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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쿠인게 뭐가 나빠 1화
프롤로그

언제 한번 크게 울었던 적이 있었다. 제 몸에 비해 세 뼘쯤은 더 높은 담을 넘으려다 코를 깬 게 원인이었다. 얼얼한 코를 고사리 같은 손으로 훔치자 새빨간 피가 묻어 나왔다. 소매를 흥건히 적실 정도의 피가 아스팔트 위에 괴기스럽게 칠해져 있었다. 꼭 뭉개진 토마토처럼 보였다.
울었다. 높다란 건물 벽에 부서진 울음소리는 공허했다. 매정한 바람에 휘몰아쳐 사라지듯 들렸다. 그래서 알았던 것 같다. 아, 여긴 날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 내 목소리를 들어 주는 사람도 없다.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집을 피우듯 잔뜩 표정을 찡그렸다. 그러고는 아픈 코를 꼭 붙잡은 채 저만치 뛰어가 버린 친구들을 쫓아 뛰었다.
그것이 처음으로 홀로 일어섰던 기억이다. 그 후로도 곧잘 넘어졌지만 야무지게 툭툭 털고 일어서곤 했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렇게 웃었던 아이는 기억의 너머로 훌쩍 사라져, 이제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 눈을 찡그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냥 포기할래요.”
어차피 해도 안 될 텐데, 뭘.
사라진 아이의 그림자를 좇기엔 자신을 막고 선 벽이 너무 컸다. 그 벽이 드리운 그늘은 제 그림자보다 훨씬 크고, 훨씬 짙었다. 그래.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이, 높이 치솟아 있었던 것이다. 벽을 뛰어넘는 것조차 포기한 후에야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귓가에는 이상한 소음이 남았다. 평생 붙어서 떨어지지 않을 낙인처럼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경고와도 같았다. 앞으로도 그렇게 바닥에 주저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살라는 경고. 너의 위치는 딱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야. 너 오타쿠야?”
누군가는…… 그들은 웃었다.
웃었다.
……웃고, 웃고, 웃었다.
마치 웃는 가면을 뒤집어쓴 것처럼 웃었다.
아마 그때부터지 않을까. 발목을 잡아당기는 웃음소리가 무서워서 바닥만 내려다보게 된 게. 다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게 된 게. 일어섰던 순간을 잊어버린 게.
넘어졌을 땐 얼마나 아팠지? 다시 일어섰을 때는 얼마나 뿌듯했지? 그리고 뛰기 시작했을 때는 또 어땠지?
지금에 와서 기억하는 것이라곤 넘어졌던 순간뿐. 그때가 미치도록 아팠다는 것뿐이었다.
그렇다. 아이는, 나는 내 안에서 살고 있던 아이를 죽였다.
나는 나를 죽였다.



Ⅰ. 누구나 비밀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1)


1.
오랜만에 어린 시절 꿈을 꿨다. 세형은 턱을 괴고 있던 팔을 풀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버스는 어느새 도시로 들어서고 있었다. 창밖의 풍경은 고즈넉한 시골을 벗어나 회색 밀림 같은 도시로 칠해졌다. 줄지어 늘어선 가로수가 바람결에 가지를 떨었다.
버스 창문을 힘주어 밀었다. 뻑뻑한 창문 틈새로 소금기 섞인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었다. 에어컨 바람에는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세형은 시원한 바다 냄새를 좋아했다.
상상해 본다. 모래사장 앞까지 밀려들어 왔다가 다시 뒷걸음질 치는 파도, 쭉쭉 뻗어 있는 수평선, 흔들거리는 물결은 어느 선비의 비단 자락이 구겨진 것만 같다. 거기서 나는 짠 냄새와 광대 같은 기러기의 울음소리.
그것들을 하나하나 떠올리고 나면 그제야 실감하는 것이다. 아, 여기는 그곳과는 달라. 다른 곳이야.
서울에서 이곳으로 내려온 지 3년째. 그저 낯선 땅이었던 이곳도 제법 친숙해졌다. 세형은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제가 예전에 살았던 곳에서는 맡지 못했던 냄새가 코끝에 스몄다.
“다음 정류장은 B대 앞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묵직한 가방을 들쳐 멨다. 얼룩덜룩한 무늬의 군복이 목을 죄어 오듯 들러붙었다. 소금물에 푹 절이기라도 한 듯 답답했다. 팔을 들어 킁킁 맡아 보니 이상한 냄새가 났다. 세형은 눈살을 찌푸리며 버릇처럼 제 코를 매만졌다.
