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과거의 영웅은 마왕이 되었다
17화
여제 이리나. 그 이름이 시안의 잔잔하던 마음의 물결에 하나의 파문을 만들었다. 작은 물방울이 호수 전체에 번지는 파동을 만들 듯 그 이름 석 자가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다.
시안은 두 손으로 중년 여성의 양쪽 어깨를 강하게 붙들었다. 화들짝 놀란 그녀의 입에서 작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정말 이리나라고? 확실해?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나무의 나이테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가면의 눈구멍으로 보이는 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진득한 살의가 묻어나는 눈동자를 정면으로 직시한 여성의 눈동자가 공포로 물들었다.
“히익! 내, 내가 아는 것은 전부 말해줬으니 당장 돌아가! 그렇지 않으면 병사를 부르겠어!”
중년 여성이 팔을 휘두르며 시안을 쫓아냈다. 그와 함께 있다가 봉변을 당한 소향이 억센 팔에 얻어맞은 뺨을 부여잡으며 울상을 지었다.
“아파! 저 아줌마 갑자기 왜 저러는 거람? 병사는 오히려 내가 부르고 싶다고! 콩밥 먹고 싶어?”
씩씩거리며 중년 여성을 노려본 소향이 시안의 안색을 살핀다. 그나마 드러나 있는 눈동자조차 시안의 두 손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그 막막함이 소향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설마 너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시안의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온 작은 소리는 축제 분위기로 가득한 도시의 떠들썩함에 묻혀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바로 지척에서 귀를 기울이던 소향조차 듣지 못했을 정도다.
“여제님이 축제를 보러 나오셨대. 중앙 광장이다!”
누군가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 소리에 NPC들은 반응하지 않았으나 플레이어들은 달랐다. 그들은 연예인을 쫓는 골수팬처럼 비명을 지르며 중앙 광장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우와, 여제가 도대체 누구인데 사람들의 반응이 저런 거야?”
“보러 가자.”
질린다는 얼굴을 한 소향의 손목을 잡은 시안이 민족 대이동을 시작한 플레이어들의 뒤를 따라 중앙 광장으로 향했다.
다소 강압적인 태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소향은 마냥 좋다며 웃었다.
“이러고 있으니 데이트하는 것 같다.”
“…어휴.”
“아앗! 아니야. 말실수였어! 그러니 무언으로 손 놓지 말아줘! 내 손 돌려줘!”
언제나 활기찬 소향과 별 소득 없는 잡담을 나누다 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중앙 광장이 보이는 장소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다만 인파가 워낙 많아 중앙 광장까지 가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주위를 둘러보던 시안은 2층짜리 건물의 옥상으로 향했다.
어느 음식점의 야외 테라스로 운영되고 있던 옥상에는 시안과 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 상당수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간 시안은 비로소 원하는 바를 목격할 수 있었다.
저 멀리 중앙 광장의 분수 앞에 화사한 금발을 가진 미인 플레이어, 여제 이리나가 해바라기조차 부끄러워 고개를 숙일 만큼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모는 맨얼굴로 거리를 걸어도 남자들이 침을 흘리며 응시할 소향과 못지않은 수준이다.
“…오빠는 설마 저 여자가 보고 싶었던 거야? 부탁이니까 제발 아니라고 말해줘. 아니, 그래도 오빠가 남자라는 것을 알았으니 기뻐해야 하는 건가?”
유난히도 소향의 음성에 가시가 돋쳐 있다. 하지만 질투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화를 꾹 눌러 참는 모습이 눈에 띈다. 다만 복어처럼 볼이 빵빵해지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와아, 진짜 예쁜 여자네. 인형 같아. 사람들이 이렇게 몰려다니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해.”
내뱉는 대사 역시 국어책을 읽는 듯 톤이 딱딱하다.
“저 여자의 얼굴, 잘 봐둬.”
매정하게도 시안은 그런 소향을 도발하는 듯한 말을 내뱉었다. 질투에 미쳐 스스로의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도 그의 말을 따라 여제 이리나의 얼굴을 열심히 살폈다.
“오빠는 저런 얼굴이 취향이구나.”
사람들 틈에 파묻혀 사람 좋은 미소를 그리는 이리나를 보는 소향의 미소는 점점 썩어 문드러졌다.
소향이 사람을 잘 따르는 강아지 같은 인상이라면 이리나는 순한 양과도 같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 각자 성향은 다르지만 보기 드문 미인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미묘하게 굳어져 있던 소향의 표정은 이어지는 시안의 말을 듣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망가졌다.
