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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영웅은 마왕이 되었다
10화
그 다음 장면이 바뀌었다. 성녀가 고대 영혼들을 소환하는 동영상이 있은 후, 눈이 어지러울 만큼 수많은 특전의 혜택들과 마왕 후보에 대한 정보들이 떠올랐다.
그녀는 가상현실을 처음 접하지만 정보에 아주 까막눈은 아니었다. 타인도 아니고 가족의 일이기에 PVP팀 미르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으며,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업적을 세웠는지도 훤히 꿰고 있다.
때문에 서포터에게 또 다른 마왕 후보가 있다는 말을 들은 순간 자연스럽게 미르의 일원이자 쌍룡의 한 사람이라고 말해지는 그를, 시안을 떠올렸다.
무려 5년이라는 시간을 이향과 함께 미르로써 활동한 시안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라고, 이향이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게 된 이유를 알려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때문에 소향은 시안과 만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기왕이면 오빠를 깜짝 놀라게 해줘야지.”
조금이지만 시안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주어진 1주일 동안 부단히도 열심히 세력을 키웠다.
하지만 그녀는 희대의 천재라 불리는 미르 팀에 비하면 부족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무엇보다 게임에 대한 지식과 섬세한 정보가 부족해 실패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녀는 미르 팀의 수준에 맞춰서 제작된 석재 골렘조차 쓰러뜨리지 못한 채 치욕적인 패배를 맞이하게 되었다.
* * *
“그렇게 된 겁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언니를 대신해 미르의 한 축을 담당하고 싶습니다.”
“잘 부탁하긴 뭘 부탁한다는 거야.”
경쾌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벌리고 달려드는 소향을 저지한 시안은 라임을 앞세웠다. 커다란 눈꽃 슬라임에 가로막혀 목표물에 접근할 수 없자 소향은 울상을 지었다.
“1년 만에 만나는 건데, 가상현실에서는 처음 만나는 건데 이럴 수가. 오빠가 차가워. 설마 애정이 식은 거야?”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미르의 일원인 이향의 여동생이라는 인연으로 인해 2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소향은 첫 만남부터 끊임없이 직설적인 애정을 보내왔다.
당시에는 게임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여자를 사귄다는 발상 자체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향과의 일이 있기 때문에 소향의 애정이 부담스러웠다.
할 수 있다면 그녀와는 가끔 안부를 주고받는 아는 오빠동생. 그 정도의 관계를 구축하고 싶다는 것이 시안의 본심이다.
“그보다 진이향은 더 이상 게임 같은 것은 하지 않는 건가… 설마 하기는 했지만 그게 실제로 일어나니 기운 빠지네.”
시안은 손을 들어 뒷머리의 두피를 벗겨낼 기세로 긁어 댔다. 그 행동에는 숨길 수 없는 분노와 짜증이 묻어났다.
[시안 님! 시안 님!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평소처럼 호들갑을 떨며 머리 위를 비행하고 있는 왕눈이가 보인다.
처음에는 팔다리에 벌레가 기는 것처럼 혐오감이 이는 외모였으나, 그동안 정이라도 든 건지 이제는 그 생김새가 제법 익숙해졌다. 아주 조금이지만 귀엽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로써 시안 님은 유일한 마왕 후보가 되셨어요. 이제 인간들로부터 공포를 갈취해 마신님께 헌납하시면 진정한 마왕으로 각성하실 수 있을 거예요. 이 불초 왕눈이는 그날이 오기만을 눈꼽아 기다리겠습니다.]
“손꼽아 기다리는 거겠지. 그보다 공포는 어떻게 모을 수 있는 거야?”
[그건 시안 님께서 스스로 알아내셔야 합니다! 그럼 슬슬 역할을 마친 경기장을 폐쇄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왕눈이는 땅에 침을 뱉었고, 그 침에서 솟구친 백색의 문이 열리며 익숙한 거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작별 인사를 마친 왕눈이는 당연하다는 듯 하늘 높이 솟구쳐 사라져 버렸다.
“이만 돌아가자.”
시안이 명령에 고블린들은 승리의 함성을 내지르며 문을 통과했다. 그들의 뒤를 따라 문을 통과하려던 시안은 자신을 부르는 애절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막으라는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라임의 뒤에서 어린애처럼 울상을 짓고 있는 소향이 보인다.
