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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동족 (2)



머릿속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사라졌다.

물론 먹고 싶다는 욕망 그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죽기를 결심했을 때처럼 말이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찬비는 곰곰이 생각했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된 이유를 알아낸다면 사람을 잡아먹지 않고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심장을 찌른 것으로 자신의 안에 있던 괴물이 죽은 건 아닐까. 그렇게 된 거라면 좋을 텐데.

아니면, 그저 잠들어 있는 건 아닐까.

찬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보름간 자신이 정신을 잃고 있었듯, 괴물 또한 아직 잠들어 있는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시 사람을 잡아먹는 것으로 괴물이 깨어날지도 모른다.

“먹지 말자.”

몇 번이나 중얼거리던 그는 아예 눈까지 돌리고, 앉은 채로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만일 식인 행위가 괴물을 깨운다면 할 수 있는 데까지 먹지 않고 버티고 싶었다.

먹고 싶지 않다는 생각 그대로 제발 먹지 않을 수 있기를, 얼마나 간절히 빌었던가. 어떻게든 이 상태를 유지하고 싶었다.

얼마 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이제 들어가도 되나요?”

나래의 목소리였다.

“네. 들어오세요.”

나래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런데 방 안을 보는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먹잇감들이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하는 거예요? 왜 안 드세요?”

“입맛이 별로 없네요.”

찬비가 대답하자, 나래가 화를 내며 말했다.

“찬비 씨는 보름이나 굶은 상태예요. 더 이상 먹지 않으면 위험하다고요.”

아마 심각한 상처를 입은 자신을 걱정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찬비는 고개를 저었다.

“평범한 음식을 먹어보고 싶어요. 근처에 식당 없나요?”

“네?”

나래가 깜짝 놀라 찬비를 바라보았다. 평범한 음식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곳에는 먹이로 쓰기 위해 잡아온 인간들뿐이다.

“…알겠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밖으로 나가려면 허락을 받아야 해서.”

“허락이요?”

찬비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밖으로 나가는데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

그러자 나래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형식적인 거예요.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찬비 씨를 못 나가게 막는다거나 하는 일은 없으니까. 워낙 위험한 시기니까 서로 조심하자는 거죠. 무엇을 할 건지, 어디로 얼마나 오래 나가 있을 건지 말하고 가는 게 좋잖아요.”

“그렇군요.”

“그럼 같이 갈까요? 구경도 시켜 드린다고 했으니까.”

찬비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나래를 따라 나섰다.

방 밖으로 나온 찬비는 깜짝 놀랐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긴 복도가 미로처럼 이어져 있었다. 벽면은 투톤의 대리석이고, 간간이 그림이 든 액자가 걸려 있다. 노란빛 조명이 늘어진 천장은 높았고, 바닥 역시 고급스러운 석재로 되어 있었다. 방금 나온 단출한 방과는 너무 극명한 차이였다.

찬비는 앞장서서 걷는 나래를 따라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생각보다 넓은 곳이네요.”

“갈 곳이 없어진 사람들을 전부 수용해야 하니까요. 지금도 여유가 되는 대로 계속 증축하고 있어요.”

찬비는 다시 한번 놀랐다. 도대체 어느 정도 규모의 건물인 걸까?

“청월시 안에 이런 곳이 있었나요? 이렇게 큰 건축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는데.”

그러자 나래는 으쓱이며 미소를 지었다.

“비밀 기지 같은 곳인데 아무나 찾을 수 있으면 안 되죠. 여기는 지하예요. 지상에는 교회 건물이 있어요.”

찬비는 감탄하며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높고 넓은 건물을 지하에 만들려면 더 힘들 테니까. 영화에나 있을 것 같은 건물이었다.

“교회는 위장인가요?”

“그렇죠. 그래도 저희들 중에 기독교 신자분들도 꽤 계세요. 예전의 버릇 같은 건지, 먹기 전에 감사의 기도를 하고, 먹고 나면 참회 기도도 하고 그래요.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무신론자라서 그런 건 없지만요.”

나래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참회 기도라.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먹고 나면 찾아오는 죄책감은 허기만큼이나 괴로웠다. 자신도 괴로운 나머지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눈을 돌렸으니까. 아마 바텀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도 자신이 괴물이란 걸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긴 복도를 한참이나 걸어 몇 번의 계단을 오르내린 끝에, 나래가 손을 뻗어 복도 끝을 가리켰다.

“조금만 더 가면 돼요. 저기 문 보이시죠? 저기가 교주님 방이에요.”

“네? 행정실 같은 데 가는 거 아니었어요?”

“행정실이라뇨, 학교도 아니고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우리는 가족 같은 거예요. 기본적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교주님께 직접 말해요.”

찬비는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건물 모습이나 크기도 그렇고, 지하 던전에 들어서자마자 보스를 만나러 가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문 앞에 도착하고, 나래가 가볍게 문을 노크하는 사이 찬비가 물었다.

“…교주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그러자 나래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떨려요?”

“아니, 뭐랄까. 주의 사항 같은 게 있으면 만나기 전에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서요.”

속내를 들킨 찬비가 시선을 돌리며 둘러댔다.

“그런 거 없어요. 한번 만나보세요. 좋은 분이니까.”

문 너머에서 대답이 없었는데도, 나래는 개의치 않는 듯 킥킥 웃으며 문을 밀어 열었다.

