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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3장 꿈의 관리인 (1)
그 시각.
여름밤은 평소와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의 하루는 항상 괴물에 쫓기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번에는 늑대. 회갈색 털에, 크기는 흔히 대형견이라고 하는 썰매개보다 약간 더 큰 정도다. 얼굴은 언제나 그렇듯, 넓적하니 아가리만 있는 얼굴에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한 모습이다. 숫자는 모두 여섯 마리 정도.
끄끼그기기긱긱.
뒤에서부터 괴물의 아가리에서 나는 금속성이 섞인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꿈속에 들어온 이후로 얼마나 오랫동안 도망친 걸까.
지난번 호랑이를 피해 도망치던 곳은 암석 지대였는데, 도망치다 보니 어느새 울창한 숲에 와 있었다.
흙이 부드러웠기에 암석 지대처럼 발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풀을 헤치고 나가거나 이따금 땅 위로 솟아 있는 나무뿌리들을 조심하면서 달려야 했다.
그러나 부지런히 파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달리면서도 여름밤은 꽤나 여유가 넘쳤다.
‘오늘은 꽤 수월하네.’
어제 호랑이 괴물과 숨 막히는 추격전을 벌인 탓일까? 늑대를 피해 도망가는 일은 상대적으로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일단 늑대들의 속도가 너무 느리다. 일반적으로 본다면 빠른 게 맞겠지만 이 푸른 여인의 몸 기준에서 봤을 때는 그러했다. 꿈속의 몸은 웬만한 짐승들보다 훨씬 가볍고 빨랐다.
서서히 늑대와의 거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할 수 있으면 잡아보시지!”
괴물들이 말을 알아들을 리는 없겠지만 와락 소리쳤다.
오랜만에 후련한 기분이다. 이 정도야 쫓긴다기보다, 괴물을 가지고 노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늑대들은 여전히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다리에 힘을 주어 속력을 점점 높였다.
이렇게 하면 체력은 더 빨리 소진되겠지만, 단숨에 괴물들과의 거리를 벌릴 수 있다. 아무리 괴물이라도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지면 계속 쫓지는 않을 테지.
그때였다.
여름밤이 돌연 다급하게 방향을 꺾었다. 바로 앞 수풀이 무언가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방향을 꺾자마자 수풀 속에서 또 다른 늑대가 두 마리 튀어나왔다.
“으아아!”
재차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소리를 지르며 급하게 다시 방향을 꺾었다.
그 뒤에서 세 마리의 늑대가 솟아나듯 튀어나왔다. 이제 쫓아오고 있는 괴물은 열한 마리다.
“이거 설마…….”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듯했다.
다큐멘터리에서 본 적이 있다. 늑대나 돌고래같이 무리 사냥을 하는 동물의 경우 미리 앞에서 함정을 파고, 동료들이 있는 방향으로 사냥감을 유인하는 몰이사냥을 하기도 한다.
TV로 볼 때는 원시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도망가고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잖아!”
다시 불길한 느낌에 여름밤은 급히 방향을 꺾었다. 흉악하게 아가리를 딱딱거리며 그 뒤를 따르는 괴물은 어느새 스무 마리 가까이 불어났다.
하도 방향을 틀었더니 이제는 달려온 거리나 원래 도망치던 방향도 잘 알 수가 없었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불안감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두려운 대상이 어디에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은 흉악하게 뒤를 쫓아오는 것과는 또 다른 공포를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멈출 수는 없다.
그래, 숫자가 불어나더라도 어차피 이 속도를 따라오지는 못할 것이다.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겠지.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붉은 입술 주위의 피부에 살짝 주름이 졌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더 이상… 앞으로 갈 수 없다. 뒤는 물론이고 양옆도 마찬가지다.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러자 부스럭, 소리와 함께 수풀 안에 숨어 있던 열 마리도 넘는 늑대들이 사방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뒤쫓아 온 무리가 그 바깥을 다시 한번 둘러싼다.
소름 끼치는 금속성 사이로 스며든 기쁨이 느껴졌다.
“헉… 헉…….”
숨이 벅차온다. 오랫동안 달린 것과 별개로 수십 개의 끔찍한 아가리들이 사방을 메우고 있다. 압박감에 목이 조이는 듯했다.
