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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영웅은 마왕이 되었다
20화
눈앞이 어두워지며 기이한 환상이 보였다.
어두운 밤하늘 높이 뻗은 계단. 둥근 보름달 아래 위치한 뼈를 엮어 만든 옥좌. 거기에 거대한 체구의 남자가 앉아있다. 역광을 맞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존재만으로 위압감이 느껴진다. 무심코 무릎을 꿇을 것 같은 압박 속에서 시안은 필사적으로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강하게 깨문 입술로부터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옥좌에 앉은 남자는 짧게 고한다.
[구하라. 그대에게 힘을 주겠다.]
“…허억!”
시안은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장거리를 전력으로 질주한 것처럼 숨이 벅차고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당황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이도 보이는 것은 크리스탈이 되어버린 엘프를 감금하고 있는 감옥뿐이다. 어디에도 하늘을 향해 뻗은 계단과 옥좌는 존재하지 않는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기 위해 들어 올린 손에는 하나의 검은색 구체가 들려 있었다. 마치 어둠이 소용돌이 치고 있는 것만 같다. 촉감은 차마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하다.
<마신의 선물 ― Rank : Unknown.>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는 미확인 구체. 마신이 힘이 부족해 고민하는 마왕 후보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다.
명령어 : 오라, 마의 힘이여.
효과 : 알 수 없음.
“설마 했는데 마신이었냐?”
비로소 그 압도적인 위압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플레이어가 아무리 강해져도 쓰러뜨릴 수 없는 유일한 상대가 있으니. 바로 이 세계를 관리하는 신이 그 주인공이다.
상대가 신이라면 그 강함이, 존재만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그 힘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만한 존재감이 아니라면 신이라는 이름이 운다.
선물을 움켜쥐는 시안의 눈앞에 하나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강제 퀘스트 발생!>
감금된 엘프들을 구출하라 ― 난이도 E+
마신이 준 선물을 이용해 노예사냥꾼을 쓰러뜨리고 엘프들을 구출해야 한다. 마신이 직접 하달한 명령이므로 거절할 수 없다. 실패할 경우 상당한 패널티를 갖게 된다.
* * *
[오빠, 내 말 들려?]
때마침 소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플레이어끼리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편리한 기능이 존재한다. 시안이 휘하의 몬스터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사용되는 스킬인 의념 통화가 그 주인공이다.
얼굴을 알고 친구 등록을 한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으므로 굉장히 편리하면서도 필수적인 기능 중 하나로 손꼽힌다.
“잘 들려.”
[우리는 오빠가 말한 장소에 도착했어.]
“그렇단 말이지. 어디보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시안은 마을의 동태를 살폈다. 어느덧 마을을 돌아다니는 플레이어가 30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여기에 마을 자경단이 얼추 열 명 정도다.
그들을 합쳐 마을의 병력은 40명 언저리. 이 정도면 충분히 괜찮겠다고 판단한 시안이 의념 전달을 통해 소향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공격해. 내가 한 말 잊지 말고.”
[알겠어. 나만 믿어줘.]
자신만만하게 소리친 소향이 몬스터들에게 명령을 하달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의념 통화가 끊어졌다.
시안은 사전에 마을을 둘러보던 와중 미리 봐두었던 모험가 조합의 지부 건물 옥상으로 향했다. 1층짜리 허술한 목재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베넨 마을에서 그나마 가장 높은 장소이며 마을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옥상은 모든 플레이어에게 무료로 개방되어 있으며, 스킬의 숙련도를 훈련할 수 있는 허수아비 인형이나 과녁 따위가 배치되어 있다. 인형에 눈알 붙이기 못지않게 지루한 작업이기 때문에 이용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
옥상의 중심부에는 커다란 종이 배치되어 있는데 마법적 처리가 되어 있어 특별한 일이 아니고는 울리지 않게끔 되어 있다.
마을 곳곳에 배치된 횃불이 밤의 거리를 밝히고 있다. 시안의 시선은 마을의 입구 쪽에 향해 있었다. 두 명의 자경단이 지키고 있는 마을 입구로 헐레벌떡 뛰어오는 세 명의 플레이어가 보인다. 거리가 멀지 않기에 그들이 하는 말을 충분히 엿들을 수 있었다.
