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오타쿠인게 뭐가 나빠 2화
Ⅰ. 누구나 비밀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2)


오늘은 날씨도 덥고, 집에서는 집중도 안 될 테니 도서관에서 공부할 생각이었다. 세형은 그의 어깨를 힘 있게 두들겼다.
“장난이야. 맛있는 거 사 줄게. 진짜 고맙다.”
오늘은 정말 기분이 좋았다. 일 년 중 이렇게 기분이 좋은 날은 몇 되지 않는다. 날씨가 지독할 정도로 더운 것만 빼면 다 괜찮았다. 아침에 나오면서 그 녀석과 마주치지도 않았고, 심지어 오면서 저를 아는 그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시작부터 끝까지 좋은 일밖에 없었구나 싶었다. 아, 오늘은 뭐가 돼도 되는 날이구나. 세형의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래서 차마 떠올리지 못했다.
방심은 금물. 인간 만사 새옹지마, 길흉화복이라는 옛 선조님들의 말씀을.
가방을 다시 들쳐 메려는 순간 돌연 가게 문 종소리가 울렸다. 제일 먼저 보인 건 신코였다. 깨끗하게 빤 운동화엔 어울리지 않게 닳아 버린 신코에 시선이 갔다. 엉성하게 묶인 신발 끈은 금방이라도 풀어질 것처럼 불안했다.
아니, 더 불안한 건 따로 있었다. 저 신발을 분명 어디서 본 것 같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아니야. 설마. 그럴 리가 없어.
그는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들어 올렸다. 이내 낯익은 더벅머리를 보았을 때 헉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미친.”
뻑뻑한 목을 타고 흘러나온 한마디는 그게 전부였다.
그때 가게를 둘러보던 그가 목소리를 들었는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간발의 차이였다. 세형은 가방으로 제 얼굴을 황급히 가렸다. 이게 뭐야. 뭔데, 왜 저놈이 여기 있는데!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런 그를 건이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형?”
쉿. 쉬잇. 검지를 입 앞에 가져다 대자 그제야 그는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여름의 뙤약볕이 다시 한번 제게 성큼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복도에서 순진하게 웃던 성태의 얼굴이 떠올랐다. 또 어떤 얼굴로 저를 쳐다보고 있을까. 아니, 그 전에 자신은 대체 왜 얼굴을 가려 버린 걸까. 생각해 보면 숨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데!
세형은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못 봤을 거다. 녀석이 들어올 땐 등을 돌리고 있었으니까. 제 얼굴 같은 건 못 봤을 거다. 아니, 못 봤어야 했다. 목을 타고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목이 탔다.
“아, 혀엉……이 아니고. 저기 이거 가져가야죠.”
건의 손에는 브로마이드가 있었다. 가방 안에 들어가지 않아 빼 두었던 물건이었다. 그걸 본 순간 세형은 몇 초전의 저를 한껏 칭찬했다. 얼굴 가리길 정말 잘했다고.
이 반질반질한 질감, 이 크기, 이 형태. 오타쿠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이건 브로마이드라는 걸! 즉, 자신과 동류인 박성태가 못 알아볼 리가 절대 없다는 뜻이다.
세형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브로마이드를 받아 들었다.
그때 세형을 향해 있던 신발이 방향을 틀었다. 그는 건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저기, 매지컬 미라클 팬북은…….”
“아, 그거 다 나갔는데요. 죄송합니다.”
기회다. 도망쳐야 해.
다급히 몸을 돌렸다. 하지만 뛰쳐나가기도 전에 저를 붙잡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저기.”
“…….”
문득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돌아보지 마.
그것은 얼마 전에 보았던 공포영화의 여주인공 목소리였다. 세형은 또 한번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목 안이 따끔거렸다. 갈증을 호소하듯 입술이 자꾸만 메말랐다.
“니 김세형 맞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세형은 가방을 꼭 끌어안았다. 뭐라고 말해야 정답일까. 어떻게 해야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걸까. 해답을 찾으려 해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백지였다.
어떡하지. 어떻게 하면 좋지. 어떻게 해야…….