늑대들은 조심스럽게 천천히 포위망을 좁혀왔다. 급하게 달려들다가 대열이 흐트러지면 혹시나 빈틈으로 먹잇감이 다시 도망칠 수도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를 악물었다. 손으로 옆에 서 있는 나무를 붙잡았다.
불행히도 나무는 별로 굵지도 높지도 않았다.
올라가 봤자… 아주 잠깐 동안 더 목숨을 연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도 이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
여름밤은 하나씩 가지를 손에 쥐고, 몸을 끌어 올렸다.
나무를 타는 속도는 상당했다. 꿈속의 몸은 상상을 초월하는 운동신경을 갖고 있었다. 처음 타 보는 나무지만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었다. 금세 발을 디딜 수 있는 한계까지 도달했다.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곳이다. 잡고 있는 나무가 낭창대는 게 느껴질 정도다.
슬쩍 내려다보니, 그렇게 높진 않았지만 늑대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듯 나무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하지만 한숨 돌리고 있을 새가 없다.
여름밤이 급히 주위를 살폈다.
왼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다른 나무의 가지가 있다. 조금 떨어진 거라고는 하지만, 공중에서 나무 기둥을 붙든 상태로는 죽을힘을 다해 몸을 날려도 간신히 잡을까 말까 한 거리.
올라온 나무는 애초에 그리 높지 않다. 그러니 잡지 못해 떨어진다 해도 바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 곧바로 뜯어 먹혀 죽을 뿐.
“후…….”
죽음은… 두려움을 주는 동시에 의지를 가져다 주었다.
‘그래, 가만히 앉아서 당하는 것보다 백배는 낫다.’
“좋았어.”
여름밤이 입술을 꾹 물었다.
그때였다.
“으아악!”
갑작스럽게 나무가 크게 휘청이며, 여름밤은 균형을 잃고 가지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간신히 디디고 섰던 가지를 붙잡아 땅에 떨어지는 꼴은 면했지만, 눈앞에 목표로 하고 있던 가지가 멀어지는 것이 보였다.
여름밤은 바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비명처럼 소리쳤다.
“이런 미친, 어떻게 늑대가 나무를 타!”
상대는 동물이 아니라 괴물이다. 상식이 통할 리 없다. 괴물들이 손톱을 박아 넣으며 나무를 오르고 있었다.
나무가 기울어진다. 한 마리씩 달라붙을 때마다 나무는 더욱 기울어졌다. 디디고 선 가지가 계속해서 지면에 가까워져 가고, 각도는 더욱 위태로워져 금방 땅에 닿을 듯했다.
나무에 오를 차례를 기다리는 다른 늑대들이 바로 아래에서 서로 입을 벌리고 아우성을 쳤다. 땅 위에 건져 올려진 생선처럼 펄떡펄떡 뛰어올랐다.
마침내 그중 하나가 여름밤의 옷자락을 입에 무는 데 성공했다. 동시에 우드득, 붙들고 있는 가지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악!”
여름밤이 즉시 매달려 있는 늑대를 발로 걷어찼다. 엄청난 속도로 달리던 다리다. 늑대는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그는 급히 가지 위에서 몸을 일으켜, 나무줄기에 최대한 가깝게 붙었다. 그러곤 가지의 상태를 살폈다.
금이 간 가지는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 같다.
나무를 붙든 팔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나무의 진동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붙들기 힘들 만큼. 몸이 휘청일 만큼.
기긱긱각. 끼가그기기긱.
“헉!”
거의 손을 놓칠 뻔했다. 헛바람을 들이켰다. 괴물의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여름밤과 함께 점점 땅 쪽으로 기울어지던 나무가 크게 휘청거리며 다시 원래 각도로 돌아온 것이었다.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나무를 오르던 늑대들이 흔들림을 견디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졌다. 나무도 지독하게 흔들려 잠깐 사이에 몇 번이나 손을 놓칠 뻔했다. 그는 아예 다리까지 감고 필사적으로 나무줄기를 부둥켜안았다.
슬쩍 실눈을 뜨고 보니, 주변은 밤처럼 어두워져 있었다. 늑대들은 마구 흔들리는 땅 위에서 저들끼리 뒤엉켜 위협적인 소리로 마구 울부짖다가, 이내 하나둘 다급한 걸음으로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어 땅의 진동이 멎고, 주위가 잠잠해졌다.
“인간이여, 괜찮은가?”
