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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마주치다 (2)
‘뭐야, 이거. 몸이 안 움직여…….’
힘이 빠지는 동시에, 가위에 눌린 것처럼 여름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프랜시스가 주문을 새겼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여자의 눈동자로부터 투명하고 기다란, 끝이 뾰족하고 가는 침 같은 것이 뻗어 나왔다. 그것으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듯 여자의 눈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이건…….’
직감적으로 여름밤은 그것을 통해 자신이 망가져 버리게 될 것임을 느꼈다. 칼로 난도질당하듯, 정신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릴 것이다.
“…….”
최선을 다해 발버둥 치고 있었지만, 신음조차 낼 수 없었다. 그사이 침은 스며들 듯 여름밤의 눈동자 속으로 파고들었다. 신기하게도 고통은 없었다.
침은 실제로 여자의 눈에서 튀어나온 게 아니라, 정신이 형상화된 모습에 불과했다. 여름밤의 육체에는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다.
하지만 정신은, 영혼은 경우가 조금 다르다.
길고 투명한 침은 여름밤의 눈을 통해 정신을 향해 다가갔다.
꼬리가 달린 태아처럼 생긴 작고 연약한 그것은 아무런 저항도 못한 채 그저 머릿속을 부유하고 있었다.
마침내 날카로운 침 끝이 여름밤의 정신에 맞닿은 그 순간이었다.
“크아아아악!”
쇳소리가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은 여자 쪽이었다. 투명한 침은 여름밤의 정신에 닿아 있는 곳부터 서서히 파란빛을 띠기 시작했다. 독이 퍼지듯 선연한 파란색이 여자의 정신에 침투하고 있었다.
‘크…으으…아아! 빠, 빨리!’
고통에 치를 떨면서도 여자는 급히 침을 거두어들이려 했다.
‘안 움직여져.’
덫에 걸린 것처럼 여름밤의 정신에 닿은 침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붙들린 침을 통해 무언가가 빨려 나가고 있었다.
‘살려줘…….’
충격에 투명한 침이 진동했다. 파란색의 무언가가 곰팡이처럼 여자의 침을 좀먹어 갔다.
‘뭐지?’
한편 여름밤은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방금 전 눈을 통해 여자의 침이 들어온 뒤로는 공포조차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 바깥쪽으로 정신을 돌려 보니, 상황이 완전히 반전되어 있었다.
여름밤은 머릿속이 충만감으로 차오르고 몸의 통증이 빠른 속도로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호흡을 방해하던 복부의 통증이 사라지고, 망치에 당한 오른손도 아물어가고 있었다. 반면 비명을 지르고 있는 여자는 눈앞에서 점점 미라처럼 말라 붙어가고 있었다.
‘…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분명 자신에게 새겨진 마술은 단 하나, 접촉한 괴물을 꿈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진이 새겼고, 프랜시스가 뒤집은 마술.
그런데 이 현상은 대체 뭐란 말인가?
문득 그는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새 잡고 있던 여름밤의 팔과 멱살도 놓은 여자는 제자리에서 고통스러워하며 경련하고 있을 뿐이었다.
여름밤은 그녀에게서 주춤 한 걸음 물러섰다. 아직도 연결되어 있는 투명한 침에 여자의 고개가 홱 들렸다.
여름밤은 완전히 나은 오른손을 여자를 향해 뻗었다.
“믿음이 헤프면 중요한 순간에 배신을 당하게 돼. 내가 너를 믿었던 것처럼…….”
누군가의 음성이 떠올랐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한 목소리는 자조적이고 슬펐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고통스러워하던 여자의 표정이 차츰 평온해지기 시작하더니, 잠에 빠지듯 스르르 눈을 감았다.
곧이어 그에게 닿은 여자는 푸른 섬광에 휩싸여 공중으로 흩어지듯 사라졌다. 그녀가 들고 있던 망치만이 바닥에 툭 떨어져 나뒹굴었다.
“살았다…….”
여름밤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순간적으로 어지러운 느낌에 그는 조금 비틀거리며 섰다. 아직도 머릿속이 멍했고, 그 때문인지 마술도 풀려서 본래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푸른 여인이 발하는 빛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멍한 머리는 알 수 없는 무언가로 가득했고, 푸른 빛을 발하고 있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러지?”
뒤늦게 주위를 둘러본 여름밤은 깜짝 놀랐다. 미처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데, 아직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대낮처럼 훤히 보였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까지 다 보일 정도였다.
“저게 뭐지?”
어리둥절해하던 그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길 위에 파란색 발자국이 또렷하게 찍혀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 없었던 것이 작은 빛까지 내고 있었다.
