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과거의 영웅은 마왕이 되었다
16화
이른 아침부터 소율의 스마트 폰이 요란스럽게 울어 댔다. 간밤에 늦게까지 게임에 매진한 탓에 수면이 부족했던 소율은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며 스마트 폰의 액정을 확인했다.
“…뭐야, 모르는 번호잖아.”
모르는 번호로부터 온 전화는 받지 않는다는 신념에 따라 스마트 폰을 방치한 소율은 재차 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앞으로 두 시간 후면 알람이 울릴 테니 그때 일어날 심산이었다. 다행이도 벨소리는 금방 끊어졌다.
하지만 그가 재차 잠에 빠져들기도 전에 두 번째로 벨소리가 울렸다. 잠을 자는데 소리가 방해였으므로 통화 거부 버튼을 누르려던 소율이었으나, 액정에 나타난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진이향>
그 이름 석 자가 몽롱하던 정신을 단번에 각성시켰다. 황급히 몸을 일으킨 소율은 두 눈을 비벼대더니 다시 한 번 액정을 응시했다. 하지만 진이향이라는 이름이 다른 것으로 변하는 일은 없었다.
꿈이 아니다. 그렇게 판단한 소율은 두 차례 호흡을 가다듬은 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 여보세요.”
[오빠아!]
“…뭐야, 너냐. 부탁이니 헷갈리게 하지 말아줘.”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떠 있던 기분을 단번에 식어버리게 만들었다. 차갑고 무뚝뚝한 이향의 음성을 기대했건만 언제나 필요 이상으로 활기가 넘치는 소향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설마 조금 전의 전화도 너였던 거야?”
[맞아. 어째서 받지 않는 거야? 언니한테 사정사정해서 번호를 알아낸 거였는데. 지금 언니가 출근해야 하니까 빨리 전화기 내놓으라고 난리야!]
“…그러냐. 일단 내가 다시 걸도록 할게.”
순간적으로 이향을 바꿔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왔으나 관두었다. 어차피 그녀는 통화를 거부할 것이다.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통화를 종료한 소율은 조금 전에 걸려온 모르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소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를 한 거야?”
[엄청 큰일 났어. 이상하게 눈이 일찍 뜨여서 오빠를 기다릴 겸 게임에 접속해서 요리를 만들려고 했는데…….]
“관둬. 요리 스킬도 없는데 요리를 했다가는 식재료와 수고를 낭비할 뿐이야.”
[에잇! 말 끊지 말아줘!]
소향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평소 소율에게 미움 받는 것을 두려워해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이는 그녀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난폭함이다.
화들짝 놀란 소율이 스마트 폰을 든 채로 눈만 깜빡거렸다.
[으아아, 미안해. 소리 질러서 미안해. 하지만 정말 중요한 일이란 말이야.]
곧장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녀가 이렇게까지 하며 전하고자 하는 중요한 일이라는 것에 흥미가 생겼다.
“나도 미안. 말 끊지 않을 테니까 본론을 이야기해줘.”
[아, 응. 그러니까 평소보다 게임에 일찍 접속했는데 거점의 서쪽에서 연기가 나는 거야. 무슨 일인가 싶어서 가봤는데, 고블린 거점이 초토화되어 있었어.]
“…정말이야?”
[이런 거짓말해서 뭐하겠다고. 오늘이 만우절도 아니고. 설사 맞다 해도 나는 오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아.]
“알겠어. 이따 보자.”
그녀의 인사를 듣지도 않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소율은 거칠게 스마트 폰을 침대 위로 던져버렸다.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머리가 어지럽다. 동시에 스트레스가 치밀어 올랐다.
거실로 가서 냉장고에 있던 차가운 물로 달아오른 속을 달랜 시안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냉장고 문을 열어둔 채 소율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플레이어들의 습격은 얼마든지 예상하고 있었다. 고블린들이 플레이어들을 습격한 이상 모험가 조합은 조사단을 파견했을 거야. 상정범위 내였어. 그래서 고블린들을 적게는 2개 분대, 많게는 1개 소대 단위로 뭉쳐 다니도록 지시했다. 조사단의 구성은 1개 팀과 조합원 1인. 많아봐야 최대 6인이다. 최소 열 마리나 되는 고블린들을 쓰러뜨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전기세 네가 내냐!”
