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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결전 (3)



“또 허탕이네.”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는 곰의 뒷모습을 보며 여름밤이 중얼거렸다.

금방 찬비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시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보면 엉뚱한 괴물들뿐이었다. 한숨을 깊게 내쉬자, 푸른 빛이 쏟아지며 여름밤의 모습이 푸른 여인으로 변화했다.

끄기그기기기긱!

흠칫 돌아본 곰 괴물이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여름밤은 미동도 없이 괴물을 바라보았다.

괴물이 치켜든 앞발을 휘두르는 것에 맞추어 소매를 둘둘 걷어붙인 손을 올렸을 뿐이었다.

파앗!

푸른 섬광이 퍼지고, 괴물은 온데간데없이 꿈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에휴. 다음은 어디지?”

여름밤은 손목에 찬 은색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바늘은 9시 48분 12초에서 멈춰 있었다. 그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침이 9를 넘어갔어…….”

며칠 동안 찬비를 찾아 돌아다니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모든 괴물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것은 아니었다. 1, 즉 5분에 미치지 않는 괴물들은 보통 인간보다 약하고 작았으며, 여름밤이 접근하면 오히려 줄행랑을 쳤다.

분침이 2를 넘어가면 대부분 본능에 충실한 짐승에 가까웠다. 그래도 무기만 있다면 일반인도 제압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4를 넘어가기 시작하면 대부분 인간형의 괴물이었다. 그 시점부터 괴물의 강함은 급격하게 수직 상승했다. 찬비가 사라진 날 본 그 망치를 든 여자처럼.

하지만 이 시계를 얻고 나서 열흘이 넘게 매일 같이 돌아다녔는데도, 그런 괴물은 두 번밖에 보지 못했다. 여름밤은 다시 그 여자에게처럼 당하지 않기 위해 조심했고, 두 명 모두 무사히 꿈속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그동안 본 괴물들은 대부분 2∼3에 가까웠고, 가장 강한 괴물이 5였다.

그런데 갑자기 9를 넘어가는 괴물이라니.

“…하지만 찬비일 확률도 높겠지.”

시계를 바라보던 여름밤이 시침이 가리키는 방향, 상가 저편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콰아아아앙!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 같은 커다란 굉음과 함께 땅이 서 있기 힘들 정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으앗! 뭐야!”

여름밤은 간신히 넘어지지 않고 버텨냈다. 진동은 오래지 않아 사라졌다. 굉음이 들려온 것은 상가 쪽이었다. 균형을 잡은 여름밤이 곧바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도착한 곳은 이전에도 와본 적이 있는 폐병원의 공터였다.

아까처럼 크지는 않지만, 폐병원 부지로부터 진동이 계속해서 퍼지고 있었다.

여름밤은 마른침을 삼키며 부지 안쪽을 바라보았다.

철거되다 만 폐병원 건물보다도 더 큰 그림자 세 개가 움직이고 있었다. 원통형에 끝으로 갈수록 가는 그것들은 한눈에 바라보기도 힘들 만큼 거대했고,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며 땅을 연신 내리찍어 댔다.

그리고 그 사이로 작은 그림자가 종횡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사람의 형태. 그러나 야수에 가까운 신체 구조를 갖고 있는 그것은 살아남기 위해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여름밤은 한눈에 그것이 찬비임을 알아보았다.

“한발 늦으셨군요, 여름밤 님.”

그녀의 옆에서 걸어오며 바텀이 말했다. 안색이 아주 창백했다.

“당장 멈춰요!”

“전에도 말했습니다만, 전 마술사로서 괴물을 처치해야 합니다. 이번에도 방해하신다면 아무리 여름밤 님이라고 해도 봐주지 않을 겁니다.”

바텀이 명백한 적의를 드러냈다. 꽉 문 입술과 날카로운 눈빛. 절대로 찬비를 살려줄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여름밤은 빠른 속도로 바텀을 향해 달려들었다. 푸른 빛을 띤 주먹이 섬광처럼 허공을 갈랐다.

“이번에는 방심하지 않습니다.”

바텀은 한 손으로 그 주먹을 받아냈다. 그리고 돌처럼 딱딱해진 손으로 여름밤의 주먹을 부술 듯이 죄었다. 설상가상으로 손목을 꺾어버리기까지 했다.

