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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영웅은 마왕이 되었다
13화


그러나 비명을 지른 것은 시안이 아닌 오크였다. 피가 철철 흐르는 주먹을 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오크의 손등에는 원뿔처럼 뾰족하게 생긴 마법 방패가 틀어박혀 있었다.
“괜찮아? 오빠가 멍하니 있느라 공격을 허용하다니, 별일이 다 있네.”
함께 전투를 하던 소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의 곁에 다가왔다.
“괜찮아. 갑자기 시스템 메시지가 튀어나와서 깜짝 놀랐을 뿐이야.”
도대체 무슨 이유로 공포를 획득했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일단은 거친 숨을 몰아쉬는 오크를 쓰러뜨리는 것이 우선이다.
“크르르… 인간. 고기. 먹는다!”
자신의 상처도 아랑곳 않고 무식하게 돌격만 하는 오크는 시안의 입장에서 고블린만큼이나 시시한 상대. 본래라면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상대하는 오크는 일반 오크와 다르다. 덩치가 한층 거대하고 피부가 불그스름하다. 뿐만 아니라 가슴팍에 흉악함을 더해주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네임드 등급의 붉은 오크다. 결코 약하지 않은 소향이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할 만큼 강력한 몬스터다.
보통 오크라면 머리 아프게 개조 마법을 만들 가치도 없다. 머리가 분노로 꽉 차서 이성이 마비된 멧돼지처럼 앞만 보고 달려드는 오크의 공격을 회피하는 것은 상당히 쉬운 일이다.
하지만 힘과 생명력이 높기로 유명한 오크. 그중에서도 독보적인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는 네임드 몬스터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강력한 일격이 필요하다.
레벨과 스킬의 숙련도가 낮아 강력한 일격을 갖추지 못한 시안으로써는 어쩔 수 없이 개조 마법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개조 마법을 사용할 거야. 라임, 발목을 깨물어서 시간을 끌어. 소향이 너도 부탁할게.”
[꾸익!]
“알겠어.”
시안의 명령이 떨어지자 라임이 붉은 오크의 발목을 물었다.
“떨어져라. 슬라임. 맛없다!”
붉은 오크가 라임과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붉은 오크의 배후로 돌아간 소향이 안광을 번뜩이며 검을 휘둘렀다. 세 번의 공격은 하나도 빗나감 없이 붉은 오크의 등과 뒷덜미 등을 긁었다.
시간만 끌어줘도 충분하다 생각했건만 의외로 뛰어난 그들의 합격기가 붉은 오크를 몰아넣었다.
그사이 시안은 자신 있게 마법을 펼쳤다.
“암흑 화살.”
처음에는 세 배의 캐스팅 속도의 이점을 살린 평범한 마법이다. 적당한 속력을 자랑하며 날아간 암흑 화살은 라임과 소향으로 인해 발이 묶인 붉은 오크의 머리를 정확하게 가격했다.
실명으로 인해 붉은 오크가 허우적거리는 사이 상당한 HP를 소진한 소향과 라임이 배후로 빠졌다.
라임이 자연 회복력으로 소진된 HP를 치유하는 동안 회복 물약으로 상처를 치료하고 회복 속도를 증진시킨 소향이 재차 달려들어 붉은 오크의 신체 이곳저곳에 상처를 입혔다.
그사이 시안의 손에서 하나의 마법이 창조되었다.
“암흑 화살 개조 마법 ― 관통 증가, 회전력 부여.”
본디 밋밋한 흑색의 화살이어야 할 암흑 화살이 변화를 시작했다. 끄트머리가 스치기만 해도 피가 철철 흐를 만큼 날카로워졌으며, 시계 방향으로 맹렬하게 회전을 개시했다.
“스킬 이름은… 꿰뚫는 암흑 화살 정도로 해두지.”
그렇게 성의 없이 지어진 이름을 가진 암흑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빠르게 쏘아진 흑색의 화살이 어마무시한 관통력을 자랑하며 붉은 오크의 왼쪽 가슴을 관통했다.
그 일격으로 HP가 바닥까지 떨어진 붉은 오크는 맥없이 쓰러졌다. 대량의 경험치를 습득했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시안을 기쁘게 했다. 덕분에 두 사람은 8레벨을 달성할 수 있었다.
“오빠, 아이템!”
거기에 예상치도 못했던 소향의 외침이 구름 위에서 춤추던 기분을 단번에 대기권 위로 날려버렸다.
붉은색의 검신을 가진 장검 한 자루와 이글거리는 태양을 형상화한 붉은 문양이 박혀 있는 장갑을 들고 흔들며 소리쳤다.
“우오오!”
그를 보는 시안의 눈동자가 지구 종말의 위기에서 살아남을 구석을 발견한 사람의 눈동자처럼 반짝였다. 무려 PAO를 플레이하고 처음으로 제대로 된 완제품의 획득이다. 기쁘지 않다면 그것은 마음이 돌로 만들어진 무정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소향이 회수해 온 아이템을 조속히 감정했다.

