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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파이터 (2)
“이, 이게 뭐야?”
현태는 눈앞에서 벌어진 참극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열 명이 넘던 친구들이 모두 바닥을 구르고 있다.
그래, 시라소니나 김두한과 같은 싸움의 고수를 만나면 질 수도 있지. 아직 그런 사람은 못 봤지만.
문제는 싸움의 결과였다.
저 잔혹성.
친구들 전원의 머리통이 깨졌다. 팔과 다리가 부러진 것은 예사였다. 뼈가 근육을 찢으며 뚫고 나왔다. 제 사지가 기묘하게 뒤틀린 것을 본 친구는 아예 정신 줄을 놓아버렸다. 자신의 뼈를 직접 보는 영광을 누렸으나, 정신력이 그것을 버텨주지 못한 것이다.
“저게… 그 왕따 새끼라고?”
현태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마른침이 꼴깍 넘어간다. 손바닥에는 땀이 흥건했다. 이마와 등줄기에서도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정신 차려! 여기 있으면 죽어!
하지만 현태는 본능이 외침에 따르지 못했다. 옆에 걸리적거리는 방해꾼이 있는 탓이었다.
“무서워. 저건…… 왕따가 아닌 것 같아.”
태희가 덜덜 떨며 더욱 현태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이것 놔.”
현태는 그녀를 떼어놓고 벌떡 일어났다.
“어쩌려고?”
“네가 알아서 뭐하게?”
“왜 그래? 난 네 여친이잖아.”
“여친이 무슨 엄마라도 돼? 왜 꼬치꼬치 묻고 지랄이야, 지랄은. 그런 걸 물을 시간이 있으면 저 새끼나 잡고 있어. 가랑이를 벌리든, 이빨로 물어뜯든 시간을 벌란 말이야.”
“내, 내가?”
“그래, 네가.”
“무섭단 말이야.”
“저 자식도 남자야. 설마 여자를 때리겠어?”
“아까도 때리려고 했단 말이야.”
“허세야, 허세.”
“그래도…….”
“저 녀석만 처리하면…… 오늘 내가 안아줄게. 맛있는 데 가서 저녁 식사도 하자. 어때?”
“저, 정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던 태희가 방긋 웃었다. 그녀는 손등으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눈물을 닦았다.
고개를 끄덕인 현태는 재빨리 자신의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부르릉―
시동을 걸고 힐끗 천우를 쳐다본 다음에 액셀을 당긴다.
부아아앙―
그의 경주용 오토바이가 앞바퀴를 확 들더니 이내 거친 야생마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천우는 피에 젖은 쇠망치를 버리고 현태를 찾았다. 어차피 다른 놈들은 피라미다. 굳이 이토록 잔인하게 처리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이런 피바다로 만들어 버린 것은 현태에 대한 경고였다.
너는 이들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될 거라는.
보통 쥐는 도망칠 구석을 만들고 몰아야 한다고 말을 한다. 도망칠 구석이 없으면 이판사판 덤벼들 위험이 있기 때문에. 굳이 위험부담을 감수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천우는 현태를 철저하게 몰아붙일 생각이다. 완전히 절벽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덤벼도, 비명을 질러도, 목이 터져라 외쳐도 아무도 듣지 못할 것이다.
철저하게 고립된 채 죽어가리라.
“어딜 가!”
그때, 태희가 천우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천우는 걸음을 멈추고 태희를 바라봤다. 그는 태희에 대해서 모른다. 좋은 여자인지, 나쁜 여자인지, 성격이 좋은지, 집안은 어떤지, 아무런 정보가 없다.
일기장에 적혀 있지 않으니 관심도 없다. 한데 그런 그녀가 갑자기 튀어나와 자신의 앞길을 막고 있었다.
천우는 일기장에 적혀 있는 놈들만 처단할 생각이었다. 놈들을 어찌 처단해야 할까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다 갈 지경이다.
명단에 없는 아이다 보니 순간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자신은 훗날 살인자 혹은 연쇄살인마 혹은 사이코패스라고 불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재미로 상대를 죽이는 게 아니다.
이유가 있기 때문에 상대의 숨통을 끊어놓는 것이다.
그러니 이 빌어먹을 부반장을 어찌 해야 할까. 정말 번거롭다.
“왜? 나도 치려고? 쳐! 쳐! 가려면 날 죽이고 가라고!”
