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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학교 (1)



천우는 자신의 팔을 잡아챈 여자를 보았다. 제법 귀여운 얼굴. 눈을 말똥말똥하고 콧날은 뾰족하다. 굳이 칭찬하자면 강아지 웃음이 매력적이다.
천우는 그녀의 가슴께를 보았다. 명찰이 없다. 그러고 보니 교복도 아니다. 사복이다. 투피스 정장. 너무 어려 보이는 외모 탓에 착각을 했는데…… 학생이 아니다.
“당신…… 뭐야?”
천우는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여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였구나.”
“…….”
무슨 소리지? 뭐가 너야?
그녀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얼굴이 콘크리트에 반쯤 갈린 민우가 바닥에 쓰러져서 신음을 흘리고 있다. 혁진과 경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심각한 충격과 고통에 빠져 누군가가 나타났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죽이지는 않았네. 다행이야.”
“…….”
천우는 그녀에게 잡힌 손을 뿌리쳤다.
“어맛, 아파!”
여자는 인상을 쓰며 손목을 매만졌다.
“여자에게 많이 무례하네.”
“당신 누구야?”
천우는 다시 물었다.
“이상하네, 나를 모르다니. 본래 기억을 갖고 있다면 알 텐데. 나야, 나.”
여자는 천우의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정말 자신을 모르냐고 묻는 듯했다.
천우는 조금 당황했다. 학교에 대한 정보는 모두 동생의 일기장을 통해 알아냈다. 그런 까닭에 명찰이 없으면 상대에 대해서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선생이나 교직원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적혀 있었으니 뭔가 특징만 파악하면 알 수 있을 테지만,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 봐도 이 여자에 대해서는 떠올릴 수가 없었다.
“하아, 답답하구만. 너, 밥은 먹고 나왔냐?”
이번에는 여자가 물었다.
“안 먹었다. 왜? 사 주려고?”
참으로 치기 어린 대답이다. 대답을 해놓고도 창피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한심한 문답이라니.
그래서일까, 여자는 배를 잡고 웃었다. ‘이 자식, 어린놈의 새끼가 재미있네’라고 하면서.

