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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영웅은 마왕이 되었다
18화


Chapter 4 ― 각성


병력을 모으는 데 성공한 시안은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별이 지는 숲을 탐색했다. 그 목표란 근처에서 적당한 소규모 마을을 탐색하는 것이다.
마왕 후보인 시안은 진정한 마왕으로 각성하기 위해 플레이어를 사냥함으로써 공포를 모아야 한다. 하지만 가장 가까이 있는 도시 판테라의 경우 활동하는 플레이어의 수는 물론이요, 배치되어 있는 NPC의 병력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지금의 병력으로 판테라를 공격하는 것은 지나가던 개도 비웃을 정도로 어리석은 행위다. 차라리 계란을 던져 바위를 깨뜨릴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때문에 활동 중인 플레이어의 수가 적고 NPC병력도 적은 소규모 마을을 찾으려는 것이다.
소향은 레벨을 올리기 위해 몬스터들을 대동해 오크를 사냥하는 중이므로 모처럼 혼자 움직이게 되었다.
“기왕이면 화전민이 일군 마을을 발견했으면 좋겠네. 그 경우 자경단의 수준도 한참 떨어지니까 그리 위협적이지도 않겠지.”
작은 바람에도 위태롭게 흔들리는 흔들다리를 건너는 시안의 얼굴은 아무런 무늬도 없는 밋밋한 나무가면으로 인해 가려져 있었다.
다른 플레이어가 있는 마을을 찾는 일이다. 정체가 들킬 만한 요소들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조악한 손재주로 만든 가면은 무겁고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스스로를 달랬다.
“그보다 슬슬 뭐가 좀 나와 줬으면 좋겠는데.”
벌써 한 시간째 아무런 이변도 없는 고요함에 휩싸여 걷기 운동만 하고 있으려니 좀이 쑤셨다. 하다못해 고블린이라도 나와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 간절함이 하늘에 닿기라도 한 걸까. 시안은 네 명으로 구성된 플레이어 팀과 우연히 조우할 수 있었다.
“플레이어…….”
괜히 불안함을 느낀 시안은 행여나 싶은 마음에 가면을 고쳐 썼다. 다행이도 사전에 튼튼하게 고정해 둔 가면은 흔들림 없이 그의 얼굴을 가려주었다.
플레이어는 한 명을 제외하고 전부가 여성이었다. 남자의 하렘이라는 분위기보다는 남자가 노예라는 느낌이 가득한 팀이었기에 부러움보다는 동정심이 먼저 일었다.
“어라? 플레이어다.”
나이가 상당히 어려 보이는 소녀가 시안을 발견하고 대뜸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해온다.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소녀는 팀원들의 양해를 구하더니 다람쥐처럼 총총거리며 뛰어왔다.
본디 사냥터에서 플레이어끼리 조우하면 살짝 목례만 하고 지나가는 것이 예의다. 그러나 그녀의 행동에는 일말의 거리낌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봐, 어째서 이런 곳에서 친구도 없이 혼자 어슬렁거리고 있는 거야. 왕따냐?”
귀여운 여동생 같은 이미지의 외모와 달리 그녀의 입담은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처럼 거칠었다.
“보아하니 전투 도중 팀원들을 잃은 것 같은데, 그럴 때는 냉큼 죽으란 말이야. 너 때문에 피곤하게 생겼잖아. 하아… 감사하라고. 저쪽에 있는 남자가 너 같은 놈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바보 같을 정도로 좋은 사람이라 어쩔 수 없이 너를 돕는 거니까.”
그녀가 자신의 팀원 중 유일한 남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필드에서 팀원도 없이 혼자 돌아다니는 플레이어를 본다면 당연히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만큼 PAO에서 솔로 플레이는 난이도가 높다.
그녀는 시안을 전멸한 팀의 유일한 생존자라고 여겨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불필요한 관심이기는 하지만 마음만은 고마웠다. 말투는 상당히 거칠지만 말이다.