“끄악!”
마침 물을 마시기 위해 방에서 나온 선율이 냉장고가 문을 닫아달라고 부르는 노래에 취해 있는 소율의 등짝에 강한 스매시를 가하는 것으로 길었던 상념은 끝을 고했다.
* * *
로그인을 한 시안은 오매불망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소향과 만날 수 있었다. 정든 고블린들이 대량으로 몰살당한 것이 슬펐던 것인지 그녀의 눈가가 조금은 촉촉해져 있었다.
시안을 기다리고 있던 이는 소향뿐만이 아니었다. 로그인과 동시에 우후죽순으로 나타난 시스템 메시지가 얼마나 열렬하게 그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단락적으로 보여주었다.
<고블린 거점이 플레이어들에게 공략당했습니다. 세 개의 저택과 고블린 훈련소, 칼을 가진 고블린 석상이 파괴되었습니다.>
<습격으로 인해 휘하의 고블린이 10마리, 슬라임이 5마리 사망했습니다. 부대 목록을 확인해주세요.>
<전투의 패배로 인해 휘하 병력의 사기가 20%만큼 하락했습니다.>
<고블린을 위한 거점을 수리해주세요. 돌아갈 곳을 잃은 고블린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고블린들의 전투력이 20%만큼 하락합니다.>
“이 무슨…….”
메시지를 확인하는 시안의 눈동자가 방향성을 잃고 마구잡이로 떨렸다. 이렇게 잘 정돈되어 피해를 보고받으니 단순히 병력을 잃은 것 이상으로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뼈아프게 느낄 수 있었다.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부대 목록을 확인한 시안이 소리 없는 절규를 내질렀다. 고블린 열과 슬라임 다섯. 애지중지 키운 몬스터가 무려 열다섯이나 사망했다. 이는 시안이 가진 총 병력의 1/4에 해당하는 숫자다.
“적어도 셋 이상의 랭커가 저지른 짓이다.”
시안은 확신했다. 그가 말하는 랭커란 PAO의 선두를 칭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PPO에서 활약한 순위권의 괴물들을 칭하는 것이다.
그의 휘하에 있는 몬스터들은 각종 건물들에서 어빌리티 보정을 받는데다가 장비까지 갖추고 있다. 심지어 몬스터는 레벨을 올릴 수 없다는 상식까지 벗어나 있는 까닭에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다섯의 몬스터가 전멸을 당했다. 말인 즉 그 자존심 강한 괴물들이 셋 이상 모여 일을 저질렀다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한참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시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역시 한 방 먹여주지 않고는 성이 풀리지 않겠는데.”
“어떻게 하려고?”
잔뜩 풀이 죽어 있던 소향이 그를 따라 일어서서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물었다.
“이만한 업적이다. 아마 판테라의 NPC들 사이에서 소문이 났을 거야. 그리고 나는 PPO에서 유명했던 놈들의 이름과 얼굴을 꿰차고 있어. 찾아내서 죽인 다음 경험치와 아이템을 시원하게 털어먹어야지. 그러니까 우선 대장간으로 가자.”
“어째서?”
의문을 표하는 소향의 손목을 잡은 시안이 빠른 걸음으로 이동을 개시했다.
단순히 손을 잡는다는 행위에 질문들을 죄다 날려버린 소향이 상기된 얼굴로 헤실헤실 웃었다.
대장간에 도작한 시안이 행한 일은 가면을 만드는 것이었다. 대장장이 고블린에게 공구를 빌려 손수 나무를 깎았다. 게으른 대장장이에게 제작을 요청했다가는 기다리다 속이 터져버릴지도 모른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목재 가면이 완성되었다. 비록 스킬을 보유하지 못해 가면은 방어구가 아닌 단순 장신구로 취급되었지만 얼굴을 가린다는 중요한 역할만 해주면 된다.
“가면은 왜 쓰는 거야?”
