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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의심 (1)



“아, 와 있었어?”

방에 들어가니 욕실에서 샤워를 마치며 나오는 찬비의 모습이 보였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는 그 얼굴이 왠지 핼쑥해 보인다.

찬비가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보았다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통금이 코앞이니까.”

그는 신경질적으로 말하고는 침대 아래의 서랍에서 옷가지들을 꺼내어 입기 시작했다.

찬비는… 건드리면 터질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화가 난 걸까?

여름밤은 조심조심 찬비에게 다가갔다. 그가 찬비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는 순간, 찬비는 어떻게 알았는지 홱 돌아보더니 날카롭게 말했다.

“건들지 마.”

허공에서 갈 곳을 잃은 여름밤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어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깨어난 뒤로 계속 이런 식이다.

여름밤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짜증스럽게 들리지 않도록, 화내는 것처럼 들리지 않도록 목에 힘을 빼고.

“뭐가 문제인 거야?”

그러자 깜짝 놀랄 정도로 우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찬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름밤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창가 쪽으로 멀어졌다.

“네 탓이 아냐.”

화가 난 듯하던 목소리는 한풀 꺾여 있었다. 분노가 사라진 찬비의 목소리는 아주 외로운 느낌을 주었다. 찬비가 조용히 덧붙였다.

“내가 문제야. 해결되면… 그때 얘기할게.”

그는 더 이상 무언가 물어보지 못했다. 찬비가 어딘지 울 듯한 얼굴에 힘들게 미소를 띠었다.

“저녁은 먹었냐?”

그 모습에 여름밤은 오히려 더 기분이 복잡해졌다.

찬비는 자신이 멀어지길 원하는 걸까, 아니면 가까워지길 원하는 걸까?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가까워지지 않기를 원하는 듯도 하다.

‘하지만… 어째서?’

“어, 새벽이라는 애랑 같이 먹었어. 유성이 룸메이트. 넌?”

“…먹었어, 밖에서.”

대답하는 찬비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뭐 먹었는데?”

“그냥… 분식집에서 간단히 먹었어.”

여름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그가 아는 한, 이 근처의 분식집은 오늘 자신과 새벽이 간 곳 하나밖에 없다.

먹은 시간이 엇갈린 것일까? 아니면 같은 장소에 있고도 서로 못 본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어째서… 어디에서 무엇을 먹었는지조차 숨겨야 하는 걸까?

그렇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는 교복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욕실로 향했다. 욕실 문을 닫자, 밖에서 찬비가 길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무언가 있어.’

샤워기의 물을 틀며 여름밤은 생각했다.


* * *


꿈을 꾸었다. 아무것도 없는 드넓은 바다에 자신만 홀로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그를 괴롭히는 것도, 기쁘게 하는 것도 없다. 멀리서 보면 온통 파래서 자신은 잘 보이지도 않을 망망대해에 떠 있었다.

그때였다.

“인간이여, 왔는가?”

발아래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물이 빠지는 소리가 들리며 무언가 아래에서 자신을 밀어 올려, 여름밤은 바다에서 멀어져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거북이 프랭클린의 머리였다. 여름밤은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덕분에 안녕하다네. 자네가 다녀간 이후, 그분께서 완전히 기운을 차리셨어. 오늘 아침에는 내 머리 위에 앉아 바다를 산책하셨지. 그분이 당신께서 창조한 세상을 다시 둘러보고 싶다고 하신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네.”

그와는 대조적으로 프랭클린은 힘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다행이네요.”

그는 힘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그제야 프랭클린은 여름밤의 상태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이여, 목소리가 영 좋지 않군. 무슨 일인가? 나도 자네를 돕고 싶군.”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하지만 다른 세상의 일이라 프랭클린 씨가 도와주시긴 힘들 것 같아요.”

이 맘씨 좋은 거북이의 걱정이 느껴져 여름밤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푸른 눈은 여전히 슬픈 빛을 띠고 있었다.

잠시 말이 없던 프랭클린은 섬이 있는 방향을 향해서 헤엄치기 시작했다.

“음, 다른 세계의 일이라면 내가 직접 돕는 것은 무리겠군. 하지만 상담만이라면 할 수 있다네. 5천 년이나 산 늙은 거북이의 지혜를 빌려보는 것은 어떠한가?”

“…그래도 괜찮을까요?”

“괜찮고말고. 자네가 나에게 의지한다면 그 또한 내 기쁨이 될 걸세. 허허.”

프랭클린이 너털웃음을 쳤다. 왠지 마음이 놓인다.

여름밤이 옆으로 돌아누우며 말했다. 파란 머리카락이 얼굴 위로 흩어지듯 내려왔다.

“친한 친구가… 갑자기 절 피하는데요. 그렇다고 아주 멀어지기를 바라는 것 같지도 않고. 무언가를 숨기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음, 그렇구만. 친구 문제인가.”

프랭클린은 알아들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프랭클린의 승차감에 익숙해진 여름밤은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머릿가죽을 붙들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솔직히 걱정되서 죽겠는데 물어봐도 아무 말도 안 해주더라구요.”