마치 하늘에서부터 울려오는 듯한 굵은 목소리가 여름밤에게 말을 걸었다.
돌아본 여름밤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을 쩍 벌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없던 산이 옆에 새로 솟아나 있었다. 바로 코앞에. 쩌렁쩌렁한 산울림 같은 말소리가 거기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산은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오랜만이군, 오랜만이야. 인간을 본 건 5천 년 만인가?”
“누, 누구세요?”
그는 엉겁결에 산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쿠르릉, 하는 소리를 내며 산이 조금 들썩였다.
“나에게는 그분이 주신 이름이 있다네. 프랭클린이라고 하지. 나는 이 이름이 정말 좋아. 그분의 이름과 비슷하거든. 하지만 그분께서는 나에게 이 이름을 말할 기회가 있을 때는 내 종족부터 말하라고 하시더군. ‘거북이 프랭클린입니다’라고. 날 한 번에 인식할 수 있는 이는 별로 없을 거라면서 말이지.”
“…프랭클린?”
공중에서 갑자기 거대한 검녹색 바위가 나타나더니 훅, 떨어져 내렸다.
바위는 떨어져 내리다 말고 공중에서 멈추어 섰다. 바위 한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눈동자가 이쪽을 응시해 왔다.
여름밤은 그제야 산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 바위는 프랭클린의 머리였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산만 한, 엄청나게 큰 거북이가 눈앞에 있었다. 사람 말까지 한다.
“하하하…….”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꿈속에서 별의별 해괴한 것들을 다 만나왔다지만, 상황이 이만큼이나 비현실적이 되다 보니 제대로 놀라기도 힘들다.
“인간이여, 두려워하지 말게나. 이제 나무에서 내려와 땅을 밟아도 된다네, 늑대들은 모두 쫓아버렸으니. 혹시 불안하다면 내 머리 위에 올라타도 좋네.”
“머리 위요?”
거북이 프랭클린이 머리를 낮게 내려 나무 쪽으로 갖다 대었다. 공중에 매달려 있던 여름밤의 다리 옆에, 당장 드러누워 굴러도 될 법한 널따란 발판이 생겨났다.
“그분께서는 내 머리 위에 올라타는 것을 좋아하셨지. 나도 그렇게 다니는 걸 좋아했다네. 그분의 목소리가 더 잘 들리거든. 사실 나와 대화를 하려면 내 머리 위보다 좋은 장소는 없지.”
“어… 그럼 실례할게요.”
슬슬 팔에 힘이 달리던 참이니까.
그는 사양 않고 조심스럽게 프랭클린의 머리 위에 발을 올려놓았다.
바위처럼 차고 딱딱할 거라 생각했는데, 보기와는 달리 부드럽고 따듯한 촉감이 발바닥을 통해서 느껴졌다.
어느새 양반 다리를 하고 앉은 그는 손으로 바닥을 쓰다듬어 보았다.
“허허, 간지럽다네. 그래도 기분 좋구만.”
프랭클린이 말했다. 목소리의 울림이 앉아 있는 바닥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유 모를 안도감으로 여름밤은 한숨을 한차례 내쉬었다. 그제야 비로소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어떤가?”
“좋네요. 고맙습니다, 프랭클린 씨… 우왓!”
갑자기 앉아 있는 바닥이 들썩였다. 움직임에 놀란 여름밤이 급히 프랭클린의 살가죽을 붙잡았다. 프랭클린이 너털웃음을 짓고 있었다.
“허허허, 아주 좋군. 그래, 인간과 같이 있다는 건 이런 기분인 건가. 이제야 그분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겠군.”
“그런데 프랭클린 씨. 아까부터 계속 ‘그분’이라고 하시는데 그분이 누군가요?”
“프랜시스, 이 세계를 만드신 분이지. 그분은 인간을 좋아하신다네. 그러나 5천 년도 넘게 인간을 보지 못하셨어. 그래서 그분은 매우 외로워하고 계신다네.”
대답을 들었지만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프랜시스? 이 세계를 만든 사람? 외로워하고 있다고요?”
