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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 (1)
주변은 빗소리와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에 시끄럽다. 오늘따라 한층 더 소음이 심한 듯했다.
천우는 몸에 묻은 빗물을 털어냈다. 젖어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위로 쓸어 올렸다. 닦을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어쩐지 온몸에 화력발전소가 있어서 젖은 몸을 말려주고 있는 듯했으니까. 조금만 더 화력이 셌다면 몸에서 연기가 풀풀 났을지도 모른다.
천우는 교실 앞에서 멈췄다.
2―A반.
동생의 인생이 끝장난 곳이자, 고통스런 청춘이 고스란히 묻혀 있는 곳.
자, 가볼까. 뒤틀린 너의 인생을 바로 잡으러.
각오를 다진 천우는 교실 문을 열었다.
“으음…….”
그는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퍼퍼퍼펑!
갑작스러운 폭죽 세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여러 곳에서 폭죽이 터졌다. 여기저기서 입을 모아 ‘따다단 딴딴따, 서프라이즈!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의 건강을 축하합니다’라고 노래를 불러 댄다.
긴 생머리, 귀염성이 가득 붙은 동그란 눈, 하얀 치아, 한쪽 볼의 인상적인 보조개를 가진 여자아이가 천우에게 다가와 하와이에서나 볼 법한 꽃목걸이를 걸어주었다.
누가 보면 학교에 놀러온 줄 알겠네. 왜 이러는 건데?
천우는 무덤덤한 얼굴로 2―A반 아이들을 훑어보았다. 무척이나 잘생긴 얼굴의 아이가 다가오더니 천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야, 반갑다, 친구야. 이렇게 얼굴을 보니까 새삼 네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잘생긴 아이는 웃었다.
명찰을 슬쩍 본다. 이름은 현상태.
옥상에서 뛰어내리라는 메시지를 남긴 새끼. 일기장에도 현상태라는 이름은 어김없이 등장했다.
악질 중의 악질.
결과적으로 넌 사형.
짝짝짝짝―
그러는 사이, 주변으로 몰려든 아이들이 박수를 쳤다.
“축하해! 천우야!”
“네가 영웅이다. 우리 모두를 살렸어!”
“내 공부 좀 봐줘. 네가 가르쳐 주면 귀에 쏙쏙 들어오더라고.”
“점심 같이 먹을까? 우리 같이 먹은 적 없지? 이제 종종 같이 먹자. 우리는 친구 아이가.”
아이들이 웃으면서 한마디씩 한다.
더러운 가식들.
우웁.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이 밀려왔다. 속이 뒤집힌다. 수천 마리의 지네가 배 속을 자글자글 갉아 먹고 있는 느낌이었다. 당장에라도 이 새끼들의 머리채를 잡고서 저 창문 밖으로 내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참자.
축제는 오늘 수업이 끝나고 해가 진 후에 시작이다.
꽃목걸이를 걸어준 아이가 다가왔다. 아이는 천우의 가슴에 손을 댔다. 눈동자는 비가 내리는 연못 위에 내려앉은 파랑새처럼 파르르 떨렸다. 천우를 보며 노골적으로 유혹한다.
명찰을 바라봤다.
고현미.
일기장에 가장 많이 나오는 여자 중 한 명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내는 모른다고 하더니, 딱 그 짝이었다.
이 여자는…….
씨발, 쌍것이다.
동생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쌍년이었다. 일기장에 적인 현미란 이름 때문에 당분간 현미를 먹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왕따다. 심각할 정도로.
형에게 걱정을 시킬까 봐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형도 나만큼 걱정이 많은 사람이니까.
형은 내가 공부를 잘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왕따라고 말을 하지 못하겠다.
내가 참으면 된다. 이제 겨우 1년 반만 참으면 된다.
한국대학교에 가면 모든 악몽은 사라질 것이다. 그래, 가자. 한국대학교에. 대한민국 최고라는 한국대학교에 가면 나는 해방될 것이다.
이 지긋지긋한 지옥에서.
언제부터인가 현미가 나에게 다가온다. 나긋나긋. 그 아이의 샴푸 냄새가 좋다. 가까이 다가와서 나에게 수학 문제를 물어볼 때면 황홀하기까지 했다.
