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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영웅은 마왕이 되었다
22화
“너, 도대체 우리 애들을 몇 명이나 죽이려는 거야?”
아름다운 미성이 바람을 타고 귓가에 꽂혔다. 굉장히 차갑고 냉철한 음성이 비수처럼 꽂혀들었다.
고블린의 것이 아닌 여성의 목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루한의 생존 본능이 긴박하게 경종을 울렸다.
그는 상식보다 자신의 본능을 믿었다. 때문에 방패를 들어 올렸고, 그것이 그의 목숨을 살렸다.
“크윽!”
방패를 때리는 강한 충격에 중심을 잃은 마루한이 신음을 토했다. 흑색의 검광이 비틀거리는 그의 미간을 노리고 쏘아졌다.
“마루한!”
루리에가 쏜 화살이 마루한을 살렸다. 상대가 날아오는 화살을 회피하느라 흐트러진 틈을 타 자세를 바로 한 마루한이 한껏 미소를 지으며 루리에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마워, 루리에! 덕분에 살았…….”
하지만 감사를 받아야 할 루리에의 심장을 꿰뚫고 나온 고블린의 검을 본 순간 그의 미소가 경직되었다.
자신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마루한을 위해 화살을 쏜 결과였다. 루리에가 빛의 입자가 되어 흩어지는 것과 동시에 아이콘이 회색으로 바뀌었다.
어처구니없이 동료를 잃은 마루한이 얼빠진 얼굴로 루리에가 남긴 낡은 활을 응시했다.
“친구 덕분에 살았네. 덕분에 친구는 죽었지만.”
정면으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이 그를 깨어나게 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본 장소에는 얼굴에 기이한 목재 가면을 쓰고 있는 새하얀 백발의 여성이 서 있었다.
신장은 평균보다 조금 작은 정도이며 흑색 일통의 가죽 코트와도 같은 의복을 입고 있다. 손에 들려 있는 장검의 끝에서 흑색의 빛이 번뜩인다.
“NPC…는 아닌 것 같고, 플레이어인가?”
“마음대로 생각해도 좋아.”
“…그렇군.”
유도심문에 굉장히 쉽게 넘어오는 것으로 보아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닌 모양이라고 판단한 마루한이 그녀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상식적으로 플레이어가 몬스터를 부릴 방법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숨겨진 직업 중 하나인 시체술사가 언데드를 부릴 수 있기는 하지만 말 그대로 시체. 죽어 있는 자에 한한다.
그 외에 몬스터 조련사가 있지만 그들이 부릴 수 있는 몬스터의 수는 최대 두 마리. 이처럼 수십의 몬스터를 부릴 수 있는 직업군은 적어도 그의 상식선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PAO에서 새로 만들어진 숨겨진 직업인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밸런스 붕괴가 너무 심하잖아.”
“뭘 중얼거리고 있어? 이 순간에도 네 친구들이 죽어 나가고 있어. 조금 전 죽은 그 여자 궁수처럼 말이야.”
마루한은 힐끗 배후를 돌아보았다. 거대한 눈꽃 슬라임과 오크가 날뛰는 가운데 플레이어와 NPC들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떠들고 있을 시간이 없다. 이 여자가 지휘관일 확률이 다분한 지금 그녀를 쓰러뜨림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마루한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발을 내딛었다.
“간다!”
크게 휘둘러진 검이 허공에 궤적을 그렸다. 나아가는 칼끝이 향하는 곳은 가면으로 감춰져 있는 여성의 안면이다.
마루한은 자신의 검에 자신이 있었다. PPO시절 괜찮은 NPC스승을 만나 어느 정도 검술을 익혔고, 재능이 있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다.
때문에 지금의 일격이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한 수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가면의 여성은 너무도 손쉽게 마루한의 검을 쳐내더니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빠르다.”
경이로운 속도로 움직여 마루한의 좌측으로 향한 그녀가 밑에서부터 검을 쳐올렸다.
밑에서 위로 쳐올리는 공격. 변칙성은 있지만 위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적어도 지금의 상황에서 사용할 기술은 아니다.
그것만 해도 그녀가 검술에 문외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이로운 속도에는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다. 등줄기에 한 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엄청난 속도로 휘둘러진 일격을 회피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뺨에 작은 상처가 생기기는 했지만 목이 잘리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다.
“이대로는 죽도 밥도 안 되겠는데…….”
