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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毒)과 악(惡) (2)



R그룹의 현기출 회장.
업계 23위의 대기업.
업계에서는 현기출 회장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모르는 이가 없었다. 사람을 드럼통에 넣어 바다에 던지는 것은 애교에 불과했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일가족의 호적을 통째로 없애 버리기도 한다.
본래 부동산업의 관계자들이 잔인하고 무섭다.
하지만 현기출 회장은 그런 사람들의 상식을 훨씬 넘어선 자였다. 그렇기에 그런 거대한 기업의 수장이 될 수 있는 것일 테지만.
그런 그가 수족처럼 움직이는 조직이 있다. 일명 추살조. 그들의 정체는 현기출과 극소수의 인원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른다.
현기출 회장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역할을 하는 들개들이었다. 인원수는 적지만 R그룹을 유지시켜 주는 폭력의 핵심 부서.
간부로 진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엘리트 코스 정도라 여기면 된다. 들개에서 사냥개로 변하는 과정이기도 하고.
그런 추살조 인원이 아홉 명이나 이곳에 동원됐다. 자신들의 위치를 생각하면 꺼려질 일이지만, 부른 이는 다름 아닌 그룹의 황태자인 현상태가 아니던가.
제아무리 살인을 밥 먹듯이 하는 추살조라고 하더라도 로열패밀리 앞에서는 바짝 엎드려야 했다.
그들이 던져 주는 고기를 먹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말을 듣지 않는 사냥개는 어찌 될까?
끓는 물에 던져 버리면 끝이었다. 주인들은 결코 슬퍼하지 않는다. ‘다음 사냥개는 더 좋은 놈으로 골라야지’라고 생각을 할 뿐.
사정이 그러하니 그들은 상대가 누구든 목숨 걸고 임무를 완수해야 했다. 설사 자신의 부모를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와도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죽고 말 테니까.
문제는…….
상대가 자신들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을 때였다.
“크크르르륵.”
추살조 김평식 대리가 목을 부여잡았다. 억지로 부여잡고 있지만, 서서히 팔의 힘이 빠진다. 눈알의 힘도 빠졌다. 손을 놓자 목이 반으로 갈라지며, 부러진 프라모델처럼 머리가 뒤로 휙 넘어갔다.
갈라진 목에서 엄청난 양의 피가 솟구쳤다.
잘 정돈된 잔디밭은 어느새 넘쳐 나는 피로 시뻘겋게 도배가 되어 있었다.
이제 남은 추살조는 겨우 두 명뿐이다.
일곱 명의 젊은 추살조 직원이 제대로 된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고삐리한테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들이 이토록 속수무책으로 당한 원인은 간단했다.
방심.
비록 현상태의 말을 듣기는 했지만, 너무도 쉬운 임무라고 생각했다.
뭐라고 했더라? 왕따 새끼를 잡는다고? 아주 싸가지 없고 바락바락 기어오르는 왕따. 어디선가 격투기를 배워 눈깔이 휙 돌아간 왕따라고 하였다.
신일성 과장은 눈앞에서 벌어진 참극을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피가 난무하는 싸움이라면 오히려 바라는 바다.
러시아 마피아와는 부산에서, 일본 야쿠자와는 군산에서, 중국의 삼합회의 조직원들과는 인천에서 붙은 적이 있었다. 모두 연장을 들고 싸우기 때문에 살벌하기가 이루 말을 할 수 없었다. 한 번 붙으면 사상자가 반드시 나온다.
특히 일본의 야쿠자와 중국의 삼합회는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이쪽의 조직원이 무릎을 꿇으면 야쿠자는 단숨에 목을 베어버린다.
무슨 중세 시대도 아니고…….
신일성 과장은 부하 직원의 목이 날아가는 것을 지금껏 열 번도 넘게 봐왔다.
그러나 모든 싸움은 자신들이 이겼다. 놈들의 팔목, 발목을 모두 끊어버리고 배를 태워 각국으로 돌려보냈다. 양측 간에 사상자가 상당하지만, 이겼다는 쾌감이 더욱 컸다.
그것이 싸움의 묘미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보는 참상을 싸움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이것은 싸움이 아니었다.
도대체…….
도련님은 누구를 끌어들인 거란 말인가!
