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5화
결전 (4)



끝이다.

그 생각에 여름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곳에서 죽게 될 줄은 몰랐다. 이대로 아무도 모르는 외로운 죽음을 맞게 되는 걸까?

억울할 만도 하건만, 여름밤은 의외로 초연했다.

‘자초한 거지.’

이 모든 건 자신이 선택한 결과였다. 찬비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뛰어들었다.

그러니 억울해할 수 없었다. 그저 각오가 부족했던 자신을 탓할 뿐.

바텀을 방해하고 찬비를 구하기 위해 구덩이에 뛰어들었으면, 죽을 거란 생각도 확실히 했어야 했다.

잘못한 일은 없다. 그러니 후회도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그렇지 않다.

“…….”

찬비를 떠올리자 표정이 절로 일그러졌다.

많이 다쳤던데 괜찮은 걸까? 순간적으로 꿈으로 보낼 수는 있었지만 대체 어디로 떨어진 걸까? 살아 있을까?

‘미안하다고도 못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여름밤은 이내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찬비라면 이렇게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눈물이 흐르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두려움은 어쩔 수 없었다.

어디가 끝인지 모를 심연으로 떨어지며,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기다리는 무력감. 최소한의 저항도 허락하지 않는 이 추락의 끝이 무서웠다. 여름밤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추락은 너무나 길었다.

과열된 모터가 돌아가는 것처럼 심장이 뜨겁게 뛰었다. 서서히 뇌가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문득 아무 이유 없이 환희가 찾아왔다. 죽음 직전의 고통을 무마시키기 위해 다량의 엔도르핀이 분비되고 있었다. 의아해하면서도 여름밤은 그 생소한 기쁨을 받아들였다. 어느새 억지로 웃고 있던 그는 진심으로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조용히 그는 눈을 감았다.

‘뭐지?’

문득 그는 묘한 감각에 눈을 떴다.

어느새 여름밤을 향해 다가온 작은 천사가 그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대로 천사는 하늘로, 하늘로 상승했다.

천국으로 가는 걸까?

여름밤이 아득한 가운데서도 생각했다.

하늘은 아직도 저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

어느 순간, 상승이 멈추었다.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던 여름밤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를 내던지듯 내려놓은 천사는 여름밤의 따귀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바보! 멍청이! 도대체 뭘 하겠다고 저런 데를 들어간 거야! 하마터면 죽을 뻔했잖아!”

양쪽 볼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눈앞에는 굿펠로가 눈물을 글썽이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으으으……. 로빈? 뭐 하는 거야!”

여름밤은 뺨에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굿펠로의 손을 붙들었다. 더 맞았다가는 얼굴이 터져 나갈 것 같다.

“크헉!”

몸을 일으키려던 여름밤이 다시 대자로 바닥에 뻗었다. 양손이 붙들린 굿펠로가 옆구리를 힘껏 걷어찬 것이다.

“기껏 구해줬더니 어디서 큰소리야!”

분노에 찬 그 목소리를 듣고서야 여름밤은 자신이 지상에 올라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퍼억!

“으악!”

굿펠로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씩씩거리며 발길질을 계속했다. 얼굴을 짓밟힌 여름밤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여름밤은 이내 벌떡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굿펠로의 작은 몸을 품 안에 덥석 끌어안았다.

“살았어! 살았다고!”

여름밤은 굿펠로를 끌어안은 채 창피함도 모르고 엉엉 울었다. 갑자기 마구 울어 대니 딸꾹질이 섞이며 울음소리가 더욱 요상해졌다.

하지만 겸허히 죽음을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한 조금 전의 일이 무색하게도, 여름밤은 온몸으로 살아난 것을 기뻐하며 날뛰고 있었다.

품에 안긴 굿펠로는 놀란 눈을 하다가 이내 미소 지었다.

“그래. 살았네. 마음껏 기뻐해.”

굿펠로의 우비 위로 눈물이 뚝 떨어졌다. 눈물은 어깨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밑자락으로 타고 흘렀다.

굿펠로의 얼굴에도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마치 그녀가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굿펠로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정도껏 해!”

그러고는 여름밤의 명치를 후려쳤다. 여름밤이 배를 잡고 땅을 굴렀다.

하지만 땅바닥에서 그는 실실 웃었다.

“로빈, 고마워.”

“그런 건 됐어.”

굿펠로가 시선을 돌리며 입술을 삐죽였다.

“그 괴물이 내 정신에 주박을 걸어놓지만 않았어도 일이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는 건데. 그거 푸느라고 한참 걸렸잖아.”

그러고는 땅에 있던 돌멩이 하나를 걷어찬다. 괜히 애꿎은 데 신경질을 내는 모양이었다.

그때, 돌연 굿펠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바텀!”

굿펠로가 한쪽으로 날 듯이 뛰어갔다. 여름밤도 그 뒤를 따랐다.

그곳에는 정신을 잃은 바텀이 누워 있었다.

땅에 가라앉은 흙덩이들이 일으킨 흙먼지로 바닥에 쓰러져 있던 바텀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묻혀 있었다.

“다행이야. 살아 있어.”

바텀 위의 흙을 서둘러 털어낸 굿펠로가 일단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기운이 너무 미약한걸? 별달리 부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여름밤은 바텀에게 들었던 말이 기억났다.

“자신의 영혼을 깎아서 생명을 빚었다고, 찬비를 죽이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했어.”

“역시.”

여름밤의 설명을 듣자, 굿펠로가 한숨을 쉬며 탄식했다.

