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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쿠인게 뭐가 나빠 3화
Ⅰ. 누구나 비밀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3)


바람이 살랑거리며 그의 까만 머리카락을 들었다가 놓았다. 또 한번 그의 눈이 언뜻 보였다.
“좀 있다 말해도 되나.”
“왜 굳이 그래야 하는데? 지금 말하면 안 돼?”
하나를 더 알게 됐다.
그의 눈에는 옅은 속쌍커풀이 있었고 눈동자는 빨려 들어갈 것처럼 까맸다. 감질날 정도로 아쉬운 시간이었다. 바람이 더 세게 불었다면 그의 얼굴 전체를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아주 잠깐 일어난 바람의 장난질은 세형의 마음에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흉악한 외모도, 눈 뜨고 못 봐 줄 정도도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왜 얼굴을 가리고 다닐까. 저 앞머리를 까면 대체 어떤 얼굴이 자리해 있는 걸까. 무심코 그의 앞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닿기도 전에 손목은 붙잡히고 말았다.
마른 몸에 비해 단단한 악력이었다. 그의 손은 제법 컸다. 세형의 손목을 모두 감싸고도 남을 정도였다. 참을 새도 없이 소리를 내질러 버렸다.
“윽. 야, 미친! 손 놔!”
“나중에 내 방으로 온나.”
“알았어, 알았다고!”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평소와 같은 억양이었다. 그는 세형의 손을 제게서 떨어트려 놓더니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돈하듯 매만졌다. 세형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불만스레 내뱉었다.
“부탁 들어주면, 이제 아는 척하지 마.”
“…….”
“그 말 하려고 부른 거야. 난 너랑 달리 일코 중이야. 무슨 뜻인지 알지?”
오타쿠가 모를 리가 없다. 일코 중인 사람이 타인에게 얼마나 필사적으로 제 취미를 숨기려 하고 들키기 싫어하는지. 왜 그래야 하는지, 왜 숨기는지 같은 오타쿠라면 알 것이다.
성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막혀 있던 숨이 터져 나왔다.
“머리 마음대로 만지려고 한 건 미안하게 됐다.”
그리고 가방 던진 것도 미안하고.
가방 안을 뒤적여 밴드 하나를 꺼냈다. 성태는 세형이 건네는 것을 순순히 받아 들었다.
이제는 이렇게 대화 나눌 일도 없을 거고, 네 몸에 손댈 일은 더더욱 없을 테니까. 그렇게 칠색 팔색 안 해도 된다고. 세형은 내려놓았던 가방을 다시 어깨에 멨다.
“할 말 다 끝났으니까 갈게.”
이번 일만 다 매듭지으면 다시 본래의 생활로 원상복귀 하는 거다. 필사적으로 숨기고 또 숨기는 그 생활로 돌아가는 거다. 뻐근한 가슴을 게워 내듯 숨을 또 한번 토해 냈다. 건물 뒤에서 빠져나오자 쟁쟁한 햇볕이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손목에 남은 붉은 손자국을 무심코 매만졌다.
숨이 막힐 정도로 더운 7월 끝자락이었다.

이후 오후 강의에서 성태와 세형의 눈이 마주칠 일은 없었다. 서로를 쳐다보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바빴기 때문이다. 우연히 교양과목까지 겹쳤지만, 조별과제가 유독 많은 수업이어서 조별로 돌아가며 발표하고 교수님의 평가를 듣느라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계절 수업이라고 과제가 적은 건 아니었다. 교수님들의 강의 속도를 따라가다 보면 서로를 신경 쓸 틈조차 없었다. 좋은 일이라면 좋은 일이었다. 세형은 더는 그에게 신경을 쏟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이고 삭신이야. 김 교수님 진짜 말 빠른 거 하난 알아줘야 한다. 칠판 쳐다보느라 목 아파 뒈지는 줄 알았네.”
“그나마 불경 외는 목소리 아니어서 다행.”
“맞아 맞아.”
민정의 말에 정규는 맞장구를 쳤다.
오늘은 뭐 먹으러 가자며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그 속에서 세형은 남몰래 주위를 살폈다. 성태는 먼저 가 버린 건지 자리에 없었다.
아까 있었던 일이 떠올라 눈꺼풀이 묵직해졌다. 그 느낌을 없애려고 세형은 눈을 한차례 깜빡였다.
