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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별곡(惡人別曲) (2)



천우는 희연 덕분에 손쉽게 방을 얻었다.
돈은 많으니 문제될 것이 없었다. 상태네 집에서 털어온 현금이 자그마치 5억하고 3천만 원이었다. 그렇게 많은 돈은 머리털 나고 처음 봐서 어지간한 천우조차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 돈이면 몰디브뿐만 아니라 유럽으로 이민도 갈 수가 있겠다. 언어만 된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이미 천우에게 있어 이 엿 같은 곳에 대한 애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부모도 없다. 친척도 없다. 하나뿐인 동생은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놈들 때문에 자살을 했다. 그 와중에 동생을 도와준 이는 하나도 없었다.
경찰도, 선생도 모두 가진 자의 편이었다.
천우로서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이 나라가 그 어떤 곳보다 증오스러웠다.
그렇지만 살 사람은 살아야지.
보란 듯이 떵떵거리며 잘살 것이다.

* * *

수업이 끝났다. 대부분이 학교에 남아 야자를 하지만, 천우는 전혀 학교에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며칠이 지났건만 아직 분위기는 잠잠하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흥, 개자식들. 왕따를 건드려서 깨지면 개망신이니 누가 먼저 나설지 눈치를 보고 있는 중이다.
그럼 이쪽이 먼저 대응을 해주지.
천우는 거미줄을 치고 기다렸다.
누군가 걸리면…… 지옥을 보게 될 것이다.
천우는 가방을 걸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섰다. 그에게 ‘잘 가라’는 흔한 인사조차 건네는 이가 없었다.
학교 건물 밖을 나와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힐끗힐끗 천우를 훔쳐볼 뿐이었다. 그런 그들을 보고 있자니 속이 뒤집혔다.
너희들, 사람을 이렇게 대하는 것 아니다.
그때였다.
누군가 그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천우는 깜짝 놀라 뒤로 펄쩍 물러났다. 누군가 자신의 뒤까지 다가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낮이라 그런가?
“뭘 그렇게 놀라? 죄지었어?”
천우는 이상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상대를 보았다. 부반장, 자신보다 일찍 등교한 학생이다. 그녀의 명찰을 보았다. 이태희. 다시 한 번 머릿속에 입력했다.
“왜?”
천우는 태희를 의심쩍은 눈으로 바라봤다. 그녀와 지금껏 말 한마디 나눈 적이 없다. 친근감도 느끼지 못한다. 일기장에 적혀 있지 않은 것으로 봐서 그녀와 자신의 접점은 없었다. 하여 퉁명하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누가 너 좀 보재.”
“누가?”
“현태가.”
“현태가?”
“응.”
더욱 의심스러웠다. 현태는 2학년 중에서도 꼴통으로 유명하다. 워낙 다혈질이라 경찰서를 제집 드나들 듯이 들락날락거릴 정도였다.
만약 그의 아버지가 경찰청장이 아니었다면 진작 소년원에 갔을 것이란 소문이 파다했다. 그럼에도 그의 막강한 배경이 두려워서 뭐라고 하는 학생이나 선생은 없었다.
그리고…… 동생이 가장 두려워하던 인물이기도 했다. 얼마나 겁에 질렸는지, 연습장에 쓰인 것 중에 태반이 현태의 이름이었다.
붉게 칠하고…… 칼로 난도질을 해놨다.

죽어, 죽어, 죽어, 제발 죽어줘!