“미르를 추락시키고 이향이를 그 몰골로 만든 장본인이야. 나와 이향이의 원수다.”
“…….”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작은 돌멩이 하나가 소향의 잔잔한 마음에 격한 파도를 일으켰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그녀의 모습을 한시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망막에 새겨 넣는 시안과 달리, 커다란 충격을 받은 소향이 겨우 입을 열었다.
“나, 전혀 모르고 있었어. 언니는 나한테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으니까. 도대체 1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 *
“한 방 거하게 얻어맞았는데 멍청하게 참고 있을 생각은 없어. 복수는 해줘야지.”
판테라에서의 짧았던 관광을 끝마치고 망가진 고블린 거점으로 돌아온 시안은 자신의 생각을 숨김없이 토로했다.
“복수라니, 어떻게 하려고? 찾아가서 죽이기라도 할 거야?”
쓰러진 통나무 위에 걸터앉은 채 험한 숲길을 걷느라 다소 거칠어진 숨을 다듬던 소향이 질문했다.
판테라에서 시안은 그녀가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때문에 토라진 소향의 음성은 제법 시무룩하다.
“아니, 죽이지 않을 거야.”
시안의 입에서 나온 간결한 대답은 그녀의 생각 범주를 초월해 있었다. 당장이라도 찾아가서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반복해 죽일 거라고 선언할 줄 알았건만. 의외로 그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말은 평화적이었다.
“오빠답지 않게 소극적이네. 어째서?”
“그렇게 극단적으로 움직여 봤자 내 정체만 들통 날 뿐이야. 그 대가로 엄청난 수의 플레이어들이 몰려와서 나한테 몰매를 놓겠지. 나는 목숨에 제한이 있는데 저 녀석은 제한이 없거든. 단순히 교환해서는 메리트가 없어.”
“경험치와 아이템을 빼앗을 수 있잖아.”
“잃어버린 경험치는 금방 복구할 수 있어. 그리고 저 녀석은 대기업 유성의 사장이 애지중지하는 외동딸이다. 잃어버린 장비 따위야 금방 복구할 수 있는 재력 또한 거지고 있어. 무의미한 수고일 뿐이야. 무엇보다 나는 그런 소심한 복수를 하기 위해 게임을 시작한 게 아니야.”
“그러면 어떻게 할 건데?”
올려다보는 소향의 눈동자에 복수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것만 같았다. 언제나 유쾌하고 남을 미워할 줄 모르는 그녀가 내뱉는 증오는 어색하면서도 선명하다.
“우선은 망가진 건물들을 수리하고 잃어버린 병력을 추가로 보충해야겠지.”
시스템 목록 중 건축과 이웃한 곳에 위치한 수리 명령어를 불러온 시안은 조속히 망가진 건물들을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얼마나 파괴되었느냐에 따라 수리비가 다르게 청구되었으나, 대부분의 건물이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파괴되었으므로 새로 짓는 것 못지않을 정도의 금액이 소모되었다. 붉은 오크의 전리품을 전부 넘겨주는 대가로 소향에게 받은 영혼 조각이 수리 작업으로 인해 전부 소모되고 말았다.
“덕분에 쓸데없는 지출이 생겼다고. 오늘의 원한은 일기장에 꼭 적어둘 테다.”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이곳에 없는 한 여성에게 저주의 말을 내뱉은 시안은 고블린들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어지간히도 운이 없었는지 소환된 고블린 전부가 일반 등급이었다.
최소 둘 정도의 네임드를 원했던 시안이 물에 빠진 생쥐처럼 축 처졌다.
하루 종일 걸은 까닭에 다리가 아프다고 칭얼거리는 그녀를 라임의 위에 태운 시안이 슬라임 거점이 있는 장소로 향했다. 건물 단계에서 손해를 본 것은 고블린뿐이지만 사망한 몬스터 중에는 슬라임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병력을 모아서 어떻게 할 건데? 몬스터들을 이용해서 공격할 거야?”
“죽이지 않는다고 했잖아. 이리나에 대해서는 한동안 잊어버려. 방치해 둘 거니까. 불쾌한 일이지만 그 녀석은 재능이 있어. 내가 딱히 개입하지 않는다면 PPO에서 그랬듯 어느덧 높은 곳에 올라가 있겠지.”
“어째서 가만히 놔두려는 거야. 원수 아니었어? 복수한다는 사람치고 오빠는 너무 태평해.”