태희는 머리를 천우의 허벅지에 비비며 막무가내로 매달렸다.
가장 골치가 아픈 스타일이다.
이런 타입은 싸움도 못하면서 악만 있다.
그 악이 문제였다. 똘기 충만이라고 해야 할까.
배 째라는 스타일이다.
말도 통하지 않는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끝까지 밀어붙인다. 남의 얘기는 결코 귀담아듣지 않는다.
다만, 문제는…….
태희라는 이 아이는 딱히 동생에게 잘못한 것이 없었다.
현태 놈과 어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직접적으로 가해를 가한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판단하기가 애매했다.
그럴 때는 역시 무시하는 게 가장 무난할 것이다.
“이거 놔.”
천우는 다리를 흔들었다.
“못 놔! 날 죽이고 가라고! 아니면 이대로 돌아가든지.”
“내가 왜?”
“왕따가 주인한테 덤비는 건 말이 안 되니까.”
“주인? 현태가 왜 내 주인이지?”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잖아.”
“누가 그것을 정했지?”
“현태가.”
“누구 마음대로?”
“현태 마음대로.”
“그래? 네 논리대로면 힘이 센 놈이 약한 자를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것이잖아. 그럼 이제부터 네 논리대로 따르지.”
“…….”
태희는 무슨 말이냐는 듯이 잠시 천우의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천우의 표정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싸늘하다. 냉기가 훅훅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너도, 그 새끼도 이제부터 내 개야. 알았어? 너는 계획에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특별 케이스로 치지.”
“…….”
여전히 태희는 천우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눈초리였다.
천우는 그녀의 손에서 떼어낸 다음, 뻥 차버렸다.
“아아아악!”
태희는 몇 바퀴나 콘크리트 바닥을 굴렀다. 꽤 아플 테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 천우를 향해서 다시 덤벼들었다.
천우가 태희의 배를 다시 걷어찼다. 배를 움켜잡은 태희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댄 채 콜록콜록, 심하게 기침을 했다.
그런 태희의 뒤통수 위로 천우가 발을 얹었다.
“짖어.”
“…….”
“짖으라고, 빌어먹을 년아. 이제부터 네 주인은 나니까.”
“시, 싫어.”
“왜?”
“죽어도 그런 추한 짓은 못해.”
순간, 어이가 없었다.
추한 짓인 것을 알면서도…… 내 동생에게는 아무렇지도 않게 시켰단 말이냐!
천우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꾹 눌러 참으며 차분하게 물었다.
“너희도 나한테 시켰잖아.”
“너는 왕따니까.”
“왕따는 그런 짓을 당해도 되나?”
“당연한 것 아니야? 너와 우리의 레벨 차이를 봐. 니까짓게 공부 잘하는 것 빼고 뭐 볼 게 있어. 집이 부자야? 부모님이 잘 나가? 원래 사회도 그렇잖아. 가진 자가 없는 자를 고용하고 지배하는 거야. 우리는 회장이고 CEO야. 너는 노동자고. 그러니 당연히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해야지.”
뭐라 할 말이 없어진 천우는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래, 네가 무슨 잘못이겠니. 너를 그렇게 가르친 부모와 학교의 잘못이지.
그런 썩어 빠진 생각을 심어준 사회의 잘못이고, 욕심 많은 기득권의 잘못이지.
그렇다고 네 잘못이 아예 없다는 것은 아니야. 평범한 사람들이 대다수인 세상을 한 번도 의심 없이 바라봤다는 무관심은 정말 큰 죄다.
비록 무식한 나라 해도 이런 말은 안다.
사회에 대한 무관심과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거악(巨惡)’을 탄생시킨다.
너희들을 과연 선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나는 악이다.
인정한다.
하지만 너희들은 나보다 더 악질이다.
고로 너희들을 소멸(消滅)해야 당연하겠지.
“어서 꺼지라고! 당장 여기서 돌아가! 저 오토바이 값들은 나중에 청구할 테니까 알아서 해!”
태희의 악다구니에 천우는 정신이 들었다. 대한민국 최상위 1퍼센트에 해당한다는 이들의 자식이다. 그동안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 여겨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제 이들이 가진 생각을 어렴풋하게나마 엿볼 수가 있었다.
고고함? 개나 주라고 그래.
직접 가해를 하지 않았다 해도, 방관만 했다 해도 그것은 큰 죄다.
