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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영웅은 마왕이 되었다
14화
“키익! 왕, 어서 와라.”
언젠가부터 몇몇 고블린들이 시안을 왕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호칭이야 아무래도 좋았기에 방치해 두었더니 어느새 왕이라는 호칭이 완전하게 정착되었다.
“마침 잘됐어. 너희들, 대장간으로 가서 안장과 슬라임을 지급받도록.”
“키익! 드디어 우리도 기병대가 되는 거냐? 기쁘다!”
1분대가 타고 다니는 슬라임이 어지간히도 부러웠던 것인지 2분대의 고블린들은 분대장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허겁지겁 마왕성을 향해 내달렸다.
거점이 순식간에 텅 비며 공허함만이 남게 되었다. 하지만 시안이 훈련소에서 고블린을 찍어내기 시작하자 거점은 금세 떠들썩해졌다.
시안이 소환한 고블린의 수는 총 30마리. 그중 다섯 마리가 희귀 등급으로 탄생했다.
이로써 영혼 조각을 상당히 소모했다. 하지만 시안 휘하의 고블린만 45마리이며, 안장이 완성되기만 하면 20마리가 슬라임을 탄 기병이 될 것이다. 이는 작은 규모의 마을을 쓸어버릴 수 있는 병력이다.
이들을 다섯 마리씩 짝지어 분대를 편성했더니 무려 9번 분대까지 만들어졌다.
그동안 고블린들이 부대 구성 스킬을 달고 돌아다닌 덕에 숙련도가 하급 5단계가 되었다. 스킬의 효과도 진화하여 모든 어빌리티가 아홉 개씩 상승하게끔 되었으며, 세 개의 분대로 하나의 소대를 편성할 수 있게 되었다.
소대에 편성된 몬스터는 모든 상태 이상에 10%의 저항력을 가지며 소대장 몬스터는 소대원들의 어빌리티 일부를 받아 압도적으로 강해지게 되었다.
세 개 소대의 고블린들은 일대에 존재하는 몬스터들의 씨를 말리며 별이 지는 숲에 지배권을 넓혀갔다.
“오빠, 뭘 하려고 이렇게 고블린을 대량으로 소환하는 거야?”
바늘 가는 곳에 실 따라간다는 말처럼 시안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소향이 참지 못하겠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그건…….”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던 시안은 황급히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에게 사실을 말해줘도 되나 싶어 멈칫거렸지만 이내 생각을 멈추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몫이다.
“지금까지는 무의미한 접촉으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최대한 플레이어들과의 접촉을 꺼렸지만… 아무래도 마왕으로써 게임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플레이어들과의 전투를 피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렇구나.”
나름 고심하다 입을 연 것인데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반응했다.
사고방식이 단순하고 깊지 않은 그녀가 전하고자 하는 말뜻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음을 파악한 시안이 귀찮음을 무릅쓰고 재차 입을 열었다.
“분대 단위로 묶은 몬스터를 곳곳에 풀어서 아무런 죄도 없는, 순수하게 게임을 즐기고 있는 플레이어들을 사냥할 거라는 소리야. 무차별 PK범 등 완전 질이 나쁜 놈들이나 하는 짓을 내가 하겠다고 선언한 꼴인데 너는 아무렇지도 않아? 적어도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따지고 들 줄 알았어.”
“…그런 거야?”
“그런 거야.”
그제야 소향이 짐짓 심각한 얼굴로 고민을 시작했다.
아무리 PAO가 상대방의 생명을 취하는 것으로 강해지는 RPG류 게임이라지만 윤리성을 완전하게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문에 PK(Player Kill)는 다수에게 상당히 지탄받는 행위로 통한다.
게임 속의 세계라는 이유만으로, 상대가 죽여도 부활하는 플레이어라는 이유만으로 PK를 정당화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때문에 과반수의 플레이어들은 PK를 하나의 죄악으로 손꼽는다.