“그러면 좀 이상하네. 사명을 완수했으니 주문이 해제되고 바텀의 영혼이 다시 돌아와야 맞는 건데, 아직도 주문이 해제되지 않은 것 같아. 오빠, 혹시 그 괴물 안 죽었어?”

굿펠로의 얼굴엔 아무런 악의도 없었다.

사실대로 말할까 말까.

망설이던 여름밤이 결국 입을 열었다.

“내가 구했어.”

그러자 굿펠로가 놀라 입을 떡 벌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여름밤은 미동도 없는 바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찬비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쓰러진 바텀이 그 뒤 어떻게 됐는지는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죄책감에 굿펠로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굿펠로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바텀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여름밤이 조심스럽게 굿펠로에게 물었다.

“일단 조치를 취하면 목숨은 건질 수 있어. 하지만 이제 하루에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한두 시간. 마술을 쓰는 것도 더 이상 무리일 거야.”

바텀을 살피며 몇 가지 마술을 써보던 굿펠로가 심란한 얼굴로 말했다.

“아…….”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찬비를 구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바텀이 다치고 만 것이다.

바텀은 마술사로서의 자부심이나 프라이드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자신이 찬비를 구한 탓에, 바텀이 마술을 쓸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게다가 하루에 한두 시간 움직일 수 있다니.

“미안…….”

“사과할 필요 없어. 오빠는 그저 할 일을 한 것뿐이니까.”

오히려 굿펠로가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그 괴물이 죽어주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긴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는 거지? 요는 주문을 해제하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마술 협회 쪽에 지원을 요청할 거야. 여제 티타니아라면 주문 하나 해제하는 것쯤은 일도 아닐 테니까.”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굿펠로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굿펠로는 응급조치를 위해 몇 가지 마술을 더 사용했다.

마술로 일어난 바람이 낮게 부는 동안, 폐병원 부지에는 정적이 흘렀다. 여름밤은 그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치료를 끝내자 굿펠로는 아랫입술을 물더니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잘 있어.”

굿펠로는 바텀과 함께 공중으로 떠올라 보이지 않는 곳으로 멀리 사라졌다.

여름밤은 공터에 홀로 남았다.

‘내가 전부 망쳤어.’

허탈한 얼굴로 선 채 생각했다.

바텀에게 몹쓸 짓을 하고 말았다. 바텀은 그저 마술사로서의 본분을 다하려 했을 뿐인데 말이다.

원래대로 회복된다면 좋겠지만, 찬비를 죽이지 않으면 그 흙덩이는 사라지지 않을 거라 했으니 어려운 일이었다. 찬비는 지금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을 곳에 있으니까.

그렇다고 찬비는 구했는가?

아니, 구하지 못했다. 꿈속 세계 어디에 떨어졌을지 모르는 일이니, 어쩌면 다친 상태에서 자신보다 강한 괴물에게 쫓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고 싶어졌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 겨우 애써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커다란 공동 너머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흙덩이가 날뛰다 사라진 주변은 엉망진창이었지만, 그것은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여름밤은 완전히 뒤집어진 공터를 지나 그것에 다가갔다.

그것은 사람의 몸, 아니, 괴물이었다. 반쯤 괴물로 변한 여자의 시체가 수 토막으로 잘려 널브러져 있었다.

여름밤은 우울한 얼굴로 그 시체를 바라보았다. 검은 털이 난 팔다리. 붉은 눈과 더듬이. 그렇지만 얼굴만은 확실히 인간의 것이었다.

“…이것도 나 때문이겠지.”

여름밤이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사람 또한 처음에는 자신의 꿈에서 나온 괴물에게 당했을 것이다. 그가 꿈을 꾸지만 않았어도, 그만 없었어도 이런 꼴이 되지 않았을 사람이었다. 찬비와 같았다.

찬비 생각에 울컥해지자, 눈앞이 아른거렸다. 희미한 시야로 바라본 그 토막 난 시체는 왠지 여름밤 자신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름밤은 시신의 피에 젖은 얼굴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건드리지 마.”

누군가가 말했다. 흠칫 뒤를 돌아보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으로 가린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여름밤의 옆을 지나쳐 시신 옆으로 다가갔다.

“계속 안 오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 나와봤더니. 아무리 나라도 온전히 소생시키기는 힘들겠는데.”

혀를 차던 그는 허리춤에서 호리병을 하나 꺼내 들고 병의 마개를 열었다. 그러자 눈앞에 흩어져 있던 시신들이 흐린 연기로 변했다. 연기는 순식간에 호리병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치 옛날이야기 속에서 나오는 요술 호리병 같은 모습이었다.

호리병을 다시 허리춤에 찬 의문의 사람이 여름밤을 돌아보았다.

“너에게서는 익숙한 냄새가 나는군.”

여름밤이 펄쩍 뛰어 물러났다. 어느새 그는 쏟아지는 빛과 함께 푸른 여인의 모습로 변화해 있었다.

꿈속의 모습이 되자 확실히 느껴졌다. 남자에게서 불길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던 것이다. 괴물이다.

“역시 너였구나, 하야. 여전히 예쁘네.”

그는 갑자기 변한 여름밤의 모습에도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까지 주억거렸다.

“설마 하니 남자일 줄이야. 그래서 그렇게 찾아다녀도 보이지 않았구나.”

여름밤은 그를 잔뜩 경계하는 눈으로 노려보았지만, 남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홀로 중얼거렸다.

“따라와, 하야. 네가 할 수 있는 것들, 해야 할 것들을 보여줄게.”

말을 마친 남자는 뒤돌아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복잡한 얼굴로 한참을 머뭇거리던 여름밤은 폐병원 부지를 나서는 남자의 뒤를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