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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 (2)



천우는 현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죽여 버릴 거야! 반드시 끝장을 내고 말 거라고! 야! 야! 어딜 꼴아봐! 당장 무릎 꿇고 빌어. 내 발밑에서 엎드려 빌란 말이야! 이 씨발 놈아!”
현미는 미친년처럼 눈이 뒤집혀서 외쳤다.
“마음대로 해봐.”
천우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왼손으로 그녀의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잡아채 당기면서 오른손으로 따귀를 날렸다.
짜아악―!
날카로운 따귀 소리가 교실 전체에 울렸다. 주변에서 사진을 찍던 아이들이 움찔거렸다. 모두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몸이 얼어붙었다.
아이들은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죽었다 살아난 천우가 혹시 미친 것은 아닌지.
한편, 뺨을 후려맞은 현미의 입술에서는 더욱 많은 피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피가 항상 붙어 다니던 친구들의 하얀 블라우스에 튀었다. 아이들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어떡해, 어떡해. 갈아입을 옷도 없는데…….”
“야, 일단 화장실로 가자. 닦아야지.”
그녀들은 쓰러져 있는 현미를 나 몰라라 한 채 후다닥 교실 밖으로 나갔다. 현미가 도망치듯 움직이는 그녀들을 향해 악다구니를 썼다. 당장 경찰을 부르라며.
미친년, 아직 덜 맞았구나.
천우는 다시 연속으로 현미의 얼굴에 따귀를 날렸다. 그녀의 얼굴이 금방 시뻘겋게 부풀어 올랐다. 본래 예쁘장하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흉측하게 변하고 말았다.
천우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현미의 귀에 들려주었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오로지 현미의 귀에만 들렸다. 그녀의 부운 얼굴이 핼쑥하게 변했다.
“현미야, 이래도 나 고소할 거니?”
천우가 부드럽게 말했다. 달콤한 사베트가 입술을 넘어가듯이.
현미는 아무 말도 못한 채 증오 섞인 눈빛으로 천우를 쳐다봤다.
“큭큭큭, 그 눈빛 좋아. 그럼 생각해 봐. 둘이 같이 사이 좋게 감방에 가도 난 상관없어.”
천우는 다시 손을 들었다. 현미의 턱까지 부러트릴 생각으로.
그때, 누군가가 천우의 팔목을 잡았다. 꽤나 억센 힘이다. 천우가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현상태가 있었다.
“그만하지. 좀 심한 것 같은데 말이야.”
천우는 현상태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의 본질을 꿰뚫고 들어가 보니, 지금 그는 매우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자신이 알던 천우가 아니니까. 지금쯤이면 바닥에 엎드려서 울고 있어야 정상이니까.
만약 그랬다면 이토록 점잖게 자신의 팔을 잡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짜고짜 대걸레 자루부터 휘둘렀겠지.
너도 똑같은 놈이야.
천우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정장 교복을 바로 했다. 손에 묻은 피를 현상태의 교복에 닦자, 현상태의 입술이 삐죽거렸다. 눈매도 살벌하게 변한다.
“이 새끼가 뒈지려고…….”
굳이 현상태의 서열을 정리하자면 교실에서 다섯 번째쯤 될까. 학교에 왜 나오는지 모를 네 명의 쓰레기는 아직 등교 전이었다.
비가 오니 집에서 뭉기적거리겠지.
점심시간이나 돼야 나올 확률이 컸다.
천우는 현상태의 뺨을 잡고 머리를 들이댔다. 둘의 이마에서 쿵, 소리가 난다. 현상태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며 눈살을 찌푸렸다.
“상태야!”
바로 코앞에서 천우가 현상태의 이름을 불렀다. 교실 전체가 쩌렁쩌렁할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아이들이 깜짝 놀라서 그런 둘을 바라봤다.
“상태야!”
더 크게.
현상태가 계속 뒤로 물러난다. 놀란 눈빛이 역력했다. 점점 겁을 먹고 있다. 커다래진 눈동자가 흔들렸다. 천우를 매섭게 바라보던 눈빛이 점점 아래를 향했다.
“우리, 학교 끝나고 축제를 벌일 거잖아? 그렇지?”
천우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대번에 알아차린 상태였다. 다시 옥상에서 뛰어내리겠다는 말.
“정말 할 거냐?”