보는 이의 속이 타들어갈 정도로 태연자약한 시안의 몫까지 대신 화를 내주겠다는 기세로 소향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도착한 슬라임 거점에서 새로운 슬라임을 소환하던 시안이 일자로 다물어져 있던 입을 열었다.
“낮은 곳에서 백날 떨어져 봤자 다치는 일은 드물어. 하지만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쉽게 치명상을 입게 되는 법이야. 자잘하게 공격해서 경계심을 높일 필요는 없지. 단 한 번. 이 정도면 이 녀석이 죽겠구나 싶을 정도까지 올라갔을 때 단 한 번을 떨어뜨리면 돼. …오옷! 네임드다.”
시안이 소환한 다섯 마리의 슬라임 중 한 마리가 희귀 등급의 푸른 가시 슬라임으로 탄생했다.
돌기로 인해 우둘투둘한 푸른 가시 슬라임의 머리를 쓰다듬은 시안은 휴식을 위해 그 위에 걸터앉았다. 돌기가 딱딱해서 탑승감은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얻어맞고 가만히 있는 것은 성미에 안 맞아. 어떻게든 한 대 때려줘야겠어. 녀석에게 스트레스성 원형 탈모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라도 병력을 잔뜩 만들어 인근에 있는 소규모 마을을 습격할 생각이야.”
“어째서 작은 마을을 습격하는 건데? 그게 그 여자에게 한 방 먹여주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건지 모르겠어.”
자신 있게 내뱉은 시안의 말에 숨겨져 있는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소향의 질문이 이어졌다. 설명이 부족한 감이 있었으므로 시안은 이어서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 여자는 순해빠진 척하지만 사실은 나서기를 좋아하고 남들 위에 서는 것을 좋아해. 레벨 랭킹에서 손해를 입으면서까지 조사단에 속한 것은 고통 받는 플레이어들을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명성을 얻기 위함일 거야. 명성이 높으면 작위를, 나아가서는 옥새를 얻을 수도 있거든.”
PAO에서 명예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단순히 NPC들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정도만이 아니라 각종 퀘스트의 기본조건이 되며 민심을 사고 귀족이 되며 최종적으로는 한 국가의 왕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리나는 효율적으로 명성을 모으는 방법을 알고 있다. PPO에서도 그녀만의 방식으로 제국의 황제가 되었으니 성공가도를 걷는 방법이라 증명된 길을 따라 걷는 것이나 진배가 없다.
때문에 시안은 그녀가 세운 계획의 일부를 망치는 것으로 복수의 서막을 열기로 결정 내렸다.
“그녀가 ‘완벽하게’처리했다고 선전한 고블린들이 날뛰면 자연히 그녀의 명성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어. 플레이어들이라면 모를까, NPC들은 그런 쪽에 민감하거든. 원래 모래성은 쌓기는 어려워도 허물기는 쉬운 법이야.”
시안의 설명을 들은 소향은 입을 다문 채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스스로가 선언했듯이 소향은 그리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다. 때문에 시안의 설명이 있더라도 곧장 ‘아, 그렇구나’하고 손뼉을 마주치지 못한다. 항상 고민을 반복하고 나서야 겨우 고개를 주억거리는 게 소향이라는 여인이다.
“게다가 마을을 습격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어.”
“아직도 또 있어? 하나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
아직 생각의 정리가 덜 된 소향이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시안은 봐주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마왕 후보야. 진정한 마왕으로 각성하기 위해서는 플레이어들로부터 공포를 갈취해야 해. 그리고 거점으로 이용되는 소규모 마을에는 적당한 수의 플레이어들이 주둔하고 있어. 이리나의 평판을 떨어뜨리고 나는 필요한 공포를 얻어 마왕이 되는 것으로 더욱 강해진다. 그야말로 일석이조지.”
“오빠, 혹시 우리는 NPC와도 싸워야 하는 거야?”
“마왕 후보니까.”
말은 그럴듯하게 했지만 결국 아무런 죄도 없는 NPC들을 죽이게 된다는 뜻과 동일하다.
사람들이 NPC를 대할 때 취하는 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NPC가 어디까지나 게임의 진행에 필요한 요소로서 만들어진 데이터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주장. 다른 하나는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며 감정을 가진 NPC 역시 사람과 같은 인권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시안의 경우 전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후자의 입장을 고수하는 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NPC를 도구로 취급하는 자들을 극도로 혐오한다.
만약 소향이 후자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몬스터로 하여금 마을을 공격하도록 명하고 NPC를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는 시안을 혐오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건…….”