그 죄악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겠다고 선언하는 시안. 그를 바라보는 소향의 시선에는 숨길 수 없는 불안이 묻어났다.
“오빠는 플레이어를 죽이는 것이 괜찮은 거야? 아무렇지도 않아?”
“나는 익숙해졌어. PPO에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플레이어를 죽였어. 물론 대부분 정식 PVP이기는 했지만…….”
시안은 어젯밤에 먹은 저녁식사의 메뉴를 이야기하듯 정말 대수롭지 않게 말을 했다.
“다이브형 가상현실 게임을 하는 사람이라면 게임과 현실을 확실하게 구분해야 해. 나는 그걸 철저하게 하고 있을 뿐이고.”
현실과 게임의 분리를 주장하는 말에 뒤숭숭한 마음을 안은 소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주 게임 속에서 사는구나. 네 집념에 찬사를 보낸다.”
간만에 로그아웃을 한 시안을 반겨준 것은 질린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쌍둥이 여동생 선율이었다. 요리 중이었는지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그녀는 튀김용 나무젓가락을 이용해 아직 고글조차 벗지 못한 소율의 미간을 쿡쿡 찔렀다.
“그만해. 이마에 기름 묻어.”
“너 벌써 며칠 째 저녁식사도 거르고 있잖아. 정말 우리 엄마는 천사라니까. 나 같으면 새 접속 기기를 사주기는커녕 있는 것도 중고매장에 팔아버렸을 거야.”
뼛속까지 사무치는 매도의 연속에 소율은 몸을 떨었다.
“설마 어머니한테 이른 거야?”
“아니, 그랬다가는 엄마가 마음 아파할 테니까 아직까지는 참고 벼르는 중이야. 하지만 엄마도 조금은 눈치채고 있어. 그러니 적어도 저녁식사는 제대로 하는 것이 어때?”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족이라는 걸까. 신랄한 질책 속에서 숨길 수 없는 걱정이 묻어났다.
아무리 게임이 좋아도 가족들을 걱정시키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소율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제안에 동조했다.
겨우 그녀의 젓가락 공격에서 벗어나 고글을 내려놓은 소율은 문득 방 안의 분위기가 달라져 있음을 깨달았다.
평소보다 널찍하고 한산하다. 턱을 괴고 이유를 찾던 그는 방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커다란 캡슐형 접속 기기가 사라져 있음을 파악했다.
“뭐야, 저기 있던 구형 접속 기기 버려버린 거야? 그거 중고로 팔아도 꽤 값을 받을 수 있는 건데.”
“응? 아니, 전에 네가 나한테 준다고 했잖아. 그래서 내 방으로 옮겨놨어. 가끔 공부하다 머리 식힐 때 해보려고. 그나저나 무슨 게임 하나 다운로드하는데 돈이 20만원이나 들어? 보고 깜짝 놀라서 무심결에 욕을 해버렸잖아.”
“사실 이건 비밀인데, 매월 5만원씩 이용 요금도 내야 해.”
“게임회사가 아니라 순 날강도 집단이네. 나 같이 가난한 대학생에게서 얼마만큼 돈을 뜯어갈 생각이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게임을 하려 했는데 오히려 스트레스가 쌓이는 기분이야.”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둥켜안는 그녀를 보며 소율은 폭소를 터뜨렸다.
전액을 장학금으로 받는 그녀이지만 공부에 매진하느라 매달 용돈을 받아 생활한다. 그런 그녀에게 20만원은 상당히 큰돈이다. 반면 PPO를 통해 제법 많은 돈을 벌어들인 소율에게는 용돈이라며 던져줄 수 있는 금액에 해당한다.
“오늘부터 한 달 동안 지극한 존경의 의미를 담아 오빠라 부른다면 이용요금을 지불해 주도록 하지. 너라고 부르는 순간 기간 초기화.”
“퉤.”