여름밤은 근처에 가서 그것을 살펴보았다. 발바닥에 파란 형광 페인트를 묻힌 누군가가 걸어간 것처럼, 발자국은 공장 지역 안쪽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찬비다.’
여름밤은 무언가에 홀린 듯 그 발자국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그 파란 발자국이 찬비의 것일 거라는 기묘한 확신이 들었다. 평소에 찬비의 발자국을 눈여겨보아 뒀을 리 없는데도.
‘옅어진다.’
따라 걸을수록 발자국은 희미해지고 주변은 해가 지는 것처럼 조금씩 다시 어두워져 갔다. 머릿속의 충만감도, 푸른 광채도 잦아들었다.
여름밤은 초조한 얼굴로 더 다급히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발자국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찬비를 찾아야 한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에게서 흘러나오던 푸른 광채가 거의 사라졌을 무렵이었다.
빠드득, 빠드득.
찌걱, 찌걱.
기묘한 소리에 여름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단한 무언가가 끊어지고, 부러지는 소리. 진창이 된 바닥 위를 걷는 듯 철벅거리는 소리.
소리가 들리는 곳은 아주 가깝다. 모퉁이 너머의 골목, 고작 몇 걸음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 이제 희미해져서 거의 보이지도 않는 푸른 발자국은 소리가 들리는 그곳으로 이어져 있었다.
여름밤은 저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였다.
가슴 한구석이 불안해졌다.
‘무언가가… 진흙 범벅이 되어 마구 부러져 있는 걸까.’
이내 그는 도시에 괴물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쩌면 사람이…….’
거기까지 생각한 그는 소리 내어 놀라지 않기 위해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모퉁이를 돌았다.
“…….”
그의 상상과는 달리, 바닥은 깨끗했다.
부서지는 뼛조각이나 흘러내리는 핏물, 어느 하나도 흘리지 않고 먹고 마시는 찬비가 있었으니까.
여름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찬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억지로 잡아 늘린 사진 같았다.
왜 사람이 통째로 들어갈 만큼 입이 벌어지는지, 왜 입 밖으로 튀어나온 다리를 감아 넣을 만큼 혀가 긴 건지, 왜 이에 닿은 살갗이 아무 저항 없이 벌어지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찬비의 얼굴은 환희에 젖어 도취되어 있어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그에게는 바로 정면에 있는 여름밤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듯했다.
“우욱…….”
입을 막은 보람도 없이, 여름밤은 쓰러져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 찬비, 구역질을 하는 자신, 모든 게 이해되지 않았다.
“여름아.”
한참을 게워내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건 찬비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였다.
항상 자신을 위로하고 북돋아주던 친구, 찬비가 낯선 표정을 하고 있었다. 처음 이상함을 느꼈던 기숙사 방에서처럼 섬뜩한 표정과는 달랐다.
불안, 걱정, 공포, 분노, 그리고 슬픔.
미처 입을 떼지 못하고 있던 그때, 찬비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곤 그대로 뒤돌아 내달리기 시작했다.
“찬비야!”
여름밤은 찬비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골목에서 골목으로, 또 골목에서 골목으로. 가로등의 빛조차 닿지 않는 어두운 곳으로, 둘은 계속해서 들어갔다.
한참을 달려서 녹초가 된 몸으로 도착한 곳은 어딘지도 모르는 막다른 길이었다. 벽 앞에 멈춰 선 찬비가 천천히 뒤돌아 여름밤을 바라보았다. 거친 호흡을 내쉬며, 어느새 붉어진 눈으로.
“나는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어.”
찬비가 씹어뱉듯 말했다.
“누구에게도 보이기 싫었는데… 적어도 너한테는…….”
무너진 표정을 짓던 찬비는 결국 주저앉았다. 낮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애처로웠지만, 이따금 섞이는 도저히 사람의 것 같지는 않은 쇳소리에 소름이 돋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니지? 말도 안 되잖아. 내가 잘못 본 거지? 어두우니까…….”
여름밤은 힘겹게 찬비를 향해 발걸음을 뗐다.
“가!”
그때, 찬비가 큰 소리로 버럭 소리쳤다. 여름밤이 뚝 멈춰 섰다.
“대체 무슨 일이야, 설명을 해줘.”
“…너를 보니까 알 것 같아. 난… 괴물이야. 그러니까 빨리 도망쳐. 여기서 나가.”
“그런…….”
말도 안 된다고 외치려는 찰나, 맞지 않는 기어가 헛도는 듯한 금속성이 작게 들려왔다. 여름밤은 입을 다물었다.