조별 과제에서 박성태의 이름이 빠졌다. 세형의 조는 아니었다. 성태의 조원들은 자료를 넘기지 않은 그의 탓이라고 언성을 높였지만 박성태는 반박조차 하지 않았다. 세형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왜 말 안 해, 멍청아. 과제 말씀해 주시던 날에 학교에 없었다고, 아무도 과제에 대해서 말 안 해 줬다고, 왜 반박 안 해.
입에 풀칠이라도 한 듯 일자로 꾹 다물고 있던 입술에 분통이 터진 건 세형이었다. 답답했다.
아웃사이더라는 게 그렇다. 악질적인 괴롭힘은 없지만 외톨이가 된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다. 과제가 있어도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제 주위에 친구를 만들지 않은 건 박성태 본인이지만, 그래도 세형은 속이 터졌다.
“뭐 먹을…… 야, 야. 김세형 뭐 먹을 거냐니까.”
“나 안 먹어.”
“와?”
물론 답답하다고 해도 거기서 나서 줄 정도로 세형도 대인배는 아니었다. 제게 화살이 돌아오는 것도 싫고 기껏 쌓아 올린 이미지가 무너지는 것도 싫다. 거기서 가만히 있었던 건 잘한 행동이었다. 그와는 친한 사이도 아닌걸. 다들 아무 말 안 했잖아. 나만 가만히 있었던 거 아니야.
하지만, 그래도 복장이 터지는 건 왜일까. 뭐가 그렇게 분해서 가슴이 이토록 답답한 걸까. 체하기라도 한 것처럼 명치가 묵직했다.
세형은 가방을 챙겨 벌떡 일어섰다.
“오늘 약속 있어.”
과방 문을 열고 나왔다.
문소리가 제법 거칠게 들렸다. 신경질적으로 걸었다. 경영관을 빠져나올 때까지도 걸을 때마다 쿵쾅쿵쾅 소리가 났다. 그러다 세형은 문득 깨달았다. 왜 이렇게 그를 신경 쓰고 있는 걸까. 그놈이 대체 뭐라고.
이런 일로 화를 내는 건 우스운 행동이었다. 박성태와 자신은 아무 사이가 아니다. 그가 어떻게 되든, 무슨 일을 겪든 제가 화를 낼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걸음걸이가 다시 느려졌다. 터덜터덜 길을 걸었다. 맞아. 오히려 오늘 온종일을 박성태가 아는 척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그 순간에도 놈은 저를 돌아보지 않았는걸. 세형은 무심코 걸음을 멈추었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다. 화를 낼 만한 이유는 하나도 없다.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렸다. 돌아본 건물 유리창에 세형의 얼굴이 비쳤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복잡한 표정이었다. 동시에 그 위로 까만 뿔테안경을 쓴 소년이 보였다.
아, 그렇구나.
세형은 이해했다.
난 또 그놈에게서 날 본 거구나. 그래서 이렇게 화가 나는 거다.
집 앞에 도착해서 카톡을 보냈다. 정규와 민정에게 이유 없이 화를 내며 나온 게 마음에 걸렸다.
[미안]
[다음에 같이 밥 먹자]
답장은 문을 열자마자 왔다.
[ㅇㅇ]
[괜찮나]
괜찮냐고 물은 건 민정이었다. 세형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피식 웃었다. 제 취미만 이해해 준다면 더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민정과의 사이에는 언제나 그 선만이 짧고 진하게 그어져 있었다. 민정은 정규와는 다르게 신중하고 타인을 배려할 줄 알았다. 문제는 누구보다도 오타쿠를 싫어한다는 데에 있었다.
[ㅇㅇ괜찮]
[더워서 그랬나 봐]
휴대폰을 던져두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어김없이 땀에 푹 절어 버린 몸을 씻고 가벼운 차림으로 갈아입었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방을 나섰다. 목적지는 바로 옆방이었다. 그때 계단을 올라오시던 주인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303호 학생이제. 택배 왔드라, 집에서.”
“아아. 네, 감사합니다.”
전에 보낸다던 김치와 밑반찬이었다. 묵직한 상자를 받아 들고 있으니 돌연 304호 문이 열렸다. 커다랗고 길쭉한 수수깡이 세형을 내려다보았다. 성태는 말이 없었다. 그저 세형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더듬더듬 입이 열렸다.
“이것만 들여다 놓고 갈게.”
“도와줄까.”