“고, 고블린! 고블린과 슬라임이 쳐들어온다!”
“모험가님, 고블린이라니요? 이 근처에 고블린은 서식하지 않습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횡설수설하는 플레이어를 붙잡고 자경단원이 자초지종을 묻는다.
하지만 플레이어는 귀신에 쫓기는 사람처럼 겁을 집어먹은 얼굴을 한 채 연신 ‘고블린’이라는 단어만 뇌까리더니 자경단원을 떨쳐내고 모험가 조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키이이익!”
횃불의 빛이 닿지 않아 어둠으로 가득한 숲에서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 차례 불어온 바람이 나무를 뒤흔들며 소리를 묻으려 애썼으나 괴성은 합창하듯 하나둘 늘어만 갔다.
“이 울음소리는 고블린의 것인데… 하지만 이 근방에 서식하는 고블린은 없잖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거야?”
솟구치는 긴장감으로 인해 마른침을 삼킨 자경단원이 작게 읊조렸다.
옥상 위의 플레이어들도 얼이 빠져 숲 쪽을 바라보았다. 겨우 정신을 차린 자경단원 하나가 북을 쳐댔다. 낮게 울리는 북소리가 마을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에 따라 마을 주민들은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 문과 창을 걸어 잠갔다.
마을 곳곳에서 순찰을 돌던 자경단원들이 빠르게 모여들었다. 플레이어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할 무렵 녀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키이이익! 인간들아. 우리를 두려워하라!”
숲의 어둠을 뚫고 나온 것은 고블린이다.
하나같이 네임드임을 뽐내듯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추고 있으며 마치 군마에 탄 기마병처럼 슬라임을 몰고 있는 모습은 기발함을 넘어 기이하기까지 하다. 가장 선두에 선 붉은 빛깔의 슬라임은 머리에 강철 보호대까지 차고 있었다.
그 수가 무려 45마리에 달한다. 일반적으로 플레이어 둘에서 셋이 모여 동일 레벨의 몬스터를 사냥할 수 있음을 감안하면 터무니없이 많은 숫자다.
당연하지만 그들은 시안의 병력이다. 여기까지 오면서 조우한 몬스터와 접전을 치른 것인지 장비 이곳저곳에 다소 전투의 흔적이 엿보인다.
고블린들은 마을의 입구 앞 공터에 열을 맞춰 선 채 무기를 하늘 높이 치켜들며 연신 함성을 내질렀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 울타리는 슬라임의 점프로 쉽게 넘을 수 있는 높이밖에 되지 않는다. 저 병력이 일제히 달려들면 마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입구 쪽에 어느 정도 자경단원이 몰려들자 고블린들의 함성이 뚝 멎었다. 침묵이 지배하는 긴장 속에서 가장 선두에 있던 고블린이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키이익! 화살을 쏴라!”
그러자 약 절반 정도의 고블린이 활을 꺼내 시위를 당겼다. 그를 본 중년의 자경단장이 다급하게 손나팔을 만들었다.
“전원, 방패!”
그의 외침에 따라 자경단원들은 자신의 상반신을 겨우 가려주는 목재 사각 방패를 들어 몸을 가렸다. 포물선을 그리는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워낙 조악한 손기술로 만든 화살인데다가 고블린들이 궁술 계열 스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명중률은 한없이 저조하다.
하지만 이따금씩 눈먼 화살에 당한 자경단원들이 지르는 비명 소리는 마을의 공기를 지배하는 공포감을 한층 가중시켰다.
“화살탑은 뭐하고 있어! 화살을 쏴!”
자경단장의 고함 소리가 있고 나서야 마을 입구에 위치한 두 개의 화살탑에서 화살이 쏘아지기 시작했다. 높은 곳에서 쏘아지는 화살을 막기 위해 고블린들도 방패를 들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난간에 의지해 턱을 괸 채 전투를 구경하던 시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옥상의 문이 벌컥 열리며 NPC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조합원의 의복을 입고 있는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몇 안 되는 플레이어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험가님들! 베넨 마을의 위기입니다. 모험가 조합의 지부장으로부터 긴급 소집령이 발령되었으니 모험가 여러분들은 반드시 참여해 주십시오!”