머릿속이 너무도 혼란스러웠던 탓일까. 눈앞이 핑글핑글 돌아 버린 세형은 그만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아, 아닌데요?”
“…….”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고는 또다시 가방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돌아섰다. 가방을 방패마냥 꼭 쥐고선 한숨을 꾸역꾸역 삼켰다.
지금 이 파란 백팩 너머로 박성태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적어도 카운터에서 경악한 채 절 보는 건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더 가방을 내릴 수가 없었다.
세형은 카운터를 힐끔 곁눈질했다. 건이가 성태 몰래 이마를 감싸 쥐며 탄식하는 게 보였다.
안다. 스스로 생각해도 바보 같으니까! 지금 엄청나게 부끄러우니까!
그때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세형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유리문이 등에 툭 부딪혔다.
“맞다 아이가.”
기이한 압박감이 어깨를 짓눌러 왔다. 두려워할 만한 상대가 아닌데도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이상하게 무서웠다. 천천히 저를 조이다 덥석 물어 버리기라도 할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드는 데는 그의 느릿느릿한 말투가 한몫했으며, 서서히 다가오는 걸음걸이가 또 한몫했다. 무엇보다도 깊은 곳에서 긁어내는 듯한 저 허스키한 목소리가 제일 무서웠다. 뭐지, 이 녀석 원래 이런 놈이었나?
세형은 가방을 사이에 둔 채 눈을 크게 깜빡였다.
“내가 니 목소리도 모를 것 같나.”
아니, 언제부터 그렇게 관심이 많았다고 내 목소리까지.
세형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여서 서울말 쓰는 사람이 그리 흔한 줄 아나.”
아, 제기랄. 이건 예상 밖이다.
세형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망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 바로 등을 돌리면 분명 얼마 가지 않아 붙잡힐 터. 놈이 저를 쫓아올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잡힐 확률이 높았다.
세형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 사이 그의 손은 가방을 향해 뻗어 오고 있었다.
한심하긴. 지금이 확률 같은 걸 따질 때야?
“니 손에 든 그거…….”
안 돼. 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안 돼. 들키면 안 돼.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래. 생각해 보면 방법이고 뭐고 이 상황에서 해야 할 건 하나밖에 없다.
“매지컬 미…….”
“아니라고, 이 미친 새끼야!”
몸속 깊이 숨겨져 있던 방어 본능이었을 거다. 세형은 그의 얼굴을 향해 냅다 백팩을 던져 버렸다. 제대로 맞았는지 제법 둔탁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사과할 겨를도, 그럴 틈도 없었다. 가방이 그의 얼굴을 타고 미끄러지기 전에 세형은 냅다 뛰었다.
유리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큰일 났어, 큰일 났어! 큰일 났다고! 난 이제 망했어!!
“시이발! 어쩐지 일이 잘 돌아간다 했어!”
인생만사 새옹지마. 누가 만든 말인지는 몰라도 소름 끼칠 정도로 재수 없는 말이라는 건 확실했다. 왜냐면 정말 그러니까!


***


얼굴 아래로 가방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쿵. 제법 짐이 많은 모양인지 바닥에 떨어진 가방에선 돌덩어리 같은 소리가 났다.
흉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는데, 성태는 그 소리를 듣고선 속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전공서적이라도 들어 있었나 보다, 하고.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가방을 주우려 했다. 그러나 그의 손보다 먼저 바닥에 닿은 게 있었다.
당사자보다 옆에 있던 직원이 더 호들갑을 떨었다.
“으어어! 으억! 피, 피나요!”
“아…….”
그제야 성태는 커다란 손으로 제 코를 쥐었지만 그것만으론 역부족이었다. 가방에 제대로 맞은 것 같았다. 피를 보고 난 후에야 콧대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바닥 위로 방울방울 피가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도 상처가 난 본인은 멍하기만 했다. 옆에서 티슈를 한 움큼 뽑아 건네 왔지만 그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생각이 다른 데 가 있었다. 그렇구나. 엄청나게 무거운 거로 맞으면 이런 느낌이 드는 거구나.
