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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으로 회귀



“으으윽.”
흙구덩이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천혁은 억눌린 신음성을 토해냈다.
분명 마지막 기억은 시야 가득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들어왔고, 자신은 둔중한 충격과 함께 의식을 잃어갔다.
마지막 순간에 들려온 두 남녀의 대사는 자신이 사고를 당했음을 증명해 주었다.
한데 이상하게도 몸이 멀쩡하다.
분명 뒤틀린 사지와 기형적으로 꺾인 목의 기억이 생생했는데…….
마치 한바탕 꿈이라도 꾼 듯한 기분이다.
아니, 차라리 이 모든 것이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집으로 돌아가면 언제나처럼 동생이 저녁을 차려놓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구수한 김치찌개의 내음과 뽀얀 김이 피어오르는 하얀 쌀밥. 풍족하지는 않지만 두 사람이 먹기에 전혀 과하지 않을 식탁 위에서, 언제나처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하지만…… 역시 이것은 꿈이 아니다.
이 낯선 곳, 차갑게 와닿는 주변 공기는 지금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냉정하게 말해준다.
그렇다면 여기에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이성을 잃고 뛰어나오기는 했지만, 천우는 아직도 차가운 영안실 침대 위에 쓸쓸히 누워 있을 것이다.
그래선 안 된다.
비록 못난 형이지만…… 마지막 가는 길, 끝까지 보아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이 미치자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천혁은 지체 없이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헤맨 끝에 산을 내려온 천혁은 길게 뻗어진 도로를 발견했다. 표지판을 보니 양평 어딘가였다.
동생을 보기 위해서는 먼 길을 걸어가야 할 듯하다.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새삼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이게 다 그 뺑소니 운전자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사법연수생이라고? 기가 막혀서. 그런 놈이 술을 먹고 운전한 것도 모자라 사람을 생매장해?
어이가 없다 못해서 화가 머리끝가지 치밀어 올랐다.
이미 차 번호는 외워뒀다.
동생과의 만남을 갈라놓은 놈.
너는 절대 나에게서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천혁은 도로 위를 터벅터벅 걸었다. 외지이기도 하고 부슬부슬 비고 오고 있어 통행하는 차량은 거의 없었다. 종종 지나치는 차량을 향해 손을 들어보았지만, 한 대도 서지 않는다. 그냥 지나친다.
인심 한 번 더럽네.
할 수 없이 천혁은 뛰었다. 최소한 버스 정류장이 보이는 곳까지 뛸 생각이었다.
그런데…….
천혁은 희한한 일을 경험했다. 자신의 다리가 허공으로 붕붕 뜨기 시작하는 것이다. 정말이다. 그는 한 발을 내딛을 때마다 족히 몇 미터 이상은 뛰어넘었다.
그다지 운동은 좋아하지 않았는데, 육상부 애들만큼 빠른 듯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방울이 따가울 정도로 얼굴에 부딪쳤다. 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쳤다. 휙휙 소리는 그의 답답했던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어주는 것 같았다.
힐끗 뒤를 돌아봤다.
전력으로 수킬로미터를 뛰었다. 예전에는 100미터를 전력으로 뛰고 나면 숨이 차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는데…….
800미터를 뛰면 아예 드러누워서 거친 숨을 헐떡거릴 정도였다.
그런 자신이 100미터를 달리는 속도로 수킬로미터를 질주했다고?
이게 말이 돼?
주위를 돌아봤다. 누군가 지나가고 있다면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이게 말이 돼냐고.
그는 자신의 어금니가 뾰족하게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 * *

양평가도의 외진 구석.
어둠 속에서도 불을 밝힌 편의점 앞에는 수십 대의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었다.
평소 경춘국도 근처는 라이더들의 천국이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면 자전거를 타거나 고급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들이 거리에 가득하다.
그만큼 길이 잘 닦여 있기도 하고, 아름다운 볼거리가 많기도 하다. 물론 먹거리도 많았다.
하나 지금은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데다 밤도 늦은 터였다. 이런 날씨에는 라이더들이 움직이지 않는다.
게다가 정차되어 있는 오토바이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보통 라이더들과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일단 안전장치가 하나도 없고, 하나같이 쇼바를 올리고 화려하게 치장을 했다.