천우와 여자는 패스트푸드점에 왔다. 천우는 햄버거 세트 두 개를 시켰다. 이상하게 배가 고파서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에라도 뭔가 쑤셔 넣지 않으면, 사람이라도 잡아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자는 커피 한 잔만 시켰다.
여자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천우는 햄버거를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한꺼번에 삼키고 콜라를 마신다. 그렇게 햄버거 두 개를 게 눈 감추듯이 먹어 치웠다. 그럼에도 배는 여전히 고팠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분명 민우 패거리에게 응징을 가할 때만 해도 끓어오르는 피의 욕망이 가득했는데, 여자의 얼굴을 보자 흥분이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그와 동시에 미처 깨닫지 못한 허기가 몰려왔다.
또한 여자의 말에 순순히 따르는 자신의 모습도 이해 못할 일이었다.
한 대 치면 곧바로 쓰러질 것처럼 가녀린 모습인데, 왠지 그럴 수가 없다.
게다가 왠지 자신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해서 여기까지 따라오기는 했는데…….
천우는 주머니를 뒤졌다.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지폐 두 장.
멀뚱히 바라보자 여자는 피식 웃었다.
“귀여운 구석이 있네. 자.”
여자가 카드를 천우에게 건넸다.
천우는 작정하고는 아예 패밀리 세트를 시켜 버렸다. 최소 4인분이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몽땅 먹어 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아…….”
눈앞의 음식을 모두 먹고 나자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그나저나 누굽니까?”
천우가 물었다.
“참 빨리도 물어본다. 나, 너희 학교 영어 선생님.”
“영어 선생님?”
“그래.”
“이름은?”
“정희연.”
젠장, 역시나 알 수가 없다. 당연하다. 일기장에 한 줄도 적혀 있지 않으니까.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뭐라고 해야 하지?
“제가…… 사고로 머리를 다쳐서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천우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모른 척 딱 잡아떼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희연은 전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한 달간 어디에 있었지?”
희연이 커피를 내려놓았다. 어린 외모답지 않게 우아하게 다리를 꼬았다. 쭉 뻗은 다리에 눈이 절로 간다.
“왜요?”
천우가 되물었다.
자, 잠깐. 또 한 달? 난 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기억이 왔다 갔다 하나 보네.”
“저에 대해서 아는 게 있습니까?”
“아주 조금.”
“뭐에 대해서?”
“음, 너는 네가 뭔지 잘 모르는 것 같네. 뭐, 보통 있는 일이지. 너, 요즘 몸이 이상하지?”
희연은 물끄러미 천우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호감이 담긴 듯했는데, 지금은 눈동자의 빛이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감정도 사라진다.
“어떤?”
“살의가 드글드글 끓고 온몸이 뜨거울 때가 많지? 사람의 피만 보면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맞아?”
“선생님이 그걸 어떻게 알죠?”
질문에 질문이 덧씌워지는 이상한 문답법이 계속됐다.
“다 아는 수가 있지.”
이 여자, 어쩐지 위험하다.
천우의 본능은 어서 여자와 떨어지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감각을 잘 믿지 않았다. 하지만 초월적인 감각을 손에 넣은 이상, 믿지 않으면 손해였다.
그래, 떨어지자.
천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그럼 학교에서 뵐게요.”
“벌써 가려고?”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음, 글쎄다. 할 말은 많지만…… 어째 너는 나와 별로 말을 섞고 싶지 않은 것 같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머리를 다쳐서 좀 힘이 듭니다.”
“힘이 드는 것치고는 잘 싸우던데?”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알았어. 가봐.”
“네, 그럼.”
“아, 천우야.”
천우는 멈칫거렸다. 이곳에 와서 천우라는 이름이 이렇게 부드럽게 들린 적은 처음이었다. 다른 아이들의 입에서 나온 천우라는 이름은 모두 놀잇감에 지나지 않았는데.
“또 무슨 일이시죠?”
“그냥…… 조심하라고.”
“제가 조심할 일이 뭐가 있나요.”
“그냥 뭐든.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라는 말이 있잖아.”
“저는 죄를 짓고 살지 않아서…… 떳떳합니다.”
“아, 그러셔?”
“네.”

천우는 근처 편의점에서 천 원짜리 커피 한 잔을 사 마시며 시간을 때웠다. 창문 밖으로는 여전히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기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곧장 학교에 가지 않는 이유는 별게 없었다. 잠깐 생각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어 선생 정희연이 했던 말, 혁진이 했던 말, 경수가 했던 말 중에서 딱 하나 공통적인 것.
자신이 모르는 한 달의 공백. 아니, 정확히는 보름의 공백이다. 보름이라는 시간이 전혀 기억에 없었다. 좀 더 깊게 파고들어 가면 자신이 왜 이런 몸이 되었는지 알 수 있는 키워드이기도 했다.
뺑소니 운전자 놈이 나를 묻은 것이 전부가 아니란 말인가.
천우는 타임 라인을 구성해 봤다.
차에 치여 외진 곳에 생매장을 당하고, 다시 부활하고.
시간순으로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자, 잠깐만.
그럼 혹시 나는 보름 동안 죽어 있던 것은 아닐까?
깨어나기 전까지의 기억이 없으니까 얼마나 묻혀 있었는지 모르잖아.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아니야. 그럼 내 몸은 썩어서 문드러졌을 텐데. 보름이면 썩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잖아.
도통 뭐가 뭔지 모르겠다. 영어 선생은 뭔가 아는 눈치이던데…….
돌아가서 물어보기에는 어쩐지 껄쩍지근했다. 귀여운 외모와는 다르게 섬뜩한 느낌을 주었기에 웬만해서는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카톡카톡카톡.
“아씨.”
뭔가 중요한 결단을 내리려는데, 아까부터 계속해서 문자가 온다.

― 야, 어디야? 설마 도망간 것은 아니지?

