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9화
또 다른 마술사 (1)



“아이고, 머리야.”

신음과 함께 여름밤은 눈을 떴다. 몸을 벌떡 일으키자 어지럼증이 밀려왔다. 여름밤은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머리를 짚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익숙한 기숙사 침대 위.

그는 신기함에 잠시 눈을 껌벅거렸다. 그 푸른 섬광을 통하지 않고 꿈이 끝난 것은 처음이다.

“일어났어?”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니, 그곳에는 찬비가 교복을 입은 채 서 있었다. 여름밤을 바라보는 눈빛이 차가웠다.

“나 먼저 나가볼게. 저녁 이따 먼저 먹어라.”

그러고는 채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찬비가 문을 닫고 나갔다.

그때, 천장의 스피커에서 큰 소리로 발랄한 음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인터 걸’의 ‘Browse me’다. 그렇다면 이제 고작 아침 7시란 소리였다.

‘아침부터 어딜 가는 거야?’

의문이 들었지만, 머리가 너무 아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이고…….”

침대에서 내려온 여름밤이 손바닥으로 두 눈을 문질렀다.

무언가 이상했다. 기분이 나른한 게 바닥에 발을 붙이지 않은 것 같다.

붕 뜬 기분으로 비틀대며 화장실로 걸어갔다. 세면대 거울에 벌겋게 홍조를 띤 동그란 얼굴이 보였다.

“뭔가… 꿈을 꿨던 것 같은데.”

천천히 무슨 꿈이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이 또한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늘 잊고 싶어도 잊기 힘들 만큼 현실적이고 무서운 꿈만을 꾸고, 뇌리에서 한동안 꿈속에서 본 것들이 떠나질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젯밤의 꿈은 어딘지 희미한 느낌을 주었다.

늑대 무리, 산만큼이나 거대한 거북이, 에메랄드빛 바다, 갈매기들, 녹림이 우거진 섬과 원숭이, 그리고 거대한 탑.

그곳에서 속이 텅 비어 있지만 움직이는 기이한 갑옷을 만났다. 그의 이름은 프랜시스, 꿈속 세계의 창조자.

그가… 무언가 마술을…….

“윽.”

순간, 머리가 속에서부터 타오르는 것처럼 아팠다. 알 수 없는 언어, 알 수 없는 음성이 붉은색으로 머릿속에서 주르륵 쏟아지듯 떠올랐다.

“…….”

문득 거울을 본 그는 할 말을 잃었다.

그 안에 비친 것은… 푸른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여인이었다.

“이게 뭐야!”

소리치던 여름밤이 급히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목소리도 바뀌었어?! 이게 대체…….’



“지금 걸려 있는 마술을 뒤집으면 그만이지. 너를 통해 저쪽으로 나가는 것처럼, 너를 통해 이쪽으로 되돌아오도록.”



아, 그래. 뒤집는다.

프랜시스는 꿈속과 현실을 잇는 마술을 뒤집으면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꿈속에 있던 것이 현실로 넘어오는 것을, 현실에 있는 것을 다시 꿈속으로 보낼 수 있도록 바꾼다.

한 박자 늦게, 머릿속에 흘러 들어온 낯선 지식들이 떠오르며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게 이런 거였어?”

여름밤은 턱 밑까지 내려온 푸른 머리카락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정말로 ‘마술’처럼 그는 푸른 여인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내가 꿈속에서 이런 모습이구나.’

꿈속 세계는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자연 그대로의 상태다. 당연히 거울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괴물에 쫓겨 다니느라 볼 틈도 없지만.

하얀 피부에 작고 가녀린, 눈부시게 파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의 모습. 머리색이 파랗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건 현실의 자신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괴리감 수준이 아니라 공포네.’

거울 속의 여자는 이제 기묘한 표정을 지은 채 이쪽을 마주 보고 있었다. 꿈속의 모습처럼, 종아리 어림까지 오는 흰색 드레스로 옷도 변해 있었다.