밖은 에어컨의 은혜를 입었던 버스 안과는 천지 차이였다. 입 안까지 퍽퍽한 뜨거움이 느껴졌다. 공기에서 까끌까끌한 모래 맛이 나는 것만 같았다. 세형은 들고 있던 모자로 부채질했다. 땀 때문에 쉰내가 나지만 바람이 없는 것보단 나았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꾹꾹 메시지를 눌렀다.
[예비군 훈련 끝났어. 이제 방 들어갈 거야]
답장은 금세 왔다.
[김치랑반찬보냈으니까 상하지않게조심하고 들어가서쉬어아들]
“아. 제발 띄어쓰기 좀 해 달라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그때 문자가 한 번 더 왔다.
[아직도만화같은거 보는거아니지?]
대답을 망설였다. 하지만 망설인다 한들 세형이 할 수 있는 답은 정해져 있었다.
전송 버튼을 조금 힘주어 눌렀다. 액정에는 꾸욱 찍힌 지문 자국이 생채기처럼 남았다.
[응. 안 봐.]
휴대폰을 주머니에 욱여넣고는 가방을 고쳐 멨다.
그러곤 등산가에게 주어진 하나의 시련처럼 뻗어 있는 오르막길을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작은 주택이 옹기종기 모인 좁은 골목길이었다. 차가 다닐 수 없는데 하물며 저 위에 버스정류장이 있을 리 없었다. 즉, 보기만 해도 답답한 이 길을 제 발로 올라가야 한단 소리였다.
이제는 적응할 때도 되었건만 날씨가 날씨인지라 한숨 먼저 나왔다. 가방이 등과 어깨를 짓눌렀다.
그는 또 한 번 코를 매만졌다. 그러고는 이내 골목 등산을 위해 걸음을 옮겼다. 오르고 또 올랐다. 가방이 무겁고 경사가 높아 자칫하면 뒤로 자빠질 것 같았지만 오르는 수밖에 없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눈앞에서 아지랑이가 흰 치마를 뒤집어쓴 여인처럼 춤을 춰 댔다.
땀은 비라도 맞은 듯 줄줄 흘러내렸다. 눈앞이 따가워서 닦아 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가쁜 숨을 뱉어 내다 저절로 비명이 터졌다.
“으아아, 젠장. 역시 방 다른 데로 잡는 거였는데!”
아니면 차라리 기숙사를 들어갈걸 그랬나. 아니, 아니다. 세형은 고개를 내저었다. 기숙사에서는 맘 편히 제 할 일을 할 수 없다. 특히 저처럼 비밀이 많은 인간은 그런 곳에 신세 지는 게 아니다. 암, 그렇고말고.
낑낑거리며 올라오자 드디어 목적지가 보였다. 하얀 페인트가 흘러내리고 칠이 벗겨진 흔적이 남은 건물이었다. 4층까지 뻗어 있는 자취방은 꼭 감옥 같았다. 특히 녹슨 난간을 볼 때면 더 그랬다.
그는 계단을 올라가 303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하. 내가 내년에 계약 연장하면 인간이 아니다.”
주머니를 뒤적여 열쇠를 꺼내 들었다. 손이 기분 나쁠 정도로 미끈거렸다. 물이라도 흠뻑 끼얹은 것처럼 땀이 줄줄 흘렀다. 팔꿈치로 턱을 훔쳐 내다 말고 세형은 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새하얀 종이가 떨어진 탓이었다. 그제야 제 옆에 사람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자연스레 종이를 주워 들었지만 땀 때문에 잉크가 번져 버렸다. 아차, 하는 신음이 목 안을 맴돌았다.
“그, 죄송합니다. 주워 드리려고 한 건데.”
“개안습니다. 그 어차피 망한 거라.”
