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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원령 (3)



“내 안…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커다란 눈, 헤르미아가 깜빡이며 설명했다.

― 말 그대로야. 새가 둥지에 살듯, 물고기가 물속에 살듯, 나도 누군가의 안에 살아. 정확히는 누군가의 그림자 안이지. 지금처럼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곳에 존재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이건 나에게 매우 불편한 상태거든. 난 편하게 쉴 공간이 필요해. 그러니까 네 그림자에 들어가게 해달라는 거야.

유성은 헤르미아와 자신의 그림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이 안에서 살게 해달라고?’

지금껏 딱히 그림자를 의식한 적도 없건만, 막상 여기에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하니 굉장히 꺼림칙한 기분이었다.

“네가 그림자 안에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건데?”

유성이 헤르미아에게 물었다.

― 적어도 안 좋은 영향은 없어.

“…어쨌든 영향이 있다는 거네?”

― 그럼. 너는 내 힘을 얻게 될 거야. 마술의 힘 말이야. 저런 잔챙이 괴물 정도는 간단하게 해치울 수 있다고.

“그런 힘이 있다고?”

― 물론!

헤르미아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러나 여전히 찜찜하기 짝이 없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그저 벽에 붙어 이동하는 커다란 눈알일 뿐이었다. 진짜로 헤르미아가 이 상황을 벗어날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림자에 받아들인다는 건 어딘가 께름칙했다.

“그림자에 들어오지 않고 저 괴물을 물리쳐 줄 수는 없는 거야?”

고민하던 유성이 말하자, 헤르미아가 깔깔 웃었다.

― 뭐래, 그게 가능했으면 벌써 그렇게 했겠지! 나도 저런 흉물스러운 게 내 앞을 왔다 갔다 하는 건 싫어. 하지만 아까도 말했잖아, 나는 지금 매우 불편한 상태야.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인간의 몸이라는 매개가 없으면 제대로 마술을 쓸 수 없다고. 날 봐, 눈만 있는 상태로 뭘 어떻게 하겠어?

역시 안 되나.

유성은 한숨을 쉬었다.

“그 마술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힘을 쓰려면 내 그림자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거지?”

― 그래그래. 간단하게 말해줄까? 그냥 선택해. 나를 그림자에 받아들이고 여기를 벗어날 건지, 아니면 계속 여기에 있을 건지.

“…선택권이 없잖아.”

유성이 불평했다. 헤르미아는 눈꼬리를 휘며 기분 나쁘게 웃었다.

― 아까 말했던 것처럼 창문으로 탈출한다는 방법도 있어. 굳이 그런 식으로 나가고 싶다면 방해는 안 할게.

유성은 다시 창밖을 돌아보았다.

여기로 나간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다. 침대 시트는 대충 봐도 낡아서 완전히 너덜너덜했다. 줄 하나로 3층에서 내려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이런 부실한 것으로는…….

“…널 그림자에 받아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결국 유성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자 벽에 떠 있던 눈이 폴짝폴짝 뛰는 것처럼 위아래로 움직였다.

― 벌써 결정한 거야? 시간이 좀 더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 됐어. 네가 할 일은 별게 없어. 그냥 날 따라서 말하면 돼.”

“알겠어.”

― ‘요정왕 오베론과 여제 티타니아의 이름 앞에 맹세하노니, 갈 곳 없는 영혼을 그림자 안에 거두노라.’

마술 주문다운 말이네, 속으로 생각한 유성이 따라 읊었다.

“요정왕 오베론과 여제 티타니아의 이름 앞에 맹세하노니, 갈 곳 없는 영혼을 그림자 안에 거두노라.”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지, 된 건가?”

― 뭐 그냥 형식적인 절차니까. 너와 내가 정식으로 맺어진다는 의미야. 다른 마술사가 함부로 나를 네 그림자에서 빼가지 못한다는 거지. 내가 더 이상 쥐죽은 듯이 숨어 살 필요가 없다는 거고.

헤르미아는 잔뜩 흥분한 듯, 목소리가 한 톤 높아져 있었다.

“그래, 잘됐네. 그래서 이걸로 끝인 거야?”

― 그럴 리가. 이제부터지! 가까이 와서 나한테 손을 얹어 봐.

유성은 벽 쪽으로 다가가 눈동자 위에 손을 얹었다. 왠지 물컹한 느낌이었다. 어릴 때 만져 봤던 문어 머리가 떠올랐다.

기묘하다고 생각하던 것도 잠시, 헤르미아가 손바닥만 하게 작아지더니 마치 흰자 위에 떠 있는 달걀노른자처럼 그의 손등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으앗!”