버려진 강아지처럼 눈물을 잔뜩 머금은 채 응시하는 눈을 차마 모른 척할 수 없던 시안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임시다. 임시로 팀을 짜도록 하자. 만약 네 실력이 미달이라 판단될 경우에는 가차 없이 이마 한복판에 불합격 도장을 찍을 거야.”
“응! 마음에 들도록 노력할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그녀는 태양을 바라보는 해바라기가 연상되는 눈부신 미소를 지었다.
* * *
진정한 마왕이 되기 위해 공포를 얻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시안은 새로이 팀원이 된 소향의 성능을 파악하는 것에 높은 중요도를 책정했다.
시안과 마찬가지로 마왕 후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던 소향이지만 경쟁에서 밀려 후보에서 탈락한 이후 암흑 검사가 되었다.
“사실 빛 마법사도 선택지에 있었는데, 마법이라는 거 생각보다 사용하기 어려워서 깔끔하게 포기했어. 나는 머리 쓰는 일에 약하거든. 무엇을 숨기리. 중·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학급 평균을 깎아먹는 존재였어.”
“그런 게 뭐 자랑거리라고 가슴을 펴며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거야? 조금은 부끄러워해라. 그리고 네 부모 역할을 해준 이향이에게 사과해.”
“언니, 바보 같은 동생이라 미안해!”
소향을 대동한 시안은 숲의 동쪽으로 향했다. 얼마 전 고블린으로부터 숲의 동쪽에서 오크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오크의 레벨은 9.
시안보다 높은 레벨이므로 만족스러운 만큼의 경험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새하얀 백발을 묶어 올린 소향은 사냥터까지 가는 도중 시안이 왼팔에 매달린 채 좀처럼 떨어지지를 않았다. 과거에도 느꼈지만 그녀의 애정은 몹시 부담스럽다.
“앗! 오크 발견!”
소향의 손가락이 먼 곳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가니 멀리서 나무를 붙잡고 흔들어 대는 오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오크는 근육질의 몸에 녹색의 피부를 가진 몬스터다. 덩치는 족히 2미터에 달하며 검은색의 머리털을 가지고 있다.
상당히 강한 근력과 내구성을 가지고 있지만 몸놀림이 둔하고 지능이 낮은 편이다. 숙련된 사냥 팀이라면 큰 피해 없이 처치할 수 있어 인기 있는 사냥감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싶어 자세히 살펴보니 나무 위에서 떨고 있는 야생의 원숭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원숭이를 보며 오크는 군침을 흘렸다. 원숭이를 사냥감으로 점찍은 것이다.
“마침 잘됐네.”
사냥감에 정신이 팔린 오크는 시안을 등지고 있다. 그야말로 기습하기 딱 좋은 상황. 시안은 망설임 없이 암흑 화살을 사용했다. 시위를 놓자 흑색의 화살이 빠르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상당히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안이 쏘아낸 화살은 정확하게 오크의 머리통에 적중했다.
강력한 대미지를 입히는 것과 동시에 어둠이 퍼지며 오크의 얼굴을 휘감았다. 상태 이상 실명이 발동된 것이다.
“크악, 크아악? 앞이 안 보인다!”
당황하며 허공에 주먹질을 시작하는 오크는 어디부터 때려주면 좋을까 고민이 될 정도로 빈틈이 넘쳤다.
“여기서부터는 나한테 맡겨줘. 오빠한테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믿어도 될까 모르겠네.”
“내가 비록 학급의 평균점을 깎아먹는 아귀이기는 했지만 체육대회에서는 언제나 반을 우승으로 만든 일등공신이었다고.”
자기만 믿어달라며 진중한 얼굴을 한 소향이 주먹으로 가슴을 소심하게 두드렸다.
미우나 고우나 앞으로 함께하게 되었으니 그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시안은 그녀의 출격을 허락했다.
“한번 믿어볼게. 믿기로 한 이상 지원사격은 없으니 그리 알아.”
“알겠어. 심장 안 멈추게 꽉 틀어쥐고 감탄할 준비하고 있어.”
자신을 믿어준다는 시안의 말에 부귀영화를 약속받은 사람처럼 행복하게 웃은 소향이 허리춤에서 고블린 대장장이가 만든 철검을 뽑았다.