누가 보면 미쳤냐고 물을 정도로 그는 지금 이 상황을 신기해하고 있었다.
“저기.”
“네, 네? 휴지, 휴지 더 드릴까요? 으아아. 세형이 형 와 그랬지!”
아, 역시 아까 그건 김세형이 맞았구나.
“저기, 펜이랑 메모지 좀.”
주위에서도 학생 괜찮냐며 와서 난리였다. 많이 아프냐고 묻는데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코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긴 했지만 생각보단 덜 아팠다. 아니 감각이 사라져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직원이 정신 사납게 눈앞을 왔다 갔다 했다.
“형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닐긴데. 아인데. 아, 아 그럴 형 아인데 진짜. 저기, 뭐 적으시는 건지 물어봐도 돼요?”
“…….”
“막 신고할라고 그러시는 거 아이죠? 이, 이거 써서 경찰서 가져가려는 거 아이죠?”
성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코를 대충 틀어막은 휴지는 금세 또 새빨갛게 젖어 버렸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치 않다는 듯 그는 쉼 없이 메모지에 무언가를 썼다.
신고하려는 게 아니라면 다행이지만, 이쯤 되면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이 과묵하다 못해 어딘가 좀 모자라지 않나 싶을 정도로 둔해 보이는 남자는 대체 뭘 쓰고 있는 걸까. 결국 건은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뭐 써요?
“통증에 대한 감상과 느낌.”
“……네?”
적어 둬야 안 잊어버리니까. 그가 말을 덧붙였지만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는 메모지를 꽉 채운 후에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기분이 나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아니, 답답하게 눈을 가린 앞머리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키만 멀대같이 컸지 하는 행동은 마치 곰 같았다. 건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모르니까 병원 가 보는 게…….”
그러거나 말거나 성태는 떨어져 있는 가방과 브로마이드를 주워 들었다. 어지간히도 급했는지 브로마이드마저 내팽개치고 가 버렸다. 그래 봤자 옆방이면서. 그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이거. 전해 줄게요.”
“지, 직접요?”
아니, 가방을 얼굴에다 던지고 간 사람인데 만나고 싶은가. 설마 직접 만나서 담판이라도 지을 작정인가? 건은 질색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이 사람에게 그 정도의 기백과 오기는 보이지 않았다. 세형에게 문전박대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어차피 옆방이고.”
성태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건이 저도 모르게 따라서 고개를 수그렸다. 유리문 밖으로 멀어지는 등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막혀 있던 숨이 겨우 터져 나왔다.
“우와. 저게 4차원이란 거구나.”
처음 봤다.
세형이 질색하는 이유를 좀 알 것 같기도 했다. 당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껄끄럽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나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뭐 어찌 되었든…….그는 뺨을 긁적이다 구석에 있던 밀대를 집어 들었다.
이걸 닦아야 하는 게 저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세형이 형. 담에 만나면 진짜 비싼 걸로 얻어묵을 기다.”


***


다음날도 어김없이 해는 떴다. 변한 게 있다면 갑자기 제 삶에 불쑥 흙발을 들이민 침입자가 한 명 생겼다는 거였다.
“아, 미친. 진짜 들어가기 싫다.”
평소에도 가고 싶었던 건 아니었지만 오늘은 더 싫었다. 세형은 강의실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손톱만 물어뜯었다. 어제 서점에서 달아난 건 좋았지만 그 뒤를 생각하지 못했다.
가방은 어찌할 것이며, 그 안에 있는 필기구는 또 어쩔 것이며, 비싼 전공 책은 또 어떡할 거며, 가장 중요한 팬북은 또 어찌한단 말인가. 다행인 게 하나 있다면 전공 책에는 제 이름이 써져 있지 않다는 거였다.
세형은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미간을 꼬집었다. 혹여나 가방이 서점에 있을까하여 전화해봤지만, 박성태가 가져갔다는 대답만 돌아왔을 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박성태는 어제 온종일 가방 받아 가라며 세형의 방문을 두들겨댔다. 하지만 세형은 모르는 척했다. 가방을 돌려받아야 한다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그거 내 가방이야, 할 정도로 배짱이 두둑한 건 아니었다.