유성이 놀라 작게 소리쳤다. 하지만 딱히 아프지도, 이상한 느낌이 들지도 않았다. 그저 손전등으로 비추고 있는 것처럼, 눈 모습의 무언가가 팔을 타고 다리를 지나서 자신의 그림자에 도달했을 뿐이었다.

잠시 후, 그림자의 얼굴 부분에 날카로운 두 개의 눈이 나타났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유성이 입을 열었다.

“…눈이 생겼네.”

― 뭐, 단순히 내가 네 그림자 안에 들어가는 것뿐이라면 이게 끝이야. 근데 이제부터 마술을 써야 하잖아? 그러려면 동기화를 해야 해. 이건… 조금 아플 거야! 히히히!

“아프다니……. 크악!”

순간 갑작스런 고통에 유성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이상한 한기가 머릿속에 들이닥쳐 내부를 마구 뒤흔들었다. 눈을 얼음 조각으로 파내는 듯한 고통에 유성은 일어나지도 못하고 신음했다.

“너 무슨… 짓이야……!”

하지만 고통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한기는 서서히 퍼져 나가 온몸을 경련시켰다.

처음에는 턱이 떨리기 시작하더니, 곧 목을 가눌 수 없게 되었다. 뒤이어 팔과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 다음부터는 마치 장기가 재배열되는 듯한 복부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심장박동도 불규칙해져서 이따금 멈추었다가 다시 뛰는 듯했다. 온몸이 고장 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 얘 좀 봐, 공짜로 힘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고통은 잠깐이야. 이것만 이겨내면 살아서 여길 나갈 수 있다고.

하지만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잠시 후 통증이 완전히 멎자, 몸이 제멋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됐다! 됐어!”

그는 신이 난 듯 폴짝폴짝 뛰면서 말했다. 하지만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은 헤르미아의 음성이었다.

― 이게 뭐야! 말이… 몸도 멋대로 움직이고…….

“우와, 오랜만이야. 뭔가를 만져 본다는 거. 이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 대체 얼마 만이람?”

손이 제멋대로 움직이더니 목선을 타고 올라가 볼을 쓰다듬었다. 뒤이어 손은 눈과 코, 귀, 입을 하나하나 더듬거리더니 입 안까지 들어갔다.

“음……. 이는 딱딱하고 혀는 촉촉해! 그리고 약간 짜네! 완벽해. 하하하하! 진짜다, 진짜야!”

손가락이 입 안에서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 뭐야, 뭐하는 거야!

당황한 유성이 있는 힘껏 소리쳤다. 하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외치듯 떠올랐을 뿐이다.

“아, 너무 놀라지는 마. 괴물을 무찌를 때까지만 네 몸의 제어권을 갖고 있을 뿐이야. 네가 마술을 할 수 있게 됐다고 해서 어떻게 써야 할지 알게 된 건 아니잖아? 지금은 그냥 나한테 맡겨두라고.”

― 너… 끝나고 나면 확실히 돌려주는 거지?

그러자 유성, 아니, 유성의 몸을 조종하고 있는 헤르미아가 깔깔 웃었다.

“이제 와서 못 믿는 거야? 나한테 몸도 마음도 다 줘놓고.”

― 그게 무슨 소리야, 몸은 그렇다고 쳐도 마음은 또 뭐야?

“느껴 봐. 이 마음을 말이지.”

유성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가슴이 벅차오르고, 난생처음 느끼는 엄청난 환희로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움직일 수 없는데 움직이고 있고, 감각은 그대로 느껴진다는 건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었다.

“동기화의 효과야. 너랑 나, 한쪽이 기뻐하게 되면 다른 한쪽도 기쁘고, 슬퍼하게 되면 다른 쪽도 슬퍼하게 돼. 그러니까 너나 나나 서로와 함께할 수밖에 없단 말이야. 난 지금 네 그림자에 들어오게 되어서 너무 기뻐. 다시 태어난 기분이라고!”

그는 즐겁게 소리쳤다.

“자, 그럼 사냥을 시작해 볼까?”

그러고는 곧바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문 너머에 있는 괴물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거침없었다.

― 자, 잠깐! 갑자기 문을 열면 어떡해!

“괜찮아, 괜찮아. 뭘 이런 거 가지고. 불안해하지 마. 나한테까지 영향이 온단 말이야.”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완전히 해도 져버린 지금 복도는 어두컴컴하고 고요하기만 했다.

― 없는데?

“아니. 있어.”

복도 끝 계단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시선이 간 곳에 괴물이 불쑥 나타났다.

“자, 내가 어떻게 하는지나 잘 봐두라고.”