우쭐거리는 소율을 향해 침 뱉는 시늉을 한 그녀는 화가 난 사람처럼 크게 발을 구르며 방에서 빠져나갔다.
하지만 이내 닫혔던 문이 열리며 그녀가 얼굴을 반쯤 들이밀었다.
“깜빡할 뻔했네. 아까 로그인을 하려 했는데 시작하는 도시를 설정하라 하더라고. 나는 펠 푸리스 도시를 선택했는데, 너는?”
“펠 푸리스가 어디 있는 도시인지 모르겠네. PAO의 대륙은 상당히 넓으니까. 나는 북대륙의 판테라 도시 근방에 있어. 만약 도움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찾아와도 돼. 물론 대가는 치러야 하겠지만. 뭘, 어렵지도 않아. 나를 부를 때…….”
“퉤.”
***
최근 판테라 도시의 모험가 조합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플레이어 모험가로부터 걸려오는 클레임의 수가 지난주와 비교해 압도적으로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동쪽의 별이 지는 숲에서 발생한 이변 때문이다.
“그러니까 고블린이 다섯 마리씩 무리를 짓고 다녔다니까요? 그중에서는 네임드도 있었어요. 덕분에 경험치랑 장비를 죄다 잃어버렸어요.”
“고블린이 슬라임을 타고 다닌단 말입니다. 제가 봤습니다. 이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요!”
“여러분! 어제부터 고블린이 열다섯 마리씩 몰려다닌다는 소식입니다. 게다가 일반 고블린보다 월등하게 강해요. 만나면 뼈도 못 추려요. 무조건 도망쳐야 합니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판테라의 모험가 조합장 클라우는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이대로 자고 싶다는 욕망이 뇌리를 지배했다. 연이어 들려오는 사건사고 소식에 최근 며칠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다. 스트레스가 임계점을 돌파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중 9할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별이 지는 숲에 출몰한다는 무리를 짓는 고블린이다.
개인행동을 하는 고블린이 집단을 이루어 다니는 것도 문제인데 그것들이 네임드만큼이나 강하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본래라면 우수한 능력을 가진 모험가들을 필두로 조사단을 꾸려야 한다. 원인을 알아야 제거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현재 선두에 있는 모험가들, 즉 랭커 플레이어들은 레벨을 올리는데 전심전력을 쏟아내느라 모험가 조합의 부탁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죽기라도 했다가는 그만큼 선두에서 뒤처지기 때문에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조사단 임무 따위는 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며칠 전부터 조사단을 꾸리기 위해 지원을 받고 있지만 자격 조건을 넘긴 실력 있는 모험가의 지원은 없다시피 했다.
용기만을 갖춘 수준 미달의 모험가들로 조사단을 꾸려봤자 의미 없는 희생만 늘어날 것이다.
“프리스는 어떻게 생각해?”
그는 맞은편에 앉아 자료를 정리하던 부하 직원 프리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상당히 갑작스러운 기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조합원 프리스는 침착하게 고민을 시작했다. 이런 경우가 과거에도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고블린 로드라도 나타난 걸까요?”
길지 않은 고민 끝에 프리스가 내놓은 주장은 고블린 로드의 탄생이라는 중얼거림이었다. 스스로가 한 말이기는 하지만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기에 멋쩍은 웃음을 흘린다.
“그럴 리가 없겠죠? 마신의 축복을 받아 탄생하는 고블린 로드는 전 대륙을 무대로 3년에 한 번씩 모습을 드러내니까요.”
“뭐, 네 말대로 고블린 로드는 아니겠지. 1년 전 하카스 지방에서 고블린 로드가 나타났고, 토벌되었으니까. 하지만 로드까지는 아니어도 샤먼이나 대장군 정도의 괴물이 나타났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역시 군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하겠죠? 아직 모험가들의 수준은 군부 미만으로 약하니까요.”
“그렇겠지. 하지만 군부는 명확한 증거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조사단은 반드시 파견해야 해.”
