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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마주치다 (1)
여름밤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몰래 나가기로 한 이상 1층의 정문을 이용할 수는 없다. 당연히 1층 경비실의 경비 아저씨한테 걸리게 될 테고, 벌점만 먹은 채 다시 붙잡혀 돌아올 것이다.
대신 창문을 이용하기로 했다. 방 맞은편에는 나무가 하나 자라 있었다. 충분히 타고서 내려갈 수 있을 만한 굵기의 나무였다.
창문을 열고 확인해 보니, 창가와의 거리가 좀 되기는 하지만 도약하면 어떻게든 닿을 수는 있을 거 같다. 솔직히 좀 무섭긴 하지만, 이미 실제로 꿈속에서 괴물에 쫓겨 한 번 나무를 타 보기도 했으니 아마 괜찮으리라.
‘아마 찬비도 이리로 나갔겠지.’
아까 눈을 떴을 때, 창문은 열려 있었다. 통로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면 딱히 열려 있을 이유가 없으리라.
그의 생각은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렸다. 찬비는 창문으로 나가기는 했지만, 나무를 타고 내려간 것은 아니었으니까.
프랜시스의 마술을 머릿속으로 떠올리자, 푸른 빛과 함께 여름밤은 푸른 머리카락의 여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창가로 향하던 여름밤이 순간 멈춰 섰다. 꿈속에서야 신발이 없어서 땅바닥이고 돌바닥이고 맨발로 디디며 뛰어야 하지만, 현실에서도 그래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잠시 후, 창틀에 앉은 여름밤이 발에 갈색 샌들을 끼웠다. 여인의 것으로 변한 발에 그나마 맞는 신발은 그것뿐이었다. 늘 신던 샌들 뒤축이 걸을 때마다 헐떡거리는 것은 조금 기묘한 느낌이었다.
샌들을 다 신은 여름밤은 창밖으로 다리를 뻗고 제 발을 한차례 내려다보았다.
원래 꿈속에서도 보던 모습이니 금방 익숙해진 걸까. 몇 번 변했다고 이제 그 작아진 발도 꽤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샌들을 꽉 조인 여름밤은 망설임도 없이 토끼처럼 가볍게 건너편의 나무로 점프하여 기둥을 잡았다. 아슬아슬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인의 몸으로 하니 가뿐한 동작이었다. 여름밤은 순식간에 나무를 타고 3층 높이를 내려갔다.
창문 아래는 바로 기숙사 부지의 후문과 통하고 있었다.
후문 앞까지 간 여름밤이 인상을 썼다. 후문에는 굵직한 사슬과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찬비는 어떻게 했을까?’
어쩌면… 담장을 넘었을지도 모른다.
담장은 옆에 있는 농구 골대보다 약간 낮았다. 문득 예전에 찬비가 저 골대에 덩크슛을 넣는 것을 본 기억이 났다. 찬비는 키도 크고, 운동신경도 좋다. 담장 위쪽은 창살로 되어 있으니 점프해서 담 위에 손을 걸치기만 한다면, 창살을 잡고 몸을 끌어 올려 충분히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도 할 수 있으려나?’
여름밤은 뒤로 다섯 걸음 정도 물러나 도움닫기를 한 다음 뛰어올랐다. 탁, 땅을 박차는 소리가 비어 있는 기숙사 뒷마당에 울렸다.
“엥?”
걱정하던 것과는 달리, 담장 위 창살은 그의 발 아래로 지나갔다. 한참 여유가 있었다. 착지 또한 별 충격도 없이 사뿐했다.
“장난 아니네.”
여름밤은 방금 뛰어넘어 버린 담장을 올려다보았다. 꿈속의 몸은 볼수록 탁월한 신체 능력을 갖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아까도 굳이 나무를 탈 것 없이 그냥 기숙사 창밖으로 뛰어내려도 되지 않았나 싶다. 좀 열심히 뛰면 기숙사 방으로 올라가는 것도 문제없을 것 같았다. 여름밤은 왠지 모를 허무함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공장 구역이면 이쪽인가?”
여름밤은 정면으로 길게 뻗은 도로를 바라보았다.