“맨얼굴로 갔다간 몰매를 맞고 리타이어 할 만큼 내가 유명인이기 때문이야.”
다소 측은한 대답을 한 시안이 가면을 써서 얼굴을 가렸다.
이어서 교역소에 들린 그는 가진 영혼 조각 중 일부를 동전으로 환전했다. 몇 개의 은화가 그의 손 위에서 짤랑거렸다. 1할의 수수료가 생각 이상으로 묵직하다.
“이게 일반 플레이어들이 사용하는 동전이야? 처음 본다. 뭔가 신기해.”
“너도 조금쯤은 환전해 두는 것이 좋아. 제법 쓸 만한 무언가를 발견할지도 모르니까.”
“알겠어.”
그의 말에 동의한 소향이 가진 금액의 절반을 환전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시안은 소향과 함께 여정에 올랐다. 목적지는 별이 지는 숲의 서쪽에 위치한 대도시, 판테라다.
* * *
“우와아…….”
두 남녀는 꼬박 하루를 걸려 소도시 판테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PPO를 즐긴 시안과 달리 난생 처음 도시를 목격한 소율은 서울에 갓 상경한 섬마을 주민처럼 눈이 빠지도록 연신 감탄을 터뜨렸다.
도시에 오는 것은 시안 역시 굉장히 오래간만이다. 습격자의 정체를 확인한다는 중요한 목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설레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판테라는 그야말로 판타지에 딱 어울리는 중세의 이미지를 갖추고 있다. 길게 뻗은 벽돌 길의 위로 중세풍의 옷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그들 사이에서 갑옷을 입거나 무기를 갖춘 플레이어들이 다수 눈에 띄었다.
좌우에는 목재로 만들어진 건물들이 즐비해 있으며 그곳에서 주민들의 삶을 훔쳐볼 수 있었다. 마치 중세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온 것만 같다.
심지어 타이밍 좋게 축제 기간에 찾아온 것인지 여기저기 오락거리가 가득하다. 분수대 앞에서 음유시인이 악기를 연주하고 서커스단의 공연이 한 구석에서 개최되었다. 불쇼를 하는 남자는 소향뿐만 아니라 시안의 이목마저도 사로잡았다.
대로를 벗어나니 커다란 규모의 시장이 나타났다. 게임이나 현실이나 시장바닥이 시끄러운 것은 매한가지였다. 손님을 유치하기 위해 소리를 질러대는 상인들과 진귀한 물건들에 관심을 보이는 손님들이 내는 소리가 요란한 하모니를 이룬다.
“오빠, 저것 좀 봐. 포레스트 보어 구이래. 아앗! 저 들풀사슴 꼬치구이도 맛있어 보여!”
배신자로 통하는 미르의 일원이기에 얼굴을 가려야 하는 시안과 달리 감출 필요가 없어 맨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소향이 밝게 웃으며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적당히 해. 너 판테라에 오고 나서부터 먹을 거에만 엄청 돈 쓰고 있다는 거 알아? 그러다 거지가 될 걸.”
“괜찮아. 돈은 쓰라고 있는 거니까. 모아두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야.”
“그 지론에는 동의한다만, 아무래도 모르는 것 같으니 하나 알려주지. PAO에서는 포만감을 초과하는 식사를 반복하면 살이 찐다. 즉 네 체형이 뒤룩뒤룩해진다는 소리다. 살이 찌면 그만큼 몸놀림이 무거워져. 너처럼 민첩성을 위주로 싸우는 검사들에게는 치명적이야.”
“…그런 것까지 현실적일 필요는 없는데. 아아, 모처럼 건량이 아니라 맛있는 간식거리가 쌓여 있는데 구경만 해야 한다니, 이건 고문이야!”
묵직한 정신공격 한 방으로 소향을 격침시킨 시안은 비로소 자신의 목적을 위한 행동을 개시했다.
중년의 여성이 운영하고 있는 노점상으로 향한 시안은 사과를 닮은 붉은 과일 하나를 집어 들고 돈을 지불했다.
NPC인 중년의 여성이 감사 인사와 함께 잔돈을 주었으나 시안은 받지 않았다.