말을 마친 조합원 NPC는 옥상의 작은 망루에 올라갔다. 그가 모습을 감추고 약 20여초 후, 마을 전체에 낮고 묵직한 종소리가 울렸다.
시안을 제외하고 종소리를 들은 모든 플레이어의 눈앞에 긴급 퀘스트를 나타내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으엑… 아무리 봐도 불가능한데. 저 녀석들 요즘 유명한 그놈들이잖아. 저것들을 피해 여기까지 왔는데 설마 마을까지 공격할 줄이야.”
“저 정도 규모면 오늘 내로 지도상에서 베넨 마을이 없어질 것 같은데, 굳이 참가할 필요가 있을까?”
옥상 위에 있던 플레이어들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모험가 조합에서 발령하는 긴급 소집령은 마을이나 도시가 위기에 처했을 때 현재 도시, 혹은 마을 내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강제적으로 전투를 강요하는 시스템이다.
물론 도망을 가도 좋지만 생존자의 신고 등으로 인해 그 사실이 발각되었을 경우 조합으로부터 여러 가지 불리한 대우를 받게 된다. 그리고 모험가 조합은 플레이어들에게 있어 펜과 종이처럼 서로 없어서는 안 될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조합의 혜택을 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 플레이어들이 하나둘 무기를 들고 조합의 게시판 앞에 모여들었다. 일부 플레이어는 퀘스트를 포기하고 도망갔기 때문에 모여 있는 인원은 그리 많지 않다.
플레이어들 사이에는 시안이 아는 얼굴도 섞여 있었다.
“마루한 일행. 아직 로그아웃하지 않았던 모양이네.”
플레이어 무리 사이에 섞여 있는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가득하다. 당연하지만 아는 사이라 해도 봐주거나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얼추 플레이어들이 다 모이자 모험가 조합의 문이 열리며 노년의 NPC가 등장했다.
“고작 이 정도인가… 아니, 도망가지 않고 모여준 것만 해도 감사해야겠군.”
그는 모여 있는 플레이어들의 수를 헤아리더니 절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시안에게 지도를 지급해준 NPC로 베넨 마을 모험가 조합의 지부장. 이름은 카비오다.
카비오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플레이어들의 얼굴을 둘러본다. 고작해야 서른 남짓한 인원으로 45마리에 달하는 고블린과 그 절반에 가까운 수의 슬라임을 몰아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적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모험가 여러분. 지금부터 인원을 두 조로 나눌 생각입니다.”
결사항쟁을 부르짖을 것이라던 예상과 달리 짧은 고민을 마친 카비오는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다. 플레이어들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거나 저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란에도 불구하고 카비오의 노련함이 담긴 눈매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하나의 조는 마을의 주민들을 데리고 탈출해서 판테라 도시까지 향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 조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주민들이 대피할 시간을 벌기 위해 몬스터와 결사항쟁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말인 즉 고블린과 싸우다 죽으란 이야기다. 이는 플레이어들이 죽어도 부활한다는 것을 알기에 할 수 있는 제안이다.
하지만 부활한다 할지라도 죽으면 경험치와 스킬 숙련도, 그리고 아이템을 잃어버리게 되며 24시간동안은 게임에 접속할 수 없다. 단순한 정의감에 취해 얻는 것보다 잃어버릴 것이 많은 전장에 몸을 내던질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부디 베넨 마을, 그리고 저희들과 마지막을 함께 해주실 용맹한 모험가분들만 남아주십시오. 나머지 분들은 주민들의 피난을 유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디 마을의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용기 있는 선택을 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카비오는 허리가 부러지도록 깊게 숙여 인사를 했다. 그 간절함은 제법 심금을 울렸다.
하지만 절반의 플레이어는 이 장소에서 떠나갔다. 남아 있는 수는 일부에 불과하다. 그들 중에는 마루한 일행도 섞여 있었다.
“곤란하네.”
시안은 떠나가는 플레이어들을 보며 뒷머리를 벅벅 긁어 댔다.