마루한은 자신의 속도로는 그녀를 따라갈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입안이 몹시 썼다.
그녀는 자신의 속도에 의존한 채 검을 휘둘렀다. 뿐만 아니라 동체시력도 상당한 모양인지 마루한의 공격을 정확하게 눈으로 보고 회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눈으로 쫓고 반응하는 것을 포기한 마루한은 지금까지 수많은 도움을 준 자신의 감을 믿기로 했다.
마루한의 기세가 변했다. 그는 오로지 감에 의존한 전투를 시작했다. 위험하다고 느끼는 순간 머리를 숙이고, 이거라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망설이지 않고 검을 뻗었다.
외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하고 위태위태했지만 감에 의지한 후 마루한은 눈으로 쫓기도 힘든 그녀의 공격을 죄다 막아내고 있었다.
‘미치겠네… 어디서 갑자기 이런 놈이 튀어나와가지고. 원래 PAO의 플레이어들은 이렇게 강한 거야?’
반대로 마루한을 상대하던 소향은 속으로 죽는 소리를 했다. 최근 시안에게 1:1로 교습을 받으며 자신감이 많이 붙어 있던 차였다.
때문에 검과 방패를 이용해 무차별적으로 고블린을 때려잡는 마루한을 발견하고 망설임 없이 달려들었다. 질 거라고는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웬걸, 막상 붙어보니 마루한은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성공할 거라고 확신한 공격을 시각이 아니라 감에 의지해 회피하거나 막는 모습은 기이하다 못해 경외롭기까지 하다. 한두 번이면 우연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그게 계속되면 필연이 된다. 그의 감은 놀랄 정도로 예리하고 정확했다.
‘오빠한테 맡겨달라고 큰소리 쳤는데, 이대로라면 신뢰를 얻기는커녕 구박을 받을 거야!’
좀처럼 승리를 점칠 수 없었기에 소향은 발을 굴렀다. 가면으로 가려진 아름다운 얼굴이 초조함에 울상이 되었다.
연속해서 두 사람의 검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레벨이 낮은 까닭에 보유하고 있는 스킬이 모자라 대부분 스킬이 아닌 평범한 공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탄이 절로 튀어나오는 전투였다.
막상막하. 용호상박.
평범함을 넘어선 두 사람의 전투에 고블린들과 플레이어들은 함부로 난입하지 못하고 그저 승자가 결정되는 것을 기다릴 뿐이었다.
하지만 소향에게는 숨겨놓은 한 수가 있었다.
“이거, 어지간하면 오빠가 비밀로 하라고 했는데… 하지만 여기서 더 시간을 끌면 오빠의 부하들이 더 큰 피해를 입게 돼. 어쩔 수 없지. 응, 오빠도 이해해 줄 거야.”
자기합리화를 마친 소향은 숨겨놓은 한 수를, 상대의 목을 꺾기 위한 비장의 패를 꺼내들었다.
“마기 해방.”
스킬을 사용한 소향의 눈앞에 여러 가지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몸 속 깊은 곳에 내제되어 있던 마기를 해방합니다. 근력과 민첩이 일시적으로 50% 상승합니다. 체력과 내구도가 30% 하락합니다.>
<플레이어가 소지한 모든 MP가 마기로 전환됩니다. 마기는 효율이 굉장히 좋은 에너지입니다. 스킬을 사용하는데 요구되는 비용이 50% 감소합니다.>
그녀가 사용한 마기 해방은 방어를 포기하고 공격에 힘을 더하는 스킬이다. 문제는 스킬을 사용할 때 나타나는 이펙트가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것이다.
가면에 가려진 그녀의 안광이 적색으로 번뜩이며 신체 곳곳에서 검은색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를 볼 마루한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마족!”
그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당혹감과 경악, 분노 따위가 담겨 있었다.
“하앗!”
기합을 내지르며 쏘아지는 일격이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감에 의존해 방패로 막아내는데 성공했지만 강한 공격력으로 인해 방패가 일그러졌다.
계속되는 전투로 인해 제대로 수리조차 못한 방패는 조금만 더 혹사시키면 완전히 망가지고 말 것이다. 선물로 받은 귀중한 방패이므로 마루한은 그것이 파괴되지 않게끔 인벤토리로 회수했다.