상대가 뭐가 되었건 조사는 필요하다. 이대로 두면 군부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며 신규 모험가들의 피해는 우후죽순으로 늘어날 것이다.
이대로 누적되는 피해를 방치한다면 판테라의 모험가는 다른 도시의 모험가들보다 수준이 한참이나 뒤처지게 된다. 그것은 곧 조합장인 클라우의 명예와 직결된다.
펜대를 굴리며 한참동안 방안을 강구하던 클라우는 들려오는 노크소리로 인해 상념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조합장.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오늘은 누군가를 만날 예정이 없는데… 일단 들어오세요.”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조합의 직원이 등장했다. 단정한 차림새를 한 남직원의 뒤에는 한 명의 여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아름답고 풍성한 금발이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조신하게 쓸어 넘기는 그녀는 단아하고 청초한 느낌이 드는 미인이었다.
몸에 달라붙는 가죽 바지와 하얀색 셔츠 위로 팔다리와 흉부를 보호해 주는 금속 경갑을 겹쳐 입은 그녀는 조합장 클라우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활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조합장님. 모험가 이리나라고 합니다.”
가죽 장갑을 벗은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고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 예의 바르면서도 기품이 느껴지는 모습에 클라우는 저도 모르게 일어서고 말았다. 모험가가 아니라 귀족을 대하는 느낌이라 생각하면서 정중한 인사에 답례를 한다.
“판테라의 모험가 조합장 클라우 리드라고 합니다. 모험가님께서는 어떻게 이곳까지 오시게 되었죠?”
그 질문에는 아무나 올 수 없는 응접실까지 안내받을 수 있던 이유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그에 스스로를 이리나라 소개한 여인은 부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심코 가슴이 쿵쾅거릴 만큼 완벽하고도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사단에 지원하고 싶습니다. 부족한 실력입니다만 제가 고통 받는 모험가 여러분들께 도움을 드릴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한때 여제라 불린 플레이어가 고블린들의 턱밑까지 칼날을 들이미는 순간이었다.
14화
“키익! 왕, 어서 와라.”
언젠가부터 몇몇 고블린들이 시안을 왕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호칭이야 아무래도 좋았기에 방치해 두었더니 어느새 왕이라는 호칭이 완전하게 정착되었다.
“마침 잘됐어. 너희들, 대장간으로 가서 안장과 슬라임을 지급받도록.”
“키익! 드디어 우리도 기병대가 되는 거냐? 기쁘다!”
1분대가 타고 다니는 슬라임이 어지간히도 부러웠던 것인지 2분대의 고블린들은 분대장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허겁지겁 마왕성을 향해 내달렸다.
거점이 순식간에 텅 비며 공허함만이 남게 되었다. 하지만 시안이 훈련소에서 고블린을 찍어내기 시작하자 거점은 금세 떠들썩해졌다.
시안이 소환한 고블린의 수는 총 30마리. 그중 다섯 마리가 희귀 등급으로 탄생했다.
이로써 영혼 조각을 상당히 소모했다. 하지만 시안 휘하의 고블린만 45마리이며, 안장이 완성되기만 하면 20마리가 슬라임을 탄 기병이 될 것이다. 이는 작은 규모의 마을을 쓸어버릴 수 있는 병력이다.
이들을 다섯 마리씩 짝지어 분대를 편성했더니 무려 9번 분대까지 만들어졌다.
그동안 고블린들이 부대 구성 스킬을 달고 돌아다닌 덕에 숙련도가 하급 5단계가 되었다. 스킬의 효과도 진화하여 모든 어빌리티가 아홉 개씩 상승하게끔 되었으며, 세 개의 분대로 하나의 소대를 편성할 수 있게 되었다.
소대에 편성된 몬스터는 모든 상태 이상에 10%의 저항력을 가지며 소대장 몬스터는 소대원들의 어빌리티 일부를 받아 압도적으로 강해지게 되었다.