그때, 거울 속 여자의 표정은 더욱 기묘하게 바뀌었다.

“아니, 잠깐만. 학교는 어떻게 하지?”

청월고등학교는 남고다. 이 모습으로 교문에 들어서는 순간, 아니, 기숙사 방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전교생이 미친 듯이 아우성칠 게 뻔하다.

‘미친……. 어쩌지?’

그러나 그런 현실적인 걱정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다.

어쩌지, 하고 머리카락을 움켜쥔 그 순간, 머릿속에서 들리는 알 수 없는 음성이 그침과 동시에, 거울 속 당황한 표정의 푸른 여인은 다시 동그란 얼굴의 남자 고등학생으로 돌아왔다.

“어? 다시 돌아왔다. 그러니까… 내 머리에 주문 같은 걸 새겨져 있어서 그게 재생되는 동안에만 효력이 발생하는 건가? 재생시키는 방법은 그냥 떠올리는 거고.”

비로소 자신에게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인 그 순간, 거울 속 남고생의 모습이 다시 여인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어제를 회상하다 그만 주문을 떠올려 버리고 만 것이다.

“자, 잠깐! 안 돼!”


* * *


“헤이, BAAAM! 좋은 아침!”

여느 아침과 똑같은 패턴으로 유성이 해맑게 웃으며 자리에 앉아 있는 여름밤에게 접근해 왔다.

“어, 안녕.”

여름밤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손을 들어 유성의 인사를 받았다.

“올, 어쩐 일로 오늘은 얼굴이 괜찮다? 좋은 꿈이라도 꿨냐?”

“꿈 얘기는 하지 마. 지금 무슨 생각하면 안 돼.”

말을 걸어도 한마디도 못하던 여느 때와는 달리, 꽤 단호한 어투로 말하는 여름밤을 유성이 신기한 듯 뜯어보았다.

앞만 바라보고 있는 여름밤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언뜻 보면 멍 때리는 것 같기도 한 상태를 굉장히 엉거주춤한 자세로 유지하고 있다.

‘아무 생각하지 마. 괜히 딴 생각하다가 생각이 나거나 하면 변하는……. 아니, 생각하지 말자. 난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속으로 끊임없이 그렇게 되뇌었다. 교실 한복판에서 그렇게 되는 것만은 절대 사양이다. 일어나서부터 시도 때도 없이 변화하는 걸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써 댄 결과 간신히 찾아낸 대안 아닌 대안이었다.

그 얼굴을 본 유성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뭐야, 저쪽에서 찬비도 똑같은 거 하고 있던데, 오늘의 도전 과제 같은 거냐? 누가 더 머리를 오래 비우고 있는지 내기했어? 하하하. 그런데 그거 누가 이기는지는 어떻게 정하냐? 내가 심판 볼까?”

“제발 나 좀 내버려 둬.”

하지만 여름밤의 애절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유성은 여전히 떠날 줄 몰랐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 히죽히죽 웃다가 갑자기 어깨에 툭, 팔을 걸쳐 왔다.

“아, 맞다. 이 얘기 하려고 온 게 아닌데. 밤, 혹시 저녁에 시간 있냐? 찬비한테 물어봤는데 저놈은 오늘 저녁에 약속 있다네.”

아침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나 먼저 나가볼게. 저녁 이따 먼저 먹어라.”



먼저 먹으라고……. 그런데 약속이 있다니, 그런 얘기는 처음 듣는데.

‘어제부터 계속 좀 이상하고. 역시 무슨 일 있는 건 아닐까?’

여름밤은 멍 때리던 것을 멈추고 유성을 쳐다보았다.

“뭐랬는데?”

하지만 유성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몰라, 저녁 약속인가 보던데? 자세한 얘기는 안 해주더라. 여튼 그래서 말인데, 그럼 너 저녁 혼자 먹지? 그럼 새벽이랑 같이 먹어라.”