힘을 가진 자는 그 힘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의 방관은 철저한 집단 이기주의에 불과할 뿐이다.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았다고 해서 깨끗한 것이 아닌 것이다.
천우는 발끝으로 태희의 턱을 올려 찼다.
뻑!
태희의 고개가 부러진 마네킹의 목처럼 뒤로 넘어갔다. 그녀의 눈빛은 경악에 차 있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목격한 듯이.
정신적 충격이 육체의 고통을 넘어선 것인지, 비명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네 말대로야. 가진 자가 없는 자를 지배해야지. 단, 지금은 돈이 기준이 아니야. 힘, 말 그대로 폭력이 절대기준이지. 그러니 넌 나한테 복종해야 마땅하겠지?”
여자는 약하다.
그래서 여자와 아이, 노인은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또한 여자는 독하다.
세상에는 독과 가시를 가진 여자가 많다. 여자라기보다는 세상을 좀 먹는 악녀들이다.
장녹수처럼, 정난정처럼, 김개시처럼, 장희빈처럼, 화안옹주처럼…….
천우에게 악녀는 처리해야 할 대상이지, 감싸줘야 할 여자가 결코 아니었다.
거듭된 발길질에도 태희는 좀처럼 꺾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자비한 폭력은 굳건한 철옹성에서 조금씩 금이 가게 만들었다.
“……제발, 제발 그만해.”
태희의 애원에 구타를 멈춘 천우가 차갑게 내뱉었다.
“말했잖아, 넌 개라고. 개는 말을 하지 않아. 그저 짖을 뿐이지.”
“흐흑, 미안해. 그만 용서해 줘…….”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군.”
천우는 흔들림 없는 태도로 짓밟아 버리겠다는 듯 다리를 들어 올렸다.
“……멍.”
복종의 의미로 한마디를 토해낸 태희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채 의식을 잃었다. 예쁘장하던 얼굴은 이미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천우는 그제야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현태와의 거리가 꽤 벌어졌다. 지금 당장 쫓지 않으면 놓칠 수도 있었다. 제아무리 오감이 발달한 천우라고 하더라도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현태의 오토바이를 청각만으로 쫓을 수는 없었다.
천우는 남은 오토바이들 중에서 그나마 멀쩡한 것을 골라서 시동을 걸었다.
다행히도 오토바이는 중학교 시절부터 몰 줄 알았다. 그냥 질풍노도의 시기였다고 생각하면 된다. 잠시 술 담배도 했지만,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느껴서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자신의 처지에 술 담배를 하는 것이 우습기도 했고.
어쨌든 그가 몰아본 오토바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과연…… 좋긴 좋군.”
천우는 입술을 뒤틀며 웃었다. 수백에서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고가의 오토바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구매할 수가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부모도 능력이라는 세상. 참 엿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아아아앙!
액셀을 당겼다. 경주용 오토바이는 굉음을 내며 천우의 예상보다 훨씬 더 힘차게 앞으로 나아갔다.
* * *
이건 함정이다.
현태를 쫓으며 천우가 느낀 감정이다. 몇 분이 흐른 뒤에 그를 뒤쫓았다. 오토바이가 아니라 뛰어도 그 시간이면 수백 미터는 도망칠 수 있다. 잘 뛰는 놈이라면 1킬로미터는 멀어졌을 것이다.
하물며 고속으로 움직이는 오토바이는 얼마나 멀리 떨어졌을지 굳이 따져 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그저 천우는 직감으로 놈의 뒤를 쫓았을 뿐이다.
그러나 현태는 천우의 예상과 다르게 움직였다. 멀리서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천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뭔가 좀 이상했다.
일부러 기다려?
천우는 그에게 다가갔다. 몇 미터쯤 남자 놈은 엑셀을 당겼다. 다시 멀어졌다.
젠장, 놈이 오토바이를 움직이는 솜씨는 자신보다 한 수 위였다.
하긴 자신은 이런 경주용 오토바이를 처음 몰아본다. 워낙 무거워서 생각보다 핸들링이 편하지가 않았다. 반면, 저 자식이 운전하는 것은 충분히 길들인 애마였다. 애초에 따라잡기란 쉽지가 않았다.
그런 자신이 어떻게 놈을 쫓을 수가 있었을까.
일부러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설마 다른 무대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일까?
흥, 좋아. 그 무대…….