폭주족들이다.
천혁은 잠시 긴장했다.
현재 자신의 몰골은 정상이 아니었다.
와이셔츠와 바지는 핏자국과 흙으로 뒤범벅이었다. 얼굴도 마찬가지. 비가 내리고 있지만, 지저분한 모습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차를 얻어 타기란 그야말로 꿈같은 일이었다.
화장실로 가서 대충이나마 얼굴과 머리, 옷에 묻은 피와 흙을 씻어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편의점 앞에 진을 치고 있는 폭주족들이 문제였다. 오토바이에서 터져 나오는 요란한 엔진 소리가 무척이나 위협적으로 들렸다.
과연 이놈들 사이를 지나가야 하나? 왠지 시비가 붙을 것 같은데…….
잠시 다른 곳을 갈까, 고민을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편의점은 이곳 한 군데밖에 보지 못했다. 또 얼마나 걸어야 편의점이 나올지 알 수가 없다.
천혁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
그는 폭주족 사이를 유유히 걸어갔다. 그러자 자기들끼리 킥킥거리던 폭주족의 웃음이 뚝 멈췄다. 그들은 마치 이상한 생물을 보듯이 천혁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모두의 얼굴에서 ‘감히’라는 표정이 엿보였다.
하지만 천혁은 거칠 것 없이 그들 사이를 지나쳤다.
대개 일진, 폭주족, 조폭 같은 부류들은 약한 자의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다. 거의 본능적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였다.
눈앞의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약하게 보이면 더 심하게 괴롭힌다. 절대 이놈들에게 굴복해서는 안 된다. 굴복하는 순간, 뼛골까지 빼 먹힌다.
천혁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한 번도 힘으로 억눌려 본 적이 없다. 당하면 당한 만큼 이를 악물고 받아버렸다. 부모님이 없어서, 동생과 둘이서 생활을 해야 한다는 마음에 더 독하게 반발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수없이 많은 싸움을 벌였고, 여느 일진 무리와 달리 천혁은 대부분 혼자였기에 어느새 늑대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그러니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저들의 습성을.
천혁이 걸어가는 길 앞으로 가로막듯이 뿌연 담배 연기가 뿜어졌다.
“어이, 꼬마. 어디 가니?”
역시나.
양쪽 귀에 피어싱을 하고 이마에 해골 마크를 문신한 사내가 천혁의 앞을 가로막았다. 놈은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더니 천혁의 얼굴로 천천히 내뱉었다.
“화장실.”
천혁은 눈앞에 담배 연기를 손으로 걷어내며 말했다.
“응아 마려서?”
“씻으러.”
“이 새끼 보게? 애야, 말이 짧잖아. ‘씻으러요’라고 공손히 대답해야지.”
“……상관하지 말지?”
천혁은 시비를 피하기 위해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내가 그런 천혁의 팔을 움켜잡았다.
억센 압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놈의 인상을 보면 분명 한껏 힘을 준 듯한데, 이상하게도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았다.
놈은 천혁이 멈춰 서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기가 살았는지 더욱 발광을 떨어 댔다.
“씨발! 내가 싫어하는 새끼랑 존나게 닮았다, 너.”
어지간하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폭력에 대한 본능이 치밀어 올랐다.
두근두근.
놈들의 정맥이 뜀박질하는 목 줄기에 절로 시선이 간다.
꿀꺽,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는 천혁이었다.
문득 저 목을 물어뜯어 정맥을 찢고는 콸콸 흘러내리는 피를 실컷 마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쳤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천혁은 애써 고개를 흔들어 떠오르는 상념들을 털어냈다.
그런 후에 서늘하게 웃으며 물었다.
“너, 나 알아?”

민철은 물끄러미 천혁을 바라봤다.
비가 내 귓구멍을 막아버렸나? 이 새끼가 지금 뭐라고 지껄인 거지?
그는 주제도 파악하지 못하고 개기는 놈들을 싫어한다. 괜한 깡으로 앞뒤 안 보고 덤비는 놈들도 싫어한다.
내가! 까라면 까야 한다! 그게 법이다.
이제껏 그렇게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다. 그게 장관 아빠와 사립대 총장 엄마를 둔 나의 배경이다. 이 배경이 바로 나의 힘이다.