됐거든. 세형은 고개를 내저었다. 현관문을 잽싸게 닫고 들어왔다. 밑반찬 통을 냉장고 안에 차곡차곡 집어넣고, 함께 온 냉동식품도 냉동실에 넣었다. 텅텅 비어 있던 냉장고가 순식간에 꽉 찼다. 많이 보낼 필요 없다고 말했는데도 또 한가득이였다. 세형은 어깨를 으쓱이곤 냉장고 문을 닫았다.
그렇게 다시 집을 나오는 사이에도 성태는 복도에 그대로 서 있었다. 뭐 하고 있냐고 물었더니 기다리고 있었단다. 세형은 질린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어차피 옆방이면서 뭐 하러 이런 수고를 하나 싶었다.
심성이 착한 것인지, 아니면 다시 문 열어 주기 귀찮은 것인지, 그도 아니면 둔한 것인지. 다행인 게 있다면 조별 과제 일을 신경 쓰는 것 같진 않았다. 벌써 다 털어 버렸는지 그는 아무렇지 않게 집에 들어갔다.
“뭐 마실래?”
“됐어. 금방 갈 거니까.”
그의 방 안은 세형의 방과 비슷했다. 아니, 더 심했다. 문이며 벽에 만화 포스터가 붙은 건 애교였고, 피규어와 만화책들이 책장을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심지어 원서도 있었다.
세형은 입을 떡하니 벌렸다. 책장에는 세형이 알고 있는 만화가 꽤 있었는데, 그 덕분에 이 피규어들이 얼마나 하는지 익히 알고 있었다. 피규어 한 개당 적어도 15만 원 이상은 될 것이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은 돈이 없어서 못 사는 걸.
“헉, 이거 초회 한정판.”
무심코 목소리가 새어 나갔다. 다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성태의 귀에 들어간 후였다. 부끄러움에 귀까지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 알고 있네.”
DVD는 물론이며 원화집, 팬북까지 없는 게 없었다. 세형은 방 안을 둘러보기 바빴다. 제가 갖고 싶었던 것들이 이 방 안에 다 있었다. 풍경에 눈이 사로잡혀 민망함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심장이 뜀박질했다. 입꼬리가 자꾸만 제멋대로 올라가려 했다. 이것도, 그리고 저것도 전부 인터넷에서 봤던 거다. 보면서 침만 흘렸던 것들이었다. 세상에, 없는 게 없네. 세형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어느새 제가 들뜬 얼굴로 방안을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그러다 세형의 눈에 보인 게 하나 있었다. 책장 맨 밑에서 조심스레 책을 빼 들었다.
“이거 꽤 마이너한 건데. 너 이런 것도 보냐?”
제 주위에는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완결이 난 게 고작 일주일 전이었다. 뒷얘기를 조금만 더 그려 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더랬다. 제법 인상 깊게 읽었던 책이라 세형의 기억에도 남아 있었다.
《회색 하늘에서 우는 용 / 글, 그림 료훤》
작가의 감성적이고 섬세한 표현이 특히나 마음에 들었던 건데. 세형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어째서인지 성태의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그가 말이 없어 세형도 책을 다시 돌려놓았다. 들떴던 게 부끄러워져 뺨을 긁적였다.
세형은 아무 데나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냥 빨리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부탁할 게 뭔데?”
친구가 되어 달라거나, 학교에서 밥 같이 먹자거나 그런 부탁이려나. 아니면 난감할 정도로 어려운 부탁일까. 세형은 눈을 깜빡이며 그를 쳐다봤다.
성태는 서랍을 뒤적이더니 서류철 하나를 꺼내 왔다. 꽤 두꺼웠다. 수많은 종이가 끼워져 있었는데 그 중 몇 장을 꺼내 세형에게 건넸다.
당연하지만 만화 그림이었다.
“이게 뭐.”
어쩌라고.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대사는 연필로 대충 적혀 있었다. 지우개질도 아직 하지 않았고 톤도 붙어 있지 않았다. 스케치 위에 선만 따져 있는 미완성 만화였다. 종이는 흔한 A4가 아닌 만화 원고였다.
신기할 정도로 그림체가 눈에 익었는데, 그게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꽤, 아니 상당히 잘 그린 그림이었다. 어디에 투고라도 하려는 건가 물어보려던 찰나에 성태가 입을 열었다.
“니, 내 어시 해 볼래?”
잘못 들었나 싶었다. 세형은 그를 멍하니 올려다봤다. 목이 부러질 것처럼 높았다. 어시라면 분명 어시스턴트를 얘기하는 것일 터. 한마디로 제 작업을 도와달라는 얘기였다. 빠르게 두 눈을 깜빡였다.