<붉은 오크의 힘 ― Rank : Rare.>
붉은 오크의 힘이 깃들어 있는 검. 한손 검이지만 양손 검에 버금가는 공격력을 가지고 있다. 오로지 힘을 숭상하는 오크의 특성으로 인해 높은 근력이 요구된다.
― 제한 : 레벨 7이상. 힘 35이상. 검사 계열.
― 내구도 : 31/31
― 공격력 : 11
― 근력 4증가. 마력 2하락.

<붉은 오크의 용맹 ― Rank : Rare>
붉은 오크의 용맹이 깃들어 있는 장갑. 방어구임에도 불구하고 주술적 처리로 인해 방어력이 아닌 공격력이 부여되어 있다.
― 제한 : 레벨 7이상.
― 내구도 : 21/21
― 공격력 : 4
― 체력 2증가.

아주 뛰어난 수준의 장비는 아니지만 특징이 확고하다.
“이건 주인이 정해져 있다고 봐도 무방하네.”
검은 당연히 검사인 소향이 장비해야 한다. 장갑 역시 공격력이 붙어 있는 이상 마법사인 시안보다는 검사인 소향에게 더 어울린다.
한참을 고민하던 시안은 결국 두 개의 장비 모두를 소향에게 넘겨주었다. 대가로 그녀가 차곡차곡 모아오던 영혼 조각의 일부를 지급받았다.
“정말 나한테 전부 줘도 괜찮겠어?”
고블린 대장장이가 만든 싸구려 검 대신 멋들어진 붉은 오크의 힘을 장비한 소향이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장갑을 손에 들고 머뭇거리는 그녀는 시안이 조금만 아쉬운 기색을 보여도 냉큼 장갑을 반납했을 것이다. 미움 받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판단한 시안은 장비들로부터 흥미를 거두었다.
“내가 사용하는 것보다 네가 사용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야. 게다가 무상으로 준 것도 아니잖아. 차라리 너에게 받은 영혼 조각을 사용해 병력의 질을 끌어올리는 편이 나한테는 이득이야.”
“오빠…….”
“감동받지 마.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해서 분배했을 뿐이니까. 마법사 아이템이 나오면 전부 내가 가질 거야. 부담 갖지도 마. 오히려 내가 불편해.”
“알겠어. 더 강해진 만큼 확실하게 오빠를 지켜줄게.”
그제야 안도하고 장갑을 착용한 그녀가 활짝 웃었다.
아이템 분배를 마친 시안은 당연하다는 듯 라임의 위에 드러누웠다. 물침대를 이용하는 느낌이라 편안함이 남다르다. 전투로 인한 피로가 단번에 날아가는 기분이다.
“오빠, 나도 라임이의 등에 올라가고 싶어.”
“안 돼. 좁아.”
“거대화하면 둘이서도 충분하잖아. 어차피 싸울 때 써먹지도 않는 거대화, 이렇게라도 써먹는 편이 숙련도를 올리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
“…그럴듯한데?”
그녀의 묘하게 논리적인 주장에 설득당한 시안이 라임의 등을 살짝 두드려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뜻을 알아차린 라임이 거대화를 사용해 몸집을 부풀렸다. 1미터 남짓하던 체구가 3미터까지 커졌다.
“고마워, 역시 오빠는 까탈스러운 척하면서 친절하네.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전문 용어가 있는 것 같았는데.”
“딱히 널 위한 건 아니야. 단지 네 말에 설득력이 있었을 뿐이라고.”
“아! 맞아. 그거야, 그거!”
배를 잡고 폭소를 터뜨린 그녀는 낑낑거리며 라임의 가죽을 잡고 올라와 그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몸을 웅크려 무릎을 끌어안은 그녀는 보고만 있어도 심장발작을 일으키게끔 하는 눈웃음을 지으며 시안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부담되는 눈빛이었으나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시안은 능숙하게 그녀의 눈빛을 받아넘겼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안은 의념 통화를 바탕으로 고블린 출몰 지역에 방치하고 온 고블린 기병대를 호출했다. 붉은 오크를 상대하는 도중 나타난 메시지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함이다.
“고블린, 혹시 특이사항이 있었나?”
<키엑! 기뻐해라, 왕. 우리가 인간들을 사냥했다. 무려 네 마리나 사냥했다. 칭찬해라.>
“…뭔가 했더니 플레이어를 사냥한 건가. 그래, 잘했어. 마음대로 행동해도 좋지만 절대 죽지는 마라.”
고블린 1분대는 시안의 휘하 몬스터 중에서도 가장 레벨이 높고 장비 상태도 뛰어나다. 무엇보다 슬라임 기병대이기에 그들을 잃는 것은 고블린과 슬라임, 두 마리를 동시에 손실하는 셈이다. 그런 이유로 시안은 그들에게 지대한 관심과 각별한 애정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격려와 충고의 말을 남긴 시안은 의념 통화 스킬을 차단했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울리던 고블린의 시끄러운 소리가 완벽하게 사라졌다.
간신히 침묵의 시간을 얻은 시안은 가만히 생각을 정리했다.
“몬스터를 다루는 것으로 보아 플레이어와 적대관계가 형성될 것이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설마 플레이어를 사냥해서 공포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네.”
턱을 매만지는 시안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뜻밖의 수확이 기분을 들뜨게 한 까닭이다.
그동안 시안은 마왕 후보에서 벗어나 진정한 마왕으로 거듭나기 위한 마지막 벽에 가로막혀 있었다. 그것은 마왕이 되기 위해 필요한 공포를 획득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유일 등급 몬스터인 라임을 휘하에 두는 것으로 소량의 공포를 얻은 이후 쭉 소식이 없어 걱정하고 있던 차였다. 그 와중 고블린들이 얻어준 소량의 공포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그동안 플레이어와의 접촉을 최대한 삼가왔는데, 이놈의 시스템이 적극적인 접촉을 유도하는군. 라임, 거점으로 돌아가자!”
공포를 얻을 방법을 알았으니 다음 차례는 수급하는 것이다.
[꾸이!]
힘차게 소리 지른 라임은 행여 등 위의 두 사람이 떨어질까 신중을 기해 꾸물거리며 거점으로 기어갔다. 저 멀리 보이는 마왕성의 천막이 바람에 펄럭이며 시안의 귀환을 반겨주었다.
거점으로 돌아온 시안이 가장 먼저 한 것은 고블린 석상과 같은 효과를 갖는 특수 건물, 슬라임의 놀이터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슬라임의 놀이터는 솟아오른 진흙이 미로처럼 꼬여 있는 작은 둔덕이었다. 그 내부에는 맑은 물웅덩이가 고여 있다.