신일성 과장은 현상태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도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겁에 질려 오줌을 줄줄 흘리고 있다.
“젠장, 젠장…….”
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어, 어쩝니까, 과장님?”
오 대리가 물었다. 그 역시 안색이 좋지 않았다. 하긴 추살조 아홉 명이 얼토당토않은 곳에서 떼죽음을 당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막아. 내가 도련님을 피신시키겠다.”
신일성 과장이 어금니를 꽉 깨물며 명령했다. 지금 오 대리에게 녹슨 낫을 휘두르고 있는, 저 순진한 얼굴을 한 괴물에게 달려들라는 것은 죽으라는 말과 동의어였다.
하지만 오 대리는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는 평범한 직장인이 아니니까.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언제나 목숨을 내놓고 살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오 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자신의 차례였다. 갈 때가 온 것이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 도련님이 살아날 수만 있다면 자신의 가족에게는 꽤나 두툼한 보상금이 지급될 것이다.
반면 도련님이 죽는다면?
지키지 못한 벌로 어떤 참상이 벌어질지 잘 알고 있었다.
무조건 막아야 한다.
오 대리는 군용 단검을 꽉 쥐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후배였던 호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날, 그곳은 지옥이었어요. 누가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저는 보지도 못했습니다. 도망 다니기 바빴거든요. 아, 하나 확실한 것은 있어요. 도련님의 명령을 받고 고딩의 목을 따러 갔던 혁진이가 미쳐서 돌아왔어요. 그가 김 실장을 죽였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이곳을 떠날렵니다. 그날 일만 생각하면 무서워 죽겠어요. 불을 켜놓지 않으면 잠도 오지 않아요. 형님도…… 조심하세요. 분명 도련님을 노리는 괴물이 있어요.”

호식이 녀석이 말한 괴물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바로 저놈.
아니, 놈은 인간의 껍질만 입고 있을 뿐이다. 세상 어느 인간도 저토록 자연스럽게 사람을 죽이지는 못한다.
문제는…… 저 자식이 괴물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자신이 막아야 한다는 점이다.
오 대리의 걸음이 빨라졌다. 여느 때와 같이 상대의 태클에 대비하여 허리를 숙이고 발끝에 힘을 주었다. 왼손으로 방어를, 오른손에 든 군용 단검으로 공격을 한다.
이런 식의 싸움은 썩 효율적이지 않다. 벌써 왼손에 바람구멍이 두 번이나 났다. 뼈와 근육이 크게 다치지 않아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심줄이 완전히 끊어져 다시는 왼손을 쓰지 못할 뻔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런 방식을 고수할 밖에 없었다. 일격필살에는 이런 공격 자세만큼 좋은 것이 없기에.
만약 저 낫이 왼손에 박히면…….
오른손으로 저놈의 목을 뚫어버릴 것이다.
평상시대로.
긴장하지 말고.
그럼 돼.
오 대리는 천우의 코앞까지 전진했다. 한데 놈이 이쪽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다.
혈향에 취했나?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어라?
푸식!
산뜻한 절삭음과 함께 오 대리의 왼손이 날아갔다. 거짓말처럼, 마치 환상인 것처럼 손가락이 그대로 펴진 채 왼손이 날아가 잔디밭을 데굴데굴 굴렀다.
소화기에서 뿌려지는 분말처럼 피 분수가 솟구쳤다.
참 비현실적인 장면이다.
“아아아…….”
뇌는 바보다.
팔이 잘리고 나서야 고통을 인지한다. 정신적인 대미지와 더불어 팔목 전체가 불에 지진 것처럼 화끈거렸다. 참을 수 없는 비명과 함께 목은 침을 맞은 것처럼 따끔거렸다.
저 낫에 베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놀라운 것은 휘둘러지는 낫을 보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저 괴물은 어디서 불쑥 튀어나온 것일까?
그리고 도련님은 왜 저런 괴물에게 이토록 지독한 원한을 샀을까?
아무래도 도련님의 일진이 좋지 않을 듯하다.
저런 괴물을…… 어떻게 막겠는가.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졌다. 무언가가 시야를 가린 것이 아닌데, 커튼을 친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떠오른 감정은 공포였다.
아, 나는 죽는구나.
그 생각으로 끝으로 오 대리의 머리통은 바닥을 굴렀다.
