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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어두운 밤, 주택가로 누군가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예전이면 환했을 주택가 골목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북한 점령군이 불필요한 전력은 모두 끊어버린 터라 켜져 있는 보안등이 없는 탓이었다.
주택 주변을 훑어보던 그는 적색 벽돌로 쳐진 담을 넘었다.
‘죽일 놈. 네놈이 이곳에 숨어 있는 것을 안다.’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731부대에 잠입했다가 끝내 배신을 하고 동지들을 팔아먹은 자의 아들이 살고 있는 집이었다.
‘죽일 놈들! 동족의 한과 피가 서린 그것을 욕심에 눈이 어두워 가로채다니.’
동지들을 배신한 것뿐만 아니라 그들의 재산까지 모두 빼앗아 호의호식한 것은 그렇다고 칠 수 있다.
하지만 독립군이 확보하려고 했던 것을 빼돌린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로 인해 민족의 운명이 뒤틀렸기 때문이다.
‘그놈은 끝내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죽은 것이 분명하다. 방수환 그자도 중요하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고.’
가로챈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벌써 대한민국을 떠났을 놈들이다.
‘분명히 떠나려고 준비를 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제 몸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놈이 이렇게 어수선한 시국에 직접 나설 리 없을 테니까.’
어제까지는 찾아볼 수 없던 북한군이 집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북한이 점령한 후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이는 한정되어 있었다. 방수환이 예전처럼 뇌물을 주고 자신을 처리하려고 부탁을 한 것이 분명했다.
‘오늘밖에는 시간이 없을 것이다. 놈을 처리하고 그것을 확보해야 한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알기에 방수환이 빠져나가기 전에 물건을 확보해야 했다.
박상훈은 조심스럽게 담장을 넘었다.
어둠을 이용해 담장 너머 마당으로 들어선 박상훈은 현관으로 간 후, 허리춤에 숨긴 단검을 꺼내 들었다.
푹!
놀랍게도 철제로 만들어진 문고리 위로 단검이 거의 소리를 내지 않고 박혔다.
서걱!
단번에 잠금장치를 잘라 버린 박상훈은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예상대로 집 안에는 온기가 없었다.
‘이미 예전에 네놈이 만들어놓은 곳을 파악해 두었다.’
건축 일로 생계를 이어가던 그였기에 건물이 지어질 때 이미 지인을 통해 설계도를 확보했다. 바깥에서는 출입구가 없게 만들어진 지하실이 있었다. 건물 안에서만 드나들 수 있는 은신처가 지하에 비밀스럽게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박상훈은 조심스럽게 응접실을 살폈다.
‘저곳이 출입구다.’
자신이 보았던 설계도와 바뀐 부분이 있었다. 지하로 통하는 출입구 위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놓여 있는데, 원래 설계도에는 없던 것이다.
계단으로 가서 나무로 막힌 옆면을 살폈다.
‘저것을 돌리면 출입구가 열리게 되어 있는 것 같은데…….’
계단 옆벽에 달린 작은 등이 출입구를 여는 장치가 틀림없지만,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었다.
문을 열다가 안에 숨어 있는 방수환에게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일을 그르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이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
예전의 대한민국이 아니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나라를 수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에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움직여야 했다.
끼기긱!
등을 잡고 옆으로 돌렸다.
스르르륵!
벽면이 옆으로 밀려나며 출입구가 열렸다. 어두운 계단 끝에 문이 있었다.
‘이곳이 네놈의 무덤이 될 것이다.’
가문 대대로 내려온 무예를 수련해 왔기에 그나마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날카로운 감각이 놈의 위치를 알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놈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기척이 드러나는 순간 곧바로 공격을 해야 한다.’
계단을 따라 밑으로 내려갔다. 문 앞에 선 박상훈은 감각을 최대한 끌어 올리며 문 안쪽을 살폈다.
문 뒤에서 들려오는 작은 기척이 느껴졌다.
‘역시 혼자구나.’
호구조사가 시작되자마자 가족들을 버리고 안가로 피신한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를 닮아 자신을 위해서는 가족까지 버릴 수 있는 놈이었다.
박상훈은 쥐고 있는 단검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단검이 희미하게 빛을 발했다. 박상훈은 벽을 향해 있는 힘껏 단검을 찔러 넣었다.
푹!
‘됐다.’
주르륵.
단검을 잡아 뽑자 핏줄기가 벽면을 타고 흘렀다. 방수환을 처리했다고 생각한 박상훈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백열전구가 켜진 은신처 안은 상당히 밝았다. 문 바로 옆에는 방수환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의 가슴에서는 붉은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죽일 놈!”