<정보 열람>
이름 : 슬라임의 놀이터 ― 희귀 등급.
슬라임을 위해 만들어진 놀이터. 슬라임이 좋아하는 환경이 갖추어진 장소로 어린 슬라임들이 행복해합니다. 그들이 느끼는 밝은 감정은 더욱 강한 슬라임을 탄생하게 할 것입니다.
― 훈련소에서 희귀 등급의 특별한 슬라임이 탄생할 확률 증가한다.
― 휘하 슬라임의 체력이 3, 민첩이 1 상승한다.
― 휘하 슬라임이 20%의 추가 경험치를 획득한다.

고블린 석상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효과에는 얼추 차이가 있었다.
슬라임의 놀이터가 완성된 것을 확인한 시안은 열다섯 마리의 슬라임을 찍어냈다. 지갑이 홀쭉해졌지만 그동안 모아놓은 영혼 조각이 상당히 있었으므로 크게 부담이 될 정도는 아니다.
소환한 슬라임 중 두 마리가 희귀 등급의 슬라임으로 소환되었다.
“우와, 슬라임이 잔뜩 있어. 여긴 천국인가?”
물침대 같은 촉감을 자랑하는 슬라임을 좋아하게 된 소향이 새로이 소환된 슬라임을 보며 바보처럼 웃었다.
그녀가 마음껏 슬라임들과 놀 수 있도록 시간을 준 시안은 대장간으로 향했다.
일이 없어 빈둥거리던 대장장이 고블린은 시안을 발견한 순간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망치질을 시작했다.
“아, 바쁘다, 바빠.”
“기뻐해라. 내가 너를 위해 일거리를 가지고 왔어. 슬라임 안장이 15개. 창이랑 활, 검과 방패를 섞어서 30개 이상 만들도록.”
“지독한 노동 착취라고 생각한다. 나는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바이며, 고기가 먹고 싶다고 선언한다.”
“주란다고 줄 것 같아? 기간은 내일까지야.”
“키익! 키이이익!”
어리광을 부리며 머리털을 쥐어뜯는 고블린 대장장이의 곁으로 가죽 주머니가 툭 떨어졌다. 살짝 벌어진 입구에서 향긋한 냄새가 났다.
“…어차피 줄 거면서 왜 까칠한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키익, 왕은 고약하게 뒤틀려 있다.”
“남아서 잔반 처리를 하는 것뿐이야.”
대장간을 뒤로하고 시안이 향한 곳은 고블린 거점이었다. 때마침 사냥을 마치고 복귀한 고블린 2분대가 모닥불을 피워놓고 옹기종기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