기꺼이 올라가 주지.
“이, 이게 뭐야?”
현태는 눈앞에서 벌어진 참극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열 명이 넘던 친구들이 모두 바닥을 구르고 있다.
그래, 시라소니나 김두한과 같은 싸움의 고수를 만나면 질 수도 있지. 아직 그런 사람은 못 봤지만.
문제는 싸움의 결과였다.
저 잔혹성.
친구들 전원의 머리통이 깨졌다. 팔과 다리가 부러진 것은 예사였다. 뼈가 근육을 찢으며 뚫고 나왔다. 제 사지가 기묘하게 뒤틀린 것을 본 친구는 아예 정신 줄을 놓아버렸다. 자신의 뼈를 직접 보는 영광을 누렸으나, 정신력이 그것을 버텨주지 못한 것이다.
“저게… 그 왕따 새끼라고?”
현태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마른침이 꼴깍 넘어간다. 손바닥에는 땀이 흥건했다. 이마와 등줄기에서도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정신 차려! 여기 있으면 죽어!
하지만 현태는 본능이 외침에 따르지 못했다. 옆에 걸리적거리는 방해꾼이 있는 탓이었다.
“무서워. 저건…… 왕따가 아닌 것 같아.”
태희가 덜덜 떨며 더욱 현태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이것 놔.”
현태는 그녀를 떼어놓고 벌떡 일어났다.
“어쩌려고?”
“네가 알아서 뭐하게?”
“왜 그래? 난 네 여친이잖아.”
“여친이 무슨 엄마라도 돼? 왜 꼬치꼬치 묻고 지랄이야, 지랄은. 그런 걸 물을 시간이 있으면 저 새끼나 잡고 있어. 가랑이를 벌리든, 이빨로 물어뜯든 시간을 벌란 말이야.”
“내, 내가?”
“그래, 네가.”
“무섭단 말이야.”
“저 자식도 남자야. 설마 여자를 때리겠어?”
“아까도 때리려고 했단 말이야.”
“허세야, 허세.”
“그래도…….”
“저 녀석만 처리하면…… 오늘 내가 안아줄게. 맛있는 데 가서 저녁 식사도 하자. 어때?”
“저, 정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던 태희가 방긋 웃었다. 그녀는 손등으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눈물을 닦았다.
고개를 끄덕인 현태는 재빨리 자신의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부르릉―
시동을 걸고 힐끗 천우를 쳐다본 다음에 액셀을 당긴다.
부아아앙―
그의 경주용 오토바이가 앞바퀴를 확 들더니 이내 거친 야생마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천우는 피에 젖은 쇠망치를 버리고 현태를 찾았다. 어차피 다른 놈들은 피라미다. 굳이 이토록 잔인하게 처리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이런 피바다로 만들어 버린 것은 현태에 대한 경고였다.
너는 이들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될 거라는.
보통 쥐는 도망칠 구석을 만들고 몰아야 한다고 말을 한다. 도망칠 구석이 없으면 이판사판 덤벼들 위험이 있기 때문에. 굳이 위험부담을 감수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천우는 현태를 철저하게 몰아붙일 생각이다. 완전히 절벽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덤벼도, 비명을 질러도, 목이 터져라 외쳐도 아무도 듣지 못할 것이다.
철저하게 고립된 채 죽어가리라.
“어딜 가!”
그때, 태희가 천우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천우는 걸음을 멈추고 태희를 바라봤다. 그는 태희에 대해서 모른다. 좋은 여자인지, 나쁜 여자인지, 성격이 좋은지, 집안은 어떤지, 아무런 정보가 없다.
일기장에 적혀 있지 않으니 관심도 없다. 한데 그런 그녀가 갑자기 튀어나와 자신의 앞길을 막고 있었다.
천우는 일기장에 적혀 있는 놈들만 처단할 생각이었다. 놈들을 어찌 처단해야 할까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다 갈 지경이다.
명단에 없는 아이다 보니 순간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자신은 훗날 살인자 혹은 연쇄살인마 혹은 사이코패스라고 불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재미로 상대를 죽이는 게 아니다.
이유가 있기 때문에 상대의 숨통을 끊어놓는 것이다.
그러니 이 빌어먹을 부반장을 어찌 해야 할까. 정말 번거롭다.
“왜? 나도 치려고? 쳐! 쳐! 가려면 날 죽이고 가라고!”
