동자에서 쏟아져 차훈의 이마로 스며들었다.
“헉! 헉!”
한참을 쏟아지던 광망이 멈추고 정진호는 창백한 안색으로 숨을 헐떡였다.
거친 숨을 토하면서 정진호는 차훈을 바라보았다. 온몸에 그려놓았던 그림과 글자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후우, 성공했구나.’
그동안 준비를 해왔던 것이 마침내 성공했다.
‘크으, 이제 길어야 사흘 정도다.’
정진호는 대법이 끝난 후 거칠어지는 호흡을 통해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내상으로 인해 온몸에 흩어져 있던 내력까지 강제로 뽑아 대부분 전이시켰다.
그나마 지금까지 막대한 내력이 내상을 진정시켜 주고 있었는데, 이제 급속도로 번지고 있다.
‘내가 이런 상태라는 것을 그놈이 절대 알아차려서는 안 된다. 껄끄러운 것은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니 놈이 손을 쓸 때까지만 버텨야 한다.’
정진호는 며칠간만 버틸 수 있도록 잠력을 격발시켰다. 최소한 5일이면 김형식이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타타타탁!
정진호는 심장 주변에 있는 혈들을 짚었다.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으나 개의치 않았다.
‘후우, 살 것 같구나. 이제 좀 쉬자.’
잠력을 격발시킨 정진호는 쓰러지듯 차훈의 옆에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