글씨체도 선명히 기억한다.
그런 개새끼와 너는 무슨 관계니? 대답 여하에 따라서 너도…… 생사를 결정해야 할지도 몰라. 대답 잘해야 돼.
태희를 쳐다보는 눈빛이 점점 서늘하게 변해갔다.
“눈빛 마음에 드네. 짜릿찌릿한걸?”
태희는 양쪽 입술을 끌어 올리며 웃었다. 학교에서 공부만 잘하는 학생인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다. 십중팔구 이년은 이중 생활을 할 것이다. 한 번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동생의 일기장에 모든 것이 적혀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 새끼는…… 어디 있지?”
“그 새끼?”
태희의 눈매가 살짝 변했다. 네가 뭔데 욕을 하느냐는 느낌이랄까.
“왜? 애인이라도 돼? 그 새끼를 욕하니까 기분이 갑자기 나빠졌어?”
“네가 함부로 할 사람이 아니야. 입 똑바로 놀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하더니, 지금의 말투는 전혀 모범적인 공부벌레와는 맞지 않았다. 좀 놀아본 애들이 할 법한 위협적인 말투였다.
“아, 그러셔?”
그렇다고 변하는 것은 없다.
내가 되살아난 이유는 간단한 이분법이다.
너희가 모조리 뒈지든지.
내가 죽든지.
놈들을 옹호하는 것들도 모조리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 버릴 생각이다. 그러니 방해하지 말라고.
천우는 태희에게 다가갔다. 태희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천우를 노려봤다. ‘네가 오면 어쩔 건데’라는 듯이.
천우는 손을 뻗어 태희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밑으로 확 당기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눈깔아.”

* * *

현태가 불렀다.
나는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면 분명…… 또 뭔가를 시킬 텐데.
현태는 학교 B동 지하에 있었다. 지하 1층은 음악실, 다용도 공구실이고, 지하 2층에는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동호회가 있었다. 연주부, 통기타부, YMCA, 수련부, 지도부, 산악회 등…….
현태는 아무 동호회에도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아무 동호회나 자신의 부실처럼 이용한다. 다른 학생들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수련부에 있었다. 노크를 하고 수련부에 들어갔다.
자욱한 담배 연기 탓에 눈을 뜨지 못하겠다.
나는 억지로 기침을 참으며 아이들을 돌아봤다.
모두 여덟 명의 수련부생이 있었다. 1학년, 2학년이 섞여 있다. 그들 가운데에서 현태가 왕처럼 거들먹거리며 담배 연기로 도넛을 만들었다.
여기서 때리려나?
하지만 오늘은 현태가 때리지 않았다. 애들을 시켜서도 때리지도 않았다. 나랑 비슷한 애들을 데리고 와서 격투기를 시키지도 않았다.
그저 핸드폰 하나를 던져 주면서 강남역으로 뛰어가라 했다.
제한 시간은 15분.
어떤 내용인지 말은 해주지 않는다. 무조건 뛰라고 할 뿐.
나는 무조건 뛸 수밖에 없었다.
강남역까지는 대충 걸어서 30~40분쯤 걸린다고 보면 된다. 체력이 약한 내가 뛴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다. 하지만 가지 않으면 어떤 보복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가 없다.
한 번도 쉬지 않고 무조건 뛰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입으로 튀어나오려고 한다. 숨을 제대로 쉬기 어려웠다. 열이 두개골 꼭대기까지 차올라서 금방이라도 뇌가 파열이 될 것만 같다. 다리는 휘청거린다. 아차하면 균형을 잃고 쓸러질 것만 같다.
그래도 다행히 제시간 안에 도착했다.
칼이다. 13분에서 14분으로 넘어가자 곧바로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숨도 제대로 들이켜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
현태 놈은 뜬금없이 내게 주변을 살피라 했다.
사람만 많다. 현태가 뭘 바라고 있는지 몰라서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역시나 욕설이 들려온다. 그럼에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난 초능력자가 아니니까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재주 같은 것 없으니까.
그제야 제 실수를 알아차렸는지 현태는 욕과 함께 본론을 꺼냈다.
손가방 든 할머니.
나는 다시 주위를 살펴봤다. 확실히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시골에서 갓 올라온 듯 허름한 옷차림, 품에는 꼬질꼬질한 손가방을 꼭 안고 있다.
상태는 내게 그 할머니로부터 가방을 건네받으라 했다.
대체 저 할머니는 누구이기에…….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어진 상태의 말은 그런 의심에 확신을 심어주었다.
가방을 받으면 바로 돌아오지 말고 두 시간 정도 거리를 배회하라고.
거기서 멈춰야 했다.
하지만 난 그럴 수가 없었다.
마치 길들여진 애완견처럼 현태의 말을 거부할 용기가 내게는 없었다.
결국 나는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할머니는 나보다 더 두려운 눈을 하고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누군가가 기다리는 듯했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기다리던 사람이 나라는 걸 직감적으로 눈치챈 듯 할머니는 나에게 다가와 한 손으로 팔을 잡았다.
그러고는 하소연을 털어놓았다.
아픈 손주의, 당장 다음 주에 수술을 받아야 하는 처지의 슬픈 사연.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은 표정으로 할머니는 제발 아이를 돌려 달라 애원했다.
망설임이 생겼다.
이번 한 번만 현태의 말을 안 듣는다면…….
사실 누가 감시하듯 지켜보고 있는 것도 아닐 테니, 그저 할머니를 못 봤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내 가슴속에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는 양심이 고개를 드는 것 같았다.
그래, 그래도 난 인간이잖아.
하지만 그 순간 떠오른 험상궂은 현태의 얼굴.
겨우 솟아나던 용기는 씻은 듯이 사라져 버리고, 마음이 다급해졌다.
얼른 저 가방을 받아야 해!
나는 할머니가 꼭 잡고 있는 돈 가방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다급하기는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 힘없는 모습 어디에 그런 힘이 숨겨져 있었나 모르겠다. 악다구니를 써 대며 손자를 찾는 할머니의 모습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문제가 더욱 커질 것이다. 결심을 굳힌 난 할머니의 가방을 억지로 빼앗았다. 그 기세에 할머니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넘어졌다. 그 와중에도 할머니는 손주를 애타게 부르며 손을 허우적댔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할머니의 표정이 머릿속에서 남아 미칠 것만 같았다. 도대체 현태와 할머니는 무슨 관계였을까?