태희는 머리를 천우의 허벅지에 비비며 막무가내로 매달렸다.
가장 골치가 아픈 스타일이다.
이런 타입은 싸움도 못하면서 악만 있다.
그 악이 문제였다. 똘기 충만이라고 해야 할까.
배 째라는 스타일이다.
말도 통하지 않는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끝까지 밀어붙인다. 남의 얘기는 결코 귀담아듣지 않는다.
다만, 문제는…….
태희라는 이 아이는 딱히 동생에게 잘못한 것이 없었다.
현태 놈과 어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직접적으로 가해를 가한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판단하기가 애매했다.
그럴 때는 역시 무시하는 게 가장 무난할 것이다.
“이거 놔.”
천우는 다리를 흔들었다.
“못 놔! 날 죽이고 가라고! 아니면 이대로 돌아가든지.”
“내가 왜?”
“왕따가 주인한테 덤비는 건 말이 안 되니까.”
“주인? 현태가 왜 내 주인이지?”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잖아.”
“누가 그것을 정했지?”
“현태가.”
“누구 마음대로?”
“현태 마음대로.”
“그래? 네 논리대로면 힘이 센 놈이 약한 자를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것이잖아. 그럼 이제부터 네 논리대로 따르지.”
“…….”
태희는 무슨 말이냐는 듯이 잠시 천우의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천우의 표정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싸늘하다. 냉기가 훅훅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너도, 그 새끼도 이제부터 내 개야. 알았어? 너는 계획에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특별 케이스로 치지.”
“…….”
여전히 태희는 천우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눈초리였다.
천우는 그녀의 손에서 떼어낸 다음, 뻥 차버렸다.
“아아아악!”
태희는 몇 바퀴나 콘크리트 바닥을 굴렀다. 꽤 아플 테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 천우를 향해서 다시 덤벼들었다.
천우가 태희의 배를 다시 걷어찼다. 배를 움켜잡은 태희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댄 채 콜록콜록, 심하게 기침을 했다.
그런 태희의 뒤통수 위로 천우가 발을 얹었다.
“짖어.”
“…….”
“짖으라고, 빌어먹을 년아. 이제부터 네 주인은 나니까.”
“시, 싫어.”
“왜?”
“죽어도 그런 추한 짓은 못해.”
순간, 어이가 없었다.
추한 짓인 것을 알면서도…… 내 동생에게는 아무렇지도 않게 시켰단 말이냐!
천우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꾹 눌러 참으며 차분하게 물었다.
“너희도 나한테 시켰잖아.”
“너는 왕따니까.”
“왕따는 그런 짓을 당해도 되나?”
“당연한 것 아니야? 너와 우리의 레벨 차이를 봐. 니까짓게 공부 잘하는 것 빼고 뭐 볼 게 있어. 집이 부자야? 부모님이 잘 나가? 원래 사회도 그렇잖아. 가진 자가 없는 자를 고용하고 지배하는 거야. 우리는 회장이고 CEO야. 너는 노동자고. 그러니 당연히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해야지.”
뭐라 할 말이 없어진 천우는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래, 네가 무슨 잘못이겠니. 너를 그렇게 가르친 부모와 학교의 잘못이지.
그런 썩어 빠진 생각을 심어준 사회의 잘못이고, 욕심 많은 기득권의 잘못이지.
그렇다고 네 잘못이 아예 없다는 것은 아니야. 평범한 사람들이 대다수인 세상을 한 번도 의심 없이 바라봤다는 무관심은 정말 큰 죄다.
비록 무식한 나라 해도 이런 말은 안다.
사회에 대한 무관심과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거악(巨惡)’을 탄생시킨다.
너희들을 과연 선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나는 악이다.
인정한다.
하지만 너희들은 나보다 더 악질이다.
고로 너희들을 소멸(消滅)해야 당연하겠지.
“어서 꺼지라고! 당장 여기서 돌아가! 저 오토바이 값들은 나중에 청구할 테니까 알아서 해!”
태희의 악다구니에 천우는 정신이 들었다. 대한민국 최상위 1퍼센트에 해당한다는 이들의 자식이다. 그동안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 여겨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제 이들이 가진 생각을 어렴풋하게나마 엿볼 수가 있었다.
고고함? 개나 주라고 그래.
직접 가해를 하지 않았다 해도, 방관만 했다 해도 그것은 큰 죄다.