좋은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되찾아 와야 한단 말인가. 전공 책 가격이 얼마나 깡패 같은데. 세형은 절규하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니 뭐하노.”
등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툭툭 두들겨 왔다. 세형은 그의 얼굴을 보고선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항상 강의 1분 전에 맞춰서 들어오는 놈이었다. 누구냐면 그제 메신저를 보낸 그 뱀 같은 놈이다. 세형은 거리를 유지하듯 자연스레 한 걸음 물러났다.
“벌써 강의시간 다 됐냐?”
“그니까 내가 왔지.”
그는 보란 듯이 제 책을 들어 보였다. 그의 품 안에는 두껍기로는 벽돌을 능가하는 전공 책이 있었다. 어제 성태에게 집어 던진 그것이었다.
“빨리 들어 온나. 니 수업 안 올 거가?”
“아, 아, 아냐. 그래. 간다, 가.”
사실은 이대로 등을 돌리고 싶은 심정이지만 안타깝게도 이번 학기 과 수석을 노리는 이상 그건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박 교수님이 누구던가. 학생 얼굴을 한 명 한 명 바라보며 출석을 부르시는 분이며, 세형은 그와 몇 번이고 개인면담을 가진 적이 있었다. 수업을 빠지는 건 물론이며 대출도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교수님들께 눈도장을 찍어 놓은 것이 이럴 때 발목을 붙잡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세형은 자리를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어째 오늘은 강의실이 제법 어수선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세형은 누군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전공 책, 내 전공 책, 내 팬북. 머릿속을 꽉 채운 건 오직 그것뿐,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다. 우선 박성태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그가 찾기도 전에 뱀, 아니 정규가 옆구리를 찔러 댔다.
“야, 야. 저 함 봐라.”
“뭐가. 왜.”
나 바빠. 그렇게 말을 이으려 했지만, 그가 한 발 더 빨랐다.
“멀대 새끼 코 깼나 본데.”
멀대란 그들이 성태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허수아비처럼 높다란 모양새를 보고 지은 별명이다. 세형은 다급히 그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홱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 끝에는 성태가 가방을 뒤적이며 앉아 있었다. 수군거림의 근원지도 그였다. 다들 코에 밴드 하나를 떡하니 붙이고 들어온 그를 보며 숙덕거렸다. 대개는 누구한테 얻어맞은 게 분명하다는 게 압도적이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세형은 속으로 정정했다. 때리고 싶어서 때린 게 아니라고. 하지만 만약 손에 벽돌을 들고 있었다면, 벽돌을 던졌을 게 분명하므로 차마 반박할 순 없었다. 저 상처를 만든 건 틀림없이 자신이었다.
많이, 다쳤나?
불쑥 죄책감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선배들도 저 새끼 우중충하다고 싫어하더만. 그거 때매 맞은 거 아이가?”
“그건 아냐.”
“니가 어째 아노.”
어떻게 알긴.
“아, 딱 보면 모르냐? 어쨌든 아냐.”
내가 장본인이니까 알지.
세형은 성태를 향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앞, 뒤, 좌, 우. 그의 근처에 제 가방은 없었다. 방에 두고 온 모양이었다. 그때 시선을 느꼈는지 성태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세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반대방향으로 돌려 버렸다. 꼭 죄라도 지은 사람 같았다.
시선은 제법 오래도록 머물렀다. 쏘아보듯 쳐다보는 눈빛은 아니었다. 멍하니 제 몸을 통과해 나가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사람이 죄짓고는 못 산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진짜 미치겠네.”
역시 그때 바로 달아난 건 잘못된 선택이었던 걸까. 하지만 아무리 다시 생각해 봐도 좋은 대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 순간 도망치는 것 외에는 아무런 방도가 없었다.