마음이 갑갑했다.

다시 바로 눕자, 답답한 마음과는 정반대로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보였다. 여름밤은 팔을 들어 눈을 가려 버렸다.

거북이 프랭클린은 한동안 눈을 감고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누구에게나 숨기고 싶은 비밀 한두 가지쯤은 있는 법이네. 때로는 그 비밀 때문에 주변과의 관계를 망치기도 하지. 그러나 그것은 자네와의 관계보다 비밀이 더 소중하다던가 하는 문제가 아닐세. 그 친구가 자네에게서 멀어지지 않고 싶어 하는 것이 느껴진다면, 오히려 그 친구가 자네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겠지. 분명 자네와의 관계와 비밀을 지키는 것 사이에서 괴로워하고 있을 게야.”

“그러면… 제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늙은 거북이는 길게 숨을 내쉬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이여, 조급해하지 말게나. 섣불리 행동하지도 말게나. 기다림은 자네에게 큰 고통이 되겠지만, 그러나 억지로 비밀을 알아내면 자네와 친구, 모두에게 상처가 될 거야. 어쩌면 그 과정에서 서로의 신뢰가 무너져 버릴 수도 있다네. 어쩌면 그 과정에서 오해가 생겨 틀어질 수도 있다네. 인간이여, 비밀을 가진 자는 외로움과 싸우게 된다네. 외로워하며, 자신의 문제는 자신만의 문제이고, 자신만이 해결해야 한다고 착각하지. 그런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바로 믿어주는 것이라네. 그 친구에게 믿고 있다고 말해주게.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게.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 친구는 자네에게 고민을 털어놓을 걸세. 그때부터 함께 고민을 해결해 나가면 되는 것이야.”

“믿어준다…….”

여름밤은 작은 목소리로 프랭클린의 말을 되뇌었다.

찬비는… 언제나 무언가 문제가 생기면 백방으로 노력해서 어떻게든 해내고야 만다.

처음 룸메이트가 되었을 때, 여름밤은 찬비가 말을 걸어도 대답도 제대로 안 하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룸메이트라면 더더욱 자신의 꿈에 대해 자세히 알아봤자 좋을 것이 없다. 그냥 같은 방에서 자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그런 상황인데 친해질 수 있을 리도 없고, 친해진다 하더라도 서로 얼굴만 붉히다 끝날 것이다.

멀리하는 게 낫다. 괜히 친해져서 자신 때문에 안 받아도 될 스트레스를 받는 것보다, 그렇게 ‘재수 없는 새끼’라고 욕하고 돌아서는 게 훨씬 낫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도 친구가 된 건 순전히 찬비의 노력 덕이었다.

찬비는 무리하게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모르면서 위로하려고 하지도 않고, 말하지 않아도 힘든 것을 알아주었다.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라는, 자신도 믿지 못할 것을 믿어주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고맙습니다. 프랭클린 씨 덕분에 조금은 알 것 같네요. 정말 지혜로운 분이시군요.”

언제 우울했냐는 듯 여름밤이 빙긋 웃었다. 그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거북이의 입가에도 은은하게 미소가 번졌다.

“인간이여, 늙은이의 지혜는 후회에서 나온다네. 시간이 지나면 과거의 후회스럽던 경험이 비로소 지혜가 되지. 원한다면 언제든 자네의 고민을 털어놓아도 좋네. 그러면 자네는 내가 한 후회를 할 필요가 없을 것이야.”

곧 여름밤을 태운 프랭클린이 섬에 도착했다. 그는 이전에 하던 것처럼 섬의 땅 위로 머리를 내려놓았다. 여름밤이 아래로 폴짝 뛰어내렸다.

“늦었군.”

여름밤의 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니, 은빛 갑옷이 팔짱을 끼고 그곳에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프랜시스 님. 바람이 선선한 것이 참 좋은 날이군요.”

“인사는 오늘 아침에도 했지 않나, 프랭클린. 그것보다 이 인간 좀 잠깐 빌려가지.”

프랜시스가 손가락으로 여름밤을 가리켰다.

“…저요?”

“그래, 여기 인간이 당신 말고 또 누가 있나. 잔말 말고 따라오도록.”

그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쉽게 걸음을 떼지 못했다.

스물스물 전날의 일이 떠오른다. 마술을 뒤집는 주문을 머리에 새기는 작업. 결과적으로 볼 때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괴물을 처리할 방법이 생겼으니 좋은 일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건 정말 머리가 깨지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덜컥 겁이 난 여름밤이 주춤 프랜시스에게서 한 걸음 멀어졌다.

“따라가 보게, 인간이여. 프랜시스 님께서 준비하신 게 있는 모양이네.”

뒤에서 거북이 프랭클린이 여름밤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래도 그는 선뜻 발을 떼지 못했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것을 지켜보던 프랜시스는 기다리다 못해 여름밤을 덥석 잡더니,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여름밤은 그대로 질질질 끌려 숲속으로 들어갔다.