아니, 잠깐. 도와달라는 게 이거야? 어이가 없기보다도 당황스러웠다. 대체 저의 뭘 보고 도와달라는 걸까. 단언컨대 입학한 뒤로 학교에서 그림을 그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니 만화 그릴 줄 안다 아이가.”
“뭐…….”
그는 서류철을 맨 뒷장까지 넘겼다.
가장 마지막 종이는 제법 오래되었고 볼품없이 구겨진 데다가 그냥 백상지였다. 거기 그려진 그림은 얼핏 보아도 만화에 비하면 훨씬 뒤떨어지는 실력이었다.
하지만 그 종이를 넘겨받은 순간 세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종이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네, 네가 왜 이걸 갖고 있어!”
“…….”
“이게 왜.”
왜 이게 여기에.
그때 버렸는데. 분명히 버렸는데!
서툴게 그려진 그림 위에는 작게 사인이 되어 있었다. 김세형. 자신의 이름이었다. 이걸 그렸던 게 언제였더라. 적어도 한창 그림에 몰두했던 때였다. 이런 취미가 세상에 통하지 않는다는 걸 몰랐을 때였다. 숨겨야 한다는 걸 몰랐을 때였다. 주먹을 꽉 쥐자 종이가 사정없이 구겨졌다.
세형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숨이 거칠어졌다.
“왜 이게 여기 있냐고!”
성태는 말이 없었다. 그저 종이가 더 구겨지기 전에 손을 뻗을 뿐이었다. 그러나 세형은 이걸 돌려줄 마음이 없었다. 크게 한 발자국 물러서며 다그쳤다. 손이 덜덜 떨렸다.
“말해. 왜 갖고 있는지!”
이곳에 오기 전에 버렸던 그림이었다. 과거를 모두 없애 버리고 싶어서, 다시 시작하고 싶어서. 그 시절에 그렸던 그림들은 모두 버렸다.
제 손으로 가장 소중한 걸 버렸을 때의 마음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제 마음을 갈가리 찢어 버리는 것처럼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때 어떤 마음으로 이걸 버렸던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렸던 이 그림을 버릴 때, 제 심정이 어땠던가.
울지 않으려 눈에 핏발을 세웠다. 버린 후에도 쓰레기통 주위를 떠나지 못해 계속 서성였다.
그랬는데.
세형은 참지 못하고 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어느새 눈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지만, 세형은 울지 않았다.
“너 대체 뭐하는 놈이야!”
성태는 저항하지 않았다. 제 멱살을 쥔 손을 떼어 내지도 않았다.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뗄 뿐이었다.
“주워 왔다.”
“…….”
“친척이 서울에 있어서.”
세형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니 울 때, 나도 있었다.”
생각도 못 했다. 그 주위에 사람이 있었을 거라곤. 세형의 손에서 저절로 힘이 빠졌다. 시선을 떨어트리자 제 그림이 보였다. 바닥에 떨어진 그림이 세형을 바라보았다. 꼭 저를 질타하는 것만 같았다. 왜 버렸어? 그렇게 묻는 것 같아서 눈을 돌려 버렸다.
참 못난 그림이었다. 이제 보니 정말 못 그렸다. 새빨개진 코를 매만지곤 한 걸음 물러섰다. 떨어진 그림을 다시 주워 든 건 성태였다.
“먹칠 잘하길래 부탁하고 싶었다.”
“누구 마음대로 그걸 주워 와. 재수 없는 새끼.”
괜히 거칠게 내뱉었지만 성태는 화내지 않았다. 구겨졌던 종이를 다시 펴서 서류철 안에 집어넣을 뿐이었다. 아니, 저걸 왜 다시 넣어.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그것보다도 성태의 말이 한발 빨랐다.
“어시 할 거제.”
거절해야 했다. 하지만 그동안 해 왔던 행동과 말부터 그의 얼굴에 가방을 집어 던져 상처를 입힌 것까지, 거절하기엔 양심에 찔리는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물론 그럴 놈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지만 성태는 제 취미를 알고 있고 이름까지 적힌 그림도 들고 있다. 제 약점을 쥐려면 얼마든지 쥘 수 있었다. 세형은 끄응 하며 신음을 삼켰다. 거기에 대고 성태는 또 의미 모를 말을 내뱉었다.
“니 내 만화도 봤다매. 재미없드나.”
“뭔 소리야, 또. 네 만화를 내가 왜 봐?”