찬비는 흠칫했다. 환한 복도와 달리 방 안은 깜깜했다. 천천히 들어서자, 발밑에 푹신한 것이 느껴졌다. 바닥에 카펫이 깔려 있는 모양이었다.

방 안에 들어서자 서서히 찬비의 눈이 붉은색으로 변했다. 어둠이 걷히듯 주변이 훤히 보이기 시작했다.

‘저건 뭐지?’

방 입구의 벽에 커다란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푸른색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나래가 그를 끌고서 방 안쪽으로 향했다.

안쪽은 서재처럼 꾸며져 있고, 커다란 책상 앞에 검은 수도복을 입은 사람이 앉아 있었다.

“교주님, 이 사람이 저번에 말씀드렸던 분이에요.”

“안녕하세요. 강찬비라고 합니다.”

찬비가 그를 향해 꾸벅 인사했다. 방 안도 어두컴컴한데, 교주는 온몸을 검은 천으로 꽁꽁 싸매고 있어 어떤 모습인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어, 그래. 네가 저번에 나래가 주워왔다는 애구나. 몸은 좀 괜찮아?”

얼굴에 쓴 검은 천이 흔들리더니, 또래 남자아이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네.”

찬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답했다.

“목소리가 어려서 놀랐어? 어차피 우리는 변신이 가능한데, 뭘.”

“아…….”

찬비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천까지 쓰고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는 어떻게 안 걸까 생각하면서.

“그런데 왜?”

교주가 나래 쪽을 바라보자, 나래가 웃으며 대답했다.

“찬비 씨가 밖에 나가고 싶다고 해서요. 평범한 음식이 드시고 싶으시다고.”

교주는 오른손으로 턱을 짚었다. 손에도 까만 천으로 된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흠,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건가?”

“미련…….”

찬비가 쓴웃음을 지었다. 되돌릴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듯했으니까. 하지만 아니라는 듯, 교주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신경 쓰지 마.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니까. 여기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런 미련을 갖고 있거든. 그게 음식인 경우는 처음이지만. 우린 평범한 음식에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으니까. 영양을 섭취하는 데는 문제없겠지만, 도무지 뭘 먹었다는 느낌이 없단 말이지.”

“그렇긴 하죠.”

나래가 동의하듯 말했다. 찬비도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시도를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니 알고 있었다. 뭘 먹어봐도 그냥 음식에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뭐, 채식주의자도 있으니까. 각자 좋을 대로 하면 되지. 한 두 시간 정도면 돼?”

교주는 상관없다는 말투로 나래를 향해 물었다. 나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정도면 충분할 거예요.”

“그래, 시간 맞춰 돌아와. 그때까지 안 오면 찾으러 나가야 하니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그 말을 끝으로 교주는 고개를 돌리고 파리를 쫓는 것처럼 손을 저었다.

둘은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밖으로 나왔다. 복도로 나오자, 붉은 눈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어때요?”

“편한 분이네요. 교주라고 해서 좀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거의 동네 형과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그렇죠? 사실 저도 처음 봤을 때 놀랐어요. 친구처럼 대해주셔서.”

“친구라…….”

찬비는 문득 여름밤을 떠올렸다.

충동을 조절할 수 있는 지금이라면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옆구리에서 피를 쏟아내며 쓰러지던 여름밤의 모습이 떠올랐다.

찬비는 한숨을 내쉬며 돌아갈까, 하는 생각을 버렸다.

“나가는 길은 이쪽이에요.”

나래가 앞에서 손짓했다.


* * *


근처의 퓨전 중식당. 식탁 위에는 찹쌀로 튀긴 납작한 탕수육과 다진 소고기가 들어간 볶음밥, 해물이 듬뿍 들어간 짬뽕, 구수한 누룽지탕 등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보기만 해도 침이 꿀꺽 넘어가는 진수성찬이다.

하지만 나래와 찬비는 그저 기계적으로 그것들을 입으로 가져가 삼킬 뿐이었다. 한참을 조용히 음식만 먹던 나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역시 아무 맛도 안 느껴지네요. 찬비 씨는 먹을 만해요?”

“사실 저도 그래요.”

찬비가 멋쩍게 웃었다. 그러자 나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사는 거니까 많이 드세요’ 하고 싶은데, 둘 다 음식 맛을 못 느끼니 좀 이상한 말이네요.”

“괜히 밖에 나와서 먹자고 했나 봐요.”

“아니에요. 찬비 씨는 아직 식사하는 데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으니까 어쩔 수 없죠.”

그러고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뭔가 생각하던 나래가 웃으며 말했다.

“아까 다음에는 같이 먹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이렇게 빨리 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러게요.”

그 말에 찬비도 살짝 미소 지었다.

잠시 후, 식사는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두 명이서 전부 먹을 수 있는 양이 아니건만, 모든 음식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만족스럽진 않지만 아주 조금, 배가 찬 느낌이었다.

그때,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가게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과 가게 직원들 또한 섞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모두 눈이 좀 멍한 것도 같았다.

“뭐지? 영업시간이 다 됐나?”

찬비와 나래는 놀라 그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랜만입니다. 아직 끝내야 할 게 남아 있었죠?”

분명 입구를 보고 있었는데,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소름이 돋은 찬비가 급히 돌아봤다.

그곳에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모자를 쓴 바텀이 미소를 띤 채 서 있었다.

“영업 개시입니다.”

그가 앞으로 한 손을 뻗자, 거대한 망치의 손잡이가 땅으로부터 솟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