“그나저나 이걸 어쩌나. 그렇지 않아도 힘든 상대였는데 이제는 가망조차 보이지 않아.”
문자 그대로 마루한은 죽음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마루한은 싸움의 승패와는 관련이 없는 것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는 흑색의 아지랑이. 전작인 PPO의 플레이어였던 마루한은 그 정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PPO의 마지막 시나리오 이벤트였던 마족의 침공에서 그 주체가 되었던 마족. 그중에서도 전사 계열 마족들이 사용하던 힘이다.
도대체 어떻게 플레이어가 마족의 힘을 손에 넣었는지 그 경위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땅에 마족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걸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야 하는데…….”
마족의 등장을 다른 플레이어들에게도 알려야 한다.
하지만 마족은 PPO에서도 마지막 시나리오에 등장하던 적들이다. PAO의 역사가 이제 막 서장을 써내려가기 시작한 지금 그의 말을 믿어주는 이는 극히 드물 것이다.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플레이어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증거 수집 방법은 동영상 촬영이다.
범죄에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크로노스 사는 특정 구역, 또는 환경에서 동영상의 촬영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바꿔 말하자면 그 외의 상황에서는 자유로이 PAO의 세계를 촬영하고 공유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의 상태를 나타내는 표시 목록에 붉은색 점이 표시되었다. 동시에 <촬영 중>이라는 중성적인 여성의 음성이 들려온다.
플레이어 개인이 시행하는 촬영에서 렌즈는 눈동자이며 마이크는 귀다. 앞으로 마루한이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영상자료로 기록될 것이다.
증거 수집의 준비를 마친 마루한은 상대를 노려봤다. 마기를 휘감은 그녀는 조금 전과 동일인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강력하기 짝이 없다.
고블린이 군대를 이루어 마을을 침공했을 때부터 평범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신경을 곤두세우는 상황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도대체 크로노스 사는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 거지?”
마루한은 패배를 직감했다. 조금 전부터 하나둘 막아내지 못한 공격이 그의 몸에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그 대미지가 눈이 번쩍 뜨일 만큼 강력하다.
직감으로 공격을 파악해도 몸이 따라주지 못한다. 그녀는 그 정도의 속도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몇 차례 공격을 막아낸 마루한은 다리에 치명적인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붉은 피가 튀며 마루한은 주저앉았다. 어느덧 HP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죽어!”
살벌한 외침과 함께 그의 목을 노리고 검이 떨어졌다. 마루한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사망을 알리는 메시지가 나타나지 않는다. 조심스레 눈을 떠보니 목에 검을 겨눈 채 미동조차 않는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이유가 뭐지?’
고민하던 마루한이 바라본 것은 기괴한 가면 중에서도 유일하게 드러나 있는 두 눈이었다. 피투성이의 마루한을 담고 있는 아름다운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고민하고 있다? 어째서… 그렇구나! 플레이어를 죽여 본 경험이 없는 거였어!’
마루한은 단번에 그녀가 망설이는 이유를 간파했다. 생각해보면 PPO시절 처음으로 PVP시스템을 접한 플레이어 중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녀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타인의 목에 검을 쑤셔 넣는 것은 윤리와 법의 틀 안에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굉장히 어려운 요구 사항이다.
하지만 마루한은 달랐다. 그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PVP를 해왔고, 그 수만큼 상대 플레이어를 죽여 왔다. 이제 와서 상대방의 목숨을 취하는 데 망설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아아앗!”
마루한이 기습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녀가 검을 내리찍는다.
그녀의 검이 마루한의 목을 꿰뚫었다. 마루한의 검 또한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마루한은 피를 토했다. 그녀의 가면 밑으로 붉은 액체가 섬뜩하게 떨어졌다.
동귀어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서서히 빛의 입자가 되어 흩어졌다.
흐려지는 의식 가운데 마루한은 하나의 메시지를 접할 수 있었다.
<12성좌의 일원, 신속의 소향을 쓰러뜨렸습니다. 이는 위대한 업적입니다. 민첩 어빌리티가 영구적으로 2 상승합니다.>
<도사리는 악의, 짙게 드리운 어둠의 그림자를 발견하셨습니다. 성국의 교회에서 당신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북대륙 최초로 마족을 제거하는 업적을 세웠습니다. 영웅 등급의 직업인 ‘북쪽의 용사’로 전직을 위한 최소 조건 중 한 가지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전직 퀘스트에 도전하시겠습니까?>
22화
“너, 도대체 우리 애들을 몇 명이나 죽이려는 거야?”