현미는 내게 여자 친구가 있냐고 물었다.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이 아이는 내가 어떤 꼴을 당하고 사는지 모르는 건가.
현미와 나는 놀랄 만큼 친해졌다. 다른 이가 보면 사귀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인생이 달라졌다. 학교 가는 게 기대되기는 처음이었다. 아이들의 괴롭힘은 여전히 지속되었지만, 그쯤은 참아낼 수 있었다. 현미만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현미가 말했다.
자신을 사랑한다면 멋지게 프러포즈를 해달라고.
모두가 알 수 있게, 우리 둘의 사랑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 달라고.
그래, 너를 위해서라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
나는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꽃다발을 들고.
가슴이 미치도록 뛰었다. 아마도 태어나서 이만큼이나 떨린 적은 없던 것 같다. 옥상 문을 조금 열어봤다.
언제나 일진 애들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다행히 오늘은 없었다. 깨끗했다. 바닥에 담배꽁초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다.
나는 옥상에 서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내가 여기에 서 있는 것을 몇몇 학생들이 보았다.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어쩐지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외쳤다.
현미야! 사랑해! 내 사랑을 받아줘!
그리고 그 순간이 절망으로 빠져드는 첫걸음이었다.
현미가 나를 봤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 하지만 감격에 젖은 모습은 아니다. 차라리 그 표정은…….
나는 이때 깨달아야 했다, 어차피 이 학교에 내 편을 들어줄 이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현미는 바닥에 주저앉아서 서럽게 울었다. 몇몇 아이들이 다가와서 그런 그녀를 달래준다.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욕설을 내뱉는다.
과거 역도를 했다는 체육 선생 지춘수와 배구 선수였다던 엄형태가 옥상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그들은 다짜고짜 나의 멱살을 잡고 따귀를 때렸다.
입술이 찢어졌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나는 선생들에게 머리채를 잡혀 질질 끌려갔다. 그러면서도 이해를 할 수 없어 현미만을 바라봤다.
그리고 나는 보고 말았다.
엉엉 울던 현미가 멀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웃고 있는 것을.
아~ 바보처럼.
나는 또 속았구나.
선생들에게 죽도록 맞았다.
대성고는 대한민국 우수 학교로 선정된 곳이다. 학교 폭력은 몇 년간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들끼리 욕설을 하는 모습도 없었다. 밝고 건강한 얼굴만 세상에 알려져 있다.
그럼 나는 뭔데.
매일 죽도록 얻어맞는 나는 이 학교 학생이 아닌가.
하도 맞아서 엉덩이의 살점이 터지고 말았다. 피가 교복에 엉겨 붙었다. 체육선생 지춘수는 그런 나의 엉덩이에 침을 발라주더니 엄형태와 낄낄거리며 비웃었다.
씨발 것들.
니들이 선생이냐!
하체가 마비가 된 것 같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이끌고 교실로 돌아왔다. 아이들이 나를 위해서 노래를 불러줬다.
나는 현미를 바라봤다.
왜 그랬어?
현미는 나를 보고 싱긋 웃었다.
그러더니 거친 욕설을 토해냈다.
병신 새끼, 당연한 것 아냐? 감히 너 따위가 날 넘볼 수 있을 것 같았어?
나는 절망했다.
다시금 끝없는 지옥의 불구덩이로 빠져들었다.
세상은 나를 반기지 않는다.
일기장에 적힌 현미에 대한 글이었다.
그 내용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천우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분노가 끓어올랐다. 당장 손을 뻗어서 저년의 목을 잡고 툭 분질러 버리고 싶다.
손만 뻗으면, 손만 뻗으면 닿는다.
“너, 나 원망 많이 했지?”
현미는 다짜고짜 천우의 가슴에 안겼다. 동생이 느꼈을 그 샴푸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녀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면, 정말로 아찔한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수컷을 유혹하기 위한 암컷의 페르몬이다.
“네가 유서에 내 이름을 적지 않았다고 들었어. 정말이야? 너무 고마워. 나는 네가 날 미워하는 줄 알았어.”
유서?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동생아, 너는 유서를 남긴 거니? 그런데 왜 나는 그걸 보지 못했지?
아무래도 유서에 대해서 알아봐야겠다.
“화 풀 거지?”
현미는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천우를 바라보았다. 뭔가 잔뜩 바라는 눈빛이었다.
“키스해!”