그제야 사태의 중요성을 인지한 소향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갈팡질팡했다. 다이브형 가상현실 게임이 처음인 그녀는 NPC는 고사하고 플레이어조차 죽여 본 경험이 없다.
아직 NPC를 대하는 태도를 결정하지는 못했으나 마음이 약하고 선한 성품을 가진 그녀가 어떤 입장을 고수하게 될 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렇다면 필드에 나와 있는 플레이어만 골라서 쓰러뜨리면 되는 거 아니야? 그것만으로도 아직 고블린들이 건재하다는 것은 알릴 수 있잖아.”
그녀가 나름대로의 절충안을 내놓았으나 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라고 해서 그 방법을 떠올리지 못한 것도 아니다. 효율이 극도로 떨어진다.
“너는 PAO의 필드가 얼마나 넓다고 생각하는 거야? 물론 그만큼 플레이어의 수도 많기는 하지만 필드에서 플레이어와 조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에 의지해야 해. 여러 모로 수고에 비해 보상이 확실하지 않은 방법이야.”
“그러면 마을에 가서 유인해 오는 방법은? 오빠가 귀찮다면 내가 할게. 사냥을 가자고 말한 다음 고블린들이 잠복하고 있는 곳으로 데리고 오면…….”
“그래봤자 몇 번이야. 한 세 번 정도 하면 플레이어 중 몬스터와 내통하는 자가 있다고 소문이 쫙 퍼질 걸. 우리는 아직 성장 단계에 있어. 그 정도로 어그로가 끌려서는 곤란해.”
“…….”
말을 잃은 그녀는 멍하니 자신의 발등만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작은 두통을 느낀 시안이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게임을 즐기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른 법이야. 누구는 아바타의 성장을 즐기고 누구는 미지의 세계를 모험하는 것을 즐겨. NPC를 사람처럼 취급하는 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어. 나는 후자일 뿐이야. 물론 너에게 강요할 마음은 없어. NPC와 싸우는 것이 싫다면 너는 근처에서 사냥을 하고 있어도 좋아.”
“언니는 어땠는데?”
그녀가 말하는 언니란 미르의 일원이자 시안의 유일한 라이벌인 이향이다.
“…녀석은 전자였어.”
다름 아닌 가족의 일이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시안이 진실을 고했다.
지키기로 다짐한 NPC를 위해서라면 스스로의 목숨을 내던지는 것조차 망설이지 않았던 옛 친구를 생각하며 시안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그녀가 보여주었던 마지막 표정이, 5년간 곁에 있으면 본 적 없는 그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잘 모르겠어. 나는 지금까지 NPC를 만나 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오빠가 하자는 대로 할래.”
눈을 뜨면 언제나 그랬듯 근심 걱정 하나 없이 만개한 소향의 미소가 보였다.
사실상 시안의 병력 중에서 본인을 제외하면 가장 강한 인물이 소향이다. 그녀가 빠지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 다소 불안한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때문에 그녀의 수락은 풍부한 안심감을 안겨주었다.
“그래, 게임은 즐겨야지. 머리 아픈 일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만으로도 족해. 전에 내가 말했나? 게임과 현실을 철저하게 분리하라고. 게임은 게임. 현실은 현실. 그걸 실패하면 언젠가 굉장히 곤란한 일을 겪게 될 거야.”
그렇게 말하는 시안은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말투와 표정에서 실패의 경험을 읽어낸 소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의미에서 병력을 조금 더 키우고 싶은데, 슬슬 고블린이나 슬라임 말고 다른 병과도 넣고 싶어. 네 생각은 어때?”
억지로 분위기를 밝게 전환하기 위한 시안의 노력이 이어졌다.
상당히 소모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안의 수중에는 제법 많은 영혼 조각이 남아 있었다. 민첩한 몸놀림을 자랑하는 소향이 팀에 합류하면서 전보다 더 많은 몬스터를 사냥할 수 있게 된 것이 주된 이유다.
“음… 슬라임은 어디까지나 보조해 주는 역할이고. 고블린은 덩치가 작아서 귀엽잖아?”
“그 못생긴 것들이 귀엽게 보인다면 너는 자신의 시력에 이상이 있음을 의심해 봐야 할 거야. 좋은 안과를 소개시켜 주지.”
“이상하네. 내 눈에는 귀엽게 보이는데… 어쨌든 작고 민첩한 고블린들이 있으니 이번에는 크고 힘이 강한 몬스터를 소환하는 것이 어때? 그렇지 않아도 요즘 그런 몬스터를 사냥하고 있잖아.”
귀엽게 웃는 소향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단번에 파악한 시안이 턱을 괴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오크인가.”