난…… 살아 있을 자격이 없다.
우연히 보게 된 뉴스에서 며칠 전 내가 저지른 일의 여파를 알 수 있었다.
80대 할머니의 강남대로 보이스 피싱 사기 사건.
범인은 10대 청소년. 할머니를 사기 쳐 손자의 수술비 1,500만 원이 든 가방을 훔쳐 달아났다고 한다.
충격을 받은 할머니는 충격으로 쓰러져 그대로 일어나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
안타까운 사연이 알려지면서 모금 운동이 벌어졌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못했다. 할머니의 뒤를 쫓듯이 손자 역시 수술도 받기 전에 세상을 등지고 만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범죄에 가담한 것이다.
경찰청장의 아들이란 개새끼는 나를 범죄에 이용한 거고.
완벽한 올가미.
이제 와 내가 진실을 말한다 해도 누구 하나 믿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내게 용서받을 자격이 생기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나는 쓰레기다.
놈들과 다를 바 없는…….

* * *

현태가 내 동생에게 한 짓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정말 쓰레기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내 동생은 나쁜 놈일까, 아니면 불쌍한 놈일까?
일기에 쓰여진 대로라면 불쌍한 놈이다. 그리고 의지도 없이 현태의 명령대로 움직여 할머니와 손자를 죽인 나쁜 놈이기도 하다.
최소한의 저항을 했어야 한다.
밟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하지 못한다고 버둥거렸어야 한다. 끽해야 짓밟히기밖에 더 하겠는가.
하지만 동생은 거대한 폭력 앞에 철저하게 무너졌다. 자신을 잃어버렸다. 영혼도 잃어버렸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빈껍데기뿐이었다.
자살을 하지 않았더라도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죄책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놔버렸으니까.
다만…….
동생은 죽음으로 대가를 치렀다.
못난 선택이지만, 인간으로서 더 이상 살아갈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을 테니 이해는 한다.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은 너희들이다.
너희들도 죄의 대가를 치러야지.
너희의 죄는 결코 가볍지 않다.
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것?
그에 대한 처벌은 간단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목숨을 빼앗았으니, 목숨으로 갚으면 된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들은 그저 천우의 목숨만 빼앗은 것이 아니니까.
너희는 천우의 영혼을 타락시키고, 파멸로 몰아갔다.
차라리 총으로 쏴 죽였다면, 칼로 찔렀다면, 망치로 때려죽였다면…… 나도 그저 목숨을 뺏는 것으로 그쳤을 것이다.
육체적인 고통은 잠깐에 불과하니까, 그랬다면 천우도 그리 괴롭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너희는 그러지 않았지. 내 동생을 철저하게 파멸시켰다.
자, 그럼…….
우리도 같은 방법으로 놀아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