그의 목적은 마을을 지키는 플레이어들을 쓰러뜨려 대량의 공포를 얻는 것이지 무의미하게 마을을 몰락시키는 것이 아니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결사항쟁을 하는 플레이어들만 처리하고 후퇴할 예정이었는데 카비오로 인해 계획이 틀어져버렸다.
“2소대는 대열에서 이탈하도록 해. 마을의 뒤쪽에 하나의 출구가 있다. 그 근처에 숨어서 자리를 잡도록. 소향에게는 내 명령이라고 말해줘.”
그는 의념 통화를 사용해 휘하 고블린들에게 명령을 전달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플레이어는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 그래야만 보다 많은 양의 공포를 습득할 수 있다. 명령이 하달되자 한 무리의 고블린들이 대열을 이탈해 숲의 어둠으로 사라졌다.
“제가 선봉에 서겠습니다. 마을의 주민들이 안전하게 도망갈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보겠습니다.”
마루한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소리쳤다. 일부러 목소리를 높인 것은 겁에 질려 있는 플레이어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용기를 불어넣기 위함이다.
“여러분께는 뭐라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만약 살아남는다면 베넨 마을에서 해드릴 수 있는 최대한의 사례를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마루한은 눈물을 글썽이는 카비오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주었다.
“끄아악!”
화살에 다리를 꿰뚫린 자경단원의 찢어지는 비명이 있고 나서야 플레이어들과 모험가 조합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합의 NPC들은 재빠르게 무장을 시작했으며, 마루한을 선두로 한 플레이어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투 지역을 향해 내달렸다.
화살을 쏴대던 고블린들은 어느덧 검과 창을 뽑아들며 돌진하고 있었다.
“막아라! 저들이 마을에 한 발자국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너희들의 등 뒤에 가족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자경단장의 쩌렁쩌렁한 고함이 자경단의 사기를 증강시킨다. 그들은 검을 뽑아들며 우렁차게 비명을 내질렀다. 두려워하지 않고 적들을 향해 내달리는 그들의 모습은 패배를 모르는 전사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 세계는 레벨과 어빌리티가 강함의 척도가 되는 게임의 세계. 용맹과 사기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두 개의 무리가 부딪치는 순간 자경단은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20화
눈앞이 어두워지며 기이한 환상이 보였다.
어두운 밤하늘 높이 뻗은 계단. 둥근 보름달 아래 위치한 뼈를 엮어 만든 옥좌. 거기에 거대한 체구의 남자가 앉아있다. 역광을 맞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존재만으로 위압감이 느껴진다. 무심코 무릎을 꿇을 것 같은 압박 속에서 시안은 필사적으로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강하게 깨문 입술로부터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옥좌에 앉은 남자는 짧게 고한다.
[구하라. 그대에게 힘을 주겠다.]
“…허억!”
시안은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장거리를 전력으로 질주한 것처럼 숨이 벅차고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당황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이도 보이는 것은 크리스탈이 되어버린 엘프를 감금하고 있는 감옥뿐이다. 어디에도 하늘을 향해 뻗은 계단과 옥좌는 존재하지 않는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기 위해 들어 올린 손에는 하나의 검은색 구체가 들려 있었다. 마치 어둠이 소용돌이 치고 있는 것만 같다. 촉감은 차마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하다.
<마신의 선물 ― Rank : Unknown.>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는 미확인 구체. 마신이 힘이 부족해 고민하는 마왕 후보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다.
명령어 : 오라, 마의 힘이여.
효과 : 알 수 없음.
“설마 했는데 마신이었냐?”
비로소 그 압도적인 위압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플레이어가 아무리 강해져도 쓰러뜨릴 수 없는 유일한 상대가 있으니. 바로 이 세계를 관리하는 신이 그 주인공이다.
상대가 신이라면 그 강함이, 존재만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그 힘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만한 존재감이 아니라면 신이라는 이름이 운다.
선물을 움켜쥐는 시안의 눈앞에 하나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강제 퀘스트 발생!>
감금된 엘프들을 구출하라 ― 난이도 E+
마신이 준 선물을 이용해 노예사냥꾼을 쓰러뜨리고 엘프들을 구출해야 한다. 마신이 직접 하달한 명령이므로 거절할 수 없다. 실패할 경우 상당한 패널티를 갖게 된다.