힘차게 달려 나가는 소향의 뒷모습을 보며 시안은 조용히 개조 마법을 구상했다. 믿는다고 선언하기는 했지만 소향의 레벨은 6. 오크와는 세 개의 차이가 있다.
뿐만 아니라 파티 시스템을 추천하는 PAO의 특성상 재능이 없는 자가 1:1로 몬스터를 쓰러뜨리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오크의 주먹에 얻어맞고 울면서 구조를 요청할 그녀를 돕기 위해 준비를 하는 것이다.
“하아아앗!”
하지만 금방 쓰러질 것이라던 예상과 다르게 그녀는 놀라운 움직임을 보였다.
체계적인 검술을 배운 것이 아닌지라 그녀가 휘두르는 검은 그저 마구잡이 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놀림이 재빠르고 동체시력이 좋아 오크의 공격을 한 차례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는 한편으로 오크의 급소를 노려 검을 찌르는 일격에서 강한 힘이 느껴진다. 그녀는 부족한 체격의 차이를 메우기 위해 본능적으로 공격에 체중을 실었다.
“크아악! 쥐새끼처럼 빠른 인간! 죽인다!”
실명 상태에서 벗어난 오크가 마구 손을 휘둘렀다. 그녀를 붙잡아 사지를 찢을 생각에서 열심히 손을 놀렸으나 그녀는 잡힐 것 같으면서도 잡히지 않았다.
“어어? 우오오, 위험해라. 잡힐 뻔했네.”
그녀의 얼굴표정은 진중함, 용맹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입가에 맺힌 초승달을 닮은 미소는 그녀가 지금의 전투를 즐기고 있음을 증명했다.
그녀는 춤을 추듯 움직이며 전투를 압도했다. 공격력이 모자라 일격에 커다란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으나 오크의 신체 곳곳에 붉은 실선이 생기며 출혈이 누적되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악!”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건지 오크가 몸을 던지며 태클을 시도했다. 그 위력이 사뭇 대단하다.
2미터가 넘는 거구가 갑작스럽게 달려들면 당황할 법도 하건만 그녀는 침착하게 상대를 노려보았다.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맺혀 있다.
“검의 춤.”
그녀가 스킬을 사용하자 칼끝에 작은 흑색의 빛이 생겨났다. 검이 움직일 때마다 빛은 길고 선명한 잔상을 남겼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녀의 몸이 뜀틀을 넘듯 자연스럽게 오크를 뛰어넘었다. 착지를 마친 그녀는 허점이 훤히 드러난 등에 수차례 검을 휘둘렀다.
오크는 등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그녀를 쫓기 위해 발악했다. 하지만 사방에 남아 있는 검의 잔상이 그의 눈을 괴롭혔다.
“천재인가…….”
그녀를 본 시안이 순수하게 감탄하며 읊조렸다.
보통 처음으로 다이브형 가상현실을 접한 사람은 저런 움직임을 보이지 못한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적의 공격을 멋들어지게 회피하려다가 몇 번 죽음을 겪은 플레이어는 그 후 방패를 들어 공격을 막아내는 쪽으로 전투 방식을 바꾸게 된다.
회피형 검사의 수는 상당히 적은 편이며, 그녀처럼 완벽하게 적의 공격을 회피하는 검사는 그리 많지 않다.
“하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진이향과 같은 핏줄인데 평범한 녀석일 리가 없지.”
이쯤 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짐 덩어리라 생각한 그녀는 생각 이상으로 재능 덩어리였다.
“오빠, 끝났어!”
얼굴에 튄 피를 소매로 닦아낸 그녀는 화사하게 웃었다. 얼굴 가득 피칠갑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아름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의 발밑에서는 전신이 난자되어 쓰러진 오크가 있었다.
오크의 사체는 빛의 입자가 되어 서서히 흩어졌다. 전리품은 가죽과 이빨, 그리고 영혼 조각이다.
“어때, 나 스스로도 놀란 이 완벽한 재능에 반했어?”
“그 정도는 아니야. 하지만 예상 외로 잘 싸워서 놀란 건 사실이야. 수고했어.”
솔직하게 그녀의 재능을 칭찬한 시안은 하이파이브를 위해 손바닥을 들었다.
반사적으로 손바닥을 들어 올리던 그녀는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으로 멈칫하더니 갑작스럽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마구 머리를 비벼댔다.
“이거야말로 셀프 머리 쓰다듬기!”
“…….”