투둑, 기묘한 소리가 들려 바라보니 감싸고 있는 팔뚝을 파고 들어간 찬비의 손가락이 보였다.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알겠어? 지금도……. 빨리 가. 아직… 괜찮을 때.”
어딘가 눌린 듯한 목소리는 이제 신음에 가까운 원망으로 바뀌어 있었다.
“난… 왜……. 이제 겨우… 사람처럼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름밤은 그저 계속 무언가 중얼거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찬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처음 받은 충격이 조금씩 가라앉자, 이제는 그에 대한 죄책감과 슬픔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나 때문이야.”
한참을 서 있던 여름밤이 문득 중얼거렸다.
찬비가 갑자기 날카로워진 것도, 자신을 멀리하게 된 것도, 지금 저렇게 웅크려 울고 있는 것도, 괴로워하는 것도.
자신이 이런 몸이 아니었으면, 꿈을 꾸지만 않았으면 벌어지지 않을 일이었다.
하다못해 자신이 찬비와 룸메이트가, 친구가 아니었다면.
답답하고 괴로웠다. 하지만 찬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무 의미 없지만 눈을 돌리면 더 큰 잘못을 하는 거라는 기분이 들었다. 여름밤은 찬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가라니까. 빨리 가라고. 오지 마, 위험해. 제발 가.”
찬비가 그를 보지도 않고 메인 목으로 중얼거렸다. 여름밤은 그런 찬비의 양 어깨를 꽉 붙잡아 끌어안았다.
“아니, 괜찮아. 이건 다 악몽이야. 돌아가자.”
그리고 가능한 단호하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악몽. 있을 리도, 있어서도 안 되는 꿈 같은 일일 뿐이다. 그리고 악몽을 꾼 사람에게는 위로가 필요할 뿐이다.
깨어나면 괜찮은 일이라고, 찬비가 그랬듯이 여름밤도 믿었다.
그렇게 간단히 깰 수 있을 리가 없는데도.
“멍청아…….”
찬비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스스로 원해서 친구들을 죽이게 될 거라는 바텀의 말이 머릿속에 스쳤다.
왜 도망치지 않는 거야. 왜 사람을 먹는 걸 보고서도 이렇게 가까이 있는 거야. 그렇게나 도망가라고 했는데.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 거야.”
눈물을 흘리면서도 찬비는 미소 지었다. 벌어진 입가에 날카로운 이빨이 번뜩였다.
마주치다 (2)
‘뭐야, 이거. 몸이 안 움직여…….’
힘이 빠지는 동시에, 가위에 눌린 것처럼 여름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프랜시스가 주문을 새겼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여자의 눈동자로부터 투명하고 기다란, 끝이 뾰족하고 가는 침 같은 것이 뻗어 나왔다. 그것으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듯 여자의 눈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이건…….’
직감적으로 여름밤은 그것을 통해 자신이 망가져 버리게 될 것임을 느꼈다. 칼로 난도질당하듯, 정신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릴 것이다.
“…….”
최선을 다해 발버둥 치고 있었지만, 신음조차 낼 수 없었다. 그사이 침은 스며들 듯 여름밤의 눈동자 속으로 파고들었다. 신기하게도 고통은 없었다.
침은 실제로 여자의 눈에서 튀어나온 게 아니라, 정신이 형상화된 모습에 불과했다. 여름밤의 육체에는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다.
하지만 정신은, 영혼은 경우가 조금 다르다.
길고 투명한 침은 여름밤의 눈을 통해 정신을 향해 다가갔다.
꼬리가 달린 태아처럼 생긴 작고 연약한 그것은 아무런 저항도 못한 채 그저 머릿속을 부유하고 있었다.
마침내 날카로운 침 끝이 여름밤의 정신에 맞닿은 그 순간이었다.
“크아아아악!”
쇳소리가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은 여자 쪽이었다. 투명한 침은 여름밤의 정신에 닿아 있는 곳부터 서서히 파란빛을 띠기 시작했다. 독이 퍼지듯 선연한 파란색이 여자의 정신에 침투하고 있었다.
‘크…으으…아아! 빠, 빨리!’
고통에 치를 떨면서도 여자는 급히 침을 거두어들이려 했다.
‘안 움직여져.’
덫에 걸린 것처럼 여름밤의 정신에 닿은 침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붙들린 침을 통해 무언가가 빨려 나가고 있었다.
‘살려줘…….’
충격에 투명한 침이 진동했다. 파란색의 무언가가 곰팡이처럼 여자의 침을 좀먹어 갔다.
‘뭐지?’
한편 여름밤은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방금 전 눈을 통해 여자의 침이 들어온 뒤로는 공포조차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 바깥쪽으로 정신을 돌려 보니, 상황이 완전히 반전되어 있었다.