“내가 미쳤다고 그냥 뛰어내리겠냐. 그러다 죽으면 누구 좋으라고? 번지점프할 거다.”
옥상에서 번지점프라고?
그것 역시 미친 생각이다.
하지만 상태는 혹여 딴소리가 나올까 싶어 재차 물었다.
“정말 할 거지? 나중에 다른 말 하면 안 된다.”
“내가 왜 다른 말을 해? 한다고 했잖아. 어쨌든 내기나 하지 그래? 번지점프든 뭐든 내가 뛰어내리면…….”
“뛰어내리면?”
상태가 조심스레 물었다.
왕따를 멈춰 달라는 얘기인가?
“나한테 이천만 원 가지고 와.”
“뭐?”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못 들었어? 내가 뛰어내리면 이천만 원 가지고 오라고.”
“내가 왜?”
“내가 목숨을 거는데…… 너희도 뭔가 걸어야지. 니들 돈 많잖아. 걸어, 돈.”
“못 뛰어내리면?”
“그땐 너희들이 알아서 해.”
“그래, 좋아. 씨발 새끼. 내가 잘 아는 장기 매매 업자가 있거든? 만약 못하면 네 속에 든 순대를 모조리 팔아버릴 거야. 불만 없지?”
“오호, 그런 사람들도 알아? 좋아, 팔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 그러니까 수업 끝날 때까지는 좀 조용히 있자.”
그제야 천우는 현상태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그러더니 가장 뒷자리로 가서 털썩 앉았다.
그가 이천만 원을 요구한 이유는…… 동생이 저놈한테 천만 원이란 돈을 반년 사이에 뜯겼기 때문이다.
천만 원. 자신의 집안 형편으로는 상상도 못할 거금이다. 그것을 마련하기 위해서 동생은 가지고 있는 인생을 팔아버렸다.
끝없는 추락의 시작이다.
그럼 너도 뱉어내야지.
최소한 천 배 이상으로.
이천만 원은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너도 이제 똑같이 인생의 추락을 맛보여주지.
현상태는 가장 뒤에 앉은 천우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일진 애들이 오면 저 거만한 자세도 끝날 것이다.
지금이야 죽기 살기로 발악을 하고 있는 것일 테지. 그래, 예전의 로이처럼. 그 새끼도 막판에 저렇게 미쳐서 날뛰었다.
상태가 보기에 천우의 행동은 죽기 전의 발악이나 다를 게 없었다. 이번에는 확실히 지켜볼 생각이다. 괜한 유서라도 써놓고 뒈지면 골치 아파지니까.
“야, 얘 어서 양호실로 데리고 가든지, 병원으로 데리고 가. 찡찡거리는 거 시끄러워 죽겠다.”
상태는 현미의 엉덩이를 발등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현미는 피가 흘러내리는 입술을 손수건으로 막은 채 매섭게 상태를 바라봤다. 손수건은 이미 피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뭘 봐? 넌 가서 입술이나 꿰매. 저 새끼는 내가 담글 테니까. 궁금하면 저녁에 구경이나 오고.”
“개새끼.”
현미는 분노를 짓씹으며 교실에서 나가 버렸다.
그제야 폭풍처럼 몰아치던 교실에서의 긴장감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 * *

민우는 교실에 들어가지 못했다. 교문 밖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분을 이기지 못해 씩씩거렸다. 태어나서 이렇게 분한 적은 처음이었다. 상대가 학교 일진이나 지성, 현태, 영목이 같은 아이들이었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다름 아닌 천우였다.
대성 고등학교 공식 지정 왕따.
얼마 전에는 혼자서 훌쩍거리다가 옥상에서 뛰어내린 병신.
당시 그 새끼가 유서에 자신의 이름을 썼을까 봐 얼마나 노심초사했던가. 친구들이 좆됐다는 말을 할 때는 뒷목이 서늘하기도 했다.
개새끼, 유서에 내 이름을 적어놓기만 해봐. 가족한테 찾아가서 손해배상 청구할 테니까. 이 나라에서 못 살게 만들어 버릴 거야.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그 새끼는 죽지 않았다.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 정도로 해서는 안 죽는다는 것도 알았다. 그럼 이제 마음껏 데리고 놀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학교로 돌아온 녀석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뭐, 나한테 매달 30만 원을 가지고 오라고? 미친 개새끼. 죽여 버릴 테다. 반드시 오늘 놈을 저 창문 밖으로 던져 버릴 거야.