“후욱후욱.”
천우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렇게 쉬지 않고 날뛰어본 적은 처음이다.
부활한 이후, 무적이라 여겨지던 몸에 대해서 약점을 확실히 알았다.
먼저 피가 빠지면 체력도 약해진다. 뭐, 그거야 당연한 현상인가.
재생도 그렇다. 지금까지 저 자식들에게 맞은 칼침은 모두 여섯 방. 옆구리와 팔에 각각 두 방, 허벅지에 한 방, 그리고 가장 위험한 것은 목에 맞은 한 방이다.
목에 칼침이 박혔을 때는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 아찔한 고통과 함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부활했다고 해서 무한히 살 수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재빨리 칼을 뽑아내고 재생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면 쓰러졌을지도 몰랐다.
혹시 하이랜더라는 종족처럼 목이 약점인가?
여섯 군데 입은 상처를 모두 재생하고 나니 지금껏 인간의 능력을 훌쩍 뛰어넘던 모든 능력치가 급속도로 바닥을 쳤다.
이 상태로 두 방 정도만 더 칼침을 맞으면 일반적인 인간의 몸 상태로 돌아갈 듯했다. 어쩌면 더 이상 재생 역시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약점을 알게 된 이상 더 이상 당하면 안 된다.
기껏 되살아났는데, 누구 좋으라고 이렇게 일찍 뒈질 수는 없지 않겠는가.
천우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저 빌어먹을 놈들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자리를 마련했다. 이런 식으로 막가나는 재벌집 자식들이라…….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동생은 저 자식들의 손아귀에서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 같다. 일기장에 적힌 그 아이처럼.
이름이 뭐였더라? 아, 로이. 여학생이었지.
저 자식들에게 온갖 추잡한 일을 당하고도 제대로 말 한 번 하지 못하고 자살한 그 여학생처럼. 로이의 부모는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 언론사부터 온갖 정부 기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매몰차게 거절을 당했다고 한다.
딸이 성폭행, 강간을 당한 것도 모자라 성매매를 했다고 학교에 소문이 났고, 나중에는 마약을 하고 조직폭력배와 연관이 있다는 말도 나왔다. 그 외에도 별별 소문이 다 돌았다. 끝내 학교에서는 로이를 다른 학교로 전학시키자는 말이 나왔다.
이상하지 않은가.
분명 피해자는 로이였는데…… 가해자보다 더 추잡하고 지저분한 여자가 되고 말았다.
모르긴 해도 부모는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견디다 못한 로이는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그녀로서는 마지막 선택이었을 것이다. 죽기 전 자신을 성폭행한 일당과 거짓 소문을 낸 여학생들의 실명을 유서에 적었다.
우습게도 유서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누가 가지고 갔는지 아직도 밝혀지지가 않았다.
당연히 로이는 단순 자살로 결론이 나고 말았다.
로이가 사망했을 때, 아이들은 분명 유서를 봤다고 얘기를 했는데, 경찰이 오고 나서 그것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것이다.
경찰? 혹은 선생? 그것도 아니면 아이들 중에 누군가?
워낙 혐의자가 많아서 범인을 찾기란 쉽지 않을 듯하다.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저렇게 뻔뻔하게 학교를 다니는 것이 저 자식들의 본성이다.
“후욱후욱…….”
천우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녹슨 낫을 들고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현미, 상태, 진성, 현태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났다. 넷 모두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다. 상태는 바지에 오줌을 지렸지만, 놀리는 사람은 없다. 자신들도 그러기 일보직전이니까.
바로 그때였다.
천우는 관자놀이에서 차가운 금속이 닿은 느낌을 받았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어쩐지 여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두 명의 사내가 왜 서 있을까 여겼는데…….
젠장, 경찰이었냐.
“후후후, 이거 월척인데? 도대체 몇 명이나 죽인 거야? 대한민국 사상 최초로 고딩 사이코패스. 이걸 우리가 잡았다고.”
경식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선배, 빨리 쏴요. 아까 이 새끼가 사람 죽이는 거 못 봤어요? 인간이 아니라고요. 짐승보다 더 무서운 새끼예요.”
“알아, 알아. 그냥 가까이서 한 번 보고 싶었어.”
태수의 다그침에 경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