여름밤은 머릿속이 충만감으로 차오르고 몸의 통증이 빠른 속도로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호흡을 방해하던 복부의 통증이 사라지고, 망치에 당한 오른손도 아물어가고 있었다. 반면 비명을 지르고 있는 여자는 눈앞에서 점점 미라처럼 말라 붙어가고 있었다.
‘…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분명 자신에게 새겨진 마술은 단 하나, 접촉한 괴물을 꿈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진이 새겼고, 프랜시스가 뒤집은 마술.
그런데 이 현상은 대체 뭐란 말인가?
문득 그는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새 잡고 있던 여름밤의 팔과 멱살도 놓은 여자는 제자리에서 고통스러워하며 경련하고 있을 뿐이었다.
여름밤은 그녀에게서 주춤 한 걸음 물러섰다. 아직도 연결되어 있는 투명한 침에 여자의 고개가 홱 들렸다.
여름밤은 완전히 나은 오른손을 여자를 향해 뻗었다.
“믿음이 헤프면 중요한 순간에 배신을 당하게 돼. 내가 너를 믿었던 것처럼…….”
누군가의 음성이 떠올랐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한 목소리는 자조적이고 슬펐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고통스러워하던 여자의 표정이 차츰 평온해지기 시작하더니, 잠에 빠지듯 스르르 눈을 감았다.
곧이어 그에게 닿은 여자는 푸른 섬광에 휩싸여 공중으로 흩어지듯 사라졌다. 그녀가 들고 있던 망치만이 바닥에 툭 떨어져 나뒹굴었다.
“살았다…….”
여름밤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순간적으로 어지러운 느낌에 그는 조금 비틀거리며 섰다. 아직도 머릿속이 멍했고, 그 때문인지 마술도 풀려서 본래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푸른 여인이 발하는 빛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멍한 머리는 알 수 없는 무언가로 가득했고, 푸른 빛을 발하고 있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러지?”
뒤늦게 주위를 둘러본 여름밤은 깜짝 놀랐다. 미처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데, 아직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대낮처럼 훤히 보였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까지 다 보일 정도였다.
“저게 뭐지?”
어리둥절해하던 그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길 위에 파란색 발자국이 또렷하게 찍혀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 없었던 것이 작은 빛까지 내고 있었다.
여름밤은 근처에 가서 그것을 살펴보았다. 발바닥에 파란 형광 페인트를 묻힌 누군가가 걸어간 것처럼, 발자국은 공장 지역 안쪽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찬비다.’
여름밤은 무언가에 홀린 듯 그 발자국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그 파란 발자국이 찬비의 것일 거라는 기묘한 확신이 들었다. 평소에 찬비의 발자국을 눈여겨보아 뒀을 리 없는데도.
‘옅어진다.’
따라 걸을수록 발자국은 희미해지고 주변은 해가 지는 것처럼 조금씩 다시 어두워져 갔다. 머릿속의 충만감도, 푸른 광채도 잦아들었다.
여름밤은 초조한 얼굴로 더 다급히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발자국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찬비를 찾아야 한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에게서 흘러나오던 푸른 광채가 거의 사라졌을 무렵이었다.
빠드득, 빠드득.
찌걱, 찌걱.
기묘한 소리에 여름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단한 무언가가 끊어지고, 부러지는 소리. 진창이 된 바닥 위를 걷는 듯 철벅거리는 소리.
소리가 들리는 곳은 아주 가깝다. 모퉁이 너머의 골목, 고작 몇 걸음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 이제 희미해져서 거의 보이지도 않는 푸른 발자국은 소리가 들리는 그곳으로 이어져 있었다.
여름밤은 저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였다.
가슴 한구석이 불안해졌다.
‘무언가가… 진흙 범벅이 되어 마구 부러져 있는 걸까.’
이내 그는 도시에 괴물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쩌면 사람이…….’
거기까지 생각한 그는 소리 내어 놀라지 않기 위해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모퉁이를 돌았다.
“…….”
그의 상상과는 달리, 바닥은 깨끗했다.
부서지는 뼛조각이나 흘러내리는 핏물, 어느 하나도 흘리지 않고 먹고 마시는 찬비가 있었으니까.
여름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찬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억지로 잡아 늘린 사진 같았다.
왜 사람이 통째로 들어갈 만큼 입이 벌어지는지, 왜 입 밖으로 튀어나온 다리를 감아 넣을 만큼 혀가 긴 건지, 왜 이에 닿은 살갗이 아무 저항 없이 벌어지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찬비의 얼굴은 환희에 젖어 도취되어 있어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그에게는 바로 정면에 있는 여름밤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듯했다.