아름다운 미성이 바람을 타고 귓가에 꽂혔다. 굉장히 차갑고 냉철한 음성이 비수처럼 꽂혀들었다.
고블린의 것이 아닌 여성의 목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루한의 생존 본능이 긴박하게 경종을 울렸다.
그는 상식보다 자신의 본능을 믿었다. 때문에 방패를 들어 올렸고, 그것이 그의 목숨을 살렸다.
“크윽!”
방패를 때리는 강한 충격에 중심을 잃은 마루한이 신음을 토했다. 흑색의 검광이 비틀거리는 그의 미간을 노리고 쏘아졌다.
“마루한!”
루리에가 쏜 화살이 마루한을 살렸다. 상대가 날아오는 화살을 회피하느라 흐트러진 틈을 타 자세를 바로 한 마루한이 한껏 미소를 지으며 루리에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마워, 루리에! 덕분에 살았…….”
하지만 감사를 받아야 할 루리에의 심장을 꿰뚫고 나온 고블린의 검을 본 순간 그의 미소가 경직되었다.
자신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마루한을 위해 화살을 쏜 결과였다. 루리에가 빛의 입자가 되어 흩어지는 것과 동시에 아이콘이 회색으로 바뀌었다.
어처구니없이 동료를 잃은 마루한이 얼빠진 얼굴로 루리에가 남긴 낡은 활을 응시했다.
“친구 덕분에 살았네. 덕분에 친구는 죽었지만.”
정면으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이 그를 깨어나게 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본 장소에는 얼굴에 기이한 목재 가면을 쓰고 있는 새하얀 백발의 여성이 서 있었다.
신장은 평균보다 조금 작은 정도이며 흑색 일통의 가죽 코트와도 같은 의복을 입고 있다. 손에 들려 있는 장검의 끝에서 흑색의 빛이 번뜩인다.
“NPC…는 아닌 것 같고, 플레이어인가?”
“마음대로 생각해도 좋아.”
“…그렇군.”
유도심문에 굉장히 쉽게 넘어오는 것으로 보아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닌 모양이라고 판단한 마루한이 그녀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상식적으로 플레이어가 몬스터를 부릴 방법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숨겨진 직업 중 하나인 시체술사가 언데드를 부릴 수 있기는 하지만 말 그대로 시체. 죽어 있는 자에 한한다.
그 외에 몬스터 조련사가 있지만 그들이 부릴 수 있는 몬스터의 수는 최대 두 마리. 이처럼 수십의 몬스터를 부릴 수 있는 직업군은 적어도 그의 상식선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PAO에서 새로 만들어진 숨겨진 직업인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밸런스 붕괴가 너무 심하잖아.”
“뭘 중얼거리고 있어? 이 순간에도 네 친구들이 죽어 나가고 있어. 조금 전 죽은 그 여자 궁수처럼 말이야.”
마루한은 힐끗 배후를 돌아보았다. 거대한 눈꽃 슬라임과 오크가 날뛰는 가운데 플레이어와 NPC들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떠들고 있을 시간이 없다. 이 여자가 지휘관일 확률이 다분한 지금 그녀를 쓰러뜨림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마루한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발을 내딛었다.
“간다!”
크게 휘둘러진 검이 허공에 궤적을 그렸다. 나아가는 칼끝이 향하는 곳은 가면으로 감춰져 있는 여성의 안면이다.
마루한은 자신의 검에 자신이 있었다. PPO시절 괜찮은 NPC스승을 만나 어느 정도 검술을 익혔고, 재능이 있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다.
때문에 지금의 일격이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한 수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가면의 여성은 너무도 손쉽게 마루한의 검을 쳐내더니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빠르다.”
경이로운 속도로 움직여 마루한의 좌측으로 향한 그녀가 밑에서부터 검을 쳐올렸다.
밑에서 위로 쳐올리는 공격. 변칙성은 있지만 위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적어도 지금의 상황에서 사용할 기술은 아니다.
그것만 해도 그녀가 검술에 문외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이로운 속도에는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다. 등줄기에 한 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엄청난 속도로 휘둘러진 일격을 회피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뺨에 작은 상처가 생기기는 했지만 목이 잘리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다.
“이대로는 죽도 밥도 안 되겠는데…….”