17화
여제 이리나. 그 이름이 시안의 잔잔하던 마음의 물결에 하나의 파문을 만들었다. 작은 물방울이 호수 전체에 번지는 파동을 만들 듯 그 이름 석 자가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다.
시안은 두 손으로 중년 여성의 양쪽 어깨를 강하게 붙들었다. 화들짝 놀란 그녀의 입에서 작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정말 이리나라고? 확실해?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나무의 나이테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가면의 눈구멍으로 보이는 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진득한 살의가 묻어나는 눈동자를 정면으로 직시한 여성의 눈동자가 공포로 물들었다.
“히익! 내, 내가 아는 것은 전부 말해줬으니 당장 돌아가! 그렇지 않으면 병사를 부르겠어!”
중년 여성이 팔을 휘두르며 시안을 쫓아냈다. 그와 함께 있다가 봉변을 당한 소향이 억센 팔에 얻어맞은 뺨을 부여잡으며 울상을 지었다.
“아파! 저 아줌마 갑자기 왜 저러는 거람? 병사는 오히려 내가 부르고 싶다고! 콩밥 먹고 싶어?”
씩씩거리며 중년 여성을 노려본 소향이 시안의 안색을 살핀다. 그나마 드러나 있는 눈동자조차 시안의 두 손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그 막막함이 소향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설마 너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시안의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온 작은 소리는 축제 분위기로 가득한 도시의 떠들썩함에 묻혀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바로 지척에서 귀를 기울이던 소향조차 듣지 못했을 정도다.
“여제님이 축제를 보러 나오셨대. 중앙 광장이다!”
누군가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 소리에 NPC들은 반응하지 않았으나 플레이어들은 달랐다. 그들은 연예인을 쫓는 골수팬처럼 비명을 지르며 중앙 광장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우와, 여제가 도대체 누구인데 사람들의 반응이 저런 거야?”
“보러 가자.”
질린다는 얼굴을 한 소향의 손목을 잡은 시안이 민족 대이동을 시작한 플레이어들의 뒤를 따라 중앙 광장으로 향했다.
다소 강압적인 태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소향은 마냥 좋다며 웃었다.
“이러고 있으니 데이트하는 것 같다.”
“…어휴.”
“아앗! 아니야. 말실수였어! 그러니 무언으로 손 놓지 말아줘! 내 손 돌려줘!”
언제나 활기찬 소향과 별 소득 없는 잡담을 나누다 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중앙 광장이 보이는 장소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다만 인파가 워낙 많아 중앙 광장까지 가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주위를 둘러보던 시안은 2층짜리 건물의 옥상으로 향했다.
어느 음식점의 야외 테라스로 운영되고 있던 옥상에는 시안과 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 상당수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간 시안은 비로소 원하는 바를 목격할 수 있었다.
저 멀리 중앙 광장의 분수 앞에 화사한 금발을 가진 미인 플레이어, 여제 이리나가 해바라기조차 부끄러워 고개를 숙일 만큼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모는 맨얼굴로 거리를 걸어도 남자들이 침을 흘리며 응시할 소향과 못지않은 수준이다.
“…오빠는 설마 저 여자가 보고 싶었던 거야? 부탁이니까 제발 아니라고 말해줘. 아니, 그래도 오빠가 남자라는 것을 알았으니 기뻐해야 하는 건가?”
유난히도 소향의 음성에 가시가 돋쳐 있다. 하지만 질투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화를 꾹 눌러 참는 모습이 눈에 띈다. 다만 복어처럼 볼이 빵빵해지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와아, 진짜 예쁜 여자네. 인형 같아. 사람들이 이렇게 몰려다니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해.”
내뱉는 대사 역시 국어책을 읽는 듯 톤이 딱딱하다.
“저 여자의 얼굴, 잘 봐둬.”
매정하게도 시안은 그런 소향을 도발하는 듯한 말을 내뱉었다. 질투에 미쳐 스스로의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도 그의 말을 따라 여제 이리나의 얼굴을 열심히 살폈다.
“오빠는 저런 얼굴이 취향이구나.”
사람들 틈에 파묻혀 사람 좋은 미소를 그리는 이리나를 보는 소향의 미소는 점점 썩어 문드러졌다.
소향이 사람을 잘 따르는 강아지 같은 인상이라면 이리나는 순한 양과도 같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 각자 성향은 다르지만 보기 드문 미인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미묘하게 굳어져 있던 소향의 표정은 이어지는 시안의 말을 듣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망가졌다.