성태는 대답 대신 책 하나를 빼 들었다. 아까 그 책이었다.
표지는 《회색 하늘에서 우는 용》이라는 제목과 분위기에 걸맞게 수채화 풍의 색감이었다. 따뜻하면서도 어딘가 탁한 색채가 그림에서 느껴졌다. 떨떠름하게 책을 받아 든 세형은 성태의 고갯짓대로 책장을 넘겼다.
맨 마지막 장에는 작가의 사인이 있었다. 사인도 참 멋있다. 그런데 왜일까. 세형은 이 사인이 어딘가 낯익었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이걸 대체 어디서 봤더라, 싶던 그때 성태가 또 다른 그림 한 장을 내밀었다.
아, 이건 본 적이 있다. 문 앞에서 봤던 그 그림이었다. 까만 날개를 가진 여 캐릭터. 제 그림이라는 걸 주장하기라도 하듯 그림 위에는 사인이 있었다.
“어?”
어어?
만화책 한번, 그림을 한번,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뭐야. 이거 뭐야.
봐도, 몇 번을 봐도.
세형은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성태는 그의 시선을 가만히 받아 냈다.
사인이 똑같다. 아무리 쳐다봐도 꼭 빼닮은 사인이었다. 아니, 그냥 한 사람의 사인이었다. 세형의 의문을 안다는 듯 성태는 입을 열었다.
몇 번이고 들었던 그 목소리였다. 느릿하고 묵직하고 거칠거칠한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어찌나 음성이 차분한지 말의 내용을 받아들이기까지도 시간이 걸렸다.
“료훤은 밝을 료에 너그러울 훤이란 한자 쓰고.”
“…….”
“내 이름은 밝고 너그러운 사람이 되라꼬, 우리 할배가 성태라 지었다.”
밝을 성에 너그러울 태. 그게 내 한자다. 성태는 말끝을 맺었다.
세형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몇 번이고 숨을 들이켰다. 말도 안 된다. 이건 정말, 정말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머릿속이 핑글핑글 도는 와중 성태가 쐐기를 박았다.
“그거 내가 그린 거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헐.”
……제가 참 좋다고 생각했던 작가가, 료훤이라는 그 작가가, 눈앞에 있는 이 멀대처럼 키만 크고 답답하고 죽어도 친해지기 싫은, 제 속을 터트려도 백번은 터트렸을 박성태라는 뜻이었다.
더 쉽게 말하자면 모두가 멀리하는 오타쿠이자 우리 학교 아웃사이더가 만화가란 뜻이었다. 그것도 알 사람들은 꽤 안다는 네임드 만화가.
그렇다는 거다.
“미친…….”
이번에야말로 진짜 할 말이 없었다. 세형은 얼이 빠진 채 성태를, 아니 료훤을 올려다보았다. 쉽게 믿을 수 없어 속눈썹만 연신 팔랑거렸다. 거짓말하지 말라며 소리치고 싶었지만 입이 얼어붙어 그럴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증거물이 확실했다. ‘회색.용’의 유려한 그림체와 성태가 그린 원고의 그림체가 같았으며. ‘회색.용’에 있는 작가 사인과 성태의 사인이 같았다. 또 작가 이름 옆에 적힌 한자는 성태의 말대로 밝을 료(瞭)에 너그러울 훤(愃)이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세형은 믿을 수가 없어서 제 휴대폰에 노트를 켜고 내밀었다. 터치펜도 함께 건넸다.
“여기, 여기에 주인공 그려 봐!”
성태는 말없이 휴대폰과 펜을 받아 들었다. 세형은 그 모습을 옆에 바짝 붙어 서서는,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밑그림을 그리는 단계도 없이 쓱쓱 선이 그어졌다. 단번에 턱선을 잡고 눈을 그려 넣더니 머리카락을 그렸다. 팬들이 표현하기 어렵다던 우수에 젖은 눈빛 표현도 완벽했다. 그마저도 놀라운데 성태는 한술 더 떠서 채색까지 가볍게 해냈다.
이날 세형은 처음으로 알았다. 휴대폰으로 수채화 같은 색감을 표현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휴대폰으로도 이런 그림을 그려 낼 수 있다는 것을.
성태가 그려 낸 건 완벽한 ‘회색.용’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세형을 멀거니 쳐다보더니, 이제 됐냐고 물어보기라도 하듯 휴대폰을 다시 건넸다. 세형은 저도 모르게 그를 불러 보았다.
“료, 료훤 작가님…….”
