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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영웅은 마왕이 되었다
15화


Chapter 3 ― 여제 등장


약 5년간 서비스를 한 세계최초의 다이브형 가상현실 게임 PPO. 당시 기술력의 한계로 인해 7천만 명이라는 한정적인 인원밖에 수용하지 못했지만 팬들의 숫자는 무려 10억 명에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실력이 있는 자, 많은 재화를 가진 자, 권력의 위에 선 자 등 여러 가지 분야에서 이름을 날린 유명인들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비록 최후의 순간 추락했다고 하지만 PVP랭킹 1위이자 최강의 팀 미르의 시안과 이향이 그 대표적인 예시이다.
물론 미르 팀을 제하더라도 수많은 유명인들을 낳은 것이 PPO라는 게임이다.
그리고 여제는 PPO가 낳은 유명인 중 하나에 속하는 인물이다.
여제 이리나.
그녀는 자신의 별명에 걸맞게 플레이어로서는 최초이자 유일하게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여제가 다스리는 제국은 정의로우며 약자의 편에 서고 동대륙의 평화를 지키는 전쟁 억제제로써 톡톡한 역할을 했다.
평화를 사랑하고 약자를 수호하는 정의의 편. 심지어 그녀는 화사한 금발과 벽안을 가진 눈부신 미인이다. 그녀를 직접 만나본 이들은 얼굴만큼이나 깨끗하고 아름다운 성품을 드높여 찬양하고는 했다. 심지어 현실에서는 유성그룹 사장의 외동딸이라는 직함까지 가지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제가 이끄는 PVP팀 유성은 랭킹 2위에서 6위 사이를 오갔으며, 소환사로써 그녀는 정점에 선 인물이었다.
미르와 달리 그녀는 방송에도 자주 출현했기에 ‘PPO가 뭔지 몰라도 여제가 누구인지는 안다’라는 말까지 생겨났을 정도였다.
그만한 업적을 가지고 있는 이가 유명세를 타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다. 그녀는 그야말로 PPO가 낳은 최고의 스타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존재다.
그런 그녀가 PAO에 다시 나타났다. 심지어 판테라 도시의 플레이어들을 부단히도 괴롭히는 별이 지는 숲의 고블린들을 처치하기 위해 움직인다고 한다.
레벨 랭킹 싸움이 치열한 지금의 PAO에서 손이 많이 가는 조사단 임무를 맡는다는 것은 그만큼 랭킹에서 뒤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 받는 플레이어들을 위하여 숭고한 결단을 내린 그녀의 이름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리고 여제를 필두로 한 조사단이 출발하는 당일.
판테라 도시의 동문으로 향하는 대로에는 미어터질 정도로 사람들이 몰렸다.
식당 등의 출입 가능한 건물의 2층과 옥상을 점령한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모험가 조합의 정문이다.
이내 모험가 조합의 문이 열리고 다섯 명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각양각색의 차림을 한 플레이어들의 선두에 선 아름다운 금발의 여인이 바로 여제 이리나다. 그녀를 본 사람들이 일제히 환성을 내지른다.
“저 사람이 여제… 처음 보는데 아무래도 팬클럽에 가입해야 할 것 같아. 이쪽 한 번만 봐주세요!”
“저렇게 예쁜데 착하고 재능도 있는데다가 집안까지 좋다니. 하늘은 그녀에게 모든 것을 다 준 건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대로를 걷는 여제 이리나를 향해 함성을 동반한 꽃들이 내던져졌다. 그녀의 제국이 국화로 사용했던 백색의 장미가 그 주인공이다.
“이렇게까지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위해 많은 분들이 이렇게까지 해주시니 정말 어찌할 바를 모르겠네요.”
그녀는 사람들의 반응에 익숙한 면모를 보이면서도 동시에 부끄러운 듯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쭈뼛거리며 환호하는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는 그 모습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강탈했다.
소환사를 위해 제작된 가벼운 경장을 걸친 그녀의 곁에는 늑대의 형상을 한 적색의 환수가 위풍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며 동행하고 있었다.
다소 육성이 어렵고 구하기도 어렵지만 높은 등급까지 성장하는 것으로 유명한 혈랑이다. 자신의 주인을 향해 쏟아지는 함성에 화답하듯 혈랑은 더욱 꼿꼿이 목을 세웠다.
“저길 봐, 여제의 팀원들도 엄청난 네임드야!”
“세상에… 검제, 영혼약탈자, 테랄드의 교황까지 있어. 아주 드림팀을 모아놨다고!”
여제 이리스만 해도 엄청난 유명인인데 그녀와 함께 걷는 이들의 유명세 또한 만만치 않다.
PPO에서 검으로 대적할 이가 없다고 말해지던 검제 칼람베르. 마법사 중에서 속성의 상극에서 벗어나 있는 희귀 직업인 영혼약탈자를 가진 마르브. 테랄드 교의 유일한 교황 크림.
결코 한곳에 뭉칠 일이 없다고 말해지던 최강의 존재들이 하나의 팀에 모여 있다.
특전을 통해 PPO에서 사용하던 직업을 고스란히 가지고 온 그들이 그동안 쌓아온 경험을 토대로 PAO의 정점에 설 것임을 의심하는 자는 없다.
“저 정도면 미르가 상대라도 해볼 만하지 않아?”
그 작은 중얼거림이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비록 배신자로 불리며 역적으로 통하는 미르이지만 그 실력 하나만큼은 의심하는 이가 없다.
자연스럽게 떠오른 미르의 이름은 그들이 없는 지금, 가히 최강의 팀이라 불려도 이상할 것 없는 신생 유성과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다만 그렇게 추락한 미르가 다시 나타날 것이라 생각하는 이는 적어도 이 장소에는 없었다.