“크윽!”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여름밤은 반대쪽 주먹을 뻗었다.

바텀은 그것을 막지 않았다. 그저 주먹을 움켜쥔 그대로 여름밤을 땅에 메다꽂았을 뿐이었다.

“저에게 마술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입니다. 전 저 지긋지긋한 것들을 수도 없이 상대해 왔으니까요. 맨손으로 싸워야 했던 괴물도 많았죠.”

바텀은 양손을 툭툭 털어냈다. 바닥에 엎어진 여름밤이 바텀의 다리를 잡았다. 넘어트릴 심산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힘을 써도 바텀의 다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는 땅의 마술사입니다. 몸을 땅에 고정시키는 건 아주 쉬운 일이죠.”

하지만 바텀은 말과는 달리 땀을 흘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뭐지?’

어쩐지 바텀은 마술 쓰는 것을 힘들어하고 있는 듯했다. 그 이유를 알지도 못한 채, 여름밤은 계속 바텀의 다리에 매달려 있었다.

“으아아아아!”

그때, 여름밤이 힘껏 바텀의 다리를 당겼다. 아니나 다를까, 힘이 약해지는 듯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텀의 다리는 공중으로 번쩍 들렸다.

“크앗!”

그대로 내던져진 바텀이 몸을 들썩이며 신음했다. 여름밤은 곧바로 그를 붙잡았다. 바텀의 몸이 힘없이 끌려 올라왔다.

“이제 끝이군요. 한 가지 알려드릴까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바텀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제가 죽더라도 저 마술은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절 공격하셔 봤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놀란 눈으로 여름밤이 물었다. 바텀의 눈에는 초점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저것은 제가 흙으로 빚어낸 생명. 제 영혼을 깎아내 만든 생명입니다. 그것은 저 괴물을 죽인다는 사명을… 이루기 전까지 절대 사라지지…….”

힘들게 말을 이어가던 바텀의 목이 푹 꺾였다. 눈은 감겨 있었다. 완전히 의식을 잃은 듯했다.

“바텀 씨!”

여름밤이 소리쳤지만, 바텀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옆에서는 여전히 꿈틀대는 거대한 흙덩이가 몸을 마구 휘두르며 찬비를 노리고 있었다. 한 방, 한 방이 전율을 일으킬 만큼 무거웠다.

“…저걸 어떻게 하라는 거야.”

여름밤이 망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이 몸의 근력이 좋다고 한들, 저런 걸 멈추는 건 무리였다. 흙덩이가 땅을 내리찍을 때마다 단단한 부지 바닥이 엉망으로 파헤쳐져 비산했고, 짓다 만 건물은 박살이 나고 있었다.

그때, 흙덩이가 갑자기 몸을 틀 듯 방향을 바꾸었다. 공중에 있던 찬비는 그 끄트머리에 파묻히고 말았다.

끄긱극그그그가가아악!

쇳소리가 섞인 비명이 들려왔다. 여름밤은 곧장 그곳으로 달려갔다.

찬비는 흙덩이에 파묻힌 채 공중에 떠올랐다.

“찬비야!”

여름밤이 외쳤지만 찬비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푸른 여인의 모습인 탓도 있었지만…….

끄그그그끄끼기기기기끼익!

곧 흙더미에 파묻힌 찬비의 얼굴이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했다. 괴물처럼 커다랗게 변한 입 안에 이빨이 빼곡히 생겨났다. 머리가 넓적해져 눈과 코, 귀는 모두 파묻혀 사라졌다. 몸집은 점점 비대해져만 갔다. 꿈속에 나왔던 그 호랑이 괴물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괴물이 강하게 몸부림치자 흙덩이가 터져 나가며 흩어졌다.

끼이기긱!

그러나 나머지 두 개의 흙덩이가 다가와 공중에서 낚아채듯이 호랑이 괴물의 몸을 휘감았다. 다시 끊어내려 몸부림쳤으나, 흩어진 흙덩이마저 다시 생겨나 괴물을 덮쳤다.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지켜보던 사이, 호랑이 괴물은 완전히 지친 듯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자 괴물은 빠르게 줄어들며 찬비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쿠르르릉.