* * *
“오오… 이렇게 놓고 보니까 제법 그럴싸한데?”
“쯧쯧, 그럴싸한 것이 아니다. 엄청 멋있는 거다. 보는 눈이 너무 없다.”
시안의 박한 칭찬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고블린 검사가 정정을 요청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대낮에 별이 보일 만큼 강렬한 꿀밤이었다. 고블린에게 있어 시안은 여전히 악덕 주인이었다.
말과 달리 시안은 눈앞의 존재들을 향해 마음속으로 열렬한 찬사를 보내는 중이었다. 현재 그의 눈앞에 있는 고블린은 슬라임을 타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나도 슬라임을 타고 싶다. 내 전용 슬라임을 갖고 싶다.”
새로이 개방된 슬라임 관련 건물에 대한 설명을 정독하고 있는 시안에게 다가온 고블린이 슬라임에 타고 싶다는 요청을 해왔다.
쿠션처럼 푹신푹신한 라임의 위에 드러누워 행복한 얼굴로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하는 시안이 어지간히도 부러웠던 것이다.
“안 돼. 네 장난을 위해 돈과 시간을 소모할 여유가 없어. 당장 며칠 후에…….”
“키익! 타고 싶다, 타고 싶다!”
원하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떼를 쓰기 시작하는 고블린으로 인해 시안은 기함을 했다. 제자리에서 방방 뛰어 대며 늘어뜨린 팔을 이리저리 흔드는 모습은 혼자 보기 아까울 만큼 참으로 가관이었다.
“내가 병사를 키우는지, 애를 키우는지 모르겠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아이의 인성 교육을 하는 마음으로 딱 잘라 거절하려던 시안은 돌연 떠오른 아이디어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아니, 잠깐만. 기병… 슬라임을 탄 고블린 기병이라니, 재미있을 것 같잖아.”
슬라임은 둔하게 생겼지만 외형과 다르게 제법 높은 민첩성을 가지고 있다. 고블린도 비교적 높은 민첩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체력이 압도적으로 높은 슬라임이 지구력 면에서 우월하다.
물론 여러 가지 단점도 있겠지만 효율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시안을 움직이고 있는 동력은 순수한 흥미 본위였다.
10화
그 다음 장면이 바뀌었다. 성녀가 고대 영혼들을 소환하는 동영상이 있은 후, 눈이 어지러울 만큼 수많은 특전의 혜택들과 마왕 후보에 대한 정보들이 떠올랐다.
그녀는 가상현실을 처음 접하지만 정보에 아주 까막눈은 아니었다. 타인도 아니고 가족의 일이기에 PVP팀 미르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으며,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업적을 세웠는지도 훤히 꿰고 있다.
때문에 서포터에게 또 다른 마왕 후보가 있다는 말을 들은 순간 자연스럽게 미르의 일원이자 쌍룡의 한 사람이라고 말해지는 그를, 시안을 떠올렸다.
무려 5년이라는 시간을 이향과 함께 미르로써 활동한 시안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라고, 이향이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게 된 이유를 알려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때문에 소향은 시안과 만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기왕이면 오빠를 깜짝 놀라게 해줘야지.”
조금이지만 시안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주어진 1주일 동안 부단히도 열심히 세력을 키웠다.
하지만 그녀는 희대의 천재라 불리는 미르 팀에 비하면 부족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무엇보다 게임에 대한 지식과 섬세한 정보가 부족해 실패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녀는 미르 팀의 수준에 맞춰서 제작된 석재 골렘조차 쓰러뜨리지 못한 채 치욕적인 패배를 맞이하게 되었다.
* * *
“그렇게 된 겁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언니를 대신해 미르의 한 축을 담당하고 싶습니다.”
“잘 부탁하긴 뭘 부탁한다는 거야.”
경쾌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벌리고 달려드는 소향을 저지한 시안은 라임을 앞세웠다. 커다란 눈꽃 슬라임에 가로막혀 목표물에 접근할 수 없자 소향은 울상을 지었다.
“1년 만에 만나는 건데, 가상현실에서는 처음 만나는 건데 이럴 수가. 오빠가 차가워. 설마 애정이 식은 거야?”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미르의 일원인 이향의 여동생이라는 인연으로 인해 2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소향은 첫 만남부터 끊임없이 직설적인 애정을 보내왔다.