그는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손에서 무언가 검고 기다란 고드름 같은 것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손에서부터 점점 길게 자라났다. 팔보다도 길게, 그의 몸보다도 길게, 날카로운 날을 번뜩이면서 뻗어나갔다.

― 뭐야, 이게?

“영검(影劍)이야. 그림자로 된 건데, 저런 괴물들을 상대로 꽤 쓸 만한 무기지. 무엇보다 좋은 점은…….”

코앞까지 돌진해 온 괴물이 그를 향해 직선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푸욱!

영검에서 자라난 날카로운 도신이 괴물의 목을 관통했다. 마치 괴물이 알아서 스스로 검에 몸을 갖다 박은 것처럼.

“우리를 제외한 다른 것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거야. 덕분에 이런 멍청한 괴물은 검이 있는 줄도 모르고 스스로 뛰어들어서 죽어버리지, 히히히히.”

그는 즐겁게 웃었다. 검을 비틀자 분리된 괴물의 목이 땅 위로 떨어졌다. 목을 잃은 괴물의 몸은 절단면에서 피를 뿜으며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떨어진 머리가 바닥을 굴러 벽에 퉁, 부딪쳤다.

― 피가…….

자신의 손으로 이런 짓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 이럴 필요까지는 없었잖아. 이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럼 어떻게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괴물은 완전히 토막을 내놓지 않으면 금세 회복해서 다시 돌아다닌다고. 게다가 봐, 꽤 재밌잖아.”

그는 영검으로 쓰러져 있는 괴물의 사체를 수차례 더 베었다. 영검에 베인 단면은 소름 끼치도록 깨끗했다. 괴물의 사체는 마치 케익처럼 아무 저항 없이 조각나다가, 막판에는 완전히 본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 하나도 안 재밌어.

유성은 당장이라도 눈을 감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오히려 몸은 헤르미아의 뜻대로 제멋대로 움직이며 사체를 모두 완전히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버렸다. 아니, 거의 갈아버려 바닥의 시체는 거의 도마 위의 찌꺼기처럼 보였다.

헤르미아는 그의 몸을 이용해 신나게 웃어 댔다. 그 괴리감이 견딜 수 없었다.

“히히히히. 거짓말하지 마. 너도 당연히 즐겁겠지, 내가 이렇게 재밌는데! 괴물은 악, 그 악을 멸하는 것은 정의야. 정의를 행하는 건 올바르고 즐거운 일이라고.”

유성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로 알 수 없는 고양감이 가슴으로부터 솟아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이 정도면 되겠지. 설마 이렇게 곤죽이 된 상태에서 다시 살아나서 움직이지는 못할 테니까.”

말을 마치기 무섭게 조각난 괴물의 사체에서 검은 불꽃이 일어났다. 그제야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영검을 공중에 놓자, 허공에서 검은 칼이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이윽고 그는 괴물의 사체를 뛰어넘어 계단을 내려갔다. 1층에 도착했을 때 유성이 입을 열었다.

―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뭐가?”

― 너 아직도 나한테 몸을 돌려주지 않고 있잖아.

말 그대로였다. 괴물도 죽였고, 위험한 건 전부 사라졌는데도 아직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헤르미아는 별거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아,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까.”

― 할 일?

“이거 봐.”

― 아…….

그는 로비에 놓인 낡은 거울 앞에 섰다. 그러자 엉망이 된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온몸이 괴물의 피로 더럽혀진 상태였다.

“완전 피 범벅이잖아. 이 상태로 밖에 나갈 수 있겠어?”

그는 으스대듯 말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소리도 없이 핏자국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정말 뿅 하고 말끔해진 자신이 서 있었다.

― 헐…….

“나는 숨고 숨기는 게 특기야. 이건 피 얼룩들만 전부 숨긴 거지. 숨긴 것뿐이니까 나중에 제대로 씻고 세탁해야 하겠지만. 그리고…….”

순간 잠깐 머리가 어질하며 눈앞이 일그러졌다. 다시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오자 비몽사몽하던 상태에서 찬물을 맞은 것처럼 감각이 또렷해졌다.

― 자, 어때. 난 제대로 돌려줬다? 거짓말은 안 한다고.

머릿속에서 다시 헤르미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성은 즉시 몸을 움직여 보았다. 문제없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였다.

― 이제 됐지? 그럼 빨리 가자. 빨리 여기서 나가고 싶어. 네가 어떤 곳에 사는지도 궁금하고.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도 모르네.

“…유성이야. 전유성.”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실감 나지 않는 듯 멍하니 자신의 손을 바라보던 유성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