“키스해!”
“키스해!”
아이들이 열광적으로 외쳐 댔다.
그 함성과도 같은 소리가 천우의 피를 차갑게 식혔다.
현미는 천우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췄다.
“와아아아!”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자 현미는 자신만만하게 엄지손가락을 척 내밀었다. 흥분한 아이들이 사진을 마구 찍기 시작했다.
순간, 현미가 천우에게서 떨어지며 자신의 상의를 찢으려 들었다.
그래, 그렇겠지.
그거야 대충 예상을 했지.
니들의 더러운 수작 따위에 말려들 내가 아니다.
그 순간, 현미도, 아이들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쭈우우욱.
현미의 아랫입술이 벌건 속살을 드러내며 찢겨져 나간 것이다.
교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아이들이 두 눈을 껌벅껌벅거렸다.
뚝뚝뚝뚝―
현미의 입술에서 쉴 새 없이 피가 떨어졌다. 입술은 너덜너덜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마치 흉측한 마녀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현미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바닥에 피가 떨어지고…….
곧 극심한 아픔이 밀려왔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겨우 뻗어서 아랫입술을 매만졌다. 손가락에 잔뜩 피가 묻어났다.
“피…… 피? 이게 내 피라고?”
현미는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꺄악! 저 새끼가! 저 새끼가 내 입술을 물어뜯었어! 고소할 거야! 너, 이 새끼, 내가 꼭 고소할 거야!”
천우는 차가운 눈으로 현미를 바라봤다. 질겅질겅, 그는 껌처럼 뭔가를 씹고 있었다.
퉤―
현미의 아랫입술이 천우의 이빨에 짓뭉개진 채 바닥에 떨어졌다.
그런 후, 천우는 한쪽 무릎에 손을 대고 현미와 눈을 맞췄다. 뱀처럼 차가워진 그의 눈빛이 발작을 일으키던 현미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맛없어.”
“……뭐?”
“네 살집은 네년만큼이나 맛이 없다고.”
“이 개새끼……. 너는 이제 끝장이야. 콩밥 먹을 줄 알아. 감히 내 입술을 이렇게 만들어? 넌 끝장이야!”
주변은 빗소리와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에 시끄럽다. 오늘따라 한층 더 소음이 심한 듯했다.
천우는 몸에 묻은 빗물을 털어냈다. 젖어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위로 쓸어 올렸다. 닦을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어쩐지 온몸에 화력발전소가 있어서 젖은 몸을 말려주고 있는 듯했으니까. 조금만 더 화력이 셌다면 몸에서 연기가 풀풀 났을지도 모른다.
천우는 교실 앞에서 멈췄다.
2―A반.
동생의 인생이 끝장난 곳이자, 고통스런 청춘이 고스란히 묻혀 있는 곳.
자, 가볼까. 뒤틀린 너의 인생을 바로 잡으러.
각오를 다진 천우는 교실 문을 열었다.
“으음…….”
그는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퍼퍼퍼펑!
갑작스러운 폭죽 세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여러 곳에서 폭죽이 터졌다. 여기저기서 입을 모아 ‘따다단 딴딴따, 서프라이즈!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의 건강을 축하합니다’라고 노래를 불러 댄다.
긴 생머리, 귀염성이 가득 붙은 동그란 눈, 하얀 치아, 한쪽 볼의 인상적인 보조개를 가진 여자아이가 천우에게 다가와 하와이에서나 볼 법한 꽃목걸이를 걸어주었다.
누가 보면 학교에 놀러온 줄 알겠네. 왜 이러는 건데?
천우는 무덤덤한 얼굴로 2―A반 아이들을 훑어보았다. 무척이나 잘생긴 얼굴의 아이가 다가오더니 천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야, 반갑다, 친구야. 이렇게 얼굴을 보니까 새삼 네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잘생긴 아이는 웃었다.
명찰을 슬쩍 본다. 이름은 현상태.
옥상에서 뛰어내리라는 메시지를 남긴 새끼. 일기장에도 현상태라는 이름은 어김없이 등장했다.
악질 중의 악질.
결과적으로 넌 사형.
짝짝짝짝―
그러는 사이, 주변으로 몰려든 아이들이 박수를 쳤다.
“축하해! 천우야!”
“네가 영웅이다. 우리 모두를 살렸어!”