“미르를 추락시키고 이향이를 그 몰골로 만든 장본인이야. 나와 이향이의 원수다.”
“…….”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작은 돌멩이 하나가 소향의 잔잔한 마음에 격한 파도를 일으켰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그녀의 모습을 한시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망막에 새겨 넣는 시안과 달리, 커다란 충격을 받은 소향이 겨우 입을 열었다.
“나, 전혀 모르고 있었어. 언니는 나한테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으니까. 도대체 1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 *
“한 방 거하게 얻어맞았는데 멍청하게 참고 있을 생각은 없어. 복수는 해줘야지.”
판테라에서의 짧았던 관광을 끝마치고 망가진 고블린 거점으로 돌아온 시안은 자신의 생각을 숨김없이 토로했다.
“복수라니, 어떻게 하려고? 찾아가서 죽이기라도 할 거야?”
쓰러진 통나무 위에 걸터앉은 채 험한 숲길을 걷느라 다소 거칠어진 숨을 다듬던 소향이 질문했다.
판테라에서 시안은 그녀가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때문에 토라진 소향의 음성은 제법 시무룩하다.
“아니, 죽이지 않을 거야.”
시안의 입에서 나온 간결한 대답은 그녀의 생각 범주를 초월해 있었다. 당장이라도 찾아가서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반복해 죽일 거라고 선언할 줄 알았건만. 의외로 그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말은 평화적이었다.
“오빠답지 않게 소극적이네. 어째서?”
“그렇게 극단적으로 움직여 봤자 내 정체만 들통 날 뿐이야. 그 대가로 엄청난 수의 플레이어들이 몰려와서 나한테 몰매를 놓겠지. 나는 목숨에 제한이 있는데 저 녀석은 제한이 없거든. 단순히 교환해서는 메리트가 없어.”
“경험치와 아이템을 빼앗을 수 있잖아.”
“잃어버린 경험치는 금방 복구할 수 있어. 그리고 저 녀석은 대기업 유성의 사장이 애지중지하는 외동딸이다. 잃어버린 장비 따위야 금방 복구할 수 있는 재력 또한 거지고 있어. 무의미한 수고일 뿐이야. 무엇보다 나는 그런 소심한 복수를 하기 위해 게임을 시작한 게 아니야.”
“그러면 어떻게 할 건데?”
올려다보는 소향의 눈동자에 복수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것만 같았다. 언제나 유쾌하고 남을 미워할 줄 모르는 그녀가 내뱉는 증오는 어색하면서도 선명하다.
“우선은 망가진 건물들을 수리하고 잃어버린 병력을 추가로 보충해야겠지.”
시스템 목록 중 건축과 이웃한 곳에 위치한 수리 명령어를 불러온 시안은 조속히 망가진 건물들을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얼마나 파괴되었느냐에 따라 수리비가 다르게 청구되었으나, 대부분의 건물이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파괴되었으므로 새로 짓는 것 못지않을 정도의 금액이 소모되었다. 붉은 오크의 전리품을 전부 넘겨주는 대가로 소향에게 받은 영혼 조각이 수리 작업으로 인해 전부 소모되고 말았다.
“덕분에 쓸데없는 지출이 생겼다고. 오늘의 원한은 일기장에 꼭 적어둘 테다.”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이곳에 없는 한 여성에게 저주의 말을 내뱉은 시안은 고블린들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어지간히도 운이 없었는지 소환된 고블린 전부가 일반 등급이었다.
최소 둘 정도의 네임드를 원했던 시안이 물에 빠진 생쥐처럼 축 처졌다.
하루 종일 걸은 까닭에 다리가 아프다고 칭얼거리는 그녀를 라임의 위에 태운 시안이 슬라임 거점이 있는 장소로 향했다. 건물 단계에서 손해를 본 것은 고블린뿐이지만 사망한 몬스터 중에는 슬라임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병력을 모아서 어떻게 할 건데? 몬스터들을 이용해서 공격할 거야?”
“죽이지 않는다고 했잖아. 이리나에 대해서는 한동안 잊어버려. 방치해 둘 거니까. 불쾌한 일이지만 그 녀석은 재능이 있어. 내가 딱히 개입하지 않는다면 PPO에서 그랬듯 어느덧 높은 곳에 올라가 있겠지.”
“어째서 가만히 놔두려는 거야. 원수 아니었어? 복수한다는 사람치고 오빠는 너무 태평해.”