“예상하신대로입니다. 고블린과 만나서 무작정 도망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아무래도 길까지 잃어버린 모양이에요.”
입을 열자 거짓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급조한 것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진실이라 믿어줄 만한 수준이다. 실제 소녀는 좁쌀만큼도 의심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잔말 말고 따라와. 가까운 마을까지 안내해 줄 테니까. 무려 보수도 받지 않는다. 앞으로 평생 감사하며 살아.”
“판테라로 가시는 겁니까?”
“아니. 우리들은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베넨 마을을 거점으로 삼고 있어. 우선은 베넨 마을로 간 다음 판테라로 가는 팀에 합류하거나 마차를 이용하도록 해. 그보다 잔소리 말고 따라오라고 했잖아. 정강이 차버린다? 세이버 울프의 먹이로 던져버린다?”
그녀의 거친 말투는 쌍둥이인 선율의 독설에 내성이 있는 시안에게 어떠한 대미지도 주지 못했다.
그녀의 말에 시안은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가면에 가려져서 보이지도 않을 테니 기분이 내키는 대로 마음껏 웃었다.
뜻밖에도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왔다. 적당한 마을을 찾고 있었는데 이렇게 납시어서 정보를 알려줄 뿐만 아니라 안내까지 해주겠다니, 넙죽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다.
“그렇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와.”
그녀는 표정 가득 귀찮음을 드러내며 시안의 팔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일행들과 가까워질수록 눈에 띄게 변모했다. 일그러져 있던 입술이 예쁜 호선을 그리고, 맹수마저 깨갱거리며 움츠러들게 만들 사나운 눈매가 순진무구하게 바뀌었다.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루한∼! 말한 대로 데리고 왔어. 몬스터들한테 동료들을 전부 잃었다나 봐. 어떻게 해? 불쌍해. 조금이지만 눈물이 나와 버렸어.”
“너 누구냐!”
남자의 품에 안겨 어리광을 부리는 그녀를 본 시안이 무심코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귀신에 홀린 것만 같다.
“안녕하세요. 팀의 리더인 마루한이라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검사죠.”
유일한 남성 플레이어가 두 팔 벌려 시안을 환영했다. 단순한 짐꾼 포지션이라 생각했던 남자는 의외로 팀의 리더를 맡고 있었다.
화사한 금발로 물들인 머리카락을 가진 그의 웃음은 20대 초반이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동네를 누비던 골목대장 같은 천진난만함을 가지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제 소개를 깜빡했네요. 제 이름은 루리에. 보시다시피 궁수이며 파티에서 귀염둥이를 담당하고 있어요.”
시안에게 합류를 제안한 소녀가 어색한 분위기가 파고들 틈 따위는 여지조차 주지 않겠다는 기세로 자기소개를 했다.
동료들을 등진 그녀는 얼굴만으로 날고 긴다 하는 불량배들을 무릎 꿇릴 수 있을 정도로 흉악한 표정을 지으며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시안은 기밀 유지를 약속하는 뜻에서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다른 두 여성도 자기소개를 했다. 청순한 인상을 가진 마법사의 이름이 신시아였으며, 날카로운 고양이상 사제의 이름이 우리엘이다.
“마파두부라고 합니다. 직업은 마법사죠.”
워낙 급격한 만남이었기에 가명으로 사용할 이름을 준비하지 않았다. 때문에 아무렇게나 댄 이름이 어제 점심으로 먹은 마파두부였다.
“아, 나 마파두부 좋아하는데. 배가 고파지는 이름이네요.”
두 개의 얼굴을 가진 루리에가 군침을 흘리며 말했다.
“어쨌거나 짧은 시간이 되겠지만 잘 부탁드려요, 마파두부 님!”
리더인 마루한이 악수를 청해온다. 시안도 그의 손을 맞잡았다. 온화한 인상과 달리 힘이 느껴지는 딱딱하고 두꺼운 손이다.