* * *
[오빠, 내 말 들려?]
때마침 소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플레이어끼리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편리한 기능이 존재한다. 시안이 휘하의 몬스터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사용되는 스킬인 의념 통화가 그 주인공이다.
얼굴을 알고 친구 등록을 한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으므로 굉장히 편리하면서도 필수적인 기능 중 하나로 손꼽힌다.
“잘 들려.”
[우리는 오빠가 말한 장소에 도착했어.]
“그렇단 말이지. 어디보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시안은 마을의 동태를 살폈다. 어느덧 마을을 돌아다니는 플레이어가 30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여기에 마을 자경단이 얼추 열 명 정도다.
그들을 합쳐 마을의 병력은 40명 언저리. 이 정도면 충분히 괜찮겠다고 판단한 시안이 의념 전달을 통해 소향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공격해. 내가 한 말 잊지 말고.”
[알겠어. 나만 믿어줘.]
자신만만하게 소리친 소향이 몬스터들에게 명령을 하달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의념 통화가 끊어졌다.
시안은 사전에 마을을 둘러보던 와중 미리 봐두었던 모험가 조합의 지부 건물 옥상으로 향했다. 1층짜리 허술한 목재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베넨 마을에서 그나마 가장 높은 장소이며 마을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옥상은 모든 플레이어에게 무료로 개방되어 있으며, 스킬의 숙련도를 훈련할 수 있는 허수아비 인형이나 과녁 따위가 배치되어 있다. 인형에 눈알 붙이기 못지않게 지루한 작업이기 때문에 이용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
옥상의 중심부에는 커다란 종이 배치되어 있는데 마법적 처리가 되어 있어 특별한 일이 아니고는 울리지 않게끔 되어 있다.
마을 곳곳에 배치된 횃불이 밤의 거리를 밝히고 있다. 시안의 시선은 마을의 입구 쪽에 향해 있었다. 두 명의 자경단이 지키고 있는 마을 입구로 헐레벌떡 뛰어오는 세 명의 플레이어가 보인다. 거리가 멀지 않기에 그들이 하는 말을 충분히 엿들을 수 있었다.
“고, 고블린! 고블린과 슬라임이 쳐들어온다!”
“모험가님, 고블린이라니요? 이 근처에 고블린은 서식하지 않습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횡설수설하는 플레이어를 붙잡고 자경단원이 자초지종을 묻는다.
하지만 플레이어는 귀신에 쫓기는 사람처럼 겁을 집어먹은 얼굴을 한 채 연신 ‘고블린’이라는 단어만 뇌까리더니 자경단원을 떨쳐내고 모험가 조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키이이익!”
횃불의 빛이 닿지 않아 어둠으로 가득한 숲에서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 차례 불어온 바람이 나무를 뒤흔들며 소리를 묻으려 애썼으나 괴성은 합창하듯 하나둘 늘어만 갔다.
“이 울음소리는 고블린의 것인데… 하지만 이 근방에 서식하는 고블린은 없잖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거야?”
솟구치는 긴장감으로 인해 마른침을 삼킨 자경단원이 작게 읊조렸다.
옥상 위의 플레이어들도 얼이 빠져 숲 쪽을 바라보았다. 겨우 정신을 차린 자경단원 하나가 북을 쳐댔다. 낮게 울리는 북소리가 마을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에 따라 마을 주민들은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 문과 창을 걸어 잠갔다.
마을 곳곳에서 순찰을 돌던 자경단원들이 빠르게 모여들었다. 플레이어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할 무렵 녀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키이이익! 인간들아. 우리를 두려워하라!”
숲의 어둠을 뚫고 나온 것은 고블린이다.
하나같이 네임드임을 뽐내듯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추고 있으며 마치 군마에 탄 기마병처럼 슬라임을 몰고 있는 모습은 기발함을 넘어 기이하기까지 하다. 가장 선두에 선 붉은 빛깔의 슬라임은 머리에 강철 보호대까지 차고 있었다.
그 수가 무려 45마리에 달한다. 일반적으로 플레이어 둘에서 셋이 모여 동일 레벨의 몬스터를 사냥할 수 있음을 감안하면 터무니없이 많은 숫자다.