세 개 소대의 고블린들은 일대에 존재하는 몬스터들의 씨를 말리며 별이 지는 숲에 지배권을 넓혀갔다.
“오빠, 뭘 하려고 이렇게 고블린을 대량으로 소환하는 거야?”
바늘 가는 곳에 실 따라간다는 말처럼 시안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소향이 참지 못하겠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그건…….”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던 시안은 황급히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에게 사실을 말해줘도 되나 싶어 멈칫거렸지만 이내 생각을 멈추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몫이다.
“지금까지는 무의미한 접촉으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최대한 플레이어들과의 접촉을 꺼렸지만… 아무래도 마왕으로써 게임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플레이어들과의 전투를 피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렇구나.”
나름 고심하다 입을 연 것인데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반응했다.
사고방식이 단순하고 깊지 않은 그녀가 전하고자 하는 말뜻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음을 파악한 시안이 귀찮음을 무릅쓰고 재차 입을 열었다.
“분대 단위로 묶은 몬스터를 곳곳에 풀어서 아무런 죄도 없는, 순수하게 게임을 즐기고 있는 플레이어들을 사냥할 거라는 소리야. 무차별 PK범 등 완전 질이 나쁜 놈들이나 하는 짓을 내가 하겠다고 선언한 꼴인데 너는 아무렇지도 않아? 적어도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따지고 들 줄 알았어.”
“…그런 거야?”
“그런 거야.”
그제야 소향이 짐짓 심각한 얼굴로 고민을 시작했다.
아무리 PAO가 상대방의 생명을 취하는 것으로 강해지는 RPG류 게임이라지만 윤리성을 완전하게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문에 PK(Player Kill)는 다수에게 상당히 지탄받는 행위로 통한다.
게임 속의 세계라는 이유만으로, 상대가 죽여도 부활하는 플레이어라는 이유만으로 PK를 정당화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때문에 과반수의 플레이어들은 PK를 하나의 죄악으로 손꼽는다.
그 죄악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겠다고 선언하는 시안. 그를 바라보는 소향의 시선에는 숨길 수 없는 불안이 묻어났다.
“오빠는 플레이어를 죽이는 것이 괜찮은 거야? 아무렇지도 않아?”
“나는 익숙해졌어. PPO에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플레이어를 죽였어. 물론 대부분 정식 PVP이기는 했지만…….”
시안은 어젯밤에 먹은 저녁식사의 메뉴를 이야기하듯 정말 대수롭지 않게 말을 했다.
“다이브형 가상현실 게임을 하는 사람이라면 게임과 현실을 확실하게 구분해야 해. 나는 그걸 철저하게 하고 있을 뿐이고.”
현실과 게임의 분리를 주장하는 말에 뒤숭숭한 마음을 안은 소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주 게임 속에서 사는구나. 네 집념에 찬사를 보낸다.”
간만에 로그아웃을 한 시안을 반겨준 것은 질린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쌍둥이 여동생 선율이었다. 요리 중이었는지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그녀는 튀김용 나무젓가락을 이용해 아직 고글조차 벗지 못한 소율의 미간을 쿡쿡 찔렀다.
“그만해. 이마에 기름 묻어.”
“너 벌써 며칠 째 저녁식사도 거르고 있잖아. 정말 우리 엄마는 천사라니까. 나 같으면 새 접속 기기를 사주기는커녕 있는 것도 중고매장에 팔아버렸을 거야.”
뼛속까지 사무치는 매도의 연속에 소율은 몸을 떨었다.
“설마 어머니한테 이른 거야?”
“아니, 그랬다가는 엄마가 마음 아파할 테니까 아직까지는 참고 벼르는 중이야. 하지만 엄마도 조금은 눈치채고 있어. 그러니 적어도 저녁식사는 제대로 하는 것이 어때?”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족이라는 걸까. 신랄한 질책 속에서 숨길 수 없는 걱정이 묻어났다.