박상훈은 쓰러져 있는 방수환을 힐끔 바라본 후, 은신처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얼마 후, 벽장 안에 만들어진 비밀 금고를 찾을 수 있었다.
“한 번밖에는 사용할 수 없을 것 같구나.”
조금 전, 방수환을 죽이기 위해 과도하게 진력을 썼다. 남아 있는 것은 겨우 한 번 사용할 정도의 양이었다.
푹!
박상훈은 비밀 금고의 잠금장치 부분에 단검을 찔러 넣고는 헤집어 버렸다. 잠금 장치가 해제되자 금고 문을 여는 것은 금방이었다.
금고 안에는 누런빛을 발하는 금괴들과 상당한 양의 달러, 그리고 뭔가가 담긴 주머니들이 들어 있었다.
박상훈은 주머니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는 것도 있고, 루비가 들어 있는 것도 있었다.
“이거군.”
세 번째 주머니를 뒤졌을 때,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아주 투박해 보이는 구슬이었다.
박상훈은 구슬이 담긴 주머니를 품에 넣은 후, 등에 짊어진 가방을 풀었다. 등산용으로 만들어진 백팩이었다. 금고 안에 들어 있는 금괴와 외화를 비롯해 보석들은 백팩 안에 넣었다.
“으음.”
등에 짊어지자 제법 묵직했지만, 그리 부담이 되는 무게는 아니었다.
“나가자.”
박상훈은 곧바로 은신처를 나섰다. 그러고는 밖으로 나와 건물 뒤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LPG 가스통과 보일러에 사용하기 위해 비치해 둔 기름통들이 있었다.
박상훈은 가스통과 기름통을 옮겨 집 안 곳곳에 기름을 흠뻑 뿌렸다. 뒤이어 가스통의 밸브를 연 후에 잘게 찢어 기름을 흠뻑 적신 커튼을 이용해 도화선을 만들었다.
“후우, 잘 가라. 묻어주지는 못하지만, 화장은 해줄 테니.”
박상훈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기름에 흠뻑 젖은 커튼에 불을 붙였다.
화르르르!
불이 붙자마자 박상훈은 재빠르게 담을 넘었다. 곳곳에 북한군의 초소가 있는 만큼 화광이 충천하기 전에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콰콰쾅!!
박상훈이 벗어나고 1분이 조금 지난 후, 폭발음과 함께 붉은 화염이 치솟았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폭발음에 근처의 시선이 쏠렸다. 초소에서 경비를 하던 북한군들이 화재가 난 장소로 몰려들었다.
박상훈은 경비 병력들이 우왕좌왕하는 틈을 이용해 은밀하게 초소를 벗어난 후,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부우우웅!
박상훈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군 지휘관이 타는 차량 하나가 나타났다.
방수환의 집으로 향하는, 추상철이 탄 차량이었다.
“저곳은?”
화광이 솟아오르는 것을 발견한 추상철은 그곳이 방수환의 집임을 직감했다.
“어서 가라.”
“예, 대좌 동지.”
운전병에게 지시를 내린 추상철은 바쁘게 머리를 돌렸다.
‘조심스러운 성격이라 화재가 발생할 만한 일은 만들지 않을 자였다. 그렇다면……. 저 불은 방화가 틀림없다.’
집으로 다가갈수록 짙어지는 기름 냄새에 추상철은 누군가 방수환에게 손을 썼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사방에 불이 붙고, 화염이 엄청난 화재였다. 방화가 아닌 이상에는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누군가 손을 쓴 것이 틀림없었다.
“차를 돌려 이 주소로 가라.”
더 이상 볼 것도 없었다. 추상철은 주소 하나가 적힌 쪽지를 운전병에게 주었다. 방수환이 모함한, 박상훈이 거주하고 있는 주소였다. 방수환의 집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서둘러 박상훈의 집으로 간 추상철은 운전병과 함께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쾅!
반지하 주택의 문을 부수고 들어간 추상철은 놀라 눈을 부릅뜬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박상훈의 아들인 박준호와 그의 처인 강미소였다.
“무, 무슨 일입니까?”
“박상훈은 어디 갔나?”
“아, 아버님은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가셨습니다.”
날카로운 추상철의 질문에 박준호는 벌벌 떨며 대답을 했다.
“먹을 것을 구하러 갔다? 이 시간에 말이냐?”
“제 처가 아이를 가져서 잘 먹어야 한다고 부득불 나가셨습니다.”
박준호의 변명에 강미소를 바라보니 배가 많이 불러 있었다.