이제껏 나의 힘을 넘어서는 새끼들은 보지 못했다. 하다못해 우리 학교 교장도 내 앞에서는 쩔쩔맨다. 경찰서장이 나를 보고 아는 체를 한다. 아버지 잘 계시냐고.
그런 나다.
그런데 저 새끼는 나를 잘 모르는 모양이다. 하긴 생긴 것 봐라.
더군다나 ‘나 알아?’라니.
별 거지 같은 새끼가 눈깔에 힘을 준다. 뒈지려고.
“이 새끼가 방금 뭐라고 하는지 들었어?”
민철은 친구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친구들은 저마다 웃어 대며 배꼽을 잡았다. ‘저 새끼가 미쳤네’라는 말도 덧붙이면서.
민철은 친구들의 반응에 기꺼워하며 천혁에게 압박을 가했다.
“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할 일 없으면 집에 가서 발이나 닦고 자. 괜한 사람 붙잡아 시비 걸지 말고.”
천혁은 민철의 팔을 뿌리치고 화장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민철은 튕겨진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잠시 굳어 있던 민철은 오토바이 뒷자리에 있던 헬멧을 들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천혁의 뒤통수를 갈겼다.
빠아악―
천혁의 고개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뒤통수가 찌릿찌릿하다. 해머로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몇 대만 더 맞으면 눈알이 앞으로 튀어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천혁은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가격한 민철을 바라봤다.
“너, 지금 그걸로 날 친 거냐?”
민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힘껏 휘두른 헬멧인데, 저렇게 멀쩡하면 안 되는 거다.
민철은 헬멧을 손가락으로 두드려 보았다.
탕탕!
묵직한 쇳소리가 난다.
제대로 안 맞았나?
민철은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다가가 천혁의 면상을 향해서 다시 한 번 헬멧을 휘둘렀다.
예전에도 시험해 봤는데, 벽돌로 상대의 면상을 찍는 것보다 헬멧으로 치는 것이 훨씬 효과가 있었다. 대체로 한 방이면 끝이다.
합기도를 배운 놈도, 유도를 배운 놈도, 제아무리 싸움 좀 한다고 어깨를 거들먹거리는 놈들도 이것 한 방 맞고 일어서는 꼴은 보지 못했다.
천혁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헬멧을 뚫어져라 보았다.
마치 슬로우비디오를 보는 듯한 느낌. 느리다 못해서 하품이 난다.
천혁은 얼굴로 떨어지는 헬멧을 가볍게 손바닥으로 받았다.
“어?”
주변에 있는 민철의 친구들이 보기에는 천혁의 손에 헬멧을 그냥 쥐어준 것처럼 보였다.
“에이, 장난하냐! 뭐야, 그게!”
“야! 야! 쓸데없는 짓 하려거든 그냥 가자. 재미없게.”
민철의 친구들이 엄지손가락으로 밑으로 내리며 야유를 보냈다.
“씨발, 지켜보기나 해! 내가 이 새끼를 어떻게 조지나.”
화가 치민 민철은 허리에 차고 있던 체인을 죽 당겼다. 체인은 빗물 사이로 철컹,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천혁은 체인을 들고 있는 민철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체인으로 맞으면 살갗이 뜯어진다. 꿰매기도 어렵다. 자칫 스치기라도 한다면 평생 흉터로 남을 것이다. 차라리 칼을 맞는 것이 낫다.
양아치, 일진 중에서도 상대에게 체인을 휘두르는 놈들이 가장 악질인 이유였다.
“하아…….”
천혁의 입에서 거친 숨결이 뱀의 혀처럼 흘러나왔다.
악질은 어떻게 상대를 해줘야 할까.
악질을 상대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놈들과 똑같은 버러지가 되면 된다.
그럼 쌤쌤이니까.
서로 욕해봤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 그럼 징벌 시작.
천혁은 민철에게서 뺏은 헬멧을 크게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큰 동작이라 피하기는 쉽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지금 천혁이 휘두른 동작은 번개처럼 빨랐다. 아무도 천혁이 휘두른 헬멧을 보지 못했다. 뭔가 부서지는 소리만이 그들의 귀에 들렸다.
빠각!
