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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든


달깍―
집으로 돌아온 천우는 손을 뻗어 거실의 불을 켰다. 천장에서 환한 빛이 들어오며 그의 눈을 찌푸리게 했다.
문을 닫고 운동화를 벗으니, 신발 안에는 잔뜩 빗물이 고여 있다. 2인용 식탁과 냉장고만으로 꽉 차는 거실에 발을 딛자, 물이 뚝뚝 떨어져 바닥이 젖었다.
욕실로 들어가 옷을 벗었다. 속옷과 와이셔츠, 양말, 교복을 세탁기에 넣었다.
산 중턱에 위치한 값싼 반지하의 월세방이라고 하더라도 뜨거운 물은 콸콸 나온다. 목욕탕처럼 물을 잔뜩 받아서 사용해 본 적은 없지만, 샤워를 하는 동안은 뜨거운 물이 끊긴 적은 없었다.
천우로서 등교를 하고 겨우 하루가 지났다.
최악이라 불리는 꼴통 학교에서도 늑대라 불리던 천혁이다. 눈앞에서 칼이 왔다 갔다 해도 꿈쩍도 하지 않을 정도였지만, 대성고는 다른 의미로 정신력의 소모가 심했다.
몸이 축 늘어진다. 뜨거운 물로 씻은 덕분에 찌뿌둥한 육체는 조금씩 활력을 되찾았다.
그는 자리에 앉아서 살생부를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동생의 일기장의 적힌 이름은 무려 백 명이 넘는다. 물론 모두가 악의적으로 동생을 괴롭힌 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분명 동생에게 작게나마 도움을 준 사람들도 있었다.
쉬운 예로 영어 선생인 희연을 들 수가 있었다.
영어 사전처럼 두꺼운 일기장에 딱 한 줄만 적혀 있어서 기억하지 못한 것이다.

영어 선생이 나에게 빵을 줬다.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봤다. 어느 순간부터 이 학교는 나에게 자비롭지 않다. 지옥이나 마찬가지지. 누군가 나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의심스럽다. 또 나의 목을 어떤 식으로 조르려고.
영어 선생은 그런 나의 어깨를 툭 치면서 버티라고 말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정말인가요, 선생님? 지금만 버티면 나는 자유로워질 수 있나요?

그 영어 선생이 희연을 가리키는 말이었구나.
천우는 한쪽 입술을 뒤틀었다. 처음 만남 때부터 지금까지 위화감이 상당하다.
그녀는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내뱉은 말.
부활자.
언데드.
그리고 각성체라고 했던가.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각성체라 불리는 부활자의 업그레이드 단계였다.
즉, 초월적인 감각과 대단한 힘을 가지게 된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소리였다. 그전에 제거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깔려 있는 듯했고.
천우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런 힘도 아직까지는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것인가.
학교에 쓰레기 같은 놈들뿐만 아니라 또 다른 적이 어딘가에서 도사리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얌전히 목을 내밀고 잘라 달라며 넋 놓고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상대가 누구든 이쪽 방식대로 맞춰 가면 된다.
상대가 누구든.
천우는 등교 첫날의 일기장을 덮었다. 그런 후에 동생이 사용하던 스탠드의 불을 끄고는 잠자리에 누웠다.
항상 둘이 사용하던 이불은 이제 혼자만 사용한다.
그 적막감.
그 고독감.
그 외로움은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다시금 살의가 들끓어 오른다. 희연의 말대로 놈들의 사지를 갈가리 찢어발겨서 학교 주변에 뿌리기라도 하지 않으면 가라앉지 않을 살기였다.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 들끓는 핵융합로처럼 전신으로 아드레날린을 주입하자 지쳐 있던 육신이 되살아난다.
“크흐흡.”
입에서 얕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무엇이지? 이 갑작스러운 힘은?
천우의 눈이 창문에서 조금씩 흘러 들어오는 빛을 보았다. 달빛이 그의 전신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는 것이다. 낮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힘이 육신을 휘감았다. 감각은 극도로 예민해졌다. 동시에 놀라울 정도로 욕망이 강해졌다.
아아아아~ 피를 마시고 싶다.
그렇구나.
밤이 되면……
나는 더욱 강해진다.