그만큼 싫은 거다.누군가에게 제 비밀을 들키게 되는 게. 치부를 드러내는 게 싫었다. 사실 가장 싫은 건 제 취미를 치부라 생각하는 자신이지만 말이다. 가슴 한쪽에 박힌 가시를 빼내듯 한숨을 크게 토해 냈다.
“와?”
전공 책을 꺼내며 정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사이 또 한 명이 세형의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이건 왜 또 아침부터 인상 쓰고 있는데.”
“내가 아나.”
교수님이 들어온 탓에 자리에 앉아야 했지만, 내내 시선은 박성태를 향했다. 놈은 더는 이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강의에만 열중할 뿐이었다. 싫다. 참 싫다. 저는 치부라며 가리기에 급급한데 넌 뭐가 그렇게 떳떳해서, 무엇이 그리 당당해서. 아무렇지 않은 걸까.
세형은 턱을 괸 채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여간 맘에 안 들어.
그러나 신경을 끄고 싶다 한들 어디 그게 마음대로 되던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세형은 초조해졌다. 오히려 그가 아무 말이 없는 게 더 불안할 정도였다. 세형이 보기에, 박성태는 누구에게 일러바칠 성격도 아니거니와 찾아와서 일일이 따져 물을 성격도 아니었다. 그걸 잘 아는데도 이토록 불안한 건 역시, 박성태라는 인간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지독히도 말수가 없는 놈이다. 어째서인지 제 앞에선 유독 말이 많아지는 것 같지만 이 학교 내에서 그가 누군가와 대화하는 모습은 그다지 많이 보지 못했다.
“자네 코는 왜 그런가.”
“그냥, 좀…….”
교수님의 물음에 말끝을 흐린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그는 입을 잘 열지 않았다. 그가 친구가 없는 건 그의 성격 탓도 꽤 크다고 봐야 했다.
세형은 불안한 듯 다리를 떨었다. 펜 끝을 잘근잘근 깨물며 그의 상태를 내내 살폈다. 간혹 성태가 코를 매만질 때면 죄책감은 더 배가 되었다. 머릿속에 강의 내용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그는 두 시간이 지나 강의 하나가 겨우 끝났을 즈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옆에서 게임을 하고 있던 민정이 몸을 화들짝 떨었다.
“아, 시발. 깜짝이야.”
“나 좀 볼일이 있어서 나갔다 올게.”
“어데 가는데. 나도 가까?”
아니 됐어. 하며 세형은 고개를 저었다. 따라오긴. 절대 저를 따라와선 안 될 놈이 바로 양옆에 앉아 있는 이 둘이었다.
“난 오전 강의 이게 전부야.”
“야야, 그래도 일찍 온나. 점심시간에 조별 회의 한댔다 아이가. 조장이.”
그러고 보니 그걸 잊고 있었다. 세형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어쨌든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인 후에야 겨우 발을 뗄 수 있었다.
현실감이 가장 커다란 단어를 말하라 한다면, 역시 과제를 빼놓을 수 없었다. 박성태를 생각하느라 저만치 밀어 냈던 현실이 썰물처럼 다시 밀려들어 왔다. 아침에 마셨던 캔커피의 쌉싸름한 맛이 혀끝에서 감돌았다.
뒤늦게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박성태에게 가방을 내던진 일로 이 이상 갈팡질팡할 수는 없었다. 머릿속이 차분해지자 지금 제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세형은 그의 옆을 지나치며 박성태의 책상 위에 작은 쪽지를 하나 떨어트렸다. 그리고 문밖으로 나가며 곁눈질로 그의 모습을 살폈다. 그는 말없이 쪽지를 펴 들었다.
「공연동 건물 뒤편으로 와.」
공연동이란 공동연구소동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맞은편이 법학관이고, 그 옆이 경영관이라 박성태를 만나는 게 불안하다면 불안했다. 하지만 학과가 경영학과인 만큼 세형이 자리를 비울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불안을 감수하고 시간을 쪼갤 만큼이나 세형은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이 일을 한시라도 빨리 매듭지어야만 했다. 안 그러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토록 저 녀석이 신경 쓰이는 건 그래, 죄책감 때문일 거다. 코에 붙인 저 무식할 정도로 커다란 밴드 때문일 거다. 그러니까 이 일만 매듭지으면 더는 신경 쓰지 말자.