아무리 게임이 좋아도 가족들을 걱정시키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소율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제안에 동조했다.
겨우 그녀의 젓가락 공격에서 벗어나 고글을 내려놓은 소율은 문득 방 안의 분위기가 달라져 있음을 깨달았다.
평소보다 널찍하고 한산하다. 턱을 괴고 이유를 찾던 그는 방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커다란 캡슐형 접속 기기가 사라져 있음을 파악했다.
“뭐야, 저기 있던 구형 접속 기기 버려버린 거야? 그거 중고로 팔아도 꽤 값을 받을 수 있는 건데.”
“응? 아니, 전에 네가 나한테 준다고 했잖아. 그래서 내 방으로 옮겨놨어. 가끔 공부하다 머리 식힐 때 해보려고. 그나저나 무슨 게임 하나 다운로드하는데 돈이 20만원이나 들어? 보고 깜짝 놀라서 무심결에 욕을 해버렸잖아.”
“사실 이건 비밀인데, 매월 5만원씩 이용 요금도 내야 해.”
“게임회사가 아니라 순 날강도 집단이네. 나 같이 가난한 대학생에게서 얼마만큼 돈을 뜯어갈 생각이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게임을 하려 했는데 오히려 스트레스가 쌓이는 기분이야.”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둥켜안는 그녀를 보며 소율은 폭소를 터뜨렸다.
전액을 장학금으로 받는 그녀이지만 공부에 매진하느라 매달 용돈을 받아 생활한다. 그런 그녀에게 20만원은 상당히 큰돈이다. 반면 PPO를 통해 제법 많은 돈을 벌어들인 소율에게는 용돈이라며 던져줄 수 있는 금액에 해당한다.
“오늘부터 한 달 동안 지극한 존경의 의미를 담아 오빠라 부른다면 이용요금을 지불해 주도록 하지. 너라고 부르는 순간 기간 초기화.”
“퉤.”
우쭐거리는 소율을 향해 침 뱉는 시늉을 한 그녀는 화가 난 사람처럼 크게 발을 구르며 방에서 빠져나갔다.
하지만 이내 닫혔던 문이 열리며 그녀가 얼굴을 반쯤 들이밀었다.
“깜빡할 뻔했네. 아까 로그인을 하려 했는데 시작하는 도시를 설정하라 하더라고. 나는 펠 푸리스 도시를 선택했는데, 너는?”
“펠 푸리스가 어디 있는 도시인지 모르겠네. PAO의 대륙은 상당히 넓으니까. 나는 북대륙의 판테라 도시 근방에 있어. 만약 도움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찾아와도 돼. 물론 대가는 치러야 하겠지만. 뭘, 어렵지도 않아. 나를 부를 때…….”
“퉤.”
***
최근 판테라 도시의 모험가 조합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플레이어 모험가로부터 걸려오는 클레임의 수가 지난주와 비교해 압도적으로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동쪽의 별이 지는 숲에서 발생한 이변 때문이다.
“그러니까 고블린이 다섯 마리씩 무리를 짓고 다녔다니까요? 그중에서는 네임드도 있었어요. 덕분에 경험치랑 장비를 죄다 잃어버렸어요.”
“고블린이 슬라임을 타고 다닌단 말입니다. 제가 봤습니다. 이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요!”
“여러분! 어제부터 고블린이 열다섯 마리씩 몰려다닌다는 소식입니다. 게다가 일반 고블린보다 월등하게 강해요. 만나면 뼈도 못 추려요. 무조건 도망쳐야 합니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판테라의 모험가 조합장 클라우는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이대로 자고 싶다는 욕망이 뇌리를 지배했다. 연이어 들려오는 사건사고 소식에 최근 며칠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다. 스트레스가 임계점을 돌파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중 9할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별이 지는 숲에 출몰한다는 무리를 짓는 고블린이다.