“새벽이?”

‘그런 이름을…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아마 출석 부를 때 있었던 것 같다. 이미 새 학기가 시작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워낙 죽은 듯이 지내는지라 아직도 반 애들의 얼굴과 이름을 완전히 매치할 수 없기 때문에 확신을 못할 뿐.

‘…한 번도 얘기해 본 적 없는데.’

“그래. 송새벽, 내 룸메. 그, 키 작은 애 있잖아. 오늘 내가 동아리 연습 때문에 바빠서 저녁을 못 먹을 것 같은데, 얘가 낯을 좀 가려서 말이지. 네가 나 대신 같이 밥 좀 먹어줘라. 너도 찬비랑 나 말고는 딱히 아는 애 없지? 재미있는 놈이니까 너도 이 기회에 발 좀 넓혀보라고.”

유성이 빙글빙글 웃으며 손으로 연달아 어깨를 내리쳐 왔다.

맞은 건 어깨인데 마음이 아파온다.

‘그래, 아는 애 없는 게 사실이긴 하다만…….’

여름밤의 얼굴이 순식간에 우울해졌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유성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여전히 싱글벙글인 얼굴로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새벽아!”

그러자 정말로 키가 작은 애가 뒤를 돌아보더니 이쪽으로 다가왔다. 귀를 거의 다 덮고, 앞머리마저 눈썹 언저리까지 내려오는 새카만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었다. 서 있는데도 여름밤의 앉은키와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작았다.

작고 여려 보이는 생김새와는 다르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초연한 표정이었다. 마치 인형이나 로봇 같은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왜?”

생김새처럼 억양도 없이 밋밋한 어조였지만, 어딘지 앳된 목소리였다. 가뜩이나 키도 작은데 얼굴도 상당히 어려 보였다.

‘누가 보면 초등학생인 줄 알겠네.’

유성이 여름밤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 나 동아리 간다고 했잖아. 날 대신해 줄 밥메를 구해 왔다. 서로 얼굴은 알지?”

새벽은 눈을 반쯤 감은 나른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뚫어지게 여름밤을 쳐다보았다. 여름밤은 슬그머니 새벽의 시선을 피했다. 왠지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는 시선이었다.

“안녕, 여름밤. 메뉴는 내가 정해.”

“…….”

여름밤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러자 유성은 이 상황이 너무 재밌다는 듯 낄낄거리더니, 또다시 여름밤의 어깨를 툭, 치고는 사라졌다.

“그럼 둘이 잘해보라고.”

그제야 여름밤은 자신이 이 일을 허락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뭐, 저녁을 같이 먹을 사람이 생긴 건 좋지만.

“떡볶이 먹자.”

상당히 특이한 아이라는 생각이 든다.


* * *


결국 방과 후, 둘은 분식집으로 향했다. 떡볶이에 튀김, 순대와 어묵까지 입은 즐거웠지만, 열심히 먹기만 하는 식사였다. 식사 도중에 사적인 대화는 아무것도 오가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현재. 그 어색함의 연장선상에서 기숙사로 향하는 중이었다.

뭐라도 말을 해야 할 듯한데 딱히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떠오르지 않는다.

골머리를 썩고 있던 그때, 뜻밖에 새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앞으로 우리 둘이 같이 먹게 되는 날이 많아지겠어.”

“어? 무슨 소리야?”

이 기회를 놓칠까 여름밤이 얼른 물었다. 새벽은 눈동자만 옆으로 돌려 여름밤을 쳐다보았다.

“유성이는 한동안 동아리 일로 바쁠 거고, 찬비는…….”

거기까지 말하고 새벽은 말을 멈추었다. 여름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찬비? 찬비가 왜?”

“…아니야, 신경 쓰지 마. 어쨌든 한동안은 우리 둘이서 같이 먹을 거야. 여름밤 너도 ‘전불학’에 속하게 된 거 같으니까.”

