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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영웅은 마왕이 되었다
21화


고블린의 검이 자경단원의 검을 쳐내면 슬라임이 허벅다리를 물어뜯거나 온몸을 이용한 전력투구를 한다. 그렇다고 슬라임에 신경을 쓰다보면 머리 위로 번개처럼 칼날이 내리꽂힌다.
“무, 무슨 고블린이 이렇게 강한 거야? 정말 고블린이 맞기는 한 건가?”
마치 고블린의 탈을 쓴 상위의 몬스터를 상대하고 있는 것만 같다.
자경단원의 레벨과 실력이라면 고블린 한 마리 정도는 무리 없이 처치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시안의 휘하에 있는 고블린은 더 이상 고블린이라 부르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강했다.
속절없이 당하기만 하는 자경단원의 뒤로 플레이어들이 합류했다.
“고블린 따위가 어딜 감히! 강력한 일격!”
“조심하세요! 일반적인 고블린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요!”
아직은 게임의 초창기인지라 플레이어들의 레벨은 자경단보다 낮다. 하지만 다양한 직업이 조합된 그들의 팀플레이는 고블린을 잠시나마 주춤하게 만들 정도로 우수했다.
전사들이 전위를 맡고 사제들이 그들을 집중적으로 치유하고 축복한다. 방어력은 약하지만 강력한 공격력을 가진 궁수나 마법사가 후방에서 지원을 한다. 마법사들의 공격은 고블린들에게 제법 큰 피해를 입혔다.
특히 마루한 일행의 활약이 압도적이다.
“무슨 고블린의 힘이 이렇게… 젠장, 루리에!”
“세상에서 가장 힘세고 민첩하며 아름다운 궁수, 루리에님의 결전 기술 나가신다. 충격 화살!”
다른 일행들의 활약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마루한과 루리에의 경우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돋보였다.
레벨이 높다거나 장비가 좋은 것이 아니다. 순수하게 실력만 가지고 독보적인 활약을 보였다.
거기에 무장을 마친 모험가 조합의 직원들이 합류하니 제법 견고한 방어선이 완성되었다. 아무리 고블린들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이대로라면 제법 큰 피해가 나올 것이다.
“라임.”
전장을 지켜보던 시안이 짧게 한마디를 고했다. 그러자 고블린들 사이에서 순백의 빛깔을 가진 눈꽃 슬라임 라임이 튀어나왔다.
고무공처럼 이리저리 튀며 적진 한가운데에 안착한 라임을 본 마루한과 루리에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다.
“이, 이거 설마…….”
“꺄아악! 눈 내리는 섬의 필드 보스, 눈꽃 슬라임이다!”

<눈꽃 슬라임 라임이 거대화를 사용합니다.>

루리에의 자지러지는 비명 소리가 울리는 것과 동시에 1미터 정도의 직경을 가지고 있던 라임의 몸체가 단번에 부풀어 올랐다.
순식간에 다섯 배 정도로 몸집을 키운 채 굴러다니는 라임으로 인해 플레이어들과 NPC들이 모여 있던 장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어어어어!”
고블린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성량을 가진 고함 소리가 울리더니 숲의 어둠으로부터 거대한 몸체를 가진 괴물 세 마리가 뛰어나왔다.
근육질의 몸매와 2미터에 달하는 거체, 광기로 얼룩진 얼굴을 가진 오크였다.
그 오크의 모습이 참으로 걸작이다. 팔다리에 사각형의 금속판을 두르고 있으며 몸체에는 어설프지만 확실하게 갑옷을 입고 있다. 머리에는 투구까지 쓰고 있다.
후퇴를 모르는 전차처럼 앞만 보고 내달리는 오크의 돌진은 강함의 고저를 떠나 사람 본연의 공포를 자극한다.
“말도 안 돼! 오크는 지능이 지독하게 낮은 까닭에 장비를 사용하지 못해!”
“저걸 어떻게 막으라는 거야? 도망쳐!”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에 동조하여 몇몇의 전위가 등을 돌리고 말았다. 그로 인해 공간이 비었다.
“안 돼! 자리를 지켜야 해!”
마루한이 다급히 외쳤으나 듣는 이는 많지 않았다. 고블린의 진형을 넘어선 오크가 플레이어의 진형을 향해 몸을 던졌다.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힘이 플레이어들을 짓눌렀다. 휘둘러지는 주먹에 믿었던 방패가 으스러지고 손에서 놓친 검이 허공을 날았다.
고작 세 마리의 오크로 인해 견고하던 진형이 무너져 내렸다. 그 틈을 노려 고블린들이 들이닥쳤다.
“기병들은 사제와 마법사를 먼저 잡도록 해.”
고블린들은 시안의 지시를 착실하게 수행했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고 방패를 쥐며 달려드는 전사 계열 플레이어를 뛰어넘어 사제, 혹은 마법사 계열 플레이어를 먼저 치기 시작했다.
“무, 무슨… 고블린이 후위를 먼저 노릴 정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다고?”