힘을 가진 자는 그 힘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의 방관은 철저한 집단 이기주의에 불과할 뿐이다.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았다고 해서 깨끗한 것이 아닌 것이다.
천우는 발끝으로 태희의 턱을 올려 찼다.
뻑!
태희의 고개가 부러진 마네킹의 목처럼 뒤로 넘어갔다. 그녀의 눈빛은 경악에 차 있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목격한 듯이.
정신적 충격이 육체의 고통을 넘어선 것인지, 비명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네 말대로야. 가진 자가 없는 자를 지배해야지. 단, 지금은 돈이 기준이 아니야. 힘, 말 그대로 폭력이 절대기준이지. 그러니 넌 나한테 복종해야 마땅하겠지?”
여자는 약하다.
그래서 여자와 아이, 노인은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또한 여자는 독하다.
세상에는 독과 가시를 가진 여자가 많다. 여자라기보다는 세상을 좀 먹는 악녀들이다.
장녹수처럼, 정난정처럼, 김개시처럼, 장희빈처럼, 화안옹주처럼…….
천우에게 악녀는 처리해야 할 대상이지, 감싸줘야 할 여자가 결코 아니었다.
거듭된 발길질에도 태희는 좀처럼 꺾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자비한 폭력은 굳건한 철옹성에서 조금씩 금이 가게 만들었다.
“……제발, 제발 그만해.”
태희의 애원에 구타를 멈춘 천우가 차갑게 내뱉었다.
“말했잖아, 넌 개라고. 개는 말을 하지 않아. 그저 짖을 뿐이지.”
“흐흑, 미안해. 그만 용서해 줘…….”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군.”
천우는 흔들림 없는 태도로 짓밟아 버리겠다는 듯 다리를 들어 올렸다.
“……멍.”
복종의 의미로 한마디를 토해낸 태희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채 의식을 잃었다. 예쁘장하던 얼굴은 이미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천우는 그제야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현태와의 거리가 꽤 벌어졌다. 지금 당장 쫓지 않으면 놓칠 수도 있었다. 제아무리 오감이 발달한 천우라고 하더라도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현태의 오토바이를 청각만으로 쫓을 수는 없었다.
천우는 남은 오토바이들 중에서 그나마 멀쩡한 것을 골라서 시동을 걸었다.
다행히도 오토바이는 중학교 시절부터 몰 줄 알았다. 그냥 질풍노도의 시기였다고 생각하면 된다. 잠시 술 담배도 했지만,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느껴서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자신의 처지에 술 담배를 하는 것이 우습기도 했고.
어쨌든 그가 몰아본 오토바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과연…… 좋긴 좋군.”
천우는 입술을 뒤틀며 웃었다. 수백에서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고가의 오토바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구매할 수가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부모도 능력이라는 세상. 참 엿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아아아앙!
액셀을 당겼다. 경주용 오토바이는 굉음을 내며 천우의 예상보다 훨씬 더 힘차게 앞으로 나아갔다.
* * *
이건 함정이다.
현태를 쫓으며 천우가 느낀 감정이다. 몇 분이 흐른 뒤에 그를 뒤쫓았다. 오토바이가 아니라 뛰어도 그 시간이면 수백 미터는 도망칠 수 있다. 잘 뛰는 놈이라면 1킬로미터는 멀어졌을 것이다.
하물며 고속으로 움직이는 오토바이는 얼마나 멀리 떨어졌을지 굳이 따져 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그저 천우는 직감으로 놈의 뒤를 쫓았을 뿐이다.
그러나 현태는 천우의 예상과 다르게 움직였다. 멀리서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천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뭔가 좀 이상했다.
일부러 기다려?
천우는 그에게 다가갔다. 몇 미터쯤 남자 놈은 엑셀을 당겼다. 다시 멀어졌다.
젠장, 놈이 오토바이를 움직이는 솜씨는 자신보다 한 수 위였다.
하긴 자신은 이런 경주용 오토바이를 처음 몰아본다. 워낙 무거워서 생각보다 핸들링이 편하지가 않았다. 반면, 저 자식이 운전하는 것은 충분히 길들인 애마였다. 애초에 따라잡기란 쉽지가 않았다.
그런 자신이 어떻게 놈을 쫓을 수가 있었을까.
일부러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설마 다른 무대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일까?
흥, 좋아. 그 무대…….
기꺼이 올라가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