당시에는 게임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여자를 사귄다는 발상 자체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향과의 일이 있기 때문에 소향의 애정이 부담스러웠다.
할 수 있다면 그녀와는 가끔 안부를 주고받는 아는 오빠동생. 그 정도의 관계를 구축하고 싶다는 것이 시안의 본심이다.
“그보다 진이향은 더 이상 게임 같은 것은 하지 않는 건가… 설마 하기는 했지만 그게 실제로 일어나니 기운 빠지네.”
시안은 손을 들어 뒷머리의 두피를 벗겨낼 기세로 긁어 댔다. 그 행동에는 숨길 수 없는 분노와 짜증이 묻어났다.
[시안 님! 시안 님!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평소처럼 호들갑을 떨며 머리 위를 비행하고 있는 왕눈이가 보인다.
처음에는 팔다리에 벌레가 기는 것처럼 혐오감이 이는 외모였으나, 그동안 정이라도 든 건지 이제는 그 생김새가 제법 익숙해졌다. 아주 조금이지만 귀엽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로써 시안 님은 유일한 마왕 후보가 되셨어요. 이제 인간들로부터 공포를 갈취해 마신님께 헌납하시면 진정한 마왕으로 각성하실 수 있을 거예요. 이 불초 왕눈이는 그날이 오기만을 눈꼽아 기다리겠습니다.]
“손꼽아 기다리는 거겠지. 그보다 공포는 어떻게 모을 수 있는 거야?”
[그건 시안 님께서 스스로 알아내셔야 합니다! 그럼 슬슬 역할을 마친 경기장을 폐쇄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왕눈이는 땅에 침을 뱉었고, 그 침에서 솟구친 백색의 문이 열리며 익숙한 거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작별 인사를 마친 왕눈이는 당연하다는 듯 하늘 높이 솟구쳐 사라져 버렸다.
“이만 돌아가자.”
시안이 명령에 고블린들은 승리의 함성을 내지르며 문을 통과했다. 그들의 뒤를 따라 문을 통과하려던 시안은 자신을 부르는 애절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막으라는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라임의 뒤에서 어린애처럼 울상을 짓고 있는 소향이 보인다.
버려진 강아지처럼 눈물을 잔뜩 머금은 채 응시하는 눈을 차마 모른 척할 수 없던 시안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임시다. 임시로 팀을 짜도록 하자. 만약 네 실력이 미달이라 판단될 경우에는 가차 없이 이마 한복판에 불합격 도장을 찍을 거야.”
“응! 마음에 들도록 노력할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그녀는 태양을 바라보는 해바라기가 연상되는 눈부신 미소를 지었다.
* * *
진정한 마왕이 되기 위해 공포를 얻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시안은 새로이 팀원이 된 소향의 성능을 파악하는 것에 높은 중요도를 책정했다.
시안과 마찬가지로 마왕 후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던 소향이지만 경쟁에서 밀려 후보에서 탈락한 이후 암흑 검사가 되었다.
“사실 빛 마법사도 선택지에 있었는데, 마법이라는 거 생각보다 사용하기 어려워서 깔끔하게 포기했어. 나는 머리 쓰는 일에 약하거든. 무엇을 숨기리. 중·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학급 평균을 깎아먹는 존재였어.”
“그런 게 뭐 자랑거리라고 가슴을 펴며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거야? 조금은 부끄러워해라. 그리고 네 부모 역할을 해준 이향이에게 사과해.”
“언니, 바보 같은 동생이라 미안해!”
소향을 대동한 시안은 숲의 동쪽으로 향했다. 얼마 전 고블린으로부터 숲의 동쪽에서 오크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오크의 레벨은 9.
시안보다 높은 레벨이므로 만족스러운 만큼의 경험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새하얀 백발을 묶어 올린 소향은 사냥터까지 가는 도중 시안이 왼팔에 매달린 채 좀처럼 떨어지지를 않았다. 과거에도 느꼈지만 그녀의 애정은 몹시 부담스럽다.
“앗! 오크 발견!”
소향의 손가락이 먼 곳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가니 멀리서 나무를 붙잡고 흔들어 대는 오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오크는 근육질의 몸에 녹색의 피부를 가진 몬스터다. 덩치는 족히 2미터에 달하며 검은색의 머리털을 가지고 있다.