민철의 면상이 깨졌다. 안면이 움푹 들어가며 눈알이 반쯤 튀어나온다. 민철은 항공모함이 침몰하듯이 푹 주저앉았다. 단 한 방에 눈빛은 맛이 갔다. 흐릿하다. 의식이 반쯤 나간 듯했다. 그런 민철의 면상을 천혁은 전혀 주저 없이 발등으로 후려쳤다.
빠아악!
민철은 볼링 핀이 쓰러지듯 옆으로 자빠졌다. 완전히 의식이 증발한 듯했다. 부러진 이빨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떨어졌음에도 가만히 있는 것을 보면.
천혁은 천천히 헬멧을 들어 올렸다.
찌그러진 헬멧에는 피가 잔뜩 묻어 있다.
꿀꺽.
천혁은 피를 보자 왠지 모르게 치솟아 오르는 기이한 열기를 참지 못했다. 그는 헬멧에 묻은 피를 혀로 핥았다.
아아아!
이런 맛이라니.
세상에 어떤 진미를 맛보는 것보다 좋았다. 어릴 적, 부모님과 함께 근사한 식당에 가서 먹은 최고급 소고기보다 더.
할짝할짝할짝.
부슬부슬 비가 오는 밤. 흐릿하게 달빛 아래 갑자기 나타난 지저분한 몰골의 사내. 게다가 그 사내는 혀를 길게 내밀어 피를 핥고 있다.
그 기괴함이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때, 그들은 뭔가 심상치 않다고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여럿이 함께 뭉쳐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그들의 뇌리에서 울리는 경고를 무시하고 말았다.
“이런 씨발 놈이!”
폭주족들이 일제히 천혁을 향해서 덤벼들었다.
꿀꺽.
피를 삼킨 천혁은 잠시 눈을 감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까 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힘이 치솟고 있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시 눈을 뜨자 세상이 달라 보였다.
먹잇감이 가득하다.
천혁을 피로 범벅이 된 혀를 길게 내빼 입술을 핥았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옆에 세워진 오토바이를 잡았다. 한 손으로 거침없이 들어 올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폭주족들을 향해 던졌다.
빠아아악―
놀랄 겨를도 없었다.
두 명의 폭주족은 날아든 오토바이에 그대로 깔리게 생겼다. 두 놈의 두 눈이 호박처럼 커지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비명을 질렀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
콰직!
끔찍한 소음과 함께 둘은 오토바이와 한데 뒤엉켜 굴렀다. 한껏 가죽 재킷을 입고 멋을 낸 그들은 팔과 다리가 기형적으로 꺾인 채 콘크리트 바닥을 나뒹굴었다.
주르륵,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는 비와 함께 뒤섞여 콘크리트 바닥을 붉게 적셨다.
기세등등하게 달려오던 폭주족들이 멈칫했다.
뭐, 뭐야. 저건?
오토바이를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고? 말도 안 돼. 우리가 잘못 본 거야.
“크크크큭.”
천혁은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어쩐지 엿 같은 기분이 조금 풀린 듯한 느낌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는 영안실에 누워 있을 천우도, 자신을 암매장한 뺑소니 운전자 놈도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한껏 따듯한 피를 만끽하고 싶을 뿐이었다.
천혁은 쓰러져 있는 민철의 머리채를 다시 쥐어 잡고 질질 끌었다. 그러다 땅에 떨어진 체인을 주워 들고 그의 목을 휘감았다. 조금 당기자 살점이 투툭, 찢어졌다. 핏방울이 주르륵 소리를 내며 흘러나왔다.
그 끔찍한 광경에 폭주족들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왜들 그러고 서 있지?”
천혁은 폭주족들에게 손짓을 했다.
자, 너희들 친구가 여기 있다.
용기를 내.
용기를 내서 네 친구를 구하러 와.
너희들은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폭주족이잖아. 안 그래?
마치 야수와도 같은 천혁의 모습에 폭주족들은 질려 버리고 말았다.

* * *

새벽이 돼서야 천혁은 집에 도착했다.
다가구 주택의 허름한 반지하층. 아침이면 어느 정도 햇볕도 들고, 작지만 방도 두 개다. 위치가 나빠서 그렇지, 두 사람이 가진 돈으로 이 정도 방을 구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비록 없는 형편이지만, 두 사람이 함께하기에 남부러울 게 없었다.
