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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毒)과 악(惡) (3)



내 의식은 그렇게 사라졌다.
깊은 물속으로 빠져드는 기분만이 느껴졌다.
종종 누군가의 말소리도 들렸다.
“콘크리트 더 부어. 빌어먹을 도련님들, 아예 우리 편의를 봐줄 생각이 없구만.”
다시 의식이 어둠 속에 잠겼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누군가 의식의 얼음을 깼다.
“찾았다. 설마했는데…… 아직도 살아 있어. 대단한 물건인걸?”
“와, 씨발. 그 새끼들도 진짜 잔인하다. 아무래 그래도 그렇지, 이 어린 학생을 콘크리트에 파묻어서 바다에 버리냐.”
“쓸데없는 소리. 우리는 시키는 일만 열심히 하면 돼.”

* * *

탄자니아의 수도 도도마.
탄자이나의 단 두 개밖에 없는 5성급 호텔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군과 경찰이 한데 뒤섞여 호텔을 에워쌌다.
경찰서장의 안색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외국인 관광객이 없어서 골치 아픈데, 외국인 호텔에 테러범이 들이닥칠 줄이야. 이번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않으면 탄자니아는 국가적인 명성에 치명타를 입게 될지도 몰랐다.
어쩌면 영국과 프랑스에서 들어오기로 되어 있는 차관이 중지될지도 모르고.
탄자니아는 가난하다. 유럽의 비호가 없으면 도저히 살아남을 수가 없다. 나라가 가난한 이유는 상류층의 부패가 크게 한몫을 하지만, 그것을 뭐라고 지적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지식인의 숫자도 모자랐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안다.
이곳에서 테러가 발생하면 그나마 먹고살 만한 자신들의 목이 몽땅 날아간다는 것을.
“인질은 몇 명입니까?”
수마르 경찰서장이 수도 방위 사령부의 암파차 대령에게 물었다. 암파차 대령도 난감한 모양이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두 개의 호텔 안에는 항상 무장 병력을 대기시켜 놓았는데, 모조리 제압을 당한 모양이다.
진즉 사살을 당했는지 몇 번이나 무전을 쳐도 연락은 없었다. 대신 ‘ISS’라는 신무장 단체의 우르간이라는 자가 대신 연락을 취해왔다.
[지금 유럽 연합에 감금되어 있는 우리 동료 24명을 여섯 시간 안에 석방하라.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있는 인질들을 10분마다 한 명씩 처단하겠다.]
만약 인질이 자국민이라면 이렇게 골치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충 피해자 가족에게 약간의 위로금만 전달하면 되니까. 그들에게 전달할 돈을 자신이 착복해도 되고.
그러나 유럽인, 정확히는 백인이라면 얘기는 크게 달라진다. 단 한 명이라도 사망자가 발생하면 탄자니아의 고급 관리들은 줄줄이 목이 날아간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한마디로 지금은 무척이나 심각한 상황이다.
“대략 200명 이상…….”
암파차 대령은 모자를 벗어 이마에 맺힌 땀을 연신 닦아내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뚱뚱해서 땀이 많은 그였다. 지금은 입안이 바짝바짝 마를 정도로 긴장을 해서인지 더욱 땀이 뚝뚝 흘러내렸다.
“이, 이백 명이요?”
수마르 경찰서장의 검은 얼굴이 하얗게 변색되는 것 같았다. 이백 명이라니. 미국이나 유럽인들은 자국민 한 명만 다른 나라에서 살해당해도 난리가 난다. 종종 전쟁까지 벌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이백 명이라니.
잘못하면 탄자니아의 대통령까지 갈려 나갈 수 있을 만큼 엄청난 문제였다.
“ISS 조직원들은 몇 명이나 됩니까?”
“아직 파악하지 못했소.”
“그럼 저들이 가진 무기가 무엇인지도 모릅니까?”
“아직은…….”
암파차 대령이 다시 모자를 벗고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이렇게 손을 놓고 있을 겁니까? 이러다가 우리 다 죽어요!”