경악하는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후위들이 하나둘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공포를 습득했다는 메시지가 떠오르며 시안을 즐겁게 했다.
“직접 싸우는 것도 재미있지만 이렇게 군대를 지휘하며 전장을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그나저나 이 장면을 녀석이 봤다가는 등에 칼침을 맞았겠지?”
무심결에 오랜 동료 이향을 떠올린 시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지금처럼 NPC가 섞여 있는 군대를 상대로 학살극을 벌이는 시안을 봤다면 가차 없이 절교를 선언하며 검을 휘둘렀을 것이다. 베넨 마을의 습격은 그녀가 곁에 없기 때문에 행할 수 있는 악행이었다.
라임이 눈안개 스킬을 사용하는 것을 확인한 시안은 전장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무엇보다 저곳에는 강적이라 생각했던 노예사냥꾼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승기는 기울어졌다. 후위를 잃고 전위가 발이 묶였으며 레벨 차이마저 격심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플레이어들이 고블린과 새로운 병과인 오크까지 섞인 병력을 물리칠 확률은 한없이 0에 수렴한다.
시안이 승리를 확신한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 * *

마루한은 나름대로 본인의 실력에 자신을 가지고 있는 플레이어다.
그는 과거에 루리에와 함께 PPO를 플레이했다. 하고 싶은 것을 만끽하며 게임을 즐겼음에도 불구하고 사력을 다해 매달린 랭커 플레이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재능도 가지고 있었다.
그 재능은 PAO에서도 꽃을 피웠다. PPO특전까지 받은 그는 단신으로 동레벨의 몬스터를 쓰러뜨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플레이어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당연하지만 자신감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친구들과 함께 하는 모험은 즐거웠다. 만나본 적은 없지만 최강의 PVP팀이라 손꼽히는 미르라 할지라도 친구들과 함께라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지독한 착각에 불과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작해야 눈앞에 있는 고블린을 상대로 고전하고 있었으니까.
“으아아아!”
기합을 내지른 그가 사력을 다해 검을 휘두른다. 그가 아는 일반적인 고블린이라면 결코 막아낼 수 없는 절묘한 각도와 빠르기를 가진 일격이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방패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급소를 노리고 몇 번이나 참격을 쏟아내도 대부분이 고블린에게 차단되고 만다.
심지어 계속해서 틈을 노리고 있는 슬라임까지 신경을 쓰다 보니 좀처럼 제 실력을 선보일 수가 없었다.
“후우… 이 정도라면 적어도 10레벨은 될 것 같은데, 무슨 고블린이 이렇게 강한 거야!”
마루한이 자신의 머리를 노리고 휘둘러지는 검을 방패로 쳐내며 악에 받쳐 소리를 내질렀다.
눈앞의 고블린은 너무나도 비정상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몬스터는 레벨을 올릴 수 없다는 법칙도, 네임드 몬스터는 여러 마리가 뭉쳐 다니지 않는다는 법칙도, 고블린과 슬라임, 오크는 한데 어우러질 수 없다는 생태 관계까지도 모조리 무시하고 있다.
죄 없는 마을 주민들을 지키고 싶다는 정의감 때문에 피난민 유도가 아니라 전투를 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고블린들이 이상을 일으킨 이유를 알고 싶다는 이유도 그의 선택에 한몫을 거들었다.
“퀘스트의 냄새가 난다.”
그것도 보통 퀘스트가 아니라 이벤트 성향이 짙은 대규모 퀘스트다. 이런 모험이 하고 싶어서 게임을 시작했다. 때문에 고블린을 상대하는 마루한은 힘들지언정 유쾌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마루한! 내가 도와줄 테니까 그 녀석을 끝장내자!”
배후로부터 루리에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날아온 루리에의 화살이 슬라임의 머리를 뚫고 지나갔다. 전투 도중 숙련도가 오른 덕분에 사용하기 시작한 관통 화살이다.
강한 관통력을 가진 화살에 당한 슬라임의 몸이 점점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패시브 스킬인 자폭이다.
“우와아아!”
코앞에서 생성된 시한폭탄에 놀란 마루한이 철제 방패를 들어 몸을 보호했다. 폭음과 함께 강한 충격이 그를 때렸다. 소리는 요란했지만 방패로 보호한 까닭에 피해는 크지 않았다.
오히려 슬라임을 몰고 있던 고블린의 쪽이 더 큰 피해를 입었다. 갑옷은 너덜너덜했으며 방패는 놓친 것인지 보이지 않는다. 제대로 된 무장이라고는 검 한 자루가 전부다.
“좋았어. 기회를 만들어줘서 고마워, 루리에!”
배후에 위치한 믿음직한 동료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그가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크게 휘둘러진 그의 검을 막기 위해 고블린이 고군분투했으나 조금 전보다 확연하게 느려진 속도로는 그의 일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키이익! 이, 인간 따위가 왕의 축복을 받은 내게 상처를 입히다니!”