“내 공부 좀 봐줘. 네가 가르쳐 주면 귀에 쏙쏙 들어오더라고.”
“점심 같이 먹을까? 우리 같이 먹은 적 없지? 이제 종종 같이 먹자. 우리는 친구 아이가.”
아이들이 웃으면서 한마디씩 한다.
더러운 가식들.
우웁.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이 밀려왔다. 속이 뒤집힌다. 수천 마리의 지네가 배 속을 자글자글 갉아 먹고 있는 느낌이었다. 당장에라도 이 새끼들의 머리채를 잡고서 저 창문 밖으로 내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참자.
축제는 오늘 수업이 끝나고 해가 진 후에 시작이다.
꽃목걸이를 걸어준 아이가 다가왔다. 아이는 천우의 가슴에 손을 댔다. 눈동자는 비가 내리는 연못 위에 내려앉은 파랑새처럼 파르르 떨렸다. 천우를 보며 노골적으로 유혹한다.
명찰을 바라봤다.
고현미.
일기장에 가장 많이 나오는 여자 중 한 명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내는 모른다고 하더니, 딱 그 짝이었다.
이 여자는…….
씨발, 쌍것이다.
동생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쌍년이었다. 일기장에 적인 현미란 이름 때문에 당분간 현미를 먹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왕따다. 심각할 정도로.
형에게 걱정을 시킬까 봐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형도 나만큼 걱정이 많은 사람이니까.
형은 내가 공부를 잘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왕따라고 말을 하지 못하겠다.
내가 참으면 된다. 이제 겨우 1년 반만 참으면 된다.
한국대학교에 가면 모든 악몽은 사라질 것이다. 그래, 가자. 한국대학교에. 대한민국 최고라는 한국대학교에 가면 나는 해방될 것이다.
이 지긋지긋한 지옥에서.
언제부터인가 현미가 나에게 다가온다. 나긋나긋. 그 아이의 샴푸 냄새가 좋다. 가까이 다가와서 나에게 수학 문제를 물어볼 때면 황홀하기까지 했다.
현미는 내게 여자 친구가 있냐고 물었다.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이 아이는 내가 어떤 꼴을 당하고 사는지 모르는 건가.
현미와 나는 놀랄 만큼 친해졌다. 다른 이가 보면 사귀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인생이 달라졌다. 학교 가는 게 기대되기는 처음이었다. 아이들의 괴롭힘은 여전히 지속되었지만, 그쯤은 참아낼 수 있었다. 현미만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현미가 말했다.
자신을 사랑한다면 멋지게 프러포즈를 해달라고.
모두가 알 수 있게, 우리 둘의 사랑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 달라고.
그래, 너를 위해서라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
나는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꽃다발을 들고.
가슴이 미치도록 뛰었다. 아마도 태어나서 이만큼이나 떨린 적은 없던 것 같다. 옥상 문을 조금 열어봤다.
언제나 일진 애들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다행히 오늘은 없었다. 깨끗했다. 바닥에 담배꽁초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다.
나는 옥상에 서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내가 여기에 서 있는 것을 몇몇 학생들이 보았다.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어쩐지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외쳤다.
현미야! 사랑해! 내 사랑을 받아줘!
그리고 그 순간이 절망으로 빠져드는 첫걸음이었다.
현미가 나를 봤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 하지만 감격에 젖은 모습은 아니다. 차라리 그 표정은…….
나는 이때 깨달아야 했다, 어차피 이 학교에 내 편을 들어줄 이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현미는 바닥에 주저앉아서 서럽게 울었다. 몇몇 아이들이 다가와서 그런 그녀를 달래준다.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욕설을 내뱉는다.
과거 역도를 했다는 체육 선생 지춘수와 배구 선수였다던 엄형태가 옥상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그들은 다짜고짜 나의 멱살을 잡고 따귀를 때렸다.
입술이 찢어졌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나는 선생들에게 머리채를 잡혀 질질 끌려갔다. 그러면서도 이해를 할 수 없어 현미만을 바라봤다.
그리고 나는 보고 말았다.
엉엉 울던 현미가 멀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웃고 있는 것을.
아~ 바보처럼.
나는 또 속았구나.
선생들에게 죽도록 맞았다.