“그, 그게…… 일단은 연락을 했습니다.”
“누구한테요?”
“프랑스 외인부대한테…….”
프랑스 외인부대라는 말을 듣자 수마르 경찰서장의 인상이 팍 찡그러졌다. 이곳에 주둔하고 있는 외국의 부대들 중에서 가장 질이 나쁜 자들이 바로 프랑스 외인부대였다.
자타공인, 그들이 최강의 부대라고는 하지만, 하는 짓거리는 3류 깡패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깡패들이다. 일과 시간만 끝나면 부대 밖으로 나와 술을 마시는 것이 일상이다. 하지만 술을 먹고 나서가 문제였다.
거의 매일 싸움질이다.
그나마 싸움질은 양반이다.
놈들은 마음에 드는 여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성폭행했다. 다른 부대였으면 영창감이다. 하여 부대 근처 상인들은 더 이상 폭력과 성폭행을 자행하지 말라며 프랑스 외인부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외인부대는 아무런 성명도 내지 않았다. ‘니들은 짖어라. 우리는 우리 할 일 하련다’라는 의미였다. 그 때문인지 탄자니아에서는 프랑스 외인부대에 대한 감정이 상당히 나빴다.
“다른 부대도 있는데 왜 하필!”
수마르 경찰서장은 인상을 있는 대로 쓰며 되물었다.
“그래도…… 대테러 부대를 가진 곳은 그곳뿐이니까…….”
암파차 대령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 들어갔다. 자신도 급해서 그곳에 연락을 취했지만. 아무래도 실수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아, 너무 그렇게 타박하지 마세요.”
그 순간, 누군가가 불쑥 끼어들었다. 훤칠한 키를 가진 사내가 그들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가 다가오자 계급이 훨씬 높은 암파차 대령도 자세를 바로 했다.
그가 바로 프랑스 외인부대의 수장인 조르주 중령인 것이다. 아무리 계급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조르주 중령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탄지니아 안에서는 없었다. 대통령마저도 그의 앞에서는 허리를 굽실거릴 정도였다.
“흠흠, 들으셨다면 죄송합니다. 딱히 악감정을 가지고 한 소리는 아닙니다.”
“네, 그렇게 생각하도록 하지요.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렇죠. 상황이 아주 좋지 않죠. 그런데 외인부대에서는 무슨 방도가 있습니까?”
“저희요?”
“네.”
“뭐, 여차여차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조르주의 말에 암파차 대령과 수마르 경찰서장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최강의 전력을 가졌다는 외인부대가 아니던가. 그들이 이번 일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말인즉, 자신들의 목이 안전할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그럼 부대원들은 이미 산개를 마친 겁니까?”
“부대원이요?”
조르주 중령이 되물었다.
“네, 대테러 부대를 투입해야 해야 하지 않습니까?”
“에이, 설마요. 겨우 이런 일에. 한 명이면 됩니다.”
“한 명이라니요?”
“아, 저기 내려오네요.”
조르주 중령은 이마에 손을 대고는 상공을 바라봤다. 높은 고도에서 마크가 새겨져 있지 않은 수송기 한 대가 날아가고 있었다.
마침 그 순간, 수송기에서 부대원 한 명이 뛰어내렸다. 다른 부대원은 없었다.
스카이다이빙을 하던 부대원은 어느 지점에 이르자 낙하산을 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것은 호텔이 점거하고 있던 테러리스트도 마찬가지였다.
모두의 시선이 한곳에 박혀 있는 셈이다.
어느 지점에 이르자 부대원은 낙하산을 공중에서 끊어버렸다. 부대원은 자유낙하를 하며 호텔 내부로 뛰어내렸다.
아무리 봐도 수십 미터 상공. 낙하산으로 속도를 줄였다고 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결코 뛰어내릴 수 있는 높이가 아니었다.
“저, 저, 저…….”
사람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젊은 군인이 호텔 옥상에 떨어져 죽는 모습은 없었다.
그 대신…….
투투투투투!