후문 길을 쭉 따라가면 미개발 지역이 나오고, 그 뒤로 공장 구역이 있다. 걸어서 15분, 뛰어서는 7∼8분쯤 되는 거리. 그러나 이 ‘푸른 여인’의 신체 능력이라면 훨씬 더 빠르게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한 번 전력으로 달려보자.”
여름밤은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단거리 달리기 주자처럼 스타팅 자세를 취했다.
상식적으로 그 거리를 단거리 달리기처럼 전력 질주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이 거리의 열 배, 스무 배가 되더라도 전력 질주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꿈속에서의 감각대로라면.
그는 발로 힘차게 땅을 박찼다.
“우아앗!”
출발과 동시에, 여름밤은 스스로의 속도에 감탄했다.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구획당 100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리를 고작 두세 걸음으로 제치며 달리고 있었으니까. 차도에서 달려도 문제없을 정도다.
공장 구역에 진입하는 건 정말이지 순식간이었다. 공장 구역 입구에 도착하자 여름밤이 조금씩 속도를 줄이며 멈추어 섰다.
“…1분도 안 걸린 거 같은데?”
심박도 빨라지지 않았고,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호흡도 안정적이다.
꿈속에서야 도망치느라 바빠서 생각 못했지만, 도대체 이 가녀린 몸 어디에서 이런 힘이 나오는 것일까?
“아차.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찬비를 찾아야 해.”
여름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연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거대하고 삭막한 건물들과 철조망, 이곳저곳에 붙어 있는 경고문들, 넓디넓은 아스팔트 바닥.
공장 지역에는 길이라고 할 게 따로 없었다. 구조물이 있지 않은 곳이 모두 길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무언가를 찾기에는 오히려 제대로 길이 나 있는 곳보다 더 복잡한 곳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여름밤은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그리고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다 돌아다녀 보면 되지.’
넓기는 하지만 이 몸 상태라면 얼마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지리를 잘 모르니 후미진 곳은 못 보고 그냥 지나치거나 찬비와 엇갈릴 수도 있겠지만, 가능한 빨리 찾아서 기숙사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여름밤은 즉시 달려 나가기 위한 자세를 잡았다. 그때였다.
“저기, 길 좀 물을게.”
뒤에서 낯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름밤은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긴 웨이브 머리에 가죽 재킷을 입고 있는 한 여성이 서 있었다. 여름밤은 한동안 말을 잊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어디를 찾으시는데요?”
지금은 새벽이다. 이런 시간에, 이런 곳에서 길을 묻는 사람이라니.
‘게다가…….’
가죽 재킷을 입은 여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문제는 바로 소름 끼치게 번들거리는 눈동자였다.
그저 지나쳤다면 미처 알지 못했겠지만, 미소 짓고 있는 그 눈은 기묘한 이채를 띠고 있었다. 작은 곤충을 짓이겨 죽이기 직전의 어린아이 같은, 흥분과 즐거움이 뒤섞인 그런 것이었다.
여름밤은 곧 여자가 무언가를 손에 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보지 못한 건, 길거리에서 누군가 들고 다니는 걸 볼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여름밤은 간신히 태연한 척할 수 있었다.
여자의 손에 들린 것은 팔뚝만 한 망치였다.
“이 냄새 뭐야? 어디서 이상할 정도로 맛있는 냄새가 나고 있는데?”
“…무슨 냄새요? 모르겠는데요.”
여름밤은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뒤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자는 다가오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물러서고 있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듯, 연신 코를 킁킁거린다.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깜박이지도 않았다. 흥미로운 만화경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기묘한 표정. 점점 더 환하게 미소가 번져 간다.
여자가 문득 말했다.
“너한테서 나는 것 같은데?”
“흡!”
여름밤이 화들짝 놀라 물러섰다. 별안간 여자가 달려들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망치를 휘두른 것이다.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
간발의 차로 망치가 움직이는 것을 본 여름밤은 아슬아슬하게 그것을 피했다.
하지만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음, 다시 그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홱, 망치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아래에서 복부 쪽으로 쳐올리는 큰 스윙. 여름밤은 곧바로 바닥을 박차고 뒤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뒤로 물러서며 몇 번을 피하다 뛴 탓에, 마지막에는 균형을 살짝 잃고 말았다.