도착한 곳은 이전에도 왔던 그의 탑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 높다란 나무 탑. 그러나 프랜시스는 그 안으로 끌고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는 탑 옆에 있는 커다란 구조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바로 그 앞까지 가서야 여름밤을 놓아주었다. 여름밤은 구시렁대며 붉어진 팔목을 매만졌다.

그것은 동그랗고 투명한, 파란 수정이었다.

잘 보니 거울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잘 세공된 보석처럼 빛나는 거울은 투명했지만, 그는 물론 프랜시스와 주변 풍경까지 아무것도 그 위에 맺히지 않았다. 단지 주변으로 은은한 푸른 광채를 내고 있을 뿐이었다.

“저쪽 세계로 돌아가는 문이야. 이곳에 고정시켜 놓았다. 이렇게 하면 엉뚱한 괴물들이 다른 세상으로 뛰쳐나갈 일은 없을 거다. 또 당신이 돌아가는 문을 찾느라 고생할 필요도 없을 테지. 그리고 저 위쪽을 봐라.”

프랜시스는 손가락으로 구조물의 위를 가리켰다. 고개를 들자, 하얀 원반형의 물체가 거울 위쪽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종이 같은 질감, 가장자리 부분에 빙 둘러 찍혀 있는 은빛 무늬. 그는 금방 그 물체의 정체를 눈치챘다.

“저쪽 세계의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다.”

프랜시스가 그렇게 말하자,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그리고 있는 것처럼 시계 위에 푸른 바늘 두 개가 생겨났다.

“만일 지금 당신이 이 문으로 나간다면 새벽 2시 30분에 눈을 뜨게 되겠지. 뭐, 이론상의 이야기라서 한 번 실험해 보고는 싶군. 나갔다 들어와 봐.”

“…벌써 깨긴 싫은데요.”

“다시 자면 되잖나.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모처럼 당신을 위해서 만들었는데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건가?”

어이가 없었다.

프랜시스는 구시렁대며 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투구를 달그락거리기 시작했다. 약간 짜증이 섞여 있지만, 고압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친한 사람에게 칭얼대는 듯한 느낌이다.

여름밤은 그것이 조금 우스워 속으로 웃는 한편,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한여름밤입니다, 제 이름. 앞으로 여름밤이라고 부르세요. ‘당신’이라니 오글거려요.”

“뭐라고 부르든 내 맘이지.”

프랜시스가 말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여름밤은 아무 말 않고 프랜시스를 빤히 응시했다.

이윽고, 결국 침묵을 견디지 못한 프랜시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름밤… 양인가?”

“군입니다.”

즉답에, 프랜시스의 투구가 푹 아래로 쳐졌다.

“말이나 하는 짓이 여자 같기에 영락없이 여자라고 생각했건만. 뭐, 상관없나. 내 앞에서는 계속 이 모습이니까.”

“…….”

왠지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는다.

프랜시스가 갑자기 점점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을 알 수 없는 텅 빈 얼굴이 유독 무서워 보였다.

여름밤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프랜시스가 다가오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빨리 나가기나 해.”

갑자기 프랜시스가 손바닥으로 양쪽 어깨를 확 밀었다. ‘어어’ 하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서자, 곧바로 시야가 푸른 섬광으로 가득 찼다.

“엇!”

파란 수정이 있던 뒤쪽으로 넘어지는 것 같았는데, 어느새 얌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35분이었다.

“…축하합니다, 프랜시스 씨. 실험은 성공입니다.”

여름밤은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중얼거리고는 바로 다시 자려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문득 어딘가 휑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추운 거 같기도 했다. 옆을 돌아보니, 찬비가 있어야 할 침대 위가 텅 비어 있었다.

“화장실이라도 갔나?”

여름밤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슬쩍 화장실 문 앞까지 다가갔다. 물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작게 노크를 하고 열어보니, 아무도 없음은 물론이고 불도 꺼져 있었다.

“어디 간 거지?”

다시 돌아와 찬비의 침대를 살펴보려는데, 어디선가 찬 바람이 불어와 볼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온 바람에 커튼이 흔들리고 있었다.

“창문도 열어놓고 어디로 간 거야?”

여름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가 창문을 닫았다.

그때, 문득 바텀이 한 말이 떠올랐다.



“얼마 전에 위험한 녀석을 하나 놓쳤거든요.”



바텀을 다치게 한 그 괴물은 아직 이 도시를 돌아다니고 있는 듯했다.

‘만일 찬비가 밖으로 나간 거라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 괴물을 만난다면?’

그러나 여름밤은 이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헤어질 때, 바텀과 굿펠로는 다시 일을 하러 간다고 했다. 보호 대상이 자신이 맞다면, 그들은 계속 이 주변을 돌며 괴물을 잡고 있을 것이다. 바텀이 부상 중인 듯했지만, 단신으로 자연 재해까지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두 명이나 있다. 더욱이 한 번 놓친 괴물이면 그냥 보아 넘겼을 리 없다. 제일 먼저 찾아내 처리했으리라.

“별일 없겠지.”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여름밤은 좀처럼 창가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