빗발치듯 쏟아지는 총탄 소리와 여러 명이 동시에 지르는 비명 소리만이 들려왔다.

조르주 중령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상당한 연봉을 받는 외인부대의 수장답게 그의 손목시계는 롤렉스였다. 무엇보다 그는 전자시계보다는 기계식 시계를 좋아했다. 개인적인 취향이었다. 전자시계는 어쩐지 인간 냄새가 안 난다나. 어쨌든 돈만 주면 무자비한 종족 청소까지 마다않는 외인부대의 수장이 할 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9분…… 21초, 22초, 23초…….”
조르주 중령이 시간을 잰다.
“시간을 왜 재는 겁니까?”
수마르 경찰서장이 물었다.
“아, 조금 전에 호텔에 잠입한 대원이 10분 안에 테러리스트들을 제압하겠다고 말을 했거든요. 그 시간을 재는 겁니다.”
“10분 안에요? 몇 명이나 있을지 모르는데?”
“뭐, 알아서 하겠죠.”
“그, 그런 무책임한 말이…….”
“아, 거참! 믿으쇼. 그 자식이라면 가능하니까. 그리고…… 그가 실패해도…….”
조르주 중령이 슬쩍 뒤를 바라봤다. 어느새 1개 중대에 달하는 외인부대의 대원들이 완전무장을 마친 채 호텔 내부로 진입을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저, 저기…… 조르주 중령, 막무가내로 호텔에 진입을 하면 안 됩니다. 2백 명이 넘는 인질이 있단 말이오.”
“뭐, 최대한 구해보도록 노력을 해보겠습니다.”
조르주 중령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지만, 조르주 중령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토록 위험한 상황에서 저런 해맑은 미소라니.
울컥 짜증이 밀려오는 수마르 경찰서장이었다.
그때였다.
콰콰콰콰쾅!
호텔의 정문이 폭발하며 서너 명의 사내들이 튕겨져 나왔다. 그들은 풍선 인형처럼 수차례나 공중에서 회전을 한 후에 바닥에 철푸덕 떨어졌다.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조르주 중령이 손가락을 까닥이자 뒤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외인부대원들이 우르르 달려 나가 그들을 포박하려 했다. 하지만 외인부대원들은 이내 조르주 중령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조르주 중령이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그 자식이 적을 살려둘 리가 없지. 최소한 한두 명이라도 살려두면 좋으련만.
“후우.”
이내 부서진 정문으로 건장한 신장의 사내가 나타났다. 방탄모를 벗자 준수한 얼굴이 나타난다. 이색적이게도 아프리카에서는 자주 볼 수 없는 동양인이었다.
신장은 대략 6피트가 조금 넘는 정도. 동양인치고는 상당한 키였다. 얼마나 신체를 단련했는지 군복을 입었음에도 탄탄한 육체가 그대로 드러났다.
땀으로 범벅이 된 사내가 조르주 중령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몇 명이나 잡았나?”
“열일곱.”
“인질은?”
“죽지는 않았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몇몇이 총에 맞았거든. 서둘러야 할 거야.”
“그 정도야 뭐, 총에 맞은 인질이 재수가 없는 거지. 들었소? 서둘러서 인질을 후송하시오.”
조르주 중령은 수마르 경찰서장과 암파차 대령을 번갈아 쳐다보다 구호를 재촉했다. 믿기지 않는 일을 목격한 두 사람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고는 부하들에게 명령해서 서둘러 진입을 명령했다.
“그리고 보스.”
조르주 중령이 뒤를 돌아보며 사내를 불렀다. 중령 계급을 가진 조르주가 아무 계급도 없는 사내를 부르는, 희한한 광경이었다.
“왜?”
사내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조르주 중령을 바라봤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셔도 될 것 같소이다.”
“그래?”
“응. 이제 보스는 자유야. 본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도록 해.”
“아하, 그렇단 말이지?”
지난 오 년간 한 번도 웃지 않은 사내의 얼굴에서 미소가 번졌다.
주위를 꽁꽁 얼려 버릴 것 같은 차가운 미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