“그건 팁이야, 아줌마. 그보다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가르쳐 주겠어?”
“오호호, 너는 외지에서 왔니? 어쩔 수 없네. 내가 아는 거라면 얼마든지 알려줄게.”
구매한 열매를 다섯 개는 살 수 있는 만큼의 잔돈을 주머니에 넣은 중년의 여성은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것처럼 웃으며 말했다. 과연 돈을 지불하지 않았어도 이런 태도를 보였을까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가면의 밑 부분을 살짝 들어 올려 과일을 한 입 베어 물은 시안이 혀를 내밀어 입맛을 다셨다.
“맛있네, 이거.”
“플로네트라고 한단다. 하나 더 먹어도 좋아.”
“음, 고마워. 하지만 내가 알고 싶은 건 그게 아니야. 얼마 전 별이 지는 숲에서 발생한 이변에 대해 알고 있어?”
시안이 열매 하나를 소향에게 던져주며 말했다.
“아아, 혹시 별이 지는 숲에 나타났다는 이상하게 강한 고블린들을 이야기하는 거니? 모험가 분들이 하도 떠들어 대서 상인인 나조차도 알고 있단다. 덕분에 며칠간 판테라가 떠들썩했어. 하지만 훌륭하신 모험가분들이 해결해 주셨단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수다스러운 성격인지 중년의 여자는 시안이 조금 운을 떼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열심히 이야기를 풀었다. 심지어 제대로 하려고 마음먹은 것인지 의자까지 가지고 와서 자리를 잡는다.
“별이 지는 숲이라 하면 초입 부분에 고블린과 슬라임이 있어 위험하지만 각종 희귀한 약초와 버섯, 열매 등이 풍부한 곳이란다. 그런데 변종 고블린이 나타났다는 소식과 함께 모험가들의 발길이 뚝 끊겨서 이래저래 걱정이 많았어.”
“음, 그렇구만.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적당한 맞장구는 화자의 기분을 들뜨게 한다. 그리고 들뜬 기분은 무의식적으로 심층 부분의 것을 포함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게 만든다.
“다행이도 뛰어난 실력을 가진 모험가분들이 변종 고블린들을 싹 정리해 주셨단다. 동행한 모험가 조합의 직원이 말하기를, 살아생전 그분들보다 뛰어난 모험가는 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고. 고작 넷이서 열 마리의 변종 고블린과 그들이 사육하는 슬라임 다섯을 쓰러뜨렸다고 소문이 파다해. 참으로 영웅적인 면모라 생각하지 않니?”
‘내 고블린들을 사냥하고 어지간히도 많은 명예를 모은 모양이군. 그 명예, 바닥까지 떨어뜨려주마.’
겉으로는 중년 여성의 말에 공감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는 등 과장된 반응을 보이는 시안이었으나, 속마음은 들끓는 용암과도 같았다.
“그런데 그 모험가들의 이름은 알고 있어?”
“음… 확실히 들은 것 같기는 한데 잘 생각이 나지 않네. 무언가 계기만 있으면 떠오를 것 같기도 하고…….”
“…이 플로트인가 뭔가 하는 열매를 하나 더 줘. 잔돈은 필요 없어. 돈 귀신 같으니라고.”
“고맙구나. 덕분에 기억이 났어. 검을 귀신같이 쓰는 모험가와 치유 마법이 기가 막힌 치유사가 있었어. 이름은 모르겠구나. 그리고 마브르인가 하는 이름을 가진 모험가도 있었지. 그리고 그들의 리더가 이리나라는 모험가란다. 굉장히 아름다운 여자라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마치 이 아줌마의 소싯적을 보는 느낌이었단다.”
비싼 정보료를 지불한 효과는 톡톡히 있었다. 그녀는 시안의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었다. 다만 너무 잘 긁어줘서 문제였다.
“…지금 뭐라고 했어?”
“응? 뭐가 말이니?”
“마지막에 나온 그 리더라는 여자의 이름말이야. 다시 말해줘.”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팀의 리더 이름은 이리나였단다. 확실히 다른 모험가들은 그녀를 여제라 칭하더구나.”