마루한은 자신의 속도로는 그녀를 따라갈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입안이 몹시 썼다.
그녀는 자신의 속도에 의존한 채 검을 휘둘렀다. 뿐만 아니라 동체시력도 상당한 모양인지 마루한의 공격을 정확하게 눈으로 보고 회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눈으로 쫓고 반응하는 것을 포기한 마루한은 지금까지 수많은 도움을 준 자신의 감을 믿기로 했다.
마루한의 기세가 변했다. 그는 오로지 감에 의존한 전투를 시작했다. 위험하다고 느끼는 순간 머리를 숙이고, 이거라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망설이지 않고 검을 뻗었다.
외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하고 위태위태했지만 감에 의지한 후 마루한은 눈으로 쫓기도 힘든 그녀의 공격을 죄다 막아내고 있었다.
‘미치겠네… 어디서 갑자기 이런 놈이 튀어나와가지고. 원래 PAO의 플레이어들은 이렇게 강한 거야?’
반대로 마루한을 상대하던 소향은 속으로 죽는 소리를 했다. 최근 시안에게 1:1로 교습을 받으며 자신감이 많이 붙어 있던 차였다.
때문에 검과 방패를 이용해 무차별적으로 고블린을 때려잡는 마루한을 발견하고 망설임 없이 달려들었다. 질 거라고는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웬걸, 막상 붙어보니 마루한은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성공할 거라고 확신한 공격을 시각이 아니라 감에 의지해 회피하거나 막는 모습은 기이하다 못해 경외롭기까지 하다. 한두 번이면 우연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그게 계속되면 필연이 된다. 그의 감은 놀랄 정도로 예리하고 정확했다.
‘오빠한테 맡겨달라고 큰소리 쳤는데, 이대로라면 신뢰를 얻기는커녕 구박을 받을 거야!’
좀처럼 승리를 점칠 수 없었기에 소향은 발을 굴렀다. 가면으로 가려진 아름다운 얼굴이 초조함에 울상이 되었다.
연속해서 두 사람의 검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레벨이 낮은 까닭에 보유하고 있는 스킬이 모자라 대부분 스킬이 아닌 평범한 공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탄이 절로 튀어나오는 전투였다.
막상막하. 용호상박.
평범함을 넘어선 두 사람의 전투에 고블린들과 플레이어들은 함부로 난입하지 못하고 그저 승자가 결정되는 것을 기다릴 뿐이었다.
하지만 소향에게는 숨겨놓은 한 수가 있었다.
“이거, 어지간하면 오빠가 비밀로 하라고 했는데… 하지만 여기서 더 시간을 끌면 오빠의 부하들이 더 큰 피해를 입게 돼. 어쩔 수 없지. 응, 오빠도 이해해 줄 거야.”
자기합리화를 마친 소향은 숨겨놓은 한 수를, 상대의 목을 꺾기 위한 비장의 패를 꺼내들었다.
“마기 해방.”
스킬을 사용한 소향의 눈앞에 여러 가지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몸 속 깊은 곳에 내제되어 있던 마기를 해방합니다. 근력과 민첩이 일시적으로 50% 상승합니다. 체력과 내구도가 30% 하락합니다.>
<플레이어가 소지한 모든 MP가 마기로 전환됩니다. 마기는 효율이 굉장히 좋은 에너지입니다. 스킬을 사용하는데 요구되는 비용이 50% 감소합니다.>
그녀가 사용한 마기 해방은 방어를 포기하고 공격에 힘을 더하는 스킬이다. 문제는 스킬을 사용할 때 나타나는 이펙트가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것이다.
가면에 가려진 그녀의 안광이 적색으로 번뜩이며 신체 곳곳에서 검은색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를 볼 마루한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마족!”
그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당혹감과 경악, 분노 따위가 담겨 있었다.
“하앗!”
기합을 내지르며 쏘아지는 일격이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감에 의존해 방패로 막아내는데 성공했지만 강한 공격력으로 인해 방패가 일그러졌다.
계속되는 전투로 인해 제대로 수리조차 못한 방패는 조금만 더 혹사시키면 완전히 망가지고 말 것이다. 선물로 받은 귀중한 방패이므로 마루한은 그것이 파괴되지 않게끔 인벤토리로 회수했다.
“그나저나 이걸 어쩌나. 그렇지 않아도 힘든 상대였는데 이제는 가망조차 보이지 않아.”