현상태, 이놈은 질리지도 않나. 분명 간다고 얘기했는데.

― 씨발! 너, 내 입술 몇 바늘이나 꿰맸는지 알아? 열두 바늘이야, 열두 바늘! 오늘 너 죽는 꼴을 꼭 봐야겠다. 어디 갔어, 이 새꺄! 도망친 거면 각오해. 지옥 끝까지 쫓아갈 테니까.

현미다.
지독한 년. 눈에 얼마나 시퍼런 독기가 서려 있을지 대충 상상이 간다.
후회된다.
이래서 어중간하면 안 된다. 할 때는 철저하게 짓밟아야 한다.
오늘은 긴 밤이 될 듯하다.
“후우…….”
천우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아무래도 이들에게는 교육이 더 필요한 것 같았다.
세상에는 말로 해서는 안 되는 종자들이 있다. 자근자근 짓밟아 내장까지 터트려야 지들이 잘못한 줄을 알겠지.
카톡카톡카톡.

― 어디야!
― 어디냐고!
― 어디 있어! 대답해, 빙신아!
― 도망치기만 해봐!
― 씨발아! 대답 안 해?

천우는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움직여도 될 시간이었다. 당직을 서는 선생을 빼고는 모두 퇴근했을 것이다. 건물 뒤로 돌아가면 선생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더군다나 비도 세차게 몰아치는 밤. 선생이 밖으로 나올 확률은 거의 없었다.
기다려라.
이제는 온전히 너희들과 나만의 시간이다.
천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쏴아아아아―
비는 여전히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천우는 학교 정문에 도착했다. 정문은 굳게 닫혀 있지만, 교직원들이 드나드는 샛문은 열려 있었다. 학교의 거의 모든 불이 꺼져 있다. 켜져 있는 곳은 교무실과 수위실, 두 곳뿐이다. 비가 쏟아지는 이 밤에 그곳에서 사람이 밖으로 나올 확률은 매우 적다.
천우는 2학년이 사용하는 B동 건물을 바라봤다.
학교는 1학년이 사용하는 A, 2학년이 사용하는 B, 3학년이 사용하는 C동과 체육관, 전산실 건물로 나눠져 있었다. 교무실은 A동에 위치한다. 건물이 ‘ㄷ’ 자 형태로 나눠져 있기에 중앙에 있는 A동에서 B동이나 C동의 건물 뒤편을 보기란 불가능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그것도 비가 거칠게 내리는 날씨이지만, 천우는 건물 옥상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대충 확인할 수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다섯 명. 많으면 여덟 명 정도인 듯했다.
한 반에 서른 명도 안 되는데, 그중에서 나의 죽음을 바라는 새끼들이 1/3이나 되다니.
새삼 기분이 엿 같아진다.
천우는 B동 건물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불이 꺼진 건물 안은 바깥보다 훨씬 어두웠다. 손을 뻗으면 손등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그럼에도 천우의 눈빛은 야생동물처럼 시퍼렇게 빛이 났다. 벽에 붙은 풍경화, 초상화, 역대 교장들의 사진 등이 매우 잘 보인다. 당연히 상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또렷하게 보였다. 마치 열 영상 증폭 장치를 사용해서 전방을 살피는 느낌 같았다.
천우는 계단을 따라 움직였다. 그의 발끝에 빗물이 고인 채 맺힌다.
이윽고 옥상에 다다랐다.
문은 열려 있다.
손잡이를 잡아 돌리자 철을 긁는 기괴한 소리가 옥상 전체에 울려 퍼졌다.
끼이익―
“와우! 씨발 새끼, 진짜 왔네.”
현상태가 천우를 반겼다.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반대편 손에는 담배를 들고.
아이들은 모두 일곱 명. 천우는 한 명씩 명찰을 살폈다.
고현미, 이채연, 성희라, 여학생 셋.
현상태, 김진성, 우진천, 김수만, 남학생 넷.
지긋지긋한 이름들이다.
저들의 이름은 각기 두 번 이상씩 일기장에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