“의지로써 이성을 유지하고 계신 분이지. 하지만 외로움이 그분의 의지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어. 지난 5천 년간 잘 견뎌오셨지만 이제는 한계라네. 의지란 소모품이지. 어디에선가 채우지 않으면 안 된다네. 그분은 스스로의 의지를 다시 채우지 않은 지 오래되었어. 요즘은 이성을 완전히 잃기 전에 스스로 영면에 드는 것이 어떨지 고민 중이시지.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나는 굉장히 슬퍼질 거야. 나뿐만 아니라 그분을 따르는 많은 이들이 슬퍼하겠지.”
“안됐네요.”
슬픈 목소리였다. 그 또한 기분이 우울해지는 듯했다.
잠시 침묵하던 프랭클린이 돌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이여, 인간이여. 내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네. 들어보겠나?”
“예? 으앗… 뭐, 뭔데요?”
정말 좋은 생각이라는 듯 연신 프랭클린이 고개를 끄덕이는 통에 바닥이 마구 흔들렸다. 디스코 팡팡을 타는 것 같았다. 여름밤은 아예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자네가 그분을 만나보는 거야. 어쩌면 다시 의지가 생기실지도 모르지. 왜인지 자네라면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어떤가? 그분을 한 번 만나주지 않겠나?”
여름밤이 씩 웃었다. 그렇게 해서 이 친절한 거북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그 프랜시스란 사람이 세계를 만들었다면, 어째서 이 세계에는 저런 괴물들이 있는지, 인간은 나뿐인 건지, 혹은 왜 괴물들이 쫓아오는 건지…….
그래, 대체 왜 잠만 자면 이런 꿈을 꾸는 건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네, 저도 그분을 만나고 싶어요.”
“좋군, 아주 좋아!”
호쾌하게 말을 뱉은 프랭클린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놀이기구라도 탄 것처럼 흔들거렸지만, 프랭클린의 머리 위는 아주 넓어서 흔들린다 해도 사실 떨어질 일은 없었다.
이미 적응된 여름밤은 맘 편히 다시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느리지만 빠르게 그분이 계신 곳으로 데려다 주지.”
“느리지만 빠르게?”
“허허허. 잘 보고 있게나.”
거북이답게 프랭클린이 걷는 속도는 느리기 짝이 없다. 그치만 워낙 큰 탓에, 한 걸음 뗄 때마다 엄청난 거리를 이동할 수 있었다.
여름밤도 프랭클린을 따라 웃었다.
3장 꿈의 관리인 (1)
그 시각.
여름밤은 평소와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의 하루는 항상 괴물에 쫓기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번에는 늑대. 회갈색 털에, 크기는 흔히 대형견이라고 하는 썰매개보다 약간 더 큰 정도다. 얼굴은 언제나 그렇듯, 넓적하니 아가리만 있는 얼굴에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한 모습이다. 숫자는 모두 여섯 마리 정도.
끄끼그기기긱긱.
뒤에서부터 괴물의 아가리에서 나는 금속성이 섞인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꿈속에 들어온 이후로 얼마나 오랫동안 도망친 걸까.
지난번 호랑이를 피해 도망치던 곳은 암석 지대였는데, 도망치다 보니 어느새 울창한 숲에 와 있었다.
흙이 부드러웠기에 암석 지대처럼 발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풀을 헤치고 나가거나 이따금 땅 위로 솟아 있는 나무뿌리들을 조심하면서 달려야 했다.
그러나 부지런히 파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달리면서도 여름밤은 꽤나 여유가 넘쳤다.
‘오늘은 꽤 수월하네.’
어제 호랑이 괴물과 숨 막히는 추격전을 벌인 탓일까? 늑대를 피해 도망가는 일은 상대적으로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일단 늑대들의 속도가 너무 느리다. 일반적으로 본다면 빠른 게 맞겠지만 이 푸른 여인의 몸 기준에서 봤을 때는 그러했다. 꿈속의 몸은 웬만한 짐승들보다 훨씬 가볍고 빨랐다.
서서히 늑대와의 거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할 수 있으면 잡아보시지!”
괴물들이 말을 알아들을 리는 없겠지만 와락 소리쳤다.
오랜만에 후련한 기분이다. 이 정도야 쫓긴다기보다, 괴물을 가지고 노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늑대들은 여전히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다리에 힘을 주어 속력을 점점 높였다.
이렇게 하면 체력은 더 빨리 소진되겠지만, 단숨에 괴물들과의 거리를 벌릴 수 있다. 아무리 괴물이라도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지면 계속 쫓지는 않을 테지.
그때였다.