세형은 가방을 고쳐 메며 걸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건물 뒤로 돌아갔다. 건물 뒤편에는 나무가 많았다. 후덥지근한 바람에 나뭇가지가 휘청휘청 흔들렸다. 그사이에 서서 세형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얼마간을 그러고 서 있었을까. 30분가량이 흘렀을 즈음에야 걸음 소리가 들렸다. 쪼그려 앉아 있던 세형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왜 이제 와?”
나오라고 부른 게 언젠데.
성태는 머쓱하게 뺨을 긁적이며 다가왔다.
“미안. 조교가 불러 갖고…….”
학과 사무실에 다녀온 거구나. 세형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기다리느라 다리가 아팠지만 몰아붙일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이왕이면 좋게좋게 매듭짓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세형은 팔짱을 끼고 나무에 기댔다.
“너, 어디까지 알아?”
“뭐를?”
시치미를 뗄 작정인가 싶었지만 이내 그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세형은 미간을 모았다. 이왕이면 제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은 화제다. 한 번에 알아들어 주길 바랐지만 이놈에게는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결국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인 게 있다면 적어도 불편하진 않다는 거였다. 싫긴 싫어도 같은 오타쿠라는 건지, 이 녀석 앞에선 제 취미를 드러내도 부끄러울 게 별로 없었다. 부끄러울 게 있다면 어제 아니라며 잡아뗐던 것, 그거 하나였다.
역시 도망을 치는 게 아니었는데. 세형은 민망함에 뺨을 붉혔다. 시선을 멀리 돌린 채 입을 열었다. 삐죽 튀어나온 입술 사이로 퉁명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그…… 만화 좋아하는 거.”
대답은 시원스러울 정도로 간략하게 돌아왔다.
“어제 알았다.”
“어떻게 알았어?”
“뭐를?”
아, 정말이지. 세형은 숨을 한껏 들이쉬었다.
“어제 그게 나라는 거 어떻게 알았냐고!”
넌 내가 입 열기 전부터 알고 있었잖아. 어떻게 알고 날 잡아 세운 거야. 뭐야, 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너 왜 이러는데? 한번 나오기 시작한 말은 봇물이라도 터진 듯 줄줄 흘러나왔다. 두다다 쏟아내고 나니 가슴이 들썩거렸다. 세형은 어깨를 오르내리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저를 가리킨 손끝을 빤히 내려다보더니 성태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 특유의 억양이 귓속으로 스며들어 왔다.
“머리색이랑 피어스 자국. 뒷모습도 니였고, 걷는 폼도 니였다.”
“…….”
히익. 세형은 제 팔뚝을 문질렀다. 오소소 돋아난 소름에 몸이 절로 떨렸다.
“뭐야. 너 스토커냐?”
“아이다.”
그래, 아니겠지. 아니어야겠지. 세형은 의심쩍은 눈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무리 같은 과 동기라곤 하지만, 사람을 그렇게까지 관찰할 수 있는 건가. 그가 이토록 제게 관심이 많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눈은 몇 번 마주쳤을지 몰라도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으며, 인사 한번 나눈 적도 없었다.
은연중에 성태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세형이 저를 피하고 있으며 대화 따위 원치 않는다는 것을. 덕후는 덕후를 배려하는 법이며, 이해하는 법이다.
그래서 더 이상한 거다. 왜 이제야 제게 말을 거는가. 여태껏 묵언 수행하듯 잘 참아 왔으면서 이제 와서 이러는 게 너무나 이상했다.
“원하는 건 딱 하나 있다.”
이거 봐라. 이럴 줄 알았어. 저당 잡힐 줄 알았어. 목적이 있을 줄 알았다고.
세형은 삐딱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주도권이 그에게 있다는 걸 알기에, 태도가 조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뭐, 뭔데.”
성태는 긴 손가락으로 턱을 짚었다. 흐음, 하며 신음을 내더니 그는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