땅울림과 함께 마치 문처럼 중앙의 땅이 갈라지며 까마득한 공동을 드러냈다. 흙덩이들이 그 안으로 스며들듯 사라져 갔다. 끄트머리에 찬비를 붙잡은 채.

“안 돼!”

여름밤이 재빨리 튀어나갔다.

하지만 흙덩이가 하강하는 속도는 너무나 빨랐다. 여름밤이 공동의 끄트머리에 다다랐을 때, 이미 찬비는 공동 안까지 들어가 있었다. 절벽에서 낙하하는 듯 절망스러운 속도였다.

“찬비야!”

여름밤이 까마득한 어둠 속을 향해 외쳤다.

다음 순간, 여름밤은 뛰어가던 그대로 망설임도 없이 그 안으로 몸을 던졌다. 어떻게 나올지 같은 건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서.

그럴 시간이 없었다. 조금만 더 늦으면 찬비는 죽을 것이다.

여름밤은 쏘아진 탄환처럼 빠르게 활강했다. 조금씩 흙덩이들이 가까워졌고, 곧 여름밤은 흙더미 위를 구르며 착지했다.

흙더미 한쪽에는 작은 구멍이 있었다. 호랑이 괴물의 머리가 튀어나와 있던 자리였다. 찬비가 줄어들면서 생긴 공간이었다.

여름밤은 구멍 속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구멍 안쪽은 놀랍게도 동굴처럼 텅 비어 있었고, 벽에 부분부분 튀어나온 곳이 있었다. 빠른 하강으로 인해 공중에 반쯤 떠 있는 여름밤은 벽을 붙잡고 기대어 섰다.

“…….”

붉게 빛나는 두 눈이 어둠 속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찬비였다.

찬비는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지랑이처럼 푸른 빛을 피워 올리고 있는 눈앞의 여인은 아주 위험하고 절대적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강한 이끌림과 갈망이 느껴졌다. 온몸이 타버릴 것 같았다.

여름밤의 근처에 있을 때처럼.

“여름……?”

그제야 찬비는 여인의 체취가 여름밤의 것과 똑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푸른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왜 이런 모습인지는 설명할 시간이 없어. 나중에 만나면 해줄게. 일단 나는 너를 탈출시킬 거야. 숲이라든지, 사막이라든지, 바다일 수도 있어.”

“…무슨 소리야?”

“그곳에서 거대한 거북이를 찾아. 그리고 프랜시스에게 데려다 달라고 해.”

다급한 설명과 함께 여름밤이 튀어나온 흙덩이들을 잡으며 찬비 쪽으로 다가왔다.

“가까이 오지 마!”

또다시 이성을 잃을 것만 같았다. 찬비는 구석까지 물러나 웅크렸다.

그러나 여름밤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다시 만날 수 있어.”

그리고 손을 뻗었다.

파앗!

손에 닿은 찬비의 몸이 푸르게 빛나며 흩어지듯 사라졌다.

“…운이 좋다면.”

이걸로 찬비는 구해졌다. 바텀은 찬비를 죽일 때까지 흙덩이가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듯 말했지만, 설마 꿈속에까지 따라가지는 못할 것이다.

“문제는 나지.”

너무 깊은 땅속까지 파묻혀 이젠 빛 한 줄기 보이지 않았다. 몸에서 번지듯 나오는 푸른 빛이 아니었다면 바로 코앞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나가지?”

여름밤이 초조한 얼굴로 구멍 밖을 바라보았다.

“어, 으앗!”

그때, 갑자기 땅이 흔들려 여름밤은 자리에서 넘어졌다. 갑작스런 제동으로 심한 압력을 받은 여름밤이 신음했다. 흙덩이가 하강을 멈춘 것이다.

“제발, 이대로 상승!”

하지만 그 기대는 무참히 배신당했다.

“으아악!”

서로 엉켜 있던 흙덩이들이 저마다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곤 흩어지며 저마다 공동의 벽 안으로 사라졌다. 흙덩이 안에서 지지대를 잃고 굴러다니던 여름밤은 붙잡을 곳도 없는 공동 한가운데에 던져져, 그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