당연하지만 그들은 시안의 병력이다. 여기까지 오면서 조우한 몬스터와 접전을 치른 것인지 장비 이곳저곳에 다소 전투의 흔적이 엿보인다.
고블린들은 마을의 입구 앞 공터에 열을 맞춰 선 채 무기를 하늘 높이 치켜들며 연신 함성을 내질렀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 울타리는 슬라임의 점프로 쉽게 넘을 수 있는 높이밖에 되지 않는다. 저 병력이 일제히 달려들면 마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입구 쪽에 어느 정도 자경단원이 몰려들자 고블린들의 함성이 뚝 멎었다. 침묵이 지배하는 긴장 속에서 가장 선두에 있던 고블린이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키이익! 화살을 쏴라!”
그러자 약 절반 정도의 고블린이 활을 꺼내 시위를 당겼다. 그를 본 중년의 자경단장이 다급하게 손나팔을 만들었다.
“전원, 방패!”
그의 외침에 따라 자경단원들은 자신의 상반신을 겨우 가려주는 목재 사각 방패를 들어 몸을 가렸다. 포물선을 그리는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워낙 조악한 손기술로 만든 화살인데다가 고블린들이 궁술 계열 스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명중률은 한없이 저조하다.
하지만 이따금씩 눈먼 화살에 당한 자경단원들이 지르는 비명 소리는 마을의 공기를 지배하는 공포감을 한층 가중시켰다.
“화살탑은 뭐하고 있어! 화살을 쏴!”
자경단장의 고함 소리가 있고 나서야 마을 입구에 위치한 두 개의 화살탑에서 화살이 쏘아지기 시작했다. 높은 곳에서 쏘아지는 화살을 막기 위해 고블린들도 방패를 들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난간에 의지해 턱을 괸 채 전투를 구경하던 시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옥상의 문이 벌컥 열리며 NPC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조합원의 의복을 입고 있는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몇 안 되는 플레이어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험가님들! 베넨 마을의 위기입니다. 모험가 조합의 지부장으로부터 긴급 소집령이 발령되었으니 모험가 여러분들은 반드시 참여해 주십시오!”
말을 마친 조합원 NPC는 옥상의 작은 망루에 올라갔다. 그가 모습을 감추고 약 20여초 후, 마을 전체에 낮고 묵직한 종소리가 울렸다.
시안을 제외하고 종소리를 들은 모든 플레이어의 눈앞에 긴급 퀘스트를 나타내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으엑… 아무리 봐도 불가능한데. 저 녀석들 요즘 유명한 그놈들이잖아. 저것들을 피해 여기까지 왔는데 설마 마을까지 공격할 줄이야.”
“저 정도 규모면 오늘 내로 지도상에서 베넨 마을이 없어질 것 같은데, 굳이 참가할 필요가 있을까?”
옥상 위에 있던 플레이어들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모험가 조합에서 발령하는 긴급 소집령은 마을이나 도시가 위기에 처했을 때 현재 도시, 혹은 마을 내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강제적으로 전투를 강요하는 시스템이다.
물론 도망을 가도 좋지만 생존자의 신고 등으로 인해 그 사실이 발각되었을 경우 조합으로부터 여러 가지 불리한 대우를 받게 된다. 그리고 모험가 조합은 플레이어들에게 있어 펜과 종이처럼 서로 없어서는 안 될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조합의 혜택을 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 플레이어들이 하나둘 무기를 들고 조합의 게시판 앞에 모여들었다. 일부 플레이어는 퀘스트를 포기하고 도망갔기 때문에 모여 있는 인원은 그리 많지 않다.
플레이어들 사이에는 시안이 아는 얼굴도 섞여 있었다.
“마루한 일행. 아직 로그아웃하지 않았던 모양이네.”
플레이어 무리 사이에 섞여 있는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가득하다. 당연하지만 아는 사이라 해도 봐주거나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얼추 플레이어들이 다 모이자 모험가 조합의 문이 열리며 노년의 NPC가 등장했다.
“고작 이 정도인가… 아니, 도망가지 않고 모여준 것만 해도 감사해야겠군.”
