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과거의 영웅은 마왕이 되었다
12화


“역시 여우나 늑대에 관련된 퀘스트는 너무 경쟁이 심해. 뭔가 괜찮은 퀘스트는 없으려나.”
판테라 도시의 모험가 조합 입구에 위치한 의뢰 게시판 앞에 선 궁수 플레이어 천우랑은 턱을 쓰다듬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게시판에 의뢰 용지는 잔뜩 달려 있었으나 원하는 내용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천우랑이 원하는 퀘스트는 늑대, 혹은 여우를 처치하는 퀘스트다.
현재 천우랑의 레벨은 4이며 그의 동료들 역시 비슷한 수준이다. 본래 그 정도 레벨이라면 슬라임, 혹은 고블린을 상대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천우랑을 포함해 그의 친구들은 PAO를 통해 가상현실을 처음 접했다. 때문에 컨트롤이 아직 미숙하여 고블린은 고사하고 슬라임조차 상대하기에 어려움을 느꼈다.
그건 비단 천우랑뿐만 아니라 PPO의 경험이 없는 신규 플레이어 전원에게 해당하는 말이었다.
그런 이유로 만만한 늑대나 여우와 관련된 퀘스트는 대기표가 생길 정도로 경쟁이 심했으며,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슬라임 관련 퀘스트조차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사슴은 이제 경험치도 안 주는데… 그렇다고 고블린에 도전하기는 조금 불안하고.”
“괜찮습니다. 제가 2인분 이상을 할 테니까 저만 믿으세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홀로 전전긍긍하던 천우랑의 어깨를 감싸는 손이 있었다.
돌아보니 커다란 덩치에 비해 비교적 순한 인상을 가진 30대 초반의 남자가 싱긋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있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장구채. 언제나 함께하던 친구 한 명이 개인적인 일로 사냥에 참가하지 못한다 하여 급하게 영입한 검사 플레이어다. 그리고 팀에서 유일한 PPO경험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장구채 님은 4레벨이잖아요. 고블린은 5레벨이고. 저를 포함해 나머지 팀원들은 아직 실력이 미숙한데 어렵지 않을까요?”
“괜찮습니다. 사실 PPO경험자들이라면 1레벨로도 상대할 수 있는 것이 고블린이거든요.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모든 어빌리티 5 상승이라는 특전까지 가지고 있는데 그 정도도 못해서야 영웅이라는 이름이 울지 않겠습니까? 아하하.”
설정에 취한 장구채는 스스로를 영웅이라 칭하며 나름 호탕하다 생각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장구채 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한 번 도전해 볼까요?”
장구채의 끈질긴 설득으로 인해 결국 천우랑은 혹하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낮은 레벨의 몬스터만 사냥한 까닭에 경험치 오르는 속도가 극악이라 느끼는 판국이었다. 그런 와중에 만나보기 힘든 PPO 경험자가 합류하여 자신만 믿으라고 호언장담을 하니 욕심이 생긴 것이다. 그와 함께라면 고블린 정도야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라는 용기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결국 그는 장구채의 말을 듣고 고블린 퇴치 의뢰를 받았다. 목적지는 별이 지는 숲에 거주하는 고블린 다섯 마리를 퇴치하는 것이다.
함께 PAO를 시작한 친구들에게 소식을 전하니 그들은 불안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신을 냈다.
“그래, 운전기사님이 계신데 무서워할 게 뭐냐.”
“우리는 안전띠만 붙들어 매고 있으면 되는 거지? 기사님 마음 바뀌시기 전에 당장 출발하자!”
친구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그나마 남아 있던 일말의 불안도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검사와 궁수, 사제와 마법사로 이루어진 천우랑의 팀은 간단한 준비를 마치고 곧장 판테라 도시의 동쪽에 있는 별이 지는 숲으로 향했다.
모험가, 즉 플레이어들에게 지원되는 마차를 이용해 별이 지는 숲에 도착한 일행은 장구채를 제외하고 하나같이 긴장의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여기부터는 슬라임과 고블린이 출몰한다고 해. 다들 조심하자. 장구채 님, 전위를 부탁드릴게요.”
“그깟 고블린이나 슬라임, 저 혼자서도 처치할 수 있습니다. 저만 믿으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그럼 출발하죠.”
호언장담을 하는 장구채를 앞세운 일행은 숲의 깊숙한 곳을 향해 나아갔다.
근처에서 사냥하고 있는 플레이어 팀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우나 늑대가 출몰하는 평원 지역에 비하면 없는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수가 적다.
그들이 최초로 조우한 몬스터는 슬라임이었다.
“슬라임이다! 전부 긴장하지 말고 차분하게 전투 준비를…….”
“흐아아압! 강력한 일격!”
팀의 리더인 천우랑으로부터 지시가 있기도 전에 앞으로 뛰쳐나간 장구채가 스킬을 사용해 검을 휘둘렀다. 은은한 청색의 빛이 맺힌 검이 슬라임을 강하게 내리쳤다.
“대단하다. 슬라임 HP 깎이는 것 좀 봐.”
평소 호들갑이 유별난 사제 플레이어 리안나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자신의 특기를 발휘했다.
하지만 천우랑은 그녀의 기분을 십분 이해했다. PPO의 특전을 받은 장구채의 공격은 그렇지 못한 다른 플레이어에 비해 확실하게 강력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딜!”
이빨을 들이미는 슬라임의 공격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피한 후 옆구리에 검을 틀어박는 모습은 자연히 물개박수를 치게 만들었다.
‘멋있다. 그리고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천우랑은 자신이 검을 들고 저 자리에 서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슬라임에게 깨물린 채 발버둥 치며 친구들의 도움을 기다렸을 것이다.
확실히 PPO의 경험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극심하다. 그리고 경험이 있는 장구채와 함께 하면 고블린 정도야 손쉽게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우리도 장구채 님을 도와드리자!”
신이 난 일행은 슬라임을 둘러싸 구타를 했다. 슬라임은 전위인 장구채를 어쩌지 못하고 쓰러져야만 했다.
장구채는 슬라임이 자폭을 한다는 지식까지 전수해 주었으며, 덕분에 별다른 문제없이 계속해서 사냥을 이어갈 수 있었다.
‘장구채 님을 만나다니, 역시 나는 운이 좋아. 어쩌면 오늘 내로 6레벨을 찍을 수 있을지도 몰라.’