억양은 부산억양이었지만 말투는 느릿느릿하고 묵직했다. 목에서 긁어내는 것처럼 거칠거칠한 음성이었다. 목이 조금 쉰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세형은 이런 말투를, 목소리를 가진 사람을 한 명 더 알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닳아 버린 신코가 보였다. 엉성하게 묶인 신발 끈을 따라 조금씩, 조금씩 시선을 옮겼다. 통이 넓은 반바지 아래로 새카만 다리털이 보였다. 높았다. 아니, 컸다. 고개를 아무리 들어 올려도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이윽고 무늬 하나 없는 새하얀 반소매티셔츠를 넘어 그 얼굴을 보았을 때 세형은 그만 종이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등을 보이던 종이가 팔랑거리며 뒤집혀 땅 위에 앉았다. 종이를 빼곡히 메운 것은 그림이었다. 색감이 따뜻한 수채화도, 정교한 표현을 자랑하는 스케치도 아니었다. 그림에 칠해진 건 까만 먹뿐.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여성의 등 뒤에는 날개가 있었고 눈동자도 몸매도 실제와는 달랐다. 만화였다.
세형은 눈을 크게 깜빡였다. 그를 따라 상대방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을 덮을 정도로 지저분하게 기른 앞머리와 엉망으로 헝클어진 더벅머리. 근육이라곤 거의 없어서 수수깡처럼 길쭉하게 서 있는 그 모양새를 보고 세형은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어?”
세형이 낸 소리가 아니었다.
“니 김세형 아이가?”
“…….”
“니도 여게 사나.”
볕이 복도를 쨍하게 비추었다. 그 속에서 그는, 녀석은, 박성태는 아니, 우리 학교 아웃사이더인 이놈은 희멀거니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세형은 질린 얼굴로 몸을 슬쩍 물려 버렸다.
“와. 우연이네. 내는 우리 학과 중에 내만 여게 있는 줄 알았다.”
세형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아니, 그래서 일부러 이곳을 택한 거였다. 과 톡방에서 자취할 만한 놈들에게 며칠간 수소문을 한 결과 다들 이곳만은 꺼린다는 걸 알아차렸다. 좋은 방 계약에 실패한 놈들이나 가는 곳이라나, 뭐라나.
세형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여기밖에 없노라고. 제 몸 하나 의탁하고 은신할 곳은 오직 이곳뿐이라고. 산속에서 산삼을 찾아도 이것보단 기쁘지 않으리라.
그랬는데.
그가 세형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세형은 마치 땅에 발이 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그를 지칭하는 단어들만이 떠올랐다. 칙칙한 놈, 재수 없는 놈, 오타쿠, 찌질한 새끼……. 공동체 속에서 보기 좋게 먹잇감이 된 그를 무리에 끼워 주는 이들은 없었다. 혹여나 함께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가까이 가려는 사람조차 없다.
절대 엮여선 안 되는 종류다. 엮이긴커녕 피해 다녀도 모자랄 판에 하필이면.
공기에선 자꾸만 퍽퍽한 모래 맛이 났다. 모래 알갱이가 혀끝에서 씹히는 것 같았다.
“잘 지내보자. 모르는 거 있음 서로 물어도 보고.”
미쳤어? 세형은 속으로 반문했다. 오타쿠에 심지어 아웃사이더인 놈과 친하게 지냈다간 내 학교생활은……! 무엇 때문에 이 먼 곳까지 왔던가. 서울권 대학원서도 쓰자는 선생님의 아쉬운 눈길까지 뿌리쳐 가면서 왜 여기까지 왔는데.
하지만 마음만큼 입은 움직여 주지 않았다.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어, 어, 그래.”
눈앞에 뻗어 온 손을 억지로 부여잡았다. 맞잡은 손에서는 땀이 났다. 이상할 정도로 손이 미끈거렸다. 어서 빨리 이 손을 뿌리치고 달아나고 싶었다. 현기증이 일었다.
“그럼 있다 아이가…….”
“미안!”
“?”
“미안한데, 바빠서 먼저 들어갈게.”
“…….”
그는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세형도 그의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다. 입 안에서 까끌까끌하게 씹히는 모래가 기분 나빴다. 목 안을 꺽꺽 내리누르는 것처럼 여름 볕이 답답했다. 더웠다. 찝찝했다. 군복은 이제 들러붙는다기보다도 엉겨 붙는 것에 가까웠다.
세형은 텁텁한 입을 억지로 열었다. 차마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 시선을 딴 데 두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바쁠 것 같아.”
그런데도 그는 화를 내긴커녕 움찔거리지도 않았고, 하다못해 충격 받은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제 말의 의미를 모르진 않을 텐데도. 그저 허리를 숙여 떨어진 종이를 주워 들 뿐이었다. 그 순간 가려져 있던 놈의 눈이 드러날 뻔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놈은 교묘하게 고개를 돌려 제 얼굴을 감춰 버렸다. 세형이 본 것이라곤 머리카락처럼 새카만 눈동자뿐이었다.