대성고는 대한민국 우수 학교로 선정된 곳이다. 학교 폭력은 몇 년간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들끼리 욕설을 하는 모습도 없었다. 밝고 건강한 얼굴만 세상에 알려져 있다.
그럼 나는 뭔데.
매일 죽도록 얻어맞는 나는 이 학교 학생이 아닌가.
하도 맞아서 엉덩이의 살점이 터지고 말았다. 피가 교복에 엉겨 붙었다. 체육선생 지춘수는 그런 나의 엉덩이에 침을 발라주더니 엄형태와 낄낄거리며 비웃었다.
씨발 것들.
니들이 선생이냐!
하체가 마비가 된 것 같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이끌고 교실로 돌아왔다. 아이들이 나를 위해서 노래를 불러줬다.
나는 현미를 바라봤다.
왜 그랬어?
현미는 나를 보고 싱긋 웃었다.
그러더니 거친 욕설을 토해냈다.
병신 새끼, 당연한 것 아냐? 감히 너 따위가 날 넘볼 수 있을 것 같았어?
나는 절망했다.
다시금 끝없는 지옥의 불구덩이로 빠져들었다.
세상은 나를 반기지 않는다.
일기장에 적힌 현미에 대한 글이었다.
그 내용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천우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분노가 끓어올랐다. 당장 손을 뻗어서 저년의 목을 잡고 툭 분질러 버리고 싶다.
손만 뻗으면, 손만 뻗으면 닿는다.
“너, 나 원망 많이 했지?”
현미는 다짜고짜 천우의 가슴에 안겼다. 동생이 느꼈을 그 샴푸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녀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면, 정말로 아찔한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수컷을 유혹하기 위한 암컷의 페르몬이다.
“네가 유서에 내 이름을 적지 않았다고 들었어. 정말이야? 너무 고마워. 나는 네가 날 미워하는 줄 알았어.”
유서?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동생아, 너는 유서를 남긴 거니? 그런데 왜 나는 그걸 보지 못했지?
아무래도 유서에 대해서 알아봐야겠다.
“화 풀 거지?”
현미는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천우를 바라보았다. 뭔가 잔뜩 바라는 눈빛이었다.
“키스해!”
“키스해!”
“키스해!”
아이들이 열광적으로 외쳐 댔다.
그 함성과도 같은 소리가 천우의 피를 차갑게 식혔다.
현미는 천우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췄다.
“와아아아!”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자 현미는 자신만만하게 엄지손가락을 척 내밀었다. 흥분한 아이들이 사진을 마구 찍기 시작했다.
순간, 현미가 천우에게서 떨어지며 자신의 상의를 찢으려 들었다.
그래, 그렇겠지.
그거야 대충 예상을 했지.
니들의 더러운 수작 따위에 말려들 내가 아니다.
그 순간, 현미도, 아이들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쭈우우욱.
현미의 아랫입술이 벌건 속살을 드러내며 찢겨져 나간 것이다.
교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아이들이 두 눈을 껌벅껌벅거렸다.
뚝뚝뚝뚝―
현미의 입술에서 쉴 새 없이 피가 떨어졌다. 입술은 너덜너덜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마치 흉측한 마녀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현미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바닥에 피가 떨어지고…….
곧 극심한 아픔이 밀려왔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겨우 뻗어서 아랫입술을 매만졌다. 손가락에 잔뜩 피가 묻어났다.
“피…… 피? 이게 내 피라고?”
현미는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꺄악! 저 새끼가! 저 새끼가 내 입술을 물어뜯었어! 고소할 거야! 너, 이 새끼, 내가 꼭 고소할 거야!”
천우는 차가운 눈으로 현미를 바라봤다. 질겅질겅, 그는 껌처럼 뭔가를 씹고 있었다.
퉤―
현미의 아랫입술이 천우의 이빨에 짓뭉개진 채 바닥에 떨어졌다.
그런 후, 천우는 한쪽 무릎에 손을 대고 현미와 눈을 맞췄다. 뱀처럼 차가워진 그의 눈빛이 발작을 일으키던 현미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맛없어.”
“……뭐?”
“네 살집은 네년만큼이나 맛이 없다고.”
“이 개새끼……. 너는 이제 끝장이야. 콩밥 먹을 줄 알아. 감히 내 입술을 이렇게 만들어? 넌 끝장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