기분 좋은 생각을 하며 더욱 깊은 곳으로 나아가니 고블린과도 조우할 수 있었다. 고블린은 야비하고 민첩했다.
하지만 고블린 따위야 별문제 없다고 호언장담하던 것이 거짓은 아니었던 듯 장구채는 어렵지 않게 고블린을 상대로 발을 묶어두었다. 그 틈을 노려 공격을 집중하니 수월하게 쓰러뜨릴 수 있었다.
고블린은 맥없이 쓰러져 빛의 입자가 되었다. 지금까지 두려워하던 것이 참으로 무색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우, 우리들이 고블린을 사냥했어! 뭐야, 잔뜩 긴장했는데 별거 아니잖아.”
“이러다가 랭커되는 거 아니야? 으하하!”
천우랑은 친구와 부둥켜안고 감동을 숨기지 않았다. 이대로 고블린을 상대로 레벨을 올리고 장구채에게 지식과 기술에 대한 노하우를 전수받는다면 랭커가 되는 것도 꿈은 아니라 여겨졌다.
그들의 꿈은 별이 지는 숲 깊은 곳에서 만난 한 무리의 고블린과 조우할 때까지 영광스럽게 빛났다.
“저, 저게 뭐야?”
가장 먼저 그것을 발견한 것은 천우랑의 친구이자 마법사 플레이어인 타이만이었다. 얼이 빠진 얼굴의 그는 머리에서 마법사 모자가 흘러내리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천우랑은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주었고, 그와 마찬가지로 굳어지고 말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무리를 짓고 있는 다섯 마리의 고블린이었다.
보통 고블린 무리는 많아야 둘을 초과하지 않는다. 그 이상으로 무리를 짓고 있는 고블린은 엄연한 이레귤러이며, 모험가 조합에 보고해야 하는 시급한 사항이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서 국한되고 있지 않았다. 고블린들이 말을 타듯 슬라임을 타고 있다는 것이 천우랑의 얼과 혼을 쏙 빼놓았다.
“장구채 님, 도대체 저건 뭐죠? 고블린이 슬라임을 말처럼 몰고 있다니, 저게 가능한 건가요?”
“저, 저도 잘 모르겠군요. 세상에,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죄송한데 뺨을 조금 꼬집어 주실래요?”
신규 플레이어인 천우랑으로서는 꿈도 못 꿀 정도로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장구채조차 저런 장면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본디 고블린과 슬라임은 적대관계다. 그리고 난폭한 성격의 슬라임은 누군가에게 길들여질 몬스터가 아니다. 저 조합은 명백하게 잘못되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설정상의 오류라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키익, 하등한 인간이군.”
그들을 발견한 고블린 중 유난히 덩치가 큰 고블린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그에 따라 배후에 나열해 있던 고블린들도 검을 뽑는다.
그제야 고블린들의 무장 상태에 시선을 준 장구채가 기겁을 하며 뒤로 나자빠졌다.
고블린과 슬라임이라는 이질적인 조합이 시선을 강탈해서 파악하는 것이 늦고야 말았다. 고블린들은 녹슨 단검이 아니라 제법 괜찮은 칼과 방패로 무장하고 있었다.
“고, 고블린 검사! 아니, 불가능해. 네임드 몬스터인 고블린 검사가 다섯 마리씩이나 몰려다니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 버그냐? 크로노스가 드디어 버그를 내놓은 거냐!”
게임에 대한 지식이 있기에 오히려 지금의 상황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장구채가 현실을 부정하듯 악을 썼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블린들은 자신들이 할 일을 할 뿐이었다. 검을 뽑아들고 발등으로 슬라임의 옆구리를 살짝 때린다.
“키이이익! 여자는 죽이고 남자는 사로잡아라! 우리들의 무서움을 널리 알리고 공포를 심어주는 거다! 키킥, 키이익!”
“뭐, 뭐라고? 보통은 반대잖아!”
눈을 날카롭게 뜨고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던 슬라임들은 허가가 떨어지자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슬라임은 고무공이 튀듯 가볍게 뛰며 일행의 지척까지 도달했다.
“으아아악! 강력한 일격!”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장구채가 스킬을 사용했다. 특전을 받아 상승한 능력치로 인해 4레벨 검사가 낼 수 없는 수준의 강한 공격이 완성된다.
‘위치가 높다.’
검을 휘두르는 도중 장구채는 생각했다.
본디 고블린의 신장은 1미터밖에 되지 않는다. 물리법칙상 위에서 내려치는 힘이 아래에서 올려치는 힘보다 강할 수밖에 없으며, 인간보다 신장이 작은 고블린은 필연적으로 불리한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슬라임 위에 타고 있는 고블린은 다르다. 슬라임의 높이에 고블린의 앉은키가 더해진 까닭에 신장 차이로 인한 메리트를 가져올 수 없게 되어버렸다.
다소 힘이 떨어진 일격이 고블린의 철제 방패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방패를 살짝 우그러뜨리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그뿐이었다. 고블린에게는 어떠한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크아악!”
돌연 아래쪽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장구채는 비명을 질렀다. 고블린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사이 슬라임이 허벅지를 물어버린 것이다.
덕분에 몸에서 힘이 빠지고 말았다. 고블린은 방패를 이용해 장구채의 검을 튕겨냈고, 강하게 휘두른 검이 장구채를 베었다.
“무슨 고블린의 공격력이…….”
비정상적인 공격력에 장구채는 몸을 떨었다.
아무리 레벨 차이가 있다지만 특전을 통해 동레벨의 플레이어보다 높은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는 장구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일격에 절반의 HP가 소모되었다.
쉬지 않고 쏟아지는 비현실의 연속에 장구채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런 장구채를 향해 슬라임과 고블린의 연속 공격이 이어졌다. 나름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장구채는 고블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HP가 바닥을 드러냈다.
“이건 말도 안 돼… 용납할 수 없어!”
통한에 찬 비명을 유언으로 남긴 장구채는 사망했다.
“자, 장구채 님이 죽었어.”
믿고 있던 장구채가 단 한 마리의 고블린도 상대하지 못한 채 로그아웃을 당하고 말았다.
슬라임을 타고 있어서 평범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천우랑은 죽음을 예상했다.
“키익! 인간, 우리의 왕을 위한 거름이 되어라!”
우르르 몰려오는 고블린 기병을 보며 천우랑은 눈을 감았다. 저항을 하겠다는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전의는 이미 꺾여버렸다.