16화
이른 아침부터 소율의 스마트 폰이 요란스럽게 울어 댔다. 간밤에 늦게까지 게임에 매진한 탓에 수면이 부족했던 소율은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며 스마트 폰의 액정을 확인했다.
“…뭐야, 모르는 번호잖아.”
모르는 번호로부터 온 전화는 받지 않는다는 신념에 따라 스마트 폰을 방치한 소율은 재차 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앞으로 두 시간 후면 알람이 울릴 테니 그때 일어날 심산이었다. 다행이도 벨소리는 금방 끊어졌다.
하지만 그가 재차 잠에 빠져들기도 전에 두 번째로 벨소리가 울렸다. 잠을 자는데 소리가 방해였으므로 통화 거부 버튼을 누르려던 소율이었으나, 액정에 나타난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진이향>
그 이름 석 자가 몽롱하던 정신을 단번에 각성시켰다. 황급히 몸을 일으킨 소율은 두 눈을 비벼대더니 다시 한 번 액정을 응시했다. 하지만 진이향이라는 이름이 다른 것으로 변하는 일은 없었다.
꿈이 아니다. 그렇게 판단한 소율은 두 차례 호흡을 가다듬은 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 여보세요.”
[오빠아!]
“…뭐야, 너냐. 부탁이니 헷갈리게 하지 말아줘.”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떠 있던 기분을 단번에 식어버리게 만들었다. 차갑고 무뚝뚝한 이향의 음성을 기대했건만 언제나 필요 이상으로 활기가 넘치는 소향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설마 조금 전의 전화도 너였던 거야?”
[맞아. 어째서 받지 않는 거야? 언니한테 사정사정해서 번호를 알아낸 거였는데. 지금 언니가 출근해야 하니까 빨리 전화기 내놓으라고 난리야!]
“…그러냐. 일단 내가 다시 걸도록 할게.”
순간적으로 이향을 바꿔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왔으나 관두었다. 어차피 그녀는 통화를 거부할 것이다.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통화를 종료한 소율은 조금 전에 걸려온 모르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소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를 한 거야?”
[엄청 큰일 났어. 이상하게 눈이 일찍 뜨여서 오빠를 기다릴 겸 게임에 접속해서 요리를 만들려고 했는데…….]
“관둬. 요리 스킬도 없는데 요리를 했다가는 식재료와 수고를 낭비할 뿐이야.”
[에잇! 말 끊지 말아줘!]
소향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평소 소율에게 미움 받는 것을 두려워해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이는 그녀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난폭함이다.
화들짝 놀란 소율이 스마트 폰을 든 채로 눈만 깜빡거렸다.
[으아아, 미안해. 소리 질러서 미안해. 하지만 정말 중요한 일이란 말이야.]
곧장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녀가 이렇게까지 하며 전하고자 하는 중요한 일이라는 것에 흥미가 생겼다.
“나도 미안. 말 끊지 않을 테니까 본론을 이야기해줘.”
[아, 응. 그러니까 평소보다 게임에 일찍 접속했는데 거점의 서쪽에서 연기가 나는 거야. 무슨 일인가 싶어서 가봤는데, 고블린 거점이 초토화되어 있었어.]
“…정말이야?”
[이런 거짓말해서 뭐하겠다고. 오늘이 만우절도 아니고. 설사 맞다 해도 나는 오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아.]
“알겠어. 이따 보자.”
그녀의 인사를 듣지도 않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소율은 거칠게 스마트 폰을 침대 위로 던져버렸다.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머리가 어지럽다. 동시에 스트레스가 치밀어 올랐다.
거실로 가서 냉장고에 있던 차가운 물로 달아오른 속을 달랜 시안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냉장고 문을 열어둔 채 소율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플레이어들의 습격은 얼마든지 예상하고 있었다. 고블린들이 플레이어들을 습격한 이상 모험가 조합은 조사단을 파견했을 거야. 상정범위 내였어. 그래서 고블린들을 적게는 2개 분대, 많게는 1개 소대 단위로 뭉쳐 다니도록 지시했다. 조사단의 구성은 1개 팀과 조합원 1인. 많아봐야 최대 6인이다. 최소 열 마리나 되는 고블린들을 쓰러뜨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전기세 네가 내냐!”