하지만 천우는 이제 없다.
천혁은 방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기 한 점 없는 냉골 바닥. 그의 몸에서 떨어진 빗물이 방바닥에 흘러내렸다. 춥지는 않다. 기분만 더러울 뿐.
천혁은 몸을 일으켜 벽에 등을 기댔다. 어제 급하게 뛰쳐나간 탓에 TV는 켜진 채였다. 지금도 같은 채널이다. 하나도 즐겁지 않은데, 화면 속 연예인들은 하하호호,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몸에서 힘이 빠져 TV를 끌 기운도 없었다.
먹은 것은 없지만 배도 고프지 않았다.
문득 며칠 전 천우의 말이 떠올랐다.

“형, 형은 엄마, 아빠 보고 싶지 않아?”
“부모님? 보고 싶지. 잘들 계시나 몰라. 잘들 계시겠지. 워낙 금슬이 좋은 분들이셨잖아.
“그렇지? 그래도 우리 많이 보고 싶어 하실 거야.”
“당연하지.”
“그래서…… 나 엄마, 아빠 보러 가려고.”
“그래, 보러 가야지. 나중에 우리 같은 자식들 낳은 다음에.”
“…….”

그때, 천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 느낌은 받았지만,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원래 뭐든 척척 잘하는 동생이었니까.
원래 뭐든 잘하는 동생?
정말로 그럴까? 나만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나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하고 싶은 말도 하지 못한 건 아닐까?
학교 옥상에서 떨어졌다.
경찰은 자살 미수라고 결론지었다. 경찰이 발견했을 때까지는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차라리 그대로 죽지. 멍청한 놈.
목과 척추가 부러진 채로 몇 시간이 그렇게 방치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동생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불쌍한 놈.
너무 불쌍한 놈.
하나뿐인 형이…… 아무것도 모르다니.
정말 자살이라고?
그래, 경찰이 자살이라니까 자살이겠지. 그런데 왜 자살을 시도한 이유를 가르쳐 주지 않을까?
학교 폭력? 성적에 대한 압박감? 입시 스트레스?
뭐든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경찰은 위로의 말만 몇 마디 건넸을 뿐이다. 학교에서는 담임에게 전화 한 통화만 왔었다. 천우가 응급실에 실려 갔으니 어서 가보라고.
가보라니. 담임도 같이 갔어야 정상 아닌가.
전교 1등이었잖아. 왜 그렇게 방치를 하는 건데.
너무 무책임하잖아.
당신! 선생 아니야?
천혁은 코를 막았다. 구린내가 물씬 풍겼다. 그는 벌떡 일어나 천우의 소지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연습장, 낙서, 일기장부터 사소한 하나까지…… 모조리 뒤졌다. 뭔가 나올 것이라 예상을 하면서.
천혁이 원하는 증거는 쉽게 발견됐다.
일기장과 연습장.
먼저 연습장.
놀랍게도 연습장은 온통 시커멓게 칠해져 있었다. 볼펜으로 모조리 검게 칠해 버린 것이다. 연습장을 넘겼다. 다음 장에는 붉은 볼펜으로 누군가의 목을 자르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반 전체 아이들의 목이 잘려 있기도 했다. 하물며 교단에 서 있는 선생은 사지를 잘라났다.
꿀꺽―
천혁은 마른침을 삼켰다.
연습장을 통해 천우의 괴로운 심경이 읽히는 듯했다. 동생은 마치 지옥 속에서 살고 있는 듯했다.
뭐지? 도대체 너한테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천혁은 일기장으로 넘어갔다.
일기장은 사전만큼이나 무척 두꺼웠다.
일기장을 잡고 넘겼다. 한 장씩, 한 장씩. 넘길 때마다 그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이내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눈물은 일기장을 타고 흘렀다.
동이 튼다.
천혁은 한 번도 자리를 옮기지 않고 동생의 일기를 끝까지 읽었다.
날이 밝았다.
여전히 그는 일어서지 못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피가 뚝뚝 흘러내린다. 분을 참지 못해서 입술을 꼭 깨물었다. 입술이 찢어진다. 그럼에도 천혁은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정오가 다 돼서야…….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이윽고 마지막 장을 넘기고 일기장을 덮었다. 천혁은 공허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마치 그곳에 동생이 있다는 듯이.