<사망하셨습니다. 경험치가 하락하며 24시간 후 재접속이 가능합니다.>

“으아아아!”
힘들게 올린 경험치를 잃어버린 것으로도 모자라 접속제한 패널티까지 받은 천우랑은 가상현실 접속 기기를 벗어던지며 괴성을 내질렀다.
계속해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먼저 사망한 친구들에게서 온 전화다. 하지만 거기에 응해주고 있을 만큼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곧바로 컴퓨터 전원을 켠 천우랑은 PAO의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당연하다는 듯 떠오르는 광고 영상을 닫은 천우랑이 게시판에 글쓰기 버튼을 누르고 분노의 타이핑을 했다.

<제목 : 슬라임을 모는 고블린 기병.>
신규 플레이어입니다. 판테라 도시의 동쪽에 있는 별이 지는 숲에서 슬라임을 몰고 있는 다섯 마리의 고블린을 만났습니다. 팀에 소속되어 있던 PPO경험자분도 속수무책으로 당하시더군요. 이건 버그인가요?

글을 올린 그는 머리도 식힐 겸 환기를 하고 차가운 물을 마셨다. 손톱을 씹으며 한참 동안 거실을 방황하다 결국 컴퓨터 앞으로 돌아왔다.
그 짧은 사이에 몇 개의 댓글이 달려 있었는데, 내용은 참으로 한결같았다.

<허세가 심하시네요.>
<고블린과 슬라임은 적대 관계죠. PPO플레이어뿐 아니라 신규 플레이어라도 조금만 공부하면 아는 사실입니다.>
<거짓말을 하려면 조금 그럴 듯하게 하시기를.>

“우와, 거짓말 아닌데…….”
순식간에 양치기 소년으로 몰린 그는 두 손으로 모아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플레이 영상이라도 찍어 두는 거였는데. 격한 후회를 남기며 발만 굴렀다.

***

<플레이어를 사냥해 공포를 4만큼 획득했습니다.>

“…어?”
동쪽 깊은 곳에서 오크와 전투를 벌이던 시안은 갑자기 떠오르는 메시지에 놀라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그 틈을 노린 오크의 주먹이 그의 복부를 강타했다.
“크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