보는 이의 속이 타들어갈 정도로 태연자약한 시안의 몫까지 대신 화를 내주겠다는 기세로 소향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도착한 슬라임 거점에서 새로운 슬라임을 소환하던 시안이 일자로 다물어져 있던 입을 열었다.
“낮은 곳에서 백날 떨어져 봤자 다치는 일은 드물어. 하지만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쉽게 치명상을 입게 되는 법이야. 자잘하게 공격해서 경계심을 높일 필요는 없지. 단 한 번. 이 정도면 이 녀석이 죽겠구나 싶을 정도까지 올라갔을 때 단 한 번을 떨어뜨리면 돼. …오옷! 네임드다.”
시안이 소환한 다섯 마리의 슬라임 중 한 마리가 희귀 등급의 푸른 가시 슬라임으로 탄생했다.
돌기로 인해 우둘투둘한 푸른 가시 슬라임의 머리를 쓰다듬은 시안은 휴식을 위해 그 위에 걸터앉았다. 돌기가 딱딱해서 탑승감은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얻어맞고 가만히 있는 것은 성미에 안 맞아. 어떻게든 한 대 때려줘야겠어. 녀석에게 스트레스성 원형 탈모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라도 병력을 잔뜩 만들어 인근에 있는 소규모 마을을 습격할 생각이야.”
“어째서 작은 마을을 습격하는 건데? 그게 그 여자에게 한 방 먹여주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건지 모르겠어.”
자신 있게 내뱉은 시안의 말에 숨겨져 있는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소향의 질문이 이어졌다. 설명이 부족한 감이 있었으므로 시안은 이어서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 여자는 순해빠진 척하지만 사실은 나서기를 좋아하고 남들 위에 서는 것을 좋아해. 레벨 랭킹에서 손해를 입으면서까지 조사단에 속한 것은 고통 받는 플레이어들을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명성을 얻기 위함일 거야. 명성이 높으면 작위를, 나아가서는 옥새를 얻을 수도 있거든.”
PAO에서 명예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단순히 NPC들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정도만이 아니라 각종 퀘스트의 기본조건이 되며 민심을 사고 귀족이 되며 최종적으로는 한 국가의 왕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리나는 효율적으로 명성을 모으는 방법을 알고 있다. PPO에서도 그녀만의 방식으로 제국의 황제가 되었으니 성공가도를 걷는 방법이라 증명된 길을 따라 걷는 것이나 진배가 없다.
때문에 시안은 그녀가 세운 계획의 일부를 망치는 것으로 복수의 서막을 열기로 결정 내렸다.
“그녀가 ‘완벽하게’처리했다고 선전한 고블린들이 날뛰면 자연히 그녀의 명성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어. 플레이어들이라면 모를까, NPC들은 그런 쪽에 민감하거든. 원래 모래성은 쌓기는 어려워도 허물기는 쉬운 법이야.”
시안의 설명을 들은 소향은 입을 다문 채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스스로가 선언했듯이 소향은 그리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다. 때문에 시안의 설명이 있더라도 곧장 ‘아, 그렇구나’하고 손뼉을 마주치지 못한다. 항상 고민을 반복하고 나서야 겨우 고개를 주억거리는 게 소향이라는 여인이다.
“게다가 마을을 습격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어.”
“아직도 또 있어? 하나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
아직 생각의 정리가 덜 된 소향이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시안은 봐주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마왕 후보야. 진정한 마왕으로 각성하기 위해서는 플레이어들로부터 공포를 갈취해야 해. 그리고 거점으로 이용되는 소규모 마을에는 적당한 수의 플레이어들이 주둔하고 있어. 이리나의 평판을 떨어뜨리고 나는 필요한 공포를 얻어 마왕이 되는 것으로 더욱 강해진다. 그야말로 일석이조지.”
“오빠, 혹시 우리는 NPC와도 싸워야 하는 거야?”
“마왕 후보니까.”
말은 그럴듯하게 했지만 결국 아무런 죄도 없는 NPC들을 죽이게 된다는 뜻과 동일하다.
사람들이 NPC를 대할 때 취하는 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NPC가 어디까지나 게임의 진행에 필요한 요소로서 만들어진 데이터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주장. 다른 하나는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며 감정을 가진 NPC 역시 사람과 같은 인권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시안의 경우 전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후자의 입장을 고수하는 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NPC를 도구로 취급하는 자들을 극도로 혐오한다.
만약 소향이 후자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몬스터로 하여금 마을을 공격하도록 명하고 NPC를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는 시안을 혐오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건…….”
그제야 사태의 중요성을 인지한 소향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갈팡질팡했다. 다이브형 가상현실 게임이 처음인 그녀는 NPC는 고사하고 플레이어조차 죽여 본 경험이 없다.