뭐야. 평범하잖아. 세형은 생각했다. 흉악한 상처도 흉물스런 화상 자국도 없잖아. 소문으로 들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그것이 놈과 처음 대화한 날의 첫 감상이었다.
세형은 가방끈을 꼭 붙잡으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거칠게 닫힌 문에선 여름 냄새가 났다. 떨어진 그림을 주우려 놈이 허리를 구부리던 게 눈에 아른거렸다. 아무 말 없던 모습이 신경 쓰였다. 죄책감이 가슴 한편을 콕콕 찔러 왔다.
무심코 손을 내려다보자 검지가 새카매져 있었다. 손톱까지 잉크가 껴서 엉망이었다. 세형은 제 땀에 번졌던 그림 속의 날개를 떠올렸다. 끈적한 여름 볕이 손톱에까지 묻은 것처럼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건 제 방에 걸린 그림들을 둘러봐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기분이 가라앉았다. 제 방 벽에 걸려 있는 그림 또한 만화이기 때문이었다.
“아. 미친 나 이제 어떡해.”
세형은 문 앞에 주저앉아 양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침착하자. 그렇게 자신을 다독여 보아도 심장은 여전히 소란스럽기만 했다. 순정만화에서는 이런 식으로 뛰는 가슴을 사랑이라고 하던가. 하지만 세형은 아니었다.
겁이 났다. 같은 곳에서 지내는 정도로 이상한 소문이 나진 않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만에 하나. 저 녀석이 친한 척이라도 하면 어떡하나 싶은 것이다.
이런 생각이 바르지 않다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타인을 무작정 배척하는 게 나쁘다는 것쯤은 초등학교 도덕책에서 배울 만큼 배웠다. 그래도 어떡하라고! 세형은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난 아직 살고 싶어. 살고 싶단 말이야.
제 주위에 타인이 몰려든다는 게 어떤 것인지. 저를 무리에 끼워 넣어 준다는 게 어떤 것인지. 누군가가 저를 원해 준다는 게 어떤 것인지.
비웃음당하지 않는 삶이란 게 어떤 것인지.
세형은 그걸 알아 버렸다. 이걸 쉽게 내던질 수 있을 정도로 저는 강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저 한 몸 희생할 정도로 착한 놈도 아니다.
“내일…….”
그는 비척거리며 일어나 탁상 위에 둔 시간표를 집어 들었다.
내일은 공강이다. 그럼 내일 온종일 방 안에만 처박혀 있는 것도 좋은 방법일지 모른다. 같은 곳에 살아도 얼굴 한번 마주치지 않으면 되는 일 아닌가. 세형은 입술을 짓이기듯 깨물었다. 잘근잘근 씹힌 입술에서는 쓴 피 맛이 났다.
답답해서 먼저 옷을 벗어 던지고 욕실에 들어갔다. 끈적한 땀이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차라리 독한 말이라도 퍼붓고 끊어 낼 걸 그랬나.
실은 그러고 싶었다.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세형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역겨웠다.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목 안에 박힌 가시를 삼키고 또 삼키는 것처럼. 말하자면 동족 혐오였다.
한숨을 묻어 버리듯 찬 물줄기에 제 몸을 밀어 넣었다. 거센 물줄기가 온몸을 때리고 떨어졌다. 눈가에선 자꾸만 녀석이 내밀었던 손이 떠올랐다.
세형은 거울을 빤히 쳐다보았다. 연한 갈색으로 물들인 머리카락과 귀에 남은 피어스 자국에선 옛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간혹 이 모습에서 검은 머리카락에 굵은 뿔테안경을 쓴 남자애가 보일 때가 있었다. 속이 안 좋아져 눈을 돌려 버렸다.
박성태는 과거의 자신을 닮았다.
그래서 싫다.
‘난 너랑 죽어도 친하게 지내기 싫어.’
재차 다짐하듯 주먹을 세게 그러쥐었다.