그는 모여 있는 플레이어들의 수를 헤아리더니 절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시안에게 지도를 지급해준 NPC로 베넨 마을 모험가 조합의 지부장. 이름은 카비오다.
카비오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플레이어들의 얼굴을 둘러본다. 고작해야 서른 남짓한 인원으로 45마리에 달하는 고블린과 그 절반에 가까운 수의 슬라임을 몰아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적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모험가 여러분. 지금부터 인원을 두 조로 나눌 생각입니다.”
결사항쟁을 부르짖을 것이라던 예상과 달리 짧은 고민을 마친 카비오는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다. 플레이어들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거나 저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란에도 불구하고 카비오의 노련함이 담긴 눈매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하나의 조는 마을의 주민들을 데리고 탈출해서 판테라 도시까지 향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 조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주민들이 대피할 시간을 벌기 위해 몬스터와 결사항쟁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말인 즉 고블린과 싸우다 죽으란 이야기다. 이는 플레이어들이 죽어도 부활한다는 것을 알기에 할 수 있는 제안이다.
하지만 부활한다 할지라도 죽으면 경험치와 스킬 숙련도, 그리고 아이템을 잃어버리게 되며 24시간동안은 게임에 접속할 수 없다. 단순한 정의감에 취해 얻는 것보다 잃어버릴 것이 많은 전장에 몸을 내던질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부디 베넨 마을, 그리고 저희들과 마지막을 함께 해주실 용맹한 모험가분들만 남아주십시오. 나머지 분들은 주민들의 피난을 유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디 마을의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용기 있는 선택을 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카비오는 허리가 부러지도록 깊게 숙여 인사를 했다. 그 간절함은 제법 심금을 울렸다.
하지만 절반의 플레이어는 이 장소에서 떠나갔다. 남아 있는 수는 일부에 불과하다. 그들 중에는 마루한 일행도 섞여 있었다.
“곤란하네.”
시안은 떠나가는 플레이어들을 보며 뒷머리를 벅벅 긁어 댔다.
그의 목적은 마을을 지키는 플레이어들을 쓰러뜨려 대량의 공포를 얻는 것이지 무의미하게 마을을 몰락시키는 것이 아니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결사항쟁을 하는 플레이어들만 처리하고 후퇴할 예정이었는데 카비오로 인해 계획이 틀어져버렸다.
“2소대는 대열에서 이탈하도록 해. 마을의 뒤쪽에 하나의 출구가 있다. 그 근처에 숨어서 자리를 잡도록. 소향에게는 내 명령이라고 말해줘.”
그는 의념 통화를 사용해 휘하 고블린들에게 명령을 전달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플레이어는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 그래야만 보다 많은 양의 공포를 습득할 수 있다. 명령이 하달되자 한 무리의 고블린들이 대열을 이탈해 숲의 어둠으로 사라졌다.
“제가 선봉에 서겠습니다. 마을의 주민들이 안전하게 도망갈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보겠습니다.”
마루한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소리쳤다. 일부러 목소리를 높인 것은 겁에 질려 있는 플레이어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용기를 불어넣기 위함이다.
“여러분께는 뭐라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만약 살아남는다면 베넨 마을에서 해드릴 수 있는 최대한의 사례를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마루한은 눈물을 글썽이는 카비오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주었다.
“끄아악!”
화살에 다리를 꿰뚫린 자경단원의 찢어지는 비명이 있고 나서야 플레이어들과 모험가 조합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합의 NPC들은 재빠르게 무장을 시작했으며, 마루한을 선두로 한 플레이어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투 지역을 향해 내달렸다.
화살을 쏴대던 고블린들은 어느덧 검과 창을 뽑아들며 돌진하고 있었다.
“막아라! 저들이 마을에 한 발자국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너희들의 등 뒤에 가족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자경단장의 쩌렁쩌렁한 고함이 자경단의 사기를 증강시킨다. 그들은 검을 뽑아들며 우렁차게 비명을 내질렀다. 두려워하지 않고 적들을 향해 내달리는 그들의 모습은 패배를 모르는 전사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 세계는 레벨과 어빌리티가 강함의 척도가 되는 게임의 세계. 용맹과 사기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두 개의 무리가 부딪치는 순간 자경단은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