상당히 성품이 좋은 사람들인지 돌아가는 길에 조우하게 될 몬스터를 사냥하면 얻을 경험치 따위를 나누기 위해 잠시라도 팀에 소속되는 것이 어떻겠느냐 제안을 해왔다.
하지만 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본명을 밝혀야 하므로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들은 시안이 쓰고 있는 가면에 대해서도 호기심을 보이지 않았다.
“현실에서 연예인처럼 유명인들이 정체를 밝히기 싫을 때 이따금 가면을 쓰고는 하잖아요. 호기심 때문에 가면을 벗어달라는 것은 예의가 아니죠.”
마루한의 말에 작게나마 감동을 느낀 시안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PAO를 즐기는 모든 플레이어들이 저런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면 플레이어들 사이에 섞여 게임을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마왕 후보로써 더 이상 게임을 플레이하는데 지장이 생긴다면 그러한 길도 생각해 볼 수 있겠구나 여기며 마루한 팀의 뒤를 쫓았다.
얼마 정도 걷고 있으니 일행은 한 마리의 몬스터와 조우할 수 있었다.
몬스터는 적색의 털을 가진 늑대였으며, 덩치가 호랑이만큼 거대했다. 덩치 외에 일반 늑대와 다른 점을 꼽으라면 검처럼 날카롭게 솟은 두 개의 송곳니를 예로 들 수 있겠다.
레벨 7의 몬스터, 세이버 울프다. 공격력과 스피드가 높지만 방어력과 체력이 극도로 낮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이 근처에서는 세이버 울프가 출몰하는구나.”
적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태평하게 고개를 주억거린 시안은 새롭게 얻은 정보를 미니맵에 수동으로 표시했다.
최근 느려 터진데다가 멍청하기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오크와 드잡이 질을 하느라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던 차였다.
하지만 투지를 불태우며 앞서 가는 시안의 어깨를 마루한이 붙잡는다.
“세이버 울프군요. 레벨 9의 몬스터입니다. 고블린에게 쫓기시던 마파두부 님께는 다소 벅찬 상대일 테니 뒤쪽에 숨어 계세요.”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설정이었지.’
풀이 죽은 시안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사제보다 더욱 후미에 자리하게 되었다.
마루한 팀은 평균 레벨은 6이며, 가장 높은 마루한의 레벨이 7이다. 이는 플레이어 중에서는 상당히 높은 편이지만 세이버 울프는 어려운 상대다.
하지만 일행의 표정에서 묻어나는 것은 긴장이나 당혹이 아닌 자신감이다.
“자, 그럼 하던 대로 간다!”
가장 먼저 검사인 마루한이 선두에 선다.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던 세이버 울프가 가장 전방에 있는 마루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알겠어. 하던 대로… 축복!”
사제 플레이어 우리엘의 스킬 축복이 사용된다. 마루한의 머리 위로 새하얀 빛의 가루가 눈처럼 쏟아졌다.
세이버 울프의 앞발치기는 축복으로 강화된 마루한의 방패에 가로막혔다. 호랑이만 한 늑대의 무게가 실린 공격이었지만 자세를 낮춘 마루한은 표정을 찡그리되 방어에는 성공했다.
“갑니다. 화염탄!”
마법사 플레이어 신시아가 쏜 불덩어리가 세이버 울프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폭발과 함께 자세가 흐트러진 거체를 향해 마루한의 검이 휘둘러진다.
“흐아아압! 강력한 일격!”
스킬을 사용한 일격은 세이버 울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거대한 송곳니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하지만 추가로 가해진 방패 공격에 세이버 울프가 맥없이 뒤집어지며 나약한 복부를 드러냈다. 황급히 일어서려 했으나 방패를 앞세운 마루한이 세이버 울프를 찍어 누른다.
“상대의 빈틈을 놓치지 않는 신속 정확한 현시대 최고의 궁수, 루리에 님 등장!”
“루리에! 불필요한 미사여구가 많아!”