“사실이냐?”
“사, 사실입니다.”
“그거야 기다려 보면 알겠고. 언제 돌아온다고 했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든지 식량을 구하겠다고 말씀하시고만 나가셨습니다.”
“오늘 안으로는 돌아오겠지.”
자신의 예감을 확인하기 위해 추상철은 방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넌 바깥에 나가 박상훈이 오나 살펴봐라.”
“예, 대좌 동지.”
추상철의 지시에 운전병은 곧바로 바깥으로 나갔다.

‘왜 우리 집에?’
불을 지르고 집으로 돌아오던 박상훈은 집 앞에 서 있는 북한군의 차를 보고는 몸을 숨겼다. 밖으로 나오는 운전병을 본 박상훈이 일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그놈이 낮에 북한군을 만났다면…….’
방수환과 연관된 자가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대로는 집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몸에서 석유 냄새가 진동을 했다. 방수환의 집에 불을 지른 것을 알고 왔다면 문제가 심각했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자.’
잘못하면 아들 내외에게 화가 닥친다. 우선 자리를 벗어나 다음 일을 생각할 때였다.
박상훈은 조심스럽게 골목길을 나선 후, 동네 뒤에 있는 북한산으로 올라갔다. 산길을 올라가 그가 찾아간 곳은 커다란 평상을 닮은 바위였다. 평상 같은 바위 아래에는 작은 틈이 있었다. 어린아이가 들어갈 틈 안에는 상당히 큰 공간이 있었다.
아들이 어린 시절에 화가 난 자신을 피해 도망가 숨어 있던 곳이었다.
박상훈은 품 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열었다. 그러고는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구슬을 꺼내 들었다. 투박한 구슬인데, 옅은 붉은색이 감돌고 있었다.
박상훈은 구슬을 호주머니 속에 넣었다.
뒤이어 등에 진 백팩을 내리고는 단검과 주머니를 집어넣은 후 바위틈 안으로 밀어 넣었다.
박상훈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작은 바위들을 옮겨 와서는 틈을 막고 낙엽들을 이용해 가렸다.
‘이제는 옷에서 석유 냄새를 날려야 한다.’
아직 4월이라 쌀쌀한 날씨지만, 박상훈은 개의치 않고 옷을 벗어 털었다. 옷에 묻은 석유를 날려 버리려는 것이었다.
한참을 털어 석유 냄새를 뺀 후에 옷을 입었다.
‘일단 식량부터 구해야 한다.’
집으로 들이닥친 인민군들은 자신의 행방을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아들에게 말해놓은 것이 있기에 식량을 구해야 했다.
‘아까 그놈의 은신처에서 가지고 나올 것을…….’
더러운 돈으로 구한 식량을 손자를 가진 며느리에게 먹일 수 없어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후회가 됐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민군들이 징발한 식량 창고를 털자. 아직 석유 냄새도 남아 있고, 잡히더라도 핑계를 댈 수 있을 테니.’
박상훈은 곧장 배급을 나눠 주는 보급 창고로 향했다. 예전에 농협에서 관리하던 창고였다.
‘전에 봐두었던 곳으로 가자.’
상당수의 경비 병력들이 있지만, 개의치 않고 조심스럽게 창고로 접근했다.
경비하는 병력도 예상보다 적고 창고가 워낙 큰 탓에 틈이 있었다. 경비병들의 시선을 피해 창고와 붙어 있는 건물 옆으로 간 박상훈은 건물과 건물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건물의 수선을 맡았을 때 담당자가 예산 부족을 이유로 다음에 수리하자고 했던 환풍구가 보였다.
‘그대로군.’
박상훈은 허리를 숙인 후 낡은 환풍구를 조심스럽게 뜯어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 안에는 생필품과 식량들이 잔뜩 있었다.
박상훈은 우선 물건들을 싸 갈 것을 찾았다. 한쪽 구석에 포대가 있기에 하나 주워 들었다.
식량을 구하는 것이 어려워질 수 있기에 통조림을 챙겼다. 과일과 육류 위주로 통조림들을 챙긴 박상훈은 조심스럽게 들어왔던 곳으로 나갔다. 뜯어낸 환풍구를 다시 걸쳐 놓고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건물과 건물 사이가 그다지 넓지 않아 많이 챙겨 가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지만, 빨리 돌아가야 할 때였다.
길이만 100미터에 가까운 거리고, 시선이 가려진 곳이라 순찰을 도는 경비병을 피해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다. 보안등이 켜지지 않은 까닭에 숨어서 움직이는 것이 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