“끄악!”
마침 물을 마시기 위해 방에서 나온 선율이 냉장고가 문을 닫아달라고 부르는 노래에 취해 있는 소율의 등짝에 강한 스매시를 가하는 것으로 길었던 상념은 끝을 고했다.
* * *
로그인을 한 시안은 오매불망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소향과 만날 수 있었다. 정든 고블린들이 대량으로 몰살당한 것이 슬펐던 것인지 그녀의 눈가가 조금은 촉촉해져 있었다.
시안을 기다리고 있던 이는 소향뿐만이 아니었다. 로그인과 동시에 우후죽순으로 나타난 시스템 메시지가 얼마나 열렬하게 그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단락적으로 보여주었다.
<고블린 거점이 플레이어들에게 공략당했습니다. 세 개의 저택과 고블린 훈련소, 칼을 가진 고블린 석상이 파괴되었습니다.>
<습격으로 인해 휘하의 고블린이 10마리, 슬라임이 5마리 사망했습니다. 부대 목록을 확인해주세요.>
<전투의 패배로 인해 휘하 병력의 사기가 20%만큼 하락했습니다.>
<고블린을 위한 거점을 수리해주세요. 돌아갈 곳을 잃은 고블린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고블린들의 전투력이 20%만큼 하락합니다.>
“이 무슨…….”
메시지를 확인하는 시안의 눈동자가 방향성을 잃고 마구잡이로 떨렸다. 이렇게 잘 정돈되어 피해를 보고받으니 단순히 병력을 잃은 것 이상으로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뼈아프게 느낄 수 있었다.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부대 목록을 확인한 시안이 소리 없는 절규를 내질렀다. 고블린 열과 슬라임 다섯. 애지중지 키운 몬스터가 무려 열다섯이나 사망했다. 이는 시안이 가진 총 병력의 1/4에 해당하는 숫자다.
“적어도 셋 이상의 랭커가 저지른 짓이다.”
시안은 확신했다. 그가 말하는 랭커란 PAO의 선두를 칭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PPO에서 활약한 순위권의 괴물들을 칭하는 것이다.
그의 휘하에 있는 몬스터들은 각종 건물들에서 어빌리티 보정을 받는데다가 장비까지 갖추고 있다. 심지어 몬스터는 레벨을 올릴 수 없다는 상식까지 벗어나 있는 까닭에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다섯의 몬스터가 전멸을 당했다. 말인 즉 그 자존심 강한 괴물들이 셋 이상 모여 일을 저질렀다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한참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시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역시 한 방 먹여주지 않고는 성이 풀리지 않겠는데.”
“어떻게 하려고?”
잔뜩 풀이 죽어 있던 소향이 그를 따라 일어서서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물었다.
“이만한 업적이다. 아마 판테라의 NPC들 사이에서 소문이 났을 거야. 그리고 나는 PPO에서 유명했던 놈들의 이름과 얼굴을 꿰차고 있어. 찾아내서 죽인 다음 경험치와 아이템을 시원하게 털어먹어야지. 그러니까 우선 대장간으로 가자.”
“어째서?”
의문을 표하는 소향의 손목을 잡은 시안이 빠른 걸음으로 이동을 개시했다.
단순히 손을 잡는다는 행위에 질문들을 죄다 날려버린 소향이 상기된 얼굴로 헤실헤실 웃었다.
대장간에 도작한 시안이 행한 일은 가면을 만드는 것이었다. 대장장이 고블린에게 공구를 빌려 손수 나무를 깎았다. 게으른 대장장이에게 제작을 요청했다가는 기다리다 속이 터져버릴지도 모른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목재 가면이 완성되었다. 비록 스킬을 보유하지 못해 가면은 방어구가 아닌 단순 장신구로 취급되었지만 얼굴을 가린다는 중요한 역할만 해주면 된다.
“가면은 왜 쓰는 거야?”