돌아온 건 1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
“응.”
믿을 수 없어 또 한 번 불러 봤다.
“박, 성태?”
“응.”
진짜로? 정말로?
세형은 시야 가득 그의 그림을 담아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태는 검지를 제 입가에 가져다 댔다. 살짝 기울인 고개는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았다. 흩어진 앞머리 사이로 그의 한쪽 눈이 살며시 드러났다.
그 순간 세형은 한 번 더 놀랐다. 상상했던 눈매와 달랐기 때문이다. 동글동글한 눈매를 가지고 있을 거란 예상과는 달리 그의 눈은 제법 날카로웠다. 시원스럽게 트인 눈꼬리와 옅은 속쌍꺼풀은 세형의 눈보다도 남자답고 멋스러우며, 눈망울은 흑진주처럼 맑고 예뻤다.
순수할 거라 생각했던 그의 눈은 뜻밖에 도시적이었다.
낮은 음성이 세형의 뒤통수를 또 한 번 내려쳤다.
“비밀이데이.”
세상에. 이건 거짓말이야.
세형의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작가와 팬의 기념할 만한 첫 만남이었지만, 세형의 등을 타고 흐르는 건 식은땀뿐이었다.



Ⅱ. 첫 작업은 언제나 설렘과 불안의 연속 (1)


1.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멍하니 탁상시계를 한번, 천장을 한번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손을 들어 눈앞에 들이밀었다. 지워지지 않은 먹이 손끝에 묻어 있었다. 까맣게 변한 손톱 안의 여린 살에 시선을 주었다. 킁킁 냄새를 맡아 보니 화구 냄새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어제는 처음으로, 아니 오랜만에 작업을 했다.
몇 년 만에 다시 잡은 펜은 단단했고 나무 냄새가 났다. 잉크에서 나는 그 싸하고 강렬한 냄새를 맡은 것도 오랜만이었다. 세형은 방 중앙에 있는 테이블에서, 성태는 책상에서 작업했다. 사각사각 펜 소리가 끊임없이 났다.
“여기. 엑스 표시해 둔 곳 칠하면 된다.”
작가마다 어시스턴트에게 지시를 내리는 방법이 다른데, 가장 대표적으로 쓰이는 방법은 표시다. 그림의 한 부분에 사인해 두거나 엑스 표시를 그리거나 자신만의 특이한 마크를 그려 두기도 한다. 그 부분을 어시스턴트가 모두 먹칠을 하는 거다.
먹칠이라고 전부 새카맣게 칠하는 것이 아니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이라면 빛의 방향을 생각하며 칠해야 한다.
세형은 새하얀 원고 위에 붓을 놀렸다. 펜이나 샤프 외의 다른 걸 쥐어 보는 게 얼마만이더라. 까마득할 정도로 아주 오래전이었다. 옛사랑을 만난 듯 가슴이 술렁였다.
“요즘엔 디지털 원고 하던데. 넌 왜 안 해?”
작업 속도도 더 빨라질 거고 더 편해질 것이다. 성태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책상을 향해 돌아앉았다.
“프로그램으론 표현할 수 있는 게 한계가 있으니까. 진짜 펜이랑은 다르다 아이가.”
반박할 수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역시 프로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세형은 눈앞에서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괜히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가방도 돌려받았고, 원고 하면서 매지컬 미라클에 대해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리고 회색용에 대해 궁금했던 부분들도 마음껏 물어볼 수 있었다. 덕후로서 생각해 보자면 최고로 기쁜 순간을 보냈다고 장담해도 좋았다.
세상에. 좋아하던 작가가 바로 옆에 있었다니. 지금도 어제 일을 떠올리면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박성태라는 인간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거추장스러운 앞머리도 개 껌처럼 마른 몸도 패션감각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언제나 비슷한 흰 티셔츠에 데님바지라는 점도 변한 게 없는데. 그가 박성태라는 건 마찬가지인데.
왜 이렇게 다르게 보일까.
세형은 옆에 두었던 공책을 가져왔다. 맨 뒷장에는 그의 사인이 있었다.
“대박. 나 진짜로 작가님 사인 받은 거야?”
어젯밤 일은 꿈이 아니다. 뺨을 꼬집어 봐도 마찬가지였다. 세형은 들뜬 얼굴을 주체하지 못한 채 히죽히죽 웃었다. 일생일대의 최고의 순간일지도 몰랐다.
그 탓이었을까. 그는 가장 큰 사실을 하나 간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