상당히 강한 근력과 내구성을 가지고 있지만 몸놀림이 둔하고 지능이 낮은 편이다. 숙련된 사냥 팀이라면 큰 피해 없이 처치할 수 있어 인기 있는 사냥감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싶어 자세히 살펴보니 나무 위에서 떨고 있는 야생의 원숭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원숭이를 보며 오크는 군침을 흘렸다. 원숭이를 사냥감으로 점찍은 것이다.
“마침 잘됐네.”
사냥감에 정신이 팔린 오크는 시안을 등지고 있다. 그야말로 기습하기 딱 좋은 상황. 시안은 망설임 없이 암흑 화살을 사용했다. 시위를 놓자 흑색의 화살이 빠르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상당히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안이 쏘아낸 화살은 정확하게 오크의 머리통에 적중했다.
강력한 대미지를 입히는 것과 동시에 어둠이 퍼지며 오크의 얼굴을 휘감았다. 상태 이상 실명이 발동된 것이다.
“크악, 크아악? 앞이 안 보인다!”
당황하며 허공에 주먹질을 시작하는 오크는 어디부터 때려주면 좋을까 고민이 될 정도로 빈틈이 넘쳤다.
“여기서부터는 나한테 맡겨줘. 오빠한테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믿어도 될까 모르겠네.”
“내가 비록 학급의 평균점을 깎아먹는 아귀이기는 했지만 체육대회에서는 언제나 반을 우승으로 만든 일등공신이었다고.”
자기만 믿어달라며 진중한 얼굴을 한 소향이 주먹으로 가슴을 소심하게 두드렸다.
미우나 고우나 앞으로 함께하게 되었으니 그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시안은 그녀의 출격을 허락했다.
“한번 믿어볼게. 믿기로 한 이상 지원사격은 없으니 그리 알아.”
“알겠어. 심장 안 멈추게 꽉 틀어쥐고 감탄할 준비하고 있어.”
자신을 믿어준다는 시안의 말에 부귀영화를 약속받은 사람처럼 행복하게 웃은 소향이 허리춤에서 고블린 대장장이가 만든 철검을 뽑았다.
힘차게 달려 나가는 소향의 뒷모습을 보며 시안은 조용히 개조 마법을 구상했다. 믿는다고 선언하기는 했지만 소향의 레벨은 6. 오크와는 세 개의 차이가 있다.
뿐만 아니라 파티 시스템을 추천하는 PAO의 특성상 재능이 없는 자가 1:1로 몬스터를 쓰러뜨리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오크의 주먹에 얻어맞고 울면서 구조를 요청할 그녀를 돕기 위해 준비를 하는 것이다.
“하아아앗!”
하지만 금방 쓰러질 것이라던 예상과 다르게 그녀는 놀라운 움직임을 보였다.
체계적인 검술을 배운 것이 아닌지라 그녀가 휘두르는 검은 그저 마구잡이 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놀림이 재빠르고 동체시력이 좋아 오크의 공격을 한 차례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는 한편으로 오크의 급소를 노려 검을 찌르는 일격에서 강한 힘이 느껴진다. 그녀는 부족한 체격의 차이를 메우기 위해 본능적으로 공격에 체중을 실었다.
“크아악! 쥐새끼처럼 빠른 인간! 죽인다!”
실명 상태에서 벗어난 오크가 마구 손을 휘둘렀다. 그녀를 붙잡아 사지를 찢을 생각에서 열심히 손을 놀렸으나 그녀는 잡힐 것 같으면서도 잡히지 않았다.
“어어? 우오오, 위험해라. 잡힐 뻔했네.”
그녀의 얼굴표정은 진중함, 용맹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입가에 맺힌 초승달을 닮은 미소는 그녀가 지금의 전투를 즐기고 있음을 증명했다.
그녀는 춤을 추듯 움직이며 전투를 압도했다. 공격력이 모자라 일격에 커다란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으나 오크의 신체 곳곳에 붉은 실선이 생기며 출혈이 누적되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악!”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건지 오크가 몸을 던지며 태클을 시도했다. 그 위력이 사뭇 대단하다.
2미터가 넘는 거구가 갑작스럽게 달려들면 당황할 법도 하건만 그녀는 침착하게 상대를 노려보았다.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맺혀 있다.
“검의 춤.”