“맨얼굴로 갔다간 몰매를 맞고 리타이어 할 만큼 내가 유명인이기 때문이야.”
다소 측은한 대답을 한 시안이 가면을 써서 얼굴을 가렸다.
이어서 교역소에 들린 그는 가진 영혼 조각 중 일부를 동전으로 환전했다. 몇 개의 은화가 그의 손 위에서 짤랑거렸다. 1할의 수수료가 생각 이상으로 묵직하다.
“이게 일반 플레이어들이 사용하는 동전이야? 처음 본다. 뭔가 신기해.”
“너도 조금쯤은 환전해 두는 것이 좋아. 제법 쓸 만한 무언가를 발견할지도 모르니까.”
“알겠어.”
그의 말에 동의한 소향이 가진 금액의 절반을 환전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시안은 소향과 함께 여정에 올랐다. 목적지는 별이 지는 숲의 서쪽에 위치한 대도시, 판테라다.
* * *
“우와아…….”
두 남녀는 꼬박 하루를 걸려 소도시 판테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PPO를 즐긴 시안과 달리 난생 처음 도시를 목격한 소율은 서울에 갓 상경한 섬마을 주민처럼 눈이 빠지도록 연신 감탄을 터뜨렸다.
도시에 오는 것은 시안 역시 굉장히 오래간만이다. 습격자의 정체를 확인한다는 중요한 목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설레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판테라는 그야말로 판타지에 딱 어울리는 중세의 이미지를 갖추고 있다. 길게 뻗은 벽돌 길의 위로 중세풍의 옷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그들 사이에서 갑옷을 입거나 무기를 갖춘 플레이어들이 다수 눈에 띄었다.
좌우에는 목재로 만들어진 건물들이 즐비해 있으며 그곳에서 주민들의 삶을 훔쳐볼 수 있었다. 마치 중세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온 것만 같다.
심지어 타이밍 좋게 축제 기간에 찾아온 것인지 여기저기 오락거리가 가득하다. 분수대 앞에서 음유시인이 악기를 연주하고 서커스단의 공연이 한 구석에서 개최되었다. 불쇼를 하는 남자는 소향뿐만 아니라 시안의 이목마저도 사로잡았다.
대로를 벗어나니 커다란 규모의 시장이 나타났다. 게임이나 현실이나 시장바닥이 시끄러운 것은 매한가지였다. 손님을 유치하기 위해 소리를 질러대는 상인들과 진귀한 물건들에 관심을 보이는 손님들이 내는 소리가 요란한 하모니를 이룬다.
“오빠, 저것 좀 봐. 포레스트 보어 구이래. 아앗! 저 들풀사슴 꼬치구이도 맛있어 보여!”
배신자로 통하는 미르의 일원이기에 얼굴을 가려야 하는 시안과 달리 감출 필요가 없어 맨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소향이 밝게 웃으며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적당히 해. 너 판테라에 오고 나서부터 먹을 거에만 엄청 돈 쓰고 있다는 거 알아? 그러다 거지가 될 걸.”
“괜찮아. 돈은 쓰라고 있는 거니까. 모아두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야.”
“그 지론에는 동의한다만, 아무래도 모르는 것 같으니 하나 알려주지. PAO에서는 포만감을 초과하는 식사를 반복하면 살이 찐다. 즉 네 체형이 뒤룩뒤룩해진다는 소리다. 살이 찌면 그만큼 몸놀림이 무거워져. 너처럼 민첩성을 위주로 싸우는 검사들에게는 치명적이야.”
“…그런 것까지 현실적일 필요는 없는데. 아아, 모처럼 건량이 아니라 맛있는 간식거리가 쌓여 있는데 구경만 해야 한다니, 이건 고문이야!”
묵직한 정신공격 한 방으로 소향을 격침시킨 시안은 비로소 자신의 목적을 위한 행동을 개시했다.
중년의 여성이 운영하고 있는 노점상으로 향한 시안은 사과를 닮은 붉은 과일 하나를 집어 들고 돈을 지불했다.
NPC인 중년의 여성이 감사 인사와 함께 잔돈을 주었으나 시안은 받지 않았다.