여름밤이 돌연 다급하게 방향을 꺾었다. 바로 앞 수풀이 무언가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방향을 꺾자마자 수풀 속에서 또 다른 늑대가 두 마리 튀어나왔다.
“으아아!”
재차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소리를 지르며 급하게 다시 방향을 꺾었다.
그 뒤에서 세 마리의 늑대가 솟아나듯 튀어나왔다. 이제 쫓아오고 있는 괴물은 열한 마리다.
“이거 설마…….”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듯했다.
다큐멘터리에서 본 적이 있다. 늑대나 돌고래같이 무리 사냥을 하는 동물의 경우 미리 앞에서 함정을 파고, 동료들이 있는 방향으로 사냥감을 유인하는 몰이사냥을 하기도 한다.
TV로 볼 때는 원시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도망가고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잖아!”
다시 불길한 느낌에 여름밤은 급히 방향을 꺾었다. 흉악하게 아가리를 딱딱거리며 그 뒤를 따르는 괴물은 어느새 스무 마리 가까이 불어났다.
하도 방향을 틀었더니 이제는 달려온 거리나 원래 도망치던 방향도 잘 알 수가 없었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불안감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두려운 대상이 어디에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은 흉악하게 뒤를 쫓아오는 것과는 또 다른 공포를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멈출 수는 없다.
그래, 숫자가 불어나더라도 어차피 이 속도를 따라오지는 못할 것이다.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겠지.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붉은 입술 주위의 피부에 살짝 주름이 졌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더 이상… 앞으로 갈 수 없다. 뒤는 물론이고 양옆도 마찬가지다.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러자 부스럭, 소리와 함께 수풀 안에 숨어 있던 열 마리도 넘는 늑대들이 사방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뒤쫓아 온 무리가 그 바깥을 다시 한번 둘러싼다.
소름 끼치는 금속성 사이로 스며든 기쁨이 느껴졌다.
“헉… 헉…….”
숨이 벅차온다. 오랫동안 달린 것과 별개로 수십 개의 끔찍한 아가리들이 사방을 메우고 있다. 압박감에 목이 조이는 듯했다.
늑대들은 조심스럽게 천천히 포위망을 좁혀왔다. 급하게 달려들다가 대열이 흐트러지면 혹시나 빈틈으로 먹잇감이 다시 도망칠 수도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를 악물었다. 손으로 옆에 서 있는 나무를 붙잡았다.
불행히도 나무는 별로 굵지도 높지도 않았다.
올라가 봤자… 아주 잠깐 동안 더 목숨을 연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도 이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
여름밤은 하나씩 가지를 손에 쥐고, 몸을 끌어 올렸다.
나무를 타는 속도는 상당했다. 꿈속의 몸은 상상을 초월하는 운동신경을 갖고 있었다. 처음 타 보는 나무지만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었다. 금세 발을 디딜 수 있는 한계까지 도달했다.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곳이다. 잡고 있는 나무가 낭창대는 게 느껴질 정도다.
슬쩍 내려다보니, 그렇게 높진 않았지만 늑대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듯 나무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하지만 한숨 돌리고 있을 새가 없다.
여름밤이 급히 주위를 살폈다.
왼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다른 나무의 가지가 있다. 조금 떨어진 거라고는 하지만, 공중에서 나무 기둥을 붙든 상태로는 죽을힘을 다해 몸을 날려도 간신히 잡을까 말까 한 거리.
올라온 나무는 애초에 그리 높지 않다. 그러니 잡지 못해 떨어진다 해도 바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 곧바로 뜯어 먹혀 죽을 뿐.
“후…….”
죽음은… 두려움을 주는 동시에 의지를 가져다 주었다.
‘그래, 가만히 앉아서 당하는 것보다 백배는 낫다.’
“좋았어.”
여름밤이 입술을 꾹 물었다.
그때였다.
“으아악!”
갑작스럽게 나무가 크게 휘청이며, 여름밤은 균형을 잃고 가지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간신히 디디고 섰던 가지를 붙잡아 땅에 떨어지는 꼴은 면했지만, 눈앞에 목표로 하고 있던 가지가 멀어지는 것이 보였다.
여름밤은 바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비명처럼 소리쳤다.
“이런 미친, 어떻게 늑대가 나무를 타!”
상대는 동물이 아니라 괴물이다. 상식이 통할 리 없다. 괴물들이 손톱을 박아 넣으며 나무를 오르고 있었다.