땀을 한 차례 씻어 내고 나니 그제야 머릿속이 냉정해졌다. 정신만 똑바로 차린다면 제게 불리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아웃사이더인 그가 저에 대해 나불거리고 다닐 순 없으며, 말할 상대도 없다. 아는 척을 해 오면 시치미를 떼면 그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가 웃는 모습을 처음으로 본 게 오늘이라는 거였다. 무엇이 그리도 기뻤던 걸까, 그 녀석은.
“……재수 없게.”
세형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매트리스 위에 털썩 앉았다. 마음속에 드는 죄악감도 그를 향한 연민도, 제게 싹트는 흔들림도 전부 이기적인 마음 뒤로 감춰 버렸다. 현실도피를 하듯 휴대폰을 주워 들었다. 샤워하는 사이 메신저가 많이 쌓여 있었다.
제일 먼저 트위터를 확인했다. 손끝으로 리스트를 훑고, 제게 온 멘션들을 확인했다. 세형은 하루 중 이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똑같은 것을 좋아하고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들과의 대화. 그들과 나누는 정보, 감정. 그 모든 걸 주고받는 순간이 제일 행복했다. 쌓였던 스트레스가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 같았다.
“오. 이번 행사에 이분 책 내시는구나.”
떳떳하게 무엇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제가 무엇을 좋아하든 경멸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편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까똑!
……그리고 세형은 현실이 밀려오는 순간을 가장 싫어했다. 아니, 싫어한다기보다도 불편해했다.
[단톡 확인했냐?]
[ㄴㄴ아직]
[낼 점심?]
내일 밥 먹자고?
탁상에 놓인 달력에 시선을 두었다. 월요일에는 새빨간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어찌나 중요한 일인지 별표까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뚫어지게 쳐다봐도 저 날이 어떤 날인지는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리다가 뒤늦게 무릎을 탁 쳤다.
아. 큰일 날 뻔 했다!
[미안. 내일 친척 집에 가 봐야 됨.]
답장은 단 두 글자로 날아왔다. [ㅇㅇ]이라고. 그 짧은 글자를 보았을 때에야 세형의 입에선 한숨이 터져 나왔다. 만약 물고 늘어졌더라면 이 포악한 뱀 같은 놈을 따돌리느라 진땀깨나 뺐을 것이다.
이놈이 날름거리는 세 치 혀는 뱀의 혀보다 지독했다. 그걸 알기 때문에 내심 긴장했다. 이놈을 친구랍시고 옆에 둔 건 행운이기도 하고, 불행이기도 했다. 학교 내의 소문을 가장 빨리 물고 오며 그만큼 타인의 이야기를 잘 떠벌리는 놈이기 때문이다. 가끔씩 그가 불편하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일 거다.
세형은 휴대폰을 옆에 던져두곤 매트리스 위로 상체를 떨어트렸다.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자니 불현듯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 맞아. 내일 그 날이었지 참. 그 날이었어. 하마터면 가장 중요한 날을 지나칠 뻔했다.
때마침 휴대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일전에 세형이 설정해 둔 알람이었다. 휴대폰에는 붉은 글자로 ‘잊지 마! 팬북’이라고 써 있었다. 역시 저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건 자기 자신이다. 그는 다시 한번 히죽히죽 웃었다. 불안했던 기분이 다시 팔랑팔랑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직으로 상승했던 기분이 내리막길을 타는 데까지는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다.


2.
자취방에서 지하철을 타고 삼십 분. 그리고 걸어서 또 삼십 분. 세형은 아침부터 사서 고생길에 올랐다. 등을 타고 땀이 주르륵 흘렀다. 오늘은 한 달 중 낮 최고 기온을 찍는다더니 정말인 것 같았다.
길은 음료수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로 넘쳤다. 다들 더위를 견디질 못하고 가까운 가게로 빠지고는 했다.
그는 길가에서 나누어 준 부채를 팔락거리며 숨을 내뱉었다. 저만치에서 낯익은 간판이 보였다. 이제 곧 목적지였다. 여기까지 오면서 아는 사람과는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는 게 다행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도 못 만났다. 방을 나서며 옆을 힐끔거렸지만 문 너머는 조용했다. 학교에 간 건지, 아니면 자는 건지. 그의 시간표를 모르니 짐작밖에 할 순 없지만 그게 너무 신경 쓰였더랬다.
딱히 설렌다거나 순정만화에서처럼 ‘그놈이 너무 신경 쓰여’ 따위의 감정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꼭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보고 싶진 않지만, 눈에 안 보이면 불안했다. 물론 세형은 자신의 이런 상태가 달갑지 않았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에 신경을 써야 하니 오죽할까.