개인행동을 하는 고블린이 집단을 이루어 다니는 것도 문제인데 그것들이 네임드만큼이나 강하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본래라면 우수한 능력을 가진 모험가들을 필두로 조사단을 꾸려야 한다. 원인을 알아야 제거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현재 선두에 있는 모험가들, 즉 랭커 플레이어들은 레벨을 올리는데 전심전력을 쏟아내느라 모험가 조합의 부탁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죽기라도 했다가는 그만큼 선두에서 뒤처지기 때문에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조사단 임무 따위는 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며칠 전부터 조사단을 꾸리기 위해 지원을 받고 있지만 자격 조건을 넘긴 실력 있는 모험가의 지원은 없다시피 했다.
용기만을 갖춘 수준 미달의 모험가들로 조사단을 꾸려봤자 의미 없는 희생만 늘어날 것이다.
“프리스는 어떻게 생각해?”
그는 맞은편에 앉아 자료를 정리하던 부하 직원 프리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상당히 갑작스러운 기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조합원 프리스는 침착하게 고민을 시작했다. 이런 경우가 과거에도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고블린 로드라도 나타난 걸까요?”
길지 않은 고민 끝에 프리스가 내놓은 주장은 고블린 로드의 탄생이라는 중얼거림이었다. 스스로가 한 말이기는 하지만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기에 멋쩍은 웃음을 흘린다.
“그럴 리가 없겠죠? 마신의 축복을 받아 탄생하는 고블린 로드는 전 대륙을 무대로 3년에 한 번씩 모습을 드러내니까요.”
“뭐, 네 말대로 고블린 로드는 아니겠지. 1년 전 하카스 지방에서 고블린 로드가 나타났고, 토벌되었으니까. 하지만 로드까지는 아니어도 샤먼이나 대장군 정도의 괴물이 나타났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역시 군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하겠죠? 아직 모험가들의 수준은 군부 미만으로 약하니까요.”
“그렇겠지. 하지만 군부는 명확한 증거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조사단은 반드시 파견해야 해.”
상대가 뭐가 되었건 조사는 필요하다. 이대로 두면 군부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며 신규 모험가들의 피해는 우후죽순으로 늘어날 것이다.
이대로 누적되는 피해를 방치한다면 판테라의 모험가는 다른 도시의 모험가들보다 수준이 한참이나 뒤처지게 된다. 그것은 곧 조합장인 클라우의 명예와 직결된다.
펜대를 굴리며 한참동안 방안을 강구하던 클라우는 들려오는 노크소리로 인해 상념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조합장.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오늘은 누군가를 만날 예정이 없는데… 일단 들어오세요.”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조합의 직원이 등장했다. 단정한 차림새를 한 남직원의 뒤에는 한 명의 여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아름답고 풍성한 금발이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조신하게 쓸어 넘기는 그녀는 단아하고 청초한 느낌이 드는 미인이었다.
몸에 달라붙는 가죽 바지와 하얀색 셔츠 위로 팔다리와 흉부를 보호해 주는 금속 경갑을 겹쳐 입은 그녀는 조합장 클라우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활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조합장님. 모험가 이리나라고 합니다.”
가죽 장갑을 벗은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고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 예의 바르면서도 기품이 느껴지는 모습에 클라우는 저도 모르게 일어서고 말았다. 모험가가 아니라 귀족을 대하는 느낌이라 생각하면서 정중한 인사에 답례를 한다.
“판테라의 모험가 조합장 클라우 리드라고 합니다. 모험가님께서는 어떻게 이곳까지 오시게 되었죠?”
그 질문에는 아무나 올 수 없는 응접실까지 안내받을 수 있던 이유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그에 스스로를 이리나라 소개한 여인은 부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심코 가슴이 쿵쾅거릴 만큼 완벽하고도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사단에 지원하고 싶습니다. 부족한 실력입니다만 제가 고통 받는 모험가 여러분들께 도움을 드릴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한때 여제라 불린 플레이어가 고블린들의 턱밑까지 칼날을 들이미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