상반신으로부터 얼굴까지 이어지는 긴 상처를 입은 고블린이 발악하듯 괴성을 내질렀다.
“왕이라고? 너희들은 왕을 섬기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설마 고블린 로드?”
마루한은 순간적으로 대규모 침공 이벤트인 고블린 로드의 탄생을 떠올렸다. 확실히 고블린 로드가 탄생했다면 비정상적으로 강해진 고블린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고블린 로드가 탄생했다 할지라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들이 적대관계인 슬라임, 오크와 동맹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야. 아무리 고블린 로드라 할지라도 태생적으로 적대 관계인 슬라임, 그리고 천적 관계인 오크와 손을 잡을 수는 없어. 그렇다면 도대체…….”
“키이이익! 왕의 명령이다. 죽어라!”
나름대로 이상 현상에 대한 원인을 밝히기 위한 추리의 늪에 빠진 마루한을 향해 상처 입은 고블린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두 발의 화살이 날아와 각각 복부와 좌측 팔을 꿰뚫었다. 루리에의 작품이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마루한이 검을 휘둘렀다. 그가 사용한 스킬, 강력한 일격이 고블린의 복부를 꿰뚫었다. 피를 토하며 움찔거리던 고블린이 빛의 입자가 되어 사라졌다.
“좋아, 해냈다!”
마루한은 주먹을 불끈 쥐고 쾌재를 부르며 기뻐했다. 그가 쓰러뜨린 고블린은 화들짝 놀랄 만큼 대량의 경험치를 남겨주었다.
“루리에, 나를 따라와. 이만큼 진형을 갖추고 있는 고블린들이니 어딘가에 지휘관이 있을 거야.”
다른 동료들은 최선을 다해 전위를 지원하고 있다. 때문에 마루한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동료인 루리에만을 대동하고 적진 깊숙이 파고들었다.
목표는 하나. 고블린들을 지휘하고 있는 머리를 치기 위함이다.
눈꽃 슬라임의 스킬 범위에서 벗어난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후열에 있던 고블린들이 그를 향해 창을 찔렀으나 방패로 막고 검으로 쳐내며 강한 찌르기로 반격한다.
그의 움직임에서 체계적인 검술의 흔적은 없었지만 그는 자신을 향해 수많은 병장기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움직였다.
“후우, 괜찮아. 할 수 있어.”
그는 끊임없이 읊조리는 것으로 자기 세뇌를 하며 고블린들을 베어 넘겼다. 배후에서 날아오는 루리에의 지원사격이 그로 하여금 숨 돌릴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쉴 틈 없이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마루한은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연신 전장을 살폈다.
‘어디냐. 어디에 있는 거야.’
시야에 표시되던 팀원들 중 가장 움직임이 둔하고 실력이 미숙한 사제 우리엘의 상태를 표시하는 아이콘이 흑백으로 변했다. 치열한 전투 도중 보호를 받지 못한 까닭에 사망하고 만 것이다.
배후로부터 끝없이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이 순간에도 함께 싸우던 이들이 하나둘 죽어가고 있다 생각하니 분노가 치솟았다.
하지만 뇌리를 지배하던 분노도 그의 평정심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빠르게 식은 머리는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한다.
“아무리 강해봤자 고블린이다. 지휘관만 쓰러뜨리면 돼. 지휘관만 쓰러뜨릴 수 있으면 전열과 후열이 나누어져 있는 우리의 승리다.”
“우어어어! 인간, 죽인다!”
원하던 지휘관은 나오지 않고 거대한 몸집의 오크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휘둘러지는 주먹을 방패로 막자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튀어나왔다. 루리에의 화살은 오크가 두르고 있는 금속판을 꿰뚫지 못했다.
“크윽! 역시 이 녀석도 일반 오크보다 강해. 하지만 그래봤자 단순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오크. 내 상대는 못 된다고!”
마루한은 오크의 공격을 전부 회피하며 공격을 퍼부었다. 그의 공격 대부분이 금속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틈새를 파고들었다. 실로 대단한 솜씨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오크의 내구도 만큼이나 튼튼하고 두꺼운 피부를 뚫기 위해 스킬 사용을 주저하지 않았다.
“방패 치기. 강력한 일격!”
짧은 시간 상대방의 방어력을 깎는 방패 치기로 복부를 강타한 후 같은 위치에 강한 공격력을 가진 강력한 일격을 꽂아 넣는다.
완벽한 연계 기술에 복부를 꿰뚫린 오크가 무릎을 꿇었다. 크게 휘두른 검이 오크의 머리를 베었다. 동시에 쏘아진 화살이 오크의 눈과 상처 부위를 꿰뚫었다.
괴성을 동반한 마지막 숨을 토해낸 오크가 눈을 감았다. 그렇게 빛의 입자가 된 오크가 자취를 감추었다.
“좋았어!”
강적을 상대로 승리를 거머쥔 마루한이 격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포효를 내지른다.
마루한이 다음 목표를 선정했을 때, 비로소 지휘관이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