민우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딩동딩동―
점심시간의 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점심시간까지 나한테 돈을 가져오라고? 웃기는 개소리 하고 앉아 있네. 이번에는 네 면상에다 담뱃불을 지져 주지.
마침 경수와 혁진이 그의 앞을 지나쳤다. 반쯤 구겨진 우산을 쓰고는.
저런 우산을 쓰니 비는 비대로 맞고, 짜증은 짜증대로 나지.
“경수야, 혁진아.”
민우는 반에서 가장 많이 어울려 다니는 경수와 혁진을 불렀다. 아침에 천우에게 당하고 나서 저들한테 가장 먼저 전화를 걸었다.
이 녀석들은 지성이나 현태, 영목과 같은 일진이 아니다. 하지만 일진 녀석들도 이 둘은 잘 건드리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다. 특별한 점도 없다. 머리 염색도 하지 않았고, 피어싱도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둘에게는 머리에 총을 맞은 것 같은 똘기가 있었다. 경수는 하도 본드를 불어 대서 뇌가 살짝 맛이 갔다. 아마 반쯤 뇌가 녹지 않았을까 싶은 상태에서 학교 성적은 민우보다 뛰어나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혁진도 마찬가지. 저 새끼는 손버릇이 고약하다. 하도 물건들을 훔쳐서 별명이 대도였다. 자기는 집 한 채 값은 될 정도의 물건들을 훔쳤다고 하는데, 민우가 보기에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래도 수천만 원 어치는 되는 것 같다. 일진들이 그를 안 건드리는 이유는 콩고물이 많이 떨어지는 때문이다.
그렇다고 둘 모두 일진들에게 굽실거리는 것은 아니었다. 일진들과 어울리지 않을 뿐이지, 싸움 실력은 충분했다.
“아침부터 왜 전화질이야? 너 때문에 잠 못 잤잖아.”
경수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민우를 바라봤다. 재밌는 일이라도 있냐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도대체 학교에는 왜 나오니?
“누구 좀 까러 가자.”
“누구?”
“천우 새끼.”
“천우?”
“응.”
“대성고 대표 왕따?”
“맞아.”
“일없다. 전교생이 그 새끼 괴롭히는데, 내가 거기에 꼭 껴야 되겠냐. 차라리 좀 쌈박한 애 좀 찾아봐라. 조금 가르치면 내 앞에서만 개 흉내를 낸다든지.”
“걔가 우리 주머니인 것은 알지?”
“그거야 당연. 아, 그 새끼…… 돈 안 가져왔어? 안 되는데. 오늘 유리랑 데이트 있는데.”
경수가 허리를 앞뒤로 마구 흔들었다. 그걸 보던 혁진이도 벽을 잡고 허리를 흔든다.
미친놈들. 저런 정신 나간 행동을 하는데도 여자애들은 죽자 살자 저놈들한테 달라붙는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이젠 돈 없단다.”
천우가 자신에게 돈을 가져오란 말은 뺐다.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쪽팔린 소리를 하지 못하겠다.
민우는 생각했다. 아침에는 그 새끼가 미쳐서 날뛰긴 했지만, 지금쯤은 엄청 쫄아 있을 것이다. 여기는 학교다. 그 자식의 편이 돼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모르긴 해도 2―A반에 도착하는 즉시 다구리를 당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민우에게 더 이상 기회가 없을지도.
“뭐? 돈이 없어? 그러면 안 되지. 우리의 지갑이 돈이 없으면 지갑으로서 구실을 못하게 되는 거잖아.”
“어쨌든, 그 새끼 돈이 없단다. 아니, 이제 돈 내기 싫단다. 아무래도 손을 봐줘야겠지?”
“그런 씨부럴 새끼가! 내가 손을 안 대니까 방구로 보나 보네. 가자, 그 새끼 잡으러.”
민우는 씨익 웃었다.
아침에 잘도 잘난 듯이 지껄였겠다? 지금도 똑같은 소리를 지껄일 수 있나 한 번 봐주지.
민우는 담뱃불을 바닥에 던졌다. 빗물에 담뱃불이 저절로 꺼졌다.
그때!
교문 사이로 천우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