천혁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천우야…… 많이 힘들었겠구나……. 미안하다. 형이 돼서…… 네게 힘이 되어주지 못했구나.”
천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거울 앞에 섰다. 피범벅이 되어버린 몰골이 흉측했다. 그는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동생과 매우 흡사하다. 둘은 쌍둥이이니 당연히 닮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뿌드드득.
이 갈리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이젠…… 내가 천우로 산다.”

* * *

천혁은 자신의 모든 것을 말살시켰다.
태우고 찢고 불태웠다. 이제 천혁이란 사람은 없다. 남은 사람은 천우뿐이다.
동생은 나와 함께 천우로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동생을 화장했다.
동생의 유골은 행주대교 밑에 뿌렸다.
마지막으로 동생의 이름을 부르면서 울었다.
부모님한테 먼저 가 있어. 너를 그렇게 만든 놈들은 내가 반드시 하나 빠짐없이 데리고 갈 테니까. 그러니 너무 서운해 하지 마.
이제 나는 천우다.
하지만 더 이상 여린 천우가 아니다.
철저하게 잔인한 천우가 되어주마.
천혁은 치렁치렁하던 머리를 단정하게 깎았다. 껄렁하던 옷들도 모두 버렸다.
단정하게.
또 단정하게.
이제 누구도 우리를 분간하지 못한다.
그것만큼은 장담한다.
성격, 취미, 두뇌, 좋아하는 여자 스타일, 좋아하는 음식 등…… 모든 것이 다르지만 딱 하나만은 똑같았다.
바로 외모.
하다못해 얼굴에 박힌 점의 위치까지 닮았다.
덕분에 둘이 바뀐 것을 아무도 몰랐다. 세상 누구도 두 형제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천혁은 담임에게 전화를 걸었다. 둘은 목소리도 비슷했다. 부모님도 목소리 구별은 하지 못할 정도. 안경을 쓰고 안 쓰는 것으로 겨우 구별을 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담임은 꽤 놀란 음성이었다.
[어? 너, 너는…….]
놀라긴, 씨발 놈. 뒈진 줄 알았겠지? 하긴 옥상에서 떨어졌으니.
담임은 몸은 괜찮냐고 더듬거리며 물었다. 진심이라고는 하나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히려 왜 살아 있냐고 묻는 느낌이었다. 다시 한 번 피가 거꾸로 솟았다.
당신, 교사 맞아?
“아직 몸이 안 좋아서 일주일 뒤에 등교하겠습니다.”
천혁은 애써 분노를 삭이며 침착하게 대꾸했다.
[일주일이라…….]
담임선생은 일주일이란 단어를 곱씹었다.
왜? 학교에 천우가 살아 있다고 소문을 쫙 내시게? 천우를 그렇게 만든 아이들에게 일러바치시게?
그래, 개새끼들과 함께 준비해라.
너희는 나를 맞이해야 할 것이다.
천혁은 일주일 동안 천우가 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완전히 똑같을 수야 없을 테지만, 어느 정도 흉내는 낼 수 있었다.
엄마 배 속에서부터 동생과 18년을 함께 살았다. 다른 사람들보다 속속들이 훨씬 잘 알고 있는 게 바로 자신이다. 만에 하나 누군가가 이상하게 느낀다면, 옥상에서 떨어진 이후 기억이 잠깐잠깐 끊긴다고 둘러댈 참이었다.
자, 이제 준비는 끝났다.
천혁으로서의 삶도 종지부를 찍었다.
이제 천우로서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마지막으로 보는 너와 나의 얼굴.
쨍―
천혁은 주저 없이 거울을 깨트렸다. 더는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는 각오이기도 하다.
내가 차에 치이고도 다시 살아났다면 그 의미가 있을 터.
분명 동생이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나를 살려주었을 것이다. 이제 그 의지에 따라 살아주려고 한다.
자, 가자.
지옥으로.
너를 그렇게 만든 개자식들에게 늑대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여주러 가자고.
천혁, 아니, 새롭게 태어난 천우는 현관문을 열고 무거운 첫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