“커억!”
몸을 날린 그대로 여름밤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슴 부근을 부여잡은 채였다. 마지막 공격에 적중당하고 만 것이다.
뒤로 뛰었기에 그나마 충격을 반감시킬 수 있었지만, 푸른 여인의 상태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복부 전체가 함몰되어 즉사했을 것이다.
망치를 든 여자는 신음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여름밤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정수리, 그다음엔 턱을 노렸는데. 반사 신경이 좋네, 너. 보통 같으면 그걸 피할 수 있을 리 없지. 맞았는데 터지지도 않았고, 왠지 닿으면 안 될 것 같은 위험한 푸른 빛도 내고 있고.”
여자는 조용히 윗입술을 혀끝으로 핥았다.
“다행이야, 터지지 않아서. 제일 맛있는 데를 버릴 뻔했잖아. 너 말야, 엄청 맛있어 보여. 왜, 그 복어 같은 거. 복어는 독이 있지만 엄청 부드럽고 맛있잖아. 뭐, 이제 난 복어 같은 건 먹을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지만, 대충 무슨 맛이었는지는 기억나. 그런 맛일 것 같아. 설마 이런 게 있을 줄이야. 깜짝 놀랐다니까. 진짜 맛있겠다.”
여름밤은 온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뭐라는 거야. ‘맛있어 보인다’니 꼭 괴물 같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생각하던 여름밤이 눈을 크게 떴다.
어제 굿펠로와 폐병원 부지에 갔을 때, 폐병원 부지에 쌓여 있는 괴물들의 시체 더미 사이에 드문드문 사람처럼 보이는 시체들이 있었다. 모두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었지만.
‘사람 모습을 한 괴물도 있을 수 있다는 건가.’
“너, 괴물…이냐?”
비틀거리며 어떻게든 일어서려고 노력하던 여름밤이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 복부를 맞은 탓일까, 팔다리가 덜덜 떨리고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바로 근처까지 다가온 여자는 손바닥에 가볍게 망치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신인류’라고 하지. 너처럼 이런 거 한 대 맞았다고 뻗는 인간도 아니고, 본능밖에 없는 짐승도 아니야. 그러니까 너무 억울해하지는 말라고. 네가 나한테 먹히는 건 자연의 섭리야. 내년에 돋아날 새 잎새를 위해 낙엽이 썩어 문드러지는 그런 거지. 오, 방금 시인 같지 않았어?”
여자는 깔깔 웃었다.
“싱싱할 때 바로 먹는 게 맛있긴 하지만, 별식이기도 하고 좀 아껴두기로 할까? 용케 한 방 피하기도 했고.”
“큭…….”
여자는 한 손으로 여름밤의 멱살을 잡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발버둥을 쳐봤지만 소용없었다. 전혀 협조하지 않았음에도 여자는 마치 장난감처럼 그를 들고 있었다.
여름밤은 아직도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들어 여자를 향해 뻗었다.
닿기만 하면… 꿈속으로 날려 보낼 수 있다.
“끄아아아악!”
곧이어 끔찍한 통증이 이어졌다. 뻗어가던 손은 반쯤 묵사발이 나 있었다. 여자가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망치로 손을 후려친 것이다.
“자꾸 귀찮게 하지 마.”
여자는 경고하듯 내뱉고, 그가 더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망치를 든 손으로 다른 팔마저 움켜쥐었다. 옷 위라서 그런 것인지, 마술은 발동되지 않았다.
“뭘… 하려는 거야.”
“말벌은 먹이를 사냥할 때 먹이에 독을 주입해서 몸을 마비시키거든. 그렇게 마비된 먹이는 아사하기 전까지 꽤 긴 시간 동안 썩지 않고 버틸 수 있어. 그거랑 비슷한데, 흠……. 뭐, 그런 게 있어. 정신독이라고 부르지.”
여자는 뜸 들이지도 않고 친절히 설명했다.
“정신독……?”