나무가 기울어진다. 한 마리씩 달라붙을 때마다 나무는 더욱 기울어졌다. 디디고 선 가지가 계속해서 지면에 가까워져 가고, 각도는 더욱 위태로워져 금방 땅에 닿을 듯했다.
나무에 오를 차례를 기다리는 다른 늑대들이 바로 아래에서 서로 입을 벌리고 아우성을 쳤다. 땅 위에 건져 올려진 생선처럼 펄떡펄떡 뛰어올랐다.
마침내 그중 하나가 여름밤의 옷자락을 입에 무는 데 성공했다. 동시에 우드득, 붙들고 있는 가지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악!”
여름밤이 즉시 매달려 있는 늑대를 발로 걷어찼다. 엄청난 속도로 달리던 다리다. 늑대는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그는 급히 가지 위에서 몸을 일으켜, 나무줄기에 최대한 가깝게 붙었다. 그러곤 가지의 상태를 살폈다.
금이 간 가지는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 같다.
나무를 붙든 팔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나무의 진동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붙들기 힘들 만큼. 몸이 휘청일 만큼.
기긱긱각. 끼가그기기긱.
“헉!”
거의 손을 놓칠 뻔했다. 헛바람을 들이켰다. 괴물의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여름밤과 함께 점점 땅 쪽으로 기울어지던 나무가 크게 휘청거리며 다시 원래 각도로 돌아온 것이었다.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나무를 오르던 늑대들이 흔들림을 견디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졌다. 나무도 지독하게 흔들려 잠깐 사이에 몇 번이나 손을 놓칠 뻔했다. 그는 아예 다리까지 감고 필사적으로 나무줄기를 부둥켜안았다.
슬쩍 실눈을 뜨고 보니, 주변은 밤처럼 어두워져 있었다. 늑대들은 마구 흔들리는 땅 위에서 저들끼리 뒤엉켜 위협적인 소리로 마구 울부짖다가, 이내 하나둘 다급한 걸음으로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어 땅의 진동이 멎고, 주위가 잠잠해졌다.
“인간이여, 괜찮은가?”
마치 하늘에서부터 울려오는 듯한 굵은 목소리가 여름밤에게 말을 걸었다.
돌아본 여름밤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을 쩍 벌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없던 산이 옆에 새로 솟아나 있었다. 바로 코앞에. 쩌렁쩌렁한 산울림 같은 말소리가 거기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산은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오랜만이군, 오랜만이야. 인간을 본 건 5천 년 만인가?”
“누, 누구세요?”
그는 엉겁결에 산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쿠르릉, 하는 소리를 내며 산이 조금 들썩였다.
“나에게는 그분이 주신 이름이 있다네. 프랭클린이라고 하지. 나는 이 이름이 정말 좋아. 그분의 이름과 비슷하거든. 하지만 그분께서는 나에게 이 이름을 말할 기회가 있을 때는 내 종족부터 말하라고 하시더군. ‘거북이 프랭클린입니다’라고. 날 한 번에 인식할 수 있는 이는 별로 없을 거라면서 말이지.”
“…프랭클린?”
공중에서 갑자기 거대한 검녹색 바위가 나타나더니 훅, 떨어져 내렸다.
바위는 떨어져 내리다 말고 공중에서 멈추어 섰다. 바위 한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눈동자가 이쪽을 응시해 왔다.
여름밤은 그제야 산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 바위는 프랭클린의 머리였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산만 한, 엄청나게 큰 거북이가 눈앞에 있었다. 사람 말까지 한다.
“하하하…….”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꿈속에서 별의별 해괴한 것들을 다 만나왔다지만, 상황이 이만큼이나 비현실적이 되다 보니 제대로 놀라기도 힘들다.
“인간이여, 두려워하지 말게나. 이제 나무에서 내려와 땅을 밟아도 된다네, 늑대들은 모두 쫓아버렸으니. 혹시 불안하다면 내 머리 위에 올라타도 좋네.”
“머리 위요?”
거북이 프랭클린이 머리를 낮게 내려 나무 쪽으로 갖다 대었다. 공중에 매달려 있던 여름밤의 다리 옆에, 당장 드러누워 굴러도 될 법한 널따란 발판이 생겨났다.