“우욱…….”
입을 막은 보람도 없이, 여름밤은 쓰러져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 찬비, 구역질을 하는 자신, 모든 게 이해되지 않았다.
“여름아.”
한참을 게워내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건 찬비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였다.
항상 자신을 위로하고 북돋아주던 친구, 찬비가 낯선 표정을 하고 있었다. 처음 이상함을 느꼈던 기숙사 방에서처럼 섬뜩한 표정과는 달랐다.
불안, 걱정, 공포, 분노, 그리고 슬픔.
미처 입을 떼지 못하고 있던 그때, 찬비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곤 그대로 뒤돌아 내달리기 시작했다.
“찬비야!”
여름밤은 찬비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골목에서 골목으로, 또 골목에서 골목으로. 가로등의 빛조차 닿지 않는 어두운 곳으로, 둘은 계속해서 들어갔다.
한참을 달려서 녹초가 된 몸으로 도착한 곳은 어딘지도 모르는 막다른 길이었다. 벽 앞에 멈춰 선 찬비가 천천히 뒤돌아 여름밤을 바라보았다. 거친 호흡을 내쉬며, 어느새 붉어진 눈으로.
“나는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어.”
찬비가 씹어뱉듯 말했다.
“누구에게도 보이기 싫었는데… 적어도 너한테는…….”
무너진 표정을 짓던 찬비는 결국 주저앉았다. 낮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애처로웠지만, 이따금 섞이는 도저히 사람의 것 같지는 않은 쇳소리에 소름이 돋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니지? 말도 안 되잖아. 내가 잘못 본 거지? 어두우니까…….”
여름밤은 힘겹게 찬비를 향해 발걸음을 뗐다.
“가!”
그때, 찬비가 큰 소리로 버럭 소리쳤다. 여름밤이 뚝 멈춰 섰다.
“대체 무슨 일이야, 설명을 해줘.”
“…너를 보니까 알 것 같아. 난… 괴물이야. 그러니까 빨리 도망쳐. 여기서 나가.”
“그런…….”
말도 안 된다고 외치려는 찰나, 맞지 않는 기어가 헛도는 듯한 금속성이 작게 들려왔다. 여름밤은 입을 다물었다.
투둑, 기묘한 소리가 들려 바라보니 감싸고 있는 팔뚝을 파고 들어간 찬비의 손가락이 보였다.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알겠어? 지금도……. 빨리 가. 아직… 괜찮을 때.”
어딘가 눌린 듯한 목소리는 이제 신음에 가까운 원망으로 바뀌어 있었다.
“난… 왜……. 이제 겨우… 사람처럼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름밤은 그저 계속 무언가 중얼거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찬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처음 받은 충격이 조금씩 가라앉자, 이제는 그에 대한 죄책감과 슬픔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나 때문이야.”
한참을 서 있던 여름밤이 문득 중얼거렸다.
찬비가 갑자기 날카로워진 것도, 자신을 멀리하게 된 것도, 지금 저렇게 웅크려 울고 있는 것도, 괴로워하는 것도.
자신이 이런 몸이 아니었으면, 꿈을 꾸지만 않았으면 벌어지지 않을 일이었다.
하다못해 자신이 찬비와 룸메이트가, 친구가 아니었다면.
답답하고 괴로웠다. 하지만 찬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무 의미 없지만 눈을 돌리면 더 큰 잘못을 하는 거라는 기분이 들었다. 여름밤은 찬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가라니까. 빨리 가라고. 오지 마, 위험해. 제발 가.”
찬비가 그를 보지도 않고 메인 목으로 중얼거렸다. 여름밤은 그런 찬비의 양 어깨를 꽉 붙잡아 끌어안았다.
“아니, 괜찮아. 이건 다 악몽이야. 돌아가자.”
그리고 가능한 단호하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악몽. 있을 리도, 있어서도 안 되는 꿈 같은 일일 뿐이다. 그리고 악몽을 꾼 사람에게는 위로가 필요할 뿐이다.
깨어나면 괜찮은 일이라고, 찬비가 그랬듯이 여름밤도 믿었다.
그렇게 간단히 깰 수 있을 리가 없는데도.
“멍청아…….”
찬비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스스로 원해서 친구들을 죽이게 될 거라는 바텀의 말이 머릿속에 스쳤다.
왜 도망치지 않는 거야. 왜 사람을 먹는 걸 보고서도 이렇게 가까이 있는 거야. 그렇게나 도망가라고 했는데.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 거야.”
눈물을 흘리면서도 찬비는 미소 지었다. 벌어진 입가에 날카로운 이빨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