아직 NPC를 대하는 태도를 결정하지는 못했으나 마음이 약하고 선한 성품을 가진 그녀가 어떤 입장을 고수하게 될 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렇다면 필드에 나와 있는 플레이어만 골라서 쓰러뜨리면 되는 거 아니야? 그것만으로도 아직 고블린들이 건재하다는 것은 알릴 수 있잖아.”
그녀가 나름대로의 절충안을 내놓았으나 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라고 해서 그 방법을 떠올리지 못한 것도 아니다. 효율이 극도로 떨어진다.
“너는 PAO의 필드가 얼마나 넓다고 생각하는 거야? 물론 그만큼 플레이어의 수도 많기는 하지만 필드에서 플레이어와 조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에 의지해야 해. 여러 모로 수고에 비해 보상이 확실하지 않은 방법이야.”
“그러면 마을에 가서 유인해 오는 방법은? 오빠가 귀찮다면 내가 할게. 사냥을 가자고 말한 다음 고블린들이 잠복하고 있는 곳으로 데리고 오면…….”
“그래봤자 몇 번이야. 한 세 번 정도 하면 플레이어 중 몬스터와 내통하는 자가 있다고 소문이 쫙 퍼질 걸. 우리는 아직 성장 단계에 있어. 그 정도로 어그로가 끌려서는 곤란해.”
“…….”
말을 잃은 그녀는 멍하니 자신의 발등만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작은 두통을 느낀 시안이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게임을 즐기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른 법이야. 누구는 아바타의 성장을 즐기고 누구는 미지의 세계를 모험하는 것을 즐겨. NPC를 사람처럼 취급하는 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어. 나는 후자일 뿐이야. 물론 너에게 강요할 마음은 없어. NPC와 싸우는 것이 싫다면 너는 근처에서 사냥을 하고 있어도 좋아.”
“언니는 어땠는데?”
그녀가 말하는 언니란 미르의 일원이자 시안의 유일한 라이벌인 이향이다.
“…녀석은 전자였어.”
다름 아닌 가족의 일이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시안이 진실을 고했다.
지키기로 다짐한 NPC를 위해서라면 스스로의 목숨을 내던지는 것조차 망설이지 않았던 옛 친구를 생각하며 시안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그녀가 보여주었던 마지막 표정이, 5년간 곁에 있으면 본 적 없는 그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잘 모르겠어. 나는 지금까지 NPC를 만나 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오빠가 하자는 대로 할래.”
눈을 뜨면 언제나 그랬듯 근심 걱정 하나 없이 만개한 소향의 미소가 보였다.
사실상 시안의 병력 중에서 본인을 제외하면 가장 강한 인물이 소향이다. 그녀가 빠지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 다소 불안한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때문에 그녀의 수락은 풍부한 안심감을 안겨주었다.
“그래, 게임은 즐겨야지. 머리 아픈 일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만으로도 족해. 전에 내가 말했나? 게임과 현실을 철저하게 분리하라고. 게임은 게임. 현실은 현실. 그걸 실패하면 언젠가 굉장히 곤란한 일을 겪게 될 거야.”
그렇게 말하는 시안은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말투와 표정에서 실패의 경험을 읽어낸 소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의미에서 병력을 조금 더 키우고 싶은데, 슬슬 고블린이나 슬라임 말고 다른 병과도 넣고 싶어. 네 생각은 어때?”
억지로 분위기를 밝게 전환하기 위한 시안의 노력이 이어졌다.
상당히 소모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안의 수중에는 제법 많은 영혼 조각이 남아 있었다. 민첩한 몸놀림을 자랑하는 소향이 팀에 합류하면서 전보다 더 많은 몬스터를 사냥할 수 있게 된 것이 주된 이유다.
“음… 슬라임은 어디까지나 보조해 주는 역할이고. 고블린은 덩치가 작아서 귀엽잖아?”
“그 못생긴 것들이 귀엽게 보인다면 너는 자신의 시력에 이상이 있음을 의심해 봐야 할 거야. 좋은 안과를 소개시켜 주지.”
“이상하네. 내 눈에는 귀엽게 보이는데… 어쨌든 작고 민첩한 고블린들이 있으니 이번에는 크고 힘이 강한 몬스터를 소환하는 것이 어때? 그렇지 않아도 요즘 그런 몬스터를 사냥하고 있잖아.”
귀엽게 웃는 소향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단번에 파악한 시안이 턱을 괴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오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