* * *

여제 이리나를 필두로 한 유성 팀과 모험가 조합에서 파견한 NPC직원, 총합 5인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최근 고블린들의 이상현상이 발생했다고 말해지는 별이 지는 숲에 들어서게 되었다.
“저도 옛날에 별이 지는 숲에 와본 적이 있어요. 서쪽을 주로 방문해서 한 번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감회가 새롭네요. 너도 그렇지? 유유.”
이리나가 자신의 소환수인 혈랑 유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기분 좋게 눈을 감은 혈랑이 그녀의 다리에 얼굴을 부비며 화답한다.
“그나저나 우리 이러고 있어도 정말 괜찮은 거야? 이러고 있는 사이에도 레벨 랭킹 차이가 벌어질 텐데. 고블린 따위 사냥해봤자 경험치도 안 준다고.”
따뜻한 느낌이 드는 갈색의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 올린 여성, 교황 크림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팔짱을 끼고 미간을 찌푸린 채 툴툴거리며 지금의 상황이 못마땅하다는 것을 전력으로 어필하고 있다.
“…리더의 선택은 훌륭해.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야. 나는 그녀의 선택을 지지할 거야.”
온몸을 흑색의 천으로 감싸고 있는 남성이 그녀의 말에 반대 입장을 밝혔다.
얼핏 보면 중학생으로 보이는 신장이지만 엄연히 성인이며 영혼약탈자라는 영웅 등급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마브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극적인 성격 탓에 그의 음성은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 작다.
“아저씨는 어때? 아저씨도 고작 이런 일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영혼약탈자의 동의를 구하지 못한 크림의 시선이 검제라 불렸던 30대 초반의 남자에게 향했다. 칼람베르는 깊이가 느껴지는 눈으로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명령이니 따른다. 그뿐이다.”
“…당신은 무슨 조선시대 무인이냐.”
결국 과반수에서 밀린 크림이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아프지도 않은데 열이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이런 착해빠진 것들만 모여 있는 팀이라니. 무슨 성인군자들만 모아놨어. 내가 어쩌자고 이 재미없는 팀에 들어오게 된 걸까.”
“미안해요. 저, 불행한 일을 겪는 사람들을 보면 지나치지를 못해서… 여러분께는 제 고집으로 인해 폐를 끼쳐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그녀는 크림을 향해 허리를 직각으로 꺾었다. 그 얼굴에 떠오른 난처한 기색이 독하게 먹은 마음을 뒤흔들었다.
조금 말투가 험할 뿐이지 타인을 위해 스스로의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리나에게 모진 말을 내뱉을 만큼 크림이 악독한 여자는 아니었다.
결국 그녀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후우… 너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이리나. 조금은 사람이 이기적이어도 된다고 생각해.”
“미안해요, 크림. 그리고 저를 따라와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당신 같은 친구를 얻을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덕분에 저는 정말 행복해요.”
“…우와,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을 수 있는 거지? 멘탈이 강철로 만들어져 있는 거야? 미안하지만 나는 부서지기 쉬운 과자 같은 여자라고. 자제해 줘.”
사정없이 매도의 말은 내뱉는 크림의 얼굴은 혈액이 몰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조용히.”
검사이기 때문에 선두에서 걷던 칼람베르가 손을 들어 일행에게 침묵을 요구했다. 모두가 입을 다무는 사이 자세를 낮춘 혈랑 유유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바람에 나뭇가지가 스치는 소리에 이질적인 소음이 섞여들었다. 특유의 ‘키익!’거리는 울음이 섞인 잡담 소리. 명명백백 고블린의 것이다.
일행은 수풀의 어둠에 몸을 숨긴 채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살폈다. 놀랍게도 그 장소에는 10여 마리의 고블린과 다섯 마리의 슬라임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수집한 열매와 사냥한 고기 따위를 사이좋게 나눠먹고 있었다.
그들을 놀라게 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있는 장소에는 천막으로 구성된 집들이 있었고, 그 중앙에는 고블린의 석상까지 세워져 있었다. 단순하고 무식한데다가 무리 생활을 하지 않는 고블린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문명의 파편에 가장 놀란 것은 모험가 조합에서 파견한 NPC였다.