어느새 여자는 미소가 싹 가신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금방이라도 잠에 빠질 것 같은 평온하고 잠잠한 기분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마주치다 (1)
여름밤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몰래 나가기로 한 이상 1층의 정문을 이용할 수는 없다. 당연히 1층 경비실의 경비 아저씨한테 걸리게 될 테고, 벌점만 먹은 채 다시 붙잡혀 돌아올 것이다.
대신 창문을 이용하기로 했다. 방 맞은편에는 나무가 하나 자라 있었다. 충분히 타고서 내려갈 수 있을 만한 굵기의 나무였다.
창문을 열고 확인해 보니, 창가와의 거리가 좀 되기는 하지만 도약하면 어떻게든 닿을 수는 있을 거 같다. 솔직히 좀 무섭긴 하지만, 이미 실제로 꿈속에서 괴물에 쫓겨 한 번 나무를 타 보기도 했으니 아마 괜찮으리라.
‘아마 찬비도 이리로 나갔겠지.’
아까 눈을 떴을 때, 창문은 열려 있었다. 통로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면 딱히 열려 있을 이유가 없으리라.
그의 생각은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렸다. 찬비는 창문으로 나가기는 했지만, 나무를 타고 내려간 것은 아니었으니까.
프랜시스의 마술을 머릿속으로 떠올리자, 푸른 빛과 함께 여름밤은 푸른 머리카락의 여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창가로 향하던 여름밤이 순간 멈춰 섰다. 꿈속에서야 신발이 없어서 땅바닥이고 돌바닥이고 맨발로 디디며 뛰어야 하지만, 현실에서도 그래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잠시 후, 창틀에 앉은 여름밤이 발에 갈색 샌들을 끼웠다. 여인의 것으로 변한 발에 그나마 맞는 신발은 그것뿐이었다. 늘 신던 샌들 뒤축이 걸을 때마다 헐떡거리는 것은 조금 기묘한 느낌이었다.
샌들을 다 신은 여름밤은 창밖으로 다리를 뻗고 제 발을 한차례 내려다보았다.
원래 꿈속에서도 보던 모습이니 금방 익숙해진 걸까. 몇 번 변했다고 이제 그 작아진 발도 꽤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샌들을 꽉 조인 여름밤은 망설임도 없이 토끼처럼 가볍게 건너편의 나무로 점프하여 기둥을 잡았다. 아슬아슬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인의 몸으로 하니 가뿐한 동작이었다. 여름밤은 순식간에 나무를 타고 3층 높이를 내려갔다.
창문 아래는 바로 기숙사 부지의 후문과 통하고 있었다.
후문 앞까지 간 여름밤이 인상을 썼다. 후문에는 굵직한 사슬과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찬비는 어떻게 했을까?’
어쩌면… 담장을 넘었을지도 모른다.
담장은 옆에 있는 농구 골대보다 약간 낮았다. 문득 예전에 찬비가 저 골대에 덩크슛을 넣는 것을 본 기억이 났다. 찬비는 키도 크고, 운동신경도 좋다. 담장 위쪽은 창살로 되어 있으니 점프해서 담 위에 손을 걸치기만 한다면, 창살을 잡고 몸을 끌어 올려 충분히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도 할 수 있으려나?’
여름밤은 뒤로 다섯 걸음 정도 물러나 도움닫기를 한 다음 뛰어올랐다. 탁, 땅을 박차는 소리가 비어 있는 기숙사 뒷마당에 울렸다.
“엥?”
걱정하던 것과는 달리, 담장 위 창살은 그의 발 아래로 지나갔다. 한참 여유가 있었다. 착지 또한 별 충격도 없이 사뿐했다.
“장난 아니네.”
여름밤은 방금 뛰어넘어 버린 담장을 올려다보았다. 꿈속의 몸은 볼수록 탁월한 신체 능력을 갖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아까도 굳이 나무를 탈 것 없이 그냥 기숙사 창밖으로 뛰어내려도 되지 않았나 싶다. 좀 열심히 뛰면 기숙사 방으로 올라가는 것도 문제없을 것 같았다. 여름밤은 왠지 모를 허무함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공장 구역이면 이쪽인가?”
여름밤은 정면으로 길게 뻗은 도로를 바라보았다.