멋들어지게 포즈를 잡는 루리에에게 우리엘의 핀잔이 가해졌다. 입술을 잔뜩 내민 루리에가 시위를 당긴다.
“이게 바로 궁수 버전 강력한 일격, 충격 화살!”
그녀가 스킬을 사용하자 밋밋하던 화살촉에 푸른빛이 담긴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정확하게 늑대의 복부를 꿰뚫었다. 경직 화살의 확률적 효과인 상태 효과가 발동해 늑대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으아아앗!”
기합을 내지르는 마루한의 일격과 신시아의 화염탄이 동시에 작렬한다.
쉼 없이 연속으로 쏟아지는 공격에 세이버 울프는 이렇다 할 반응조차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아아, 예상은 했지만 거지에요. 송곳니 하나만 달랑 떨어뜨리다니, 너무한 거 아닌가요?”
“괜찮아. 송곳니는 장신구 재료로 사용되니까.”
웃으며 전리품을 회수하는 그들의 모습은 오랜 시간 알고 지내던 사이에서만 엿볼 수 있는 친밀함이 묻어났다.
정석적이지만 상당히 뛰어난 팀워크를 구경한 시안은 솔직하게 감탄하며 물개박수를 쳤다. 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긴 시간 동안 호흡을 맞췄는지 알 수 있었다. 시안은 이들이 PPO플레이어라 확신했다.
언젠가 꼭 한 번쯤은 만나서 정식으로 PVP를 신청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안은 마루한이라는 이름을 기억에 새겨두었다.
그 후에도 두 차례 세이버 울프와 조우했으나 일행은 이렇다 할 문제없이 몬스터 출몰 지역을 벗어나 NPC들이 모여 사는 작은 규모의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은 현재 저희들이 거점으로 삼고 있는 베넨 마을입니다. 보시다시피 규모는 크지 않지만 편의 시설도 잘 마련되어 있고, 숲속에 위치해 있는지라 괜찮은 토벌 퀘스트도 많아요.”
“게다가 별이 지는 숲에는 돌연변이 고블린이 자주 출몰해서 위험하잖아요. 때문에 이 근방에는 고블린을 피해 새로운 사냥터를 찾는 플레이어들이 많아요. 그래서 물품의 거래도 활발하죠.”
마을에 도착하자 급속도로 말이 많아진 신시아와 원래부터 수다스러웠던 루리에가 양옆에서 쉬지 않고 떠들어 댔다.
시안은 신이 난 채 떠드는 소녀들의 안내를 받으며 마을 곳곳을 둘러볼 수 있었다. 크지 않은 마을인지라 전체를 둘러보는데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녀들의 말대로 베넨 마을은 규모에 비해 머무르고 있는 플레이어의 수가 상당히 많았다. 여관 등의 편의 시설이 제법 마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숙소를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플레이어가 자주 눈에 띄었다.
근처에 모험을 떠난 플레이어들이 더 있을 수도 있지만 NPC를 제외하고 당장 보이는 유동인구는 약 3∼40정도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시안은 친절을 베풀어 준 마루한 일행에게 사례하기 위해 인벤토리를 열었다. 몇 가지 빈곤하기 짝이 없는 장비 목록 중에서 그나마 괜찮은 상태를 자랑하는 철제 방패를 마루한에게 건네주었다. 그가 사용하는 방패가 싸구려 목재로 만든 사각 방패였기 때문이다.
“어어? 이, 이건 철제 방패! 이렇게 귀한 것을 어떻게 받아요.”
호들갑을 떨며 손을 떠는 마루한의 반응에 오히려 시안이 더 크게 놀라고 말았다.
시안이 건네준 철제 방패는 고블린 단검을 녹여 만든 것으로 소재의 품질도 너저분하고 만든 이도 실력 없는 대장장이 고블린인지라 선물로 주는 것조차 민망한 물건이다. 저런 반응은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경악을 금치 못하는 다른 팀원들의 반응을 보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조심스레 머리를 치켜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