그는 눈앞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뻥 걷어찼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내가 왜 저놈 때문에.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머릿속이 싫어하는 인간의 얼굴로 가득 차니 기분이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세형은 거칠게 유리문을 열어젖히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은종이 맑은 소리를 내며 울렸다.
“어서 오세…… 형!”
“오냐.”
카운터를 보고 있던 소년이 활짝 웃었다. 그에 세형도 반색했다.
동네 구석에 있는 서점은 매우 낡았다. ‘우리서점’이라는 간판이 ‘으리서적’으로 보일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간판 불도 나갔는지 어두워지면 그마저도 안 보이곤 했다. 게다가 책 종류가 그리 많지 않아 손님도 별로 없었다. 서서 책을 보고 있는 손님들을 슥 훑어본 세형은 카운터로 다가갔다.
“와아, 먼가 억수로 오랜만이네.”
“그러냐? 잘 지냈어? 할아버지는?”
“할배 허리 아프다고 쫌 전에 들어갔는데. 와?”
“아냐. 그보다 그 책 들어왔어?”
자주 좀 오라며 어리광인 그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듯 쓰다듬었다. 이제 막 고등학교에 올라간 소년은 세형보다 한 뼘 정도 작았다. 아마 대학생이 되면 세형의 키를 훌쩍 뛰어넘고도 남을 것이다. 그를 볼 때면 이런 동생이 하나쯤은 있어도 참 좋을 것 같단 생각을 하곤 한다.
소년은 허리를 한껏 구부리고 카운터 밑을 뒤적였다.
“어데 있더라. 내 분명히 여따 뒀는데.”
“천천히 찾아.”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 건이가 상체를 번쩍 세우더니 카운터 위에 책 한 권과 돌돌 말린 브로마이드를 내려놓았다.
“이거 맞제? 형이 부탁했던 거.”
“오오! 맞아, 맞아. 와, 역시 진짜 너밖에 없다, 야!”
세형은 기다렸다는 듯 책을 집어 들었다. 얼마나 기다렸던가. 출판사 SNS에서 소식을 접했을 때부터 발매일까지 넉 달을 기다렸고, 국내 정식 발매가 될 때까지 거의 1년가량을 기다렸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목이 빠지라 기다린 이 책! 아슬아슬하게 예약을 놓쳤던 순간 얼마나 좌절했던가! 그리고 이걸 손에 넣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던가.
“대애박! 겁나 쩔어! 보이냐? 여기, 여기 이 부분에 작가님 사인 들어간 거!”
“그렇게 좋나?”
세형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당연하지!”
드디어 손에 넣었다!
‘매지컬☆미라클’ 팬북과 한정판 브로마이드!
세형은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열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도록 책을 넣어 갈 생각이었다. 제가 만화를 좋아한다는 건, 오타쿠라는 건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다. 그 사실을 알렸을 때 저를 덮쳐 오는 게 어떤 것들인지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진저리가 날 정도로 말이다.
이런 걸 좋아한다고 떳떳하게 말하는 건 미친 짓이야.
세형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날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이명처럼 귓가에 남아 있었다. 깔깔 울려 대는 목소리가 소름 끼쳤다. 아니라잖아. 난 오타쿠가 아니라잖아. 그만 웃어. 책을 집어 드는 손이 조금 떨렸다.
“요새도 일코(일반인 코스프레 : 덕후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일반인인 척하는 행동)하나.”
건이의 물음에 세형은 씁쓸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일코에 요즘이고 뭐고가 어딨냐.”
숨겨야 하는 건 평생 숨기는 거지. 뒷말을 삼켰지만 건이는 쉽게 알아들었다. 그는 말없이 세형이 짐을 챙기는 것을 도왔다.
세형이 일부러 한 시간이나 걸려 이 서점까지 온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학교 앞이나 번화가의 커다란 서점에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런 곳에선 누구와 마주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이곳이 유일했다. 세형이 떳떳하게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다음에 밥 한 끼 같이 먹자. 내가 쏠게.”
“오. 그럼 내 비싼 거 먹어도 되나?”
“대학생 등골 빨아먹게?”
“농담이다. 농담. 그냥 냉면 한 그릇이나 사도.”
지퍼를 잠그자 가방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전공서적도 함께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