후문 길을 쭉 따라가면 미개발 지역이 나오고, 그 뒤로 공장 구역이 있다. 걸어서 15분, 뛰어서는 7∼8분쯤 되는 거리. 그러나 이 ‘푸른 여인’의 신체 능력이라면 훨씬 더 빠르게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한 번 전력으로 달려보자.”
여름밤은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단거리 달리기 주자처럼 스타팅 자세를 취했다.
상식적으로 그 거리를 단거리 달리기처럼 전력 질주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이 거리의 열 배, 스무 배가 되더라도 전력 질주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꿈속에서의 감각대로라면.
그는 발로 힘차게 땅을 박찼다.
“우아앗!”
출발과 동시에, 여름밤은 스스로의 속도에 감탄했다.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구획당 100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리를 고작 두세 걸음으로 제치며 달리고 있었으니까. 차도에서 달려도 문제없을 정도다.
공장 구역에 진입하는 건 정말이지 순식간이었다. 공장 구역 입구에 도착하자 여름밤이 조금씩 속도를 줄이며 멈추어 섰다.
“…1분도 안 걸린 거 같은데?”
심박도 빨라지지 않았고,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호흡도 안정적이다.
꿈속에서야 도망치느라 바빠서 생각 못했지만, 도대체 이 가녀린 몸 어디에서 이런 힘이 나오는 것일까?
“아차.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찬비를 찾아야 해.”
여름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연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거대하고 삭막한 건물들과 철조망, 이곳저곳에 붙어 있는 경고문들, 넓디넓은 아스팔트 바닥.
공장 지역에는 길이라고 할 게 따로 없었다. 구조물이 있지 않은 곳이 모두 길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무언가를 찾기에는 오히려 제대로 길이 나 있는 곳보다 더 복잡한 곳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여름밤은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그리고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다 돌아다녀 보면 되지.’
넓기는 하지만 이 몸 상태라면 얼마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지리를 잘 모르니 후미진 곳은 못 보고 그냥 지나치거나 찬비와 엇갈릴 수도 있겠지만, 가능한 빨리 찾아서 기숙사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여름밤은 즉시 달려 나가기 위한 자세를 잡았다. 그때였다.
“저기, 길 좀 물을게.”
뒤에서 낯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름밤은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긴 웨이브 머리에 가죽 재킷을 입고 있는 한 여성이 서 있었다. 여름밤은 한동안 말을 잊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어디를 찾으시는데요?”
지금은 새벽이다. 이런 시간에, 이런 곳에서 길을 묻는 사람이라니.
‘게다가…….’
가죽 재킷을 입은 여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문제는 바로 소름 끼치게 번들거리는 눈동자였다.
그저 지나쳤다면 미처 알지 못했겠지만, 미소 짓고 있는 그 눈은 기묘한 이채를 띠고 있었다. 작은 곤충을 짓이겨 죽이기 직전의 어린아이 같은, 흥분과 즐거움이 뒤섞인 그런 것이었다.
여름밤은 곧 여자가 무언가를 손에 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보지 못한 건, 길거리에서 누군가 들고 다니는 걸 볼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여름밤은 간신히 태연한 척할 수 있었다.
여자의 손에 들린 것은 팔뚝만 한 망치였다.
“이 냄새 뭐야? 어디서 이상할 정도로 맛있는 냄새가 나고 있는데?”
“…무슨 냄새요? 모르겠는데요.”
여름밤은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뒤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자는 다가오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물러서고 있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듯, 연신 코를 킁킁거린다.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깜박이지도 않았다. 흥미로운 만화경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기묘한 표정. 점점 더 환하게 미소가 번져 간다.
여자가 문득 말했다.
“너한테서 나는 것 같은데?”
“흡!”
여름밤이 화들짝 놀라 물러섰다. 별안간 여자가 달려들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망치를 휘두른 것이다.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
간발의 차로 망치가 움직이는 것을 본 여름밤은 아슬아슬하게 그것을 피했다.
하지만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음, 다시 그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홱, 망치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아래에서 복부 쪽으로 쳐올리는 큰 스윙. 여름밤은 곧바로 바닥을 박차고 뒤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뒤로 물러서며 몇 번을 피하다 뛴 탓에, 마지막에는 균형을 살짝 잃고 말았다.