얼버무리면서도 새벽은 지극히 무표정했다. 특유의 억양 없는 목소리로 기계 음성 같이 문장을 늘어놓았다.

‘어떻게 저렇게 무미건조하게 말할 수 있지.’

호두까기 인형처럼 입만 움직이고 있다. 혀를 내두르면서도 관심이 생긴 여름밤이 물었다.

“전불학? 그게 뭔데?”

“‘전유성이 생각하는 불우한 학우들’의 줄임말.”

“불우해?”

여름밤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새벽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교우 관계가.”

“크윽.”

여름밤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부인할 수 없는 게 더 슬프다. 솔직히 작년부터 룸메이트던 찬비를 제외하면 거리낌 없이 대화할 수 있는 친구가 한 명도 없는 건 사실이었다. 기껏해야 유성 정도일까.

“작년 멤버들은 나를 제외한 다섯 명 모두 인기인이 되어서 졸업했지. 나는 유급이야.”

자기 자신을 가리켜 유급이라고 하면서도, 새벽의 얼굴에 낙담한 기색은 없었다. 어조가 분명해서 오히려 당당한 느낌마저 들었다.

“졸업까지 있어?”

“그래, 유성이가 매우 뿌듯해했지. 지금은 너와 나 둘뿐인 그룹이야.”

“되게 우울한 그룹이네, 그거.”

여름밤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아무리 일부러 담을 쌓고 지내는 것도 있다지만, 누군가가 관리해 줘야 할 정도로 심각해 보이는 교우 관계라니.

새벽은 그 모습을 고개도 돌리지 않고 눈만 돌려 살폈다.

“이번 연말에 넌 졸업할 거야. 나는 유급.”

그러고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 오히려 그런 새벽을 바라보는 여름밤이 조금 머뭇거리다 말했다.

“어… 너도 말투만 고치면 훨씬 낫지 않을까? 예를 들어 오늘 아침처럼 ‘메뉴는 내가 정해’라고 하지 말고 ‘뭐 먹을까?’라고 하는 거지.”

“그건 어렵지 않아.”

새벽은 다시 눈을 앞쪽으로 향했다가, 이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우리 다음에 뭐 먹을까?”

“피, 피자 어때?”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하면서도, 배우는 게 빠른 놈이구나 싶어 여름밤은 속으로 감탄했다. 그러나 별로 오래 가지는 않았다.

“메뉴는 내가 정해.”

“…….”

아직 갈 길이 멀다.

무미건조한 새벽의 얼굴은 거의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여름밤은 왠지 그가 뿌듯해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잘된 건가?”

“…진심이냐?”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까지 나왔다.

“뭐 먹을지 물어보고 바로 네가 메뉴를 정하겠다고 해버리면 물은 의미가 없어지잖아.”

“그러면… 내가 어떤 음식을 먹고 싶은지를 어떻게 전하지?”

새벽은 정말로 궁금한 듯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말 그대로 몰라서 그랬던 모양이다. 여전히 감정이 섞이지 않은 무미건조한 투였지만, 여름밤은 새벽의 사회성이 완전히 어린아이 수준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이거참, 누굴 가르칠 입장이 아닌데.’

하지만 투덜거리면서도 그는 애 하나 돌보는 심정으로 가능한 친절하게 설명했다.

“‘나는 이게 먹고 싶은데’라던가, ‘이건 어때?’라고 말하는 거지.”

“그런가.”

“보통 상대방이 먼저 ‘너는 뭐 먹고 싶은데?’하고 되물어오겠지. 그때 말하면 돼. 너는 뭐 먹고 싶은데?”

그때였다.

끼기기기까가가깍각.

금속이 서로 긁히는 것 같은 굉장히 듣기 싫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겐 아주 익숙한, ‘괴물’의 울음소리.

바로 옆 골목에서부터였다.

“나는 다음에는 치킨이 먹고 싶은데, 넌 어때?”

새벽이 옆을 돌아보았을 때, 여름밤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