“그분께서는 내 머리 위에 올라타는 것을 좋아하셨지. 나도 그렇게 다니는 걸 좋아했다네. 그분의 목소리가 더 잘 들리거든. 사실 나와 대화를 하려면 내 머리 위보다 좋은 장소는 없지.”
“어… 그럼 실례할게요.”
슬슬 팔에 힘이 달리던 참이니까.
그는 사양 않고 조심스럽게 프랭클린의 머리 위에 발을 올려놓았다.
바위처럼 차고 딱딱할 거라 생각했는데, 보기와는 달리 부드럽고 따듯한 촉감이 발바닥을 통해서 느껴졌다.
어느새 양반 다리를 하고 앉은 그는 손으로 바닥을 쓰다듬어 보았다.
“허허, 간지럽다네. 그래도 기분 좋구만.”
프랭클린이 말했다. 목소리의 울림이 앉아 있는 바닥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유 모를 안도감으로 여름밤은 한숨을 한차례 내쉬었다. 그제야 비로소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어떤가?”
“좋네요. 고맙습니다, 프랭클린 씨… 우왓!”
갑자기 앉아 있는 바닥이 들썩였다. 움직임에 놀란 여름밤이 급히 프랭클린의 살가죽을 붙잡았다. 프랭클린이 너털웃음을 짓고 있었다.
“허허허, 아주 좋군. 그래, 인간과 같이 있다는 건 이런 기분인 건가. 이제야 그분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겠군.”
“그런데 프랭클린 씨. 아까부터 계속 ‘그분’이라고 하시는데 그분이 누군가요?”
“프랜시스, 이 세계를 만드신 분이지. 그분은 인간을 좋아하신다네. 그러나 5천 년도 넘게 인간을 보지 못하셨어. 그래서 그분은 매우 외로워하고 계신다네.”
대답을 들었지만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프랜시스? 이 세계를 만든 사람? 외로워하고 있다고요?”
“의지로써 이성을 유지하고 계신 분이지. 하지만 외로움이 그분의 의지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어. 지난 5천 년간 잘 견뎌오셨지만 이제는 한계라네. 의지란 소모품이지. 어디에선가 채우지 않으면 안 된다네. 그분은 스스로의 의지를 다시 채우지 않은 지 오래되었어. 요즘은 이성을 완전히 잃기 전에 스스로 영면에 드는 것이 어떨지 고민 중이시지.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나는 굉장히 슬퍼질 거야. 나뿐만 아니라 그분을 따르는 많은 이들이 슬퍼하겠지.”
“안됐네요.”
슬픈 목소리였다. 그 또한 기분이 우울해지는 듯했다.
잠시 침묵하던 프랭클린이 돌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이여, 인간이여. 내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네. 들어보겠나?”
“예? 으앗… 뭐, 뭔데요?”
정말 좋은 생각이라는 듯 연신 프랭클린이 고개를 끄덕이는 통에 바닥이 마구 흔들렸다. 디스코 팡팡을 타는 것 같았다. 여름밤은 아예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자네가 그분을 만나보는 거야. 어쩌면 다시 의지가 생기실지도 모르지. 왜인지 자네라면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어떤가? 그분을 한 번 만나주지 않겠나?”
여름밤이 씩 웃었다. 그렇게 해서 이 친절한 거북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그 프랜시스란 사람이 세계를 만들었다면, 어째서 이 세계에는 저런 괴물들이 있는지, 인간은 나뿐인 건지, 혹은 왜 괴물들이 쫓아오는 건지…….
그래, 대체 왜 잠만 자면 이런 꿈을 꾸는 건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네, 저도 그분을 만나고 싶어요.”
“좋군, 아주 좋아!”
호쾌하게 말을 뱉은 프랭클린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놀이기구라도 탄 것처럼 흔들거렸지만, 프랭클린의 머리 위는 아주 넓어서 흔들린다 해도 사실 떨어질 일은 없었다.
이미 적응된 여름밤은 맘 편히 다시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느리지만 빠르게 그분이 계신 곳으로 데려다 주지.”
“느리지만 빠르게?”
“허허허. 잘 보고 있게나.”
거북이답게 프랭클린이 걷는 속도는 느리기 짝이 없다. 그치만 워낙 큰 탓에, 한 걸음 뗄 때마다 엄청난 거리를 이동할 수 있었다.
여름밤도 프랭클린을 따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