“이, 이건 놀랍군요. 아주 구식이기는 하지만 문명을 가진 고블린이라니, 이건 로드의 탄생을 알리는 징조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조합에 보고해서 토벌대를 꾸려야 합니다.”
돌아가자는 말을 돌려서 표현한 NPC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일행 중 겁을 집어먹고 등을 보이려 하는 자는 그뿐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전투 준비를 하는 일행들. 그들의 리더인 이리나는 성모처럼 자상하게 웃으며 NPC의 손을 감싸 쥐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리고 저희들에게 기회를 주세요. 힘없는 모험가들을 괴롭히는 저 잔악무도한 적들을 쓰러뜨릴 기회를요.”
“하, 하지만 저들은 강합니다. 일반적인 고블린들을 기준으로 생각하시면 오산입니다. 적어도 그 1.5배로 계산하지 않으면…….”
“물론 고블린들은 강하겠죠. 어쩌면 제 동료들 중에서 피해를 입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들의 손에 쓰러질 모험가들을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부디 저희들을 믿어주세요.”
“으으으…….”
조합원 NPC는 갈팡질팡했다. 그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별이 지는 숲에 발생한 이변을 조사하는 것이지 처리하는 것이 아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이리나가 갖는 높은 명성이 그에게 신뢰를 주었다. 그녀라면 믿을 수 있다는 신뢰의 감정이 마음을 잠식하는 순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신뢰에 반드시 부응하도록 할게요.”
활짝 웃으며 그에게서 멀어진 이리나가 혈랑 유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상대는 고블린 열 마리와 슬라임 다섯 마리. 보통의 몬스터보다 1.5배는 강하다고 생각해 주세요. 다치지 않는 선에서 최선을 다할 것. 명심해주시고, 공략을 시작합니다.”
그녀의 선언과 동시에 하늘로부터 거대한 무색의 구체가 떨어졌다. 느린 속도였지만 한참 먹고 마시는데 열중하느라 경계가 옅어져 있던 고블린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키익! 습격이다!”
“…늦었어. 이미 혼의 추락은 발동되었다.”
영혼약탈자 마브르의 중얼거림이 끝나기 무섭게 무색의 구체가 고블린 무리를 강타했다.
상당한 질량에 비해 지형지물에 영향은 없었다. 하지만 공격을 적중당한 고블린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갈팡질팡한다. 상태 이상 혼란에 빠진 것이다. 정신력이 낮은 녀석들은 아군을 공격하기도 했다.
대규모 마법을 사용한 마브르는 이후 자잘한 마법을 쏘며 고블린들의 생명력을 갈취했다.
“지금이에요. 칼람베르, 그리고 유유. 부탁할게요.”
검을 뽑아든 칼람베르와 혈랑 유유가 동시에 대지를 박차고 쏘아졌다. 서로 경쟁하듯 나아가는 그들은 화살처럼 날아가더니 고블린들 사이를 휘젓기 시작했다.
“진짜 무식들 하기는, 죽기 싫으면 적어도 버프는 받고 가라고. 교황의 축복.”
한 남자와 늑대에게 교황 크림의 축복이 더해졌다. 일반적인 사제의 버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상승폭이 높은 버프를 받은 그들은 더욱 격하게 날뛰었다.
특히 칼람베르의 활약이 독보적이다. 과연 검의 제왕. 검제라 불렸던 인물답게 압도적인 검술 실력을 뽐내는 그의 앞에서 고블린들은 추풍낙엽처럼 무너져 내렸다.
소환사 이리나의 응원을 받은 혈랑 유유 역시 엄청난 근력과 민첩성으로 고블린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다소의 위기가 있을 때마다 교황 크림의 손에서 쏘아진 황금빛이 상처를 회복시킨다.
전투는 압도적이었다. 방심을 노린 기습임을 감안하더라도 그들의 강함은 독보적이다. 그들 파티는 이상적이며 완성도가 높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며 상승작용을 일으키니 단일병과인 고블린들은 이렇다 할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어느덧 몬스터들은 몰살당했다. 수많은 시신들에서 빛의 입자가 솟아오르는 모습은 무심코 시선을 빼앗길 만큼이나 장관이다.
그리고 그 빛무리의 중앙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이리나는 지상에 강림한 여신처럼 아름다웠다.
“수고하셨습니다. 이로써 더 이상 변종 고블린에 의해 고통 받는 모험가들이 없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놓이네요.”
외모뿐만 아니라 마음씨 또한 고운 그녀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 조합의 NPC는 추후 보고서의 끄트머리에 이러한 문구를 기입하게 된다.

<현세에 여신이 강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