그녀가 스킬을 사용하자 칼끝에 작은 흑색의 빛이 생겨났다. 검이 움직일 때마다 빛은 길고 선명한 잔상을 남겼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녀의 몸이 뜀틀을 넘듯 자연스럽게 오크를 뛰어넘었다. 착지를 마친 그녀는 허점이 훤히 드러난 등에 수차례 검을 휘둘렀다.
오크는 등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그녀를 쫓기 위해 발악했다. 하지만 사방에 남아 있는 검의 잔상이 그의 눈을 괴롭혔다.
“천재인가…….”
그녀를 본 시안이 순수하게 감탄하며 읊조렸다.
보통 처음으로 다이브형 가상현실을 접한 사람은 저런 움직임을 보이지 못한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적의 공격을 멋들어지게 회피하려다가 몇 번 죽음을 겪은 플레이어는 그 후 방패를 들어 공격을 막아내는 쪽으로 전투 방식을 바꾸게 된다.
회피형 검사의 수는 상당히 적은 편이며, 그녀처럼 완벽하게 적의 공격을 회피하는 검사는 그리 많지 않다.
“하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진이향과 같은 핏줄인데 평범한 녀석일 리가 없지.”
이쯤 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짐 덩어리라 생각한 그녀는 생각 이상으로 재능 덩어리였다.
“오빠, 끝났어!”
얼굴에 튄 피를 소매로 닦아낸 그녀는 화사하게 웃었다. 얼굴 가득 피칠갑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아름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의 발밑에서는 전신이 난자되어 쓰러진 오크가 있었다.
오크의 사체는 빛의 입자가 되어 서서히 흩어졌다. 전리품은 가죽과 이빨, 그리고 영혼 조각이다.
“어때, 나 스스로도 놀란 이 완벽한 재능에 반했어?”
“그 정도는 아니야. 하지만 예상 외로 잘 싸워서 놀란 건 사실이야. 수고했어.”
솔직하게 그녀의 재능을 칭찬한 시안은 하이파이브를 위해 손바닥을 들었다.
반사적으로 손바닥을 들어 올리던 그녀는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으로 멈칫하더니 갑작스럽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마구 머리를 비벼댔다.
“이거야말로 셀프 머리 쓰다듬기!”
“…….”
* * *
“오오… 이렇게 놓고 보니까 제법 그럴싸한데?”
“쯧쯧, 그럴싸한 것이 아니다. 엄청 멋있는 거다. 보는 눈이 너무 없다.”
시안의 박한 칭찬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고블린 검사가 정정을 요청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대낮에 별이 보일 만큼 강렬한 꿀밤이었다. 고블린에게 있어 시안은 여전히 악덕 주인이었다.
말과 달리 시안은 눈앞의 존재들을 향해 마음속으로 열렬한 찬사를 보내는 중이었다. 현재 그의 눈앞에 있는 고블린은 슬라임을 타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나도 슬라임을 타고 싶다. 내 전용 슬라임을 갖고 싶다.”
새로이 개방된 슬라임 관련 건물에 대한 설명을 정독하고 있는 시안에게 다가온 고블린이 슬라임에 타고 싶다는 요청을 해왔다.
쿠션처럼 푹신푹신한 라임의 위에 드러누워 행복한 얼굴로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하는 시안이 어지간히도 부러웠던 것이다.
“안 돼. 네 장난을 위해 돈과 시간을 소모할 여유가 없어. 당장 며칠 후에…….”
“키익! 타고 싶다, 타고 싶다!”
원하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떼를 쓰기 시작하는 고블린으로 인해 시안은 기함을 했다. 제자리에서 방방 뛰어 대며 늘어뜨린 팔을 이리저리 흔드는 모습은 혼자 보기 아까울 만큼 참으로 가관이었다.
“내가 병사를 키우는지, 애를 키우는지 모르겠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아이의 인성 교육을 하는 마음으로 딱 잘라 거절하려던 시안은 돌연 떠오른 아이디어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아니, 잠깐만. 기병… 슬라임을 탄 고블린 기병이라니, 재미있을 것 같잖아.”
슬라임은 둔하게 생겼지만 외형과 다르게 제법 높은 민첩성을 가지고 있다. 고블린도 비교적 높은 민첩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체력이 압도적으로 높은 슬라임이 지구력 면에서 우월하다.
물론 여러 가지 단점도 있겠지만 효율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시안을 움직이고 있는 동력은 순수한 흥미 본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