“커억!”
몸을 날린 그대로 여름밤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슴 부근을 부여잡은 채였다. 마지막 공격에 적중당하고 만 것이다.
뒤로 뛰었기에 그나마 충격을 반감시킬 수 있었지만, 푸른 여인의 상태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복부 전체가 함몰되어 즉사했을 것이다.
망치를 든 여자는 신음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여름밤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정수리, 그다음엔 턱을 노렸는데. 반사 신경이 좋네, 너. 보통 같으면 그걸 피할 수 있을 리 없지. 맞았는데 터지지도 않았고, 왠지 닿으면 안 될 것 같은 위험한 푸른 빛도 내고 있고.”
여자는 조용히 윗입술을 혀끝으로 핥았다.
“다행이야, 터지지 않아서. 제일 맛있는 데를 버릴 뻔했잖아. 너 말야, 엄청 맛있어 보여. 왜, 그 복어 같은 거. 복어는 독이 있지만 엄청 부드럽고 맛있잖아. 뭐, 이제 난 복어 같은 건 먹을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지만, 대충 무슨 맛이었는지는 기억나. 그런 맛일 것 같아. 설마 이런 게 있을 줄이야. 깜짝 놀랐다니까. 진짜 맛있겠다.”
여름밤은 온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뭐라는 거야. ‘맛있어 보인다’니 꼭 괴물 같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생각하던 여름밤이 눈을 크게 떴다.
어제 굿펠로와 폐병원 부지에 갔을 때, 폐병원 부지에 쌓여 있는 괴물들의 시체 더미 사이에 드문드문 사람처럼 보이는 시체들이 있었다. 모두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었지만.
‘사람 모습을 한 괴물도 있을 수 있다는 건가.’
“너, 괴물…이냐?”
비틀거리며 어떻게든 일어서려고 노력하던 여름밤이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 복부를 맞은 탓일까, 팔다리가 덜덜 떨리고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바로 근처까지 다가온 여자는 손바닥에 가볍게 망치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신인류’라고 하지. 너처럼 이런 거 한 대 맞았다고 뻗는 인간도 아니고, 본능밖에 없는 짐승도 아니야. 그러니까 너무 억울해하지는 말라고. 네가 나한테 먹히는 건 자연의 섭리야. 내년에 돋아날 새 잎새를 위해 낙엽이 썩어 문드러지는 그런 거지. 오, 방금 시인 같지 않았어?”
여자는 깔깔 웃었다.
“싱싱할 때 바로 먹는 게 맛있긴 하지만, 별식이기도 하고 좀 아껴두기로 할까? 용케 한 방 피하기도 했고.”
“큭…….”
여자는 한 손으로 여름밤의 멱살을 잡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발버둥을 쳐봤지만 소용없었다. 전혀 협조하지 않았음에도 여자는 마치 장난감처럼 그를 들고 있었다.
여름밤은 아직도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들어 여자를 향해 뻗었다.
닿기만 하면… 꿈속으로 날려 보낼 수 있다.
“끄아아아악!”
곧이어 끔찍한 통증이 이어졌다. 뻗어가던 손은 반쯤 묵사발이 나 있었다. 여자가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망치로 손을 후려친 것이다.
“자꾸 귀찮게 하지 마.”
여자는 경고하듯 내뱉고, 그가 더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망치를 든 손으로 다른 팔마저 움켜쥐었다. 옷 위라서 그런 것인지, 마술은 발동되지 않았다.
“뭘… 하려는 거야.”
“말벌은 먹이를 사냥할 때 먹이에 독을 주입해서 몸을 마비시키거든. 그렇게 마비된 먹이는 아사하기 전까지 꽤 긴 시간 동안 썩지 않고 버틸 수 있어. 그거랑 비슷한데, 흠……. 뭐, 그런 게 있어. 정신독이라고 부르지.”
여자는 뜸 들이지도 않고 친절히 설명했다.
“정신독……?”
어느새 여자는 미소가 싹 가신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금방이라도 잠에 빠질 것 같은 평온하고 잠잠한 기분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