“그건 팁이야, 아줌마. 그보다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가르쳐 주겠어?”
“오호호, 너는 외지에서 왔니? 어쩔 수 없네. 내가 아는 거라면 얼마든지 알려줄게.”
구매한 열매를 다섯 개는 살 수 있는 만큼의 잔돈을 주머니에 넣은 중년의 여성은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것처럼 웃으며 말했다. 과연 돈을 지불하지 않았어도 이런 태도를 보였을까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가면의 밑 부분을 살짝 들어 올려 과일을 한 입 베어 물은 시안이 혀를 내밀어 입맛을 다셨다.
“맛있네, 이거.”
“플로네트라고 한단다. 하나 더 먹어도 좋아.”
“음, 고마워. 하지만 내가 알고 싶은 건 그게 아니야. 얼마 전 별이 지는 숲에서 발생한 이변에 대해 알고 있어?”
시안이 열매 하나를 소향에게 던져주며 말했다.
“아아, 혹시 별이 지는 숲에 나타났다는 이상하게 강한 고블린들을 이야기하는 거니? 모험가 분들이 하도 떠들어 대서 상인인 나조차도 알고 있단다. 덕분에 며칠간 판테라가 떠들썩했어. 하지만 훌륭하신 모험가분들이 해결해 주셨단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수다스러운 성격인지 중년의 여자는 시안이 조금 운을 떼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열심히 이야기를 풀었다. 심지어 제대로 하려고 마음먹은 것인지 의자까지 가지고 와서 자리를 잡는다.
“별이 지는 숲이라 하면 초입 부분에 고블린과 슬라임이 있어 위험하지만 각종 희귀한 약초와 버섯, 열매 등이 풍부한 곳이란다. 그런데 변종 고블린이 나타났다는 소식과 함께 모험가들의 발길이 뚝 끊겨서 이래저래 걱정이 많았어.”
“음, 그렇구만.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적당한 맞장구는 화자의 기분을 들뜨게 한다. 그리고 들뜬 기분은 무의식적으로 심층 부분의 것을 포함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게 만든다.
“다행이도 뛰어난 실력을 가진 모험가분들이 변종 고블린들을 싹 정리해 주셨단다. 동행한 모험가 조합의 직원이 말하기를, 살아생전 그분들보다 뛰어난 모험가는 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고. 고작 넷이서 열 마리의 변종 고블린과 그들이 사육하는 슬라임 다섯을 쓰러뜨렸다고 소문이 파다해. 참으로 영웅적인 면모라 생각하지 않니?”
‘내 고블린들을 사냥하고 어지간히도 많은 명예를 모은 모양이군. 그 명예, 바닥까지 떨어뜨려주마.’
겉으로는 중년 여성의 말에 공감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는 등 과장된 반응을 보이는 시안이었으나, 속마음은 들끓는 용암과도 같았다.
“그런데 그 모험가들의 이름은 알고 있어?”
“음… 확실히 들은 것 같기는 한데 잘 생각이 나지 않네. 무언가 계기만 있으면 떠오를 것 같기도 하고…….”
“…이 플로트인가 뭔가 하는 열매를 하나 더 줘. 잔돈은 필요 없어. 돈 귀신 같으니라고.”
“고맙구나. 덕분에 기억이 났어. 검을 귀신같이 쓰는 모험가와 치유 마법이 기가 막힌 치유사가 있었어. 이름은 모르겠구나. 그리고 마브르인가 하는 이름을 가진 모험가도 있었지. 그리고 그들의 리더가 이리나라는 모험가란다. 굉장히 아름다운 여자라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마치 이 아줌마의 소싯적을 보는 느낌이었단다.”
비싼 정보료를 지불한 효과는 톡톡히 있었다. 그녀는 시안의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었다. 다만 너무 잘 긁어줘서 문제였다.
“…지금 뭐라고 했어?”
“응? 뭐가 말이니?”
“마지막에 나온 그 리더라는 여자의 이름말이야. 다시 말해줘.”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팀의 리더 이름은 이리나였단다. 확실히 다른 모험가들은 그녀를 여제라 칭하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