문자 그대로 마루한은 죽음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마루한은 싸움의 승패와는 관련이 없는 것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는 흑색의 아지랑이. 전작인 PPO의 플레이어였던 마루한은 그 정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PPO의 마지막 시나리오 이벤트였던 마족의 침공에서 그 주체가 되었던 마족. 그중에서도 전사 계열 마족들이 사용하던 힘이다.
도대체 어떻게 플레이어가 마족의 힘을 손에 넣었는지 그 경위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땅에 마족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걸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야 하는데…….”
마족의 등장을 다른 플레이어들에게도 알려야 한다.
하지만 마족은 PPO에서도 마지막 시나리오에 등장하던 적들이다. PAO의 역사가 이제 막 서장을 써내려가기 시작한 지금 그의 말을 믿어주는 이는 극히 드물 것이다.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플레이어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증거 수집 방법은 동영상 촬영이다.
범죄에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크로노스 사는 특정 구역, 또는 환경에서 동영상의 촬영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바꿔 말하자면 그 외의 상황에서는 자유로이 PAO의 세계를 촬영하고 공유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의 상태를 나타내는 표시 목록에 붉은색 점이 표시되었다. 동시에 <촬영 중>이라는 중성적인 여성의 음성이 들려온다.
플레이어 개인이 시행하는 촬영에서 렌즈는 눈동자이며 마이크는 귀다. 앞으로 마루한이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영상자료로 기록될 것이다.
증거 수집의 준비를 마친 마루한은 상대를 노려봤다. 마기를 휘감은 그녀는 조금 전과 동일인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강력하기 짝이 없다.
고블린이 군대를 이루어 마을을 침공했을 때부터 평범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신경을 곤두세우는 상황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도대체 크로노스 사는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 거지?”
마루한은 패배를 직감했다. 조금 전부터 하나둘 막아내지 못한 공격이 그의 몸에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그 대미지가 눈이 번쩍 뜨일 만큼 강력하다.
직감으로 공격을 파악해도 몸이 따라주지 못한다. 그녀는 그 정도의 속도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몇 차례 공격을 막아낸 마루한은 다리에 치명적인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붉은 피가 튀며 마루한은 주저앉았다. 어느덧 HP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죽어!”
살벌한 외침과 함께 그의 목을 노리고 검이 떨어졌다. 마루한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사망을 알리는 메시지가 나타나지 않는다. 조심스레 눈을 떠보니 목에 검을 겨눈 채 미동조차 않는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이유가 뭐지?’
고민하던 마루한이 바라본 것은 기괴한 가면 중에서도 유일하게 드러나 있는 두 눈이었다. 피투성이의 마루한을 담고 있는 아름다운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고민하고 있다? 어째서… 그렇구나! 플레이어를 죽여 본 경험이 없는 거였어!’
마루한은 단번에 그녀가 망설이는 이유를 간파했다. 생각해보면 PPO시절 처음으로 PVP시스템을 접한 플레이어 중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녀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타인의 목에 검을 쑤셔 넣는 것은 윤리와 법의 틀 안에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굉장히 어려운 요구 사항이다.
하지만 마루한은 달랐다. 그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PVP를 해왔고, 그 수만큼 상대 플레이어를 죽여 왔다. 이제 와서 상대방의 목숨을 취하는 데 망설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아아앗!”
마루한이 기습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녀가 검을 내리찍는다.
그녀의 검이 마루한의 목을 꿰뚫었다. 마루한의 검 또한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마루한은 피를 토했다. 그녀의 가면 밑으로 붉은 액체가 섬뜩하게 떨어졌다.
동귀어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서서히 빛의 입자가 되어 흩어졌다.
흐려지는 의식 가운데 마루한은 하나의 메시지를 접할 수 있었다.
<12성좌의 일원, 신속의 소향을 쓰러뜨렸습니다. 이는 위대한 업적입니다. 민첩 어빌리티가 영구적으로 2 상승합니다.>
<도사리는 악의, 짙게 드리운 어둠의 그림자를 발견하셨습니다. 성국의 교회에서 당신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북대륙 최초로 마족을 제거하는 업적을 세웠습니다. 영웅 등급의 직업인 ‘북쪽의 용사’로 전직을 위한 최소 조건 중 한 가지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전직 퀘스트에 도전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