* * *

자박.
오감이 발달했다는 것은 밤귀도 밝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금 전, 누군가가 현관문을 따고 들어왔다. 딸깍거리는 쇳소리가 천우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전문적인 도둑은 아닌 듯하다. 도둑이었다면 저렇게 거칠게 문을 열지는 않을 테니까.
자박.
다시 발자국 소리.
모두 두 놈이다. 덩치가 큰 사내와 눈매가 날카로운 사내.
끼이익―
방문이 열렸다.
천우는 두 눈을 뜨고 방문으로 들어온 두 명의 사내를 바라봤다. 180센티 정도의 신장에 어깨가 떡 벌어진 건강한 사내들이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얼굴 전체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강도?
아니다. 강도가 뭐 할 짓이 없어서 이렇게 가난으로 찌든 방에 남몰래 들어오겠는가.
그럼 누구?
뭐, 저 사내들의 입을 통해서 알아내면 되겠지.
그러지 않아도 피에 대한 강렬한 갈증 때문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잘됐다.
천우는 씨익 웃었다.
“뭐야? 이 새끼 안 자고 있네?”
덩치가 조금 더 큰 사내가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허리를 반쯤 숙여서 천우의 얼굴을 바라봤다. 나름 어둠에 눈이 적응을 한 모양이다.
순간, 남자의 눈빛에서 살기가 짙어졌다.
역시 이들은 강도가 아니다. 나를 노리고 온 자객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내가 죽어야 할 이유를 머릿속으로 빠르게 찾아봤다. 나에게 당한 놈들 중에 누군가가 이들과 관계가 있다. 결론은 쉽게 도달했다.
이야, 누군지 모르지만 잔인한 새끼다. 겨우 몇 대 맞았다고 킬러를 보내? 자, 그럼 누가 나한테 이자들을 보냈는지 알아보기로 할까?
스륵―
사내는 낚싯줄을 꺼내 가죽 장갑을 낀 손에 동여매더니, 이내 쫙 편다. 그러고는 천우의 목을 향해서 짐승처럼 덤벼들었다.
먹이를 노리듯이, 한 번에 끝장을 내려는 듯이.
“어?”
하지만 사내는 이내 눈을 껌벅일 수밖에 없었다. 분명 눈앞에 사람이 누워 있었는데 감쪽같이 사라진 탓이다.
그는 뒤를 돌아봤다. 함께 온 사내에게 묻기 위함이다.
하지만 뒤에 서 있던 사내 역시 고개를 흔들었다.
“야, 위야. 위에 있어.”
“뭐?”
덩치 큰 사내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천우는 천장에 매달렸다. 거미처럼 거꾸로 매달려서 느긋하게 사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도구를 쓴 것도 아닌데 손바닥과 발바닥에 접착제라도 바른 것처럼 천장에 딱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뭐, 뭐야, 저게?”
사내가 놀라서 외쳤다. 아주 조용히 처리하라고 받은 명령이 머릿속에서 일순간 사라졌다. 지금껏 일을 해오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사람을 다치게 하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의 손에 아킬레스건이 끊긴 사람의 수만 열 명이 넘는다. 인천 앞바다에 직접 수장시킨 놈은 세 명이다. 당연하게도 사람을 죽이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어린놈의 목숨을 뺏는다고 해서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게 왜 자신이 모시는 도련님의 심기를 건드린단 말인가. 알아서 고개를 숙였으면 이런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을.
사내는 뒤처리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미 다 생각을 해두었다.
자살.
품 안에는 미리 써둔 가짜 유언장도 있었다.

저는 한국대에 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포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늘이 무너집니다.
제가 살아온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저 하늘나라에 가서 더 열심히 공부하고 싶습니다. 다음에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야말로 코웃음이 나오는 유언장이었다. 만약 언론에 공개되면 복지 사각지대니 뭐니 말들이 많이 나올 것이다.
전교 1등이란 놈이 가난에 찌들어서 공부를 제대로 못하고 죽었다고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떠들 테니까.
그렇게 되면 여론은 부모에게 돌을 던지겠지.
그럴 바에는 자식새끼 왜 낳았냐고. 그렇게 자신과 도련님은 용의선상에서 빠져나간다.
사실 교살이 아니라 칼로 찔러 죽여도 경찰의 시선이 사내에게 향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런 접점이 없으니까.
그런데…… 이런 황당한 상황은 그들의 계산에는 없었다. 천장에 거미처럼 달라붙을 수 있는 인간이라니.
“누가 보냈나?”
천우가 물었다.
“…….”
사내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가 서로를 쳐다볼 뿐.
이미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한 두 사내는 플랜 A에서 플랜 B로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자살에서 강도를 만난 살해당한 것으로.
강도라면 훨씬 더 용의선상이 넓어지기에 어지간하면 피하고 싶었는데……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지만, 저렇게 천장에 착 달라붙어서 경찰서에 신고라도 한다면 이쪽이 가지는 부담감은 더욱 커진다. 그전에 일을 끝내야 했다.
스르륵―
두 사내가 품속에서 사시미를 꺼냈다. 달빛에 비친 칼날이 새하얗게 빛났다.
“대답을 안 하시겠다?”
“내려와. 그럼 대답을 해주지.”
덩치 큰 사내가 음산하게 말했다. 어차피 상대는 뒈질 목숨이니 이쪽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천우는 두 사내를 번갈아 쳐다봤다.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그러지 않아도 몸속에서 강렬한 살기를 억누를 수가 없는데, 놈들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나를 죽이라고 사주한 놈에게 달려가야겠지. 과연 어떤 개새끼인지…… 면상을 보고 애기해야지.
“그래, 내려가지.”
말과 함께 천우의 몸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덩치 큰 사내가 사시미를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많이 휘둘러 본 솜씨인 듯 전혀 군더더기가 없었다. 목숨을 취하는 데 더없이 효율적인 움직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심각한 판단 착오를 했다. 천우가 천장에 붙어 있을 때 경각심을 가졌어야 한다. 최소한 둘이 같이 공격을 했다면…… 그나마 기회를 가질 수가 있었을 테니까.
사내가 휘두른 사시미는 허공을 갈랐다. 그의 칼보다 천우의 움직임이 훨씬 빨랐다. 천우의 팔이 휘둘러지자 사시미를 들고 있던 사내의 팔이 픽, 소리와 함께 잘려 나갔다.
사내는 자신의 잘린 팔을 멍하니 지켜봤다. 아직 고통은 없기에 현실감이 떨어진다.
이내 그의 잘린 팔이 천우의 이불에 툭, 떨어졌다. 사내의 팔에서 피가 왈칵왈칵 쏟아졌다.
곰팡이 냄새가 조금 나긴 해도 나름 정돈이 잘되어 있던 천우의 방은 순식간에 피로 도배가 되고 말았다.
분수처럼 쏟아진 피는 천우의 온몸도 흠뻑 적셨다.
두근두근.
심장 박동이 강해진다.
이건 뭐지?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동시에 천우의 눈동자가 혈광으로 시뻘겋게 변해갔다.
천우는 긴 혀로 입술에 묻은 피를 핥았다.
아아아아~
참을 수가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