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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영웅은 마왕이 되었다
9화


“…가자.”
정수리를 뚫고 솟구치는 긴장감을 억누르며 시안은 짧게 한마디를 고했다. 문 너머를 향해 힘차게 걸음을 내딛는 시안에게서 얼추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한 싸움을 하러 나가는 영웅의 풍모마저 느껴졌다.
나열해 있던 고블린들이 나름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시안의 뒤를 따랐다.
시공의 틈새로 완전히 접어들자 감싸고 있는 공기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더 무겁고 건조하며 뜨겁다. 그런 공기를 마시고 있으려니 자연히 몸에 열이 돌기 시작했다.

<마신이 만든 경기장, 시공의 틈새에 진입하셨습니다. 경쟁자를 쓰러뜨리기 전에는 이 장소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경고의 의미가 담긴 메시지가 떠올랐다. 시안은 내용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거친 손짓으로 메시지를 지워버렸다. 집중이 흐트러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길게 숨을 내쉰 시안은 가만히 서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특별한 장애물은 없지만 어둠이 이상한 작용을 하고 있는지 반경 30미터 이상을 살펴볼 수가 없게끔 되어 있다.
밟고 있는 대지의 폭은 약 20미터 가량이었으며, 외길이기에 길을 헤맬 필요는 없게끔 설계되어 있었다. 저 길 끝에서 그녀와 만날 것을 생각하며 시안은 시공의 틈새에서의 첫 걸음을 내딛었다.
[…침입자 발견. 적을 배제합니다.]
“왕눈이 녀석이 말한 수호자인가.”
이향과 그녀의 세력을 제외하면 어떠한 생명체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라 생각했건만.
예상외로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몬스터가 출몰했다.
어둠을 뚫고 등장한 것은 약 2미터 가량의 덩치를 가진 바위 골렘이다. 상반신이 비정상적으로 거대하며 두 팔이 워낙 커다란 나머지 바닥에 질질 끌렸다.
바위 골렘은 하나밖에 없는 안광을 번뜩이며 시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바위 골렘의 레벨은 12. 현재의 시안과 비교하면 상당히 높지만 부하들이 있기에 부담되는 정도는 아니다.
“약점은 눈이다. 화살을 쏴!”
거대한 덩치를 가진 적의 등장에 갈팡질팡하던 고블린들은 시안의 명령이 있고 나서야 침착함을 되찾고 전투에 임했다.
고블린들이 쏘아내는 화살이 바위 골렘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조악한 기술로 만든 활과 바닥을 치는 솜씨가 더해지니 대부분의 화살이 목표로부터 빗나가는 명장면이 연출되었다.
하지만 하나의 눈 먼 화살이 바위 골렘의 눈을 정확하게 때렸다. 바위 골렘은 소리 없이 몸부림을 치며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틈을 노린 여러 개의 암흑탄이 바위 골렘의 신체 곳곳을 때렸다. 물리 공격에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만큼 마법 공격에 취약한 바위 골렘의 생명력이 뭉텅이로 깎여나갔다.
광분한 바위 골렘이 방어를 포기하고 달려와 주먹을 휘둘렀다. 워낙 몸놀림이 둔한 상대인지라 시안은 무리 없이 피할 수 있었으나 고블린들은 아니었다.
정통으로 공격을 허용한 한 마리 고블린이 허공으로 솟구치더니 발판이 없는 곳으로 떨어졌다. 애처로운 비명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여기서 떨어지면 죽는 건가? 신경 써야 할 게 늘어났잖아.”
의외의 위험 요소를 발견한 시안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녀와의 싸움에서도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바위 골렘의 등을 향해 몇 번이고 암흑탄을 쏘았다.

<어둠 마법의 스킬 숙련도가 하급 5단계로 상승합니다. 새로운 스킬 ‘암흑 화살’과 ‘속박의 그림자’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타이밍 좋게 마법의 숙련도가 상승하며 새로운 스킬이 해금되었다.
“타이밍 좋고, 암흑 화살.”
속박의 그림자는 암흑탄보다 공격력이 낮다. 그 대신 상대방의 발을 묶는 상태 이상 효과를 갖고 있다.
하지만 당장 필요한 것은 바위 골렘을 쓰러뜨릴 수 있는 강한 공격력을 가진 스킬이다. 때문에 시안은 암흑 화살을 사용했다.
암흑 화살은 위력이 우수하고 적당한 수준의 관통력을 가졌으며, 머리를 맞출 시 확률적으로 실명 상태 이상을 부여하는 마법이다. 영창 시간이 길다는 단점이 있지만 세 배의 영창 속도를 가진 시안은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기도 하다.
스킬을 캐스팅하자 그의 손 위에 검은 구체가 생성되었다. 주먹을 쥐자 구체는 어둠이 넘실거리는 활이 되었다. 시위를 당기자 어둠으로 구성된 화살이 생겨난다.
“라임, 발목을 깨물어서 시간을 끌어.”
[꾸익!]
시안의 명령이 떨어지자 라임이 바위 골렘의 발목을 물었다. 얼핏 보면 강아지가 놀아달라고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라임의 정체는 무려 유일 등급의 몬스터다. 그 단순한 공격에 바위 골렘의 HP는 빠르게 소모되었다.
바위 골렘과 라임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에 마법이 완성되었다. 시위를 놓자 빠르게 쏘아진 흑색의 화살이 바위 골렘의 머리에 적중했다.
강력한 대미지를 입히는 것과 동시에 어둠이 퍼지며 오크의 바위 골렘을 휘감았다. 상태 이상 실명이 발동된 것이다.
[오류 발생. 오류 발생.]
앞이 보이지 않아 허우적거리는 바위 골렘은 조금 덩치가 크고 튼튼한 샌드백에 불과하다.
시안은 꾸준히 마법을 때려 박았으며, 고블린들은 바위 골렘의 공격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열심히 화살을 쏴댔다.
그 결과 HP가 바닥까지 떨어진 바위 골렘이 맥없이 쓰러졌다. 입자가 되어 사라진 바위 골렘이 남긴 것은 골렘의 핵이라는 귀한 소재다. 시안은 콧노래를 부르며 소재를 회수했다.
허리를 편 시안은 휘하의 고블린들을 둘러보았다. 고작 열다섯밖에 없는 고블린이다. 어처구니없게 발판 밑으로 떨어져 희생당한 녀석의 빈자리가 유난히도 크게 느껴졌다.
혀를 찬 시안은 전투로 소모된 MP를 회복시키기 위해 인벤토리에서 푸른색 약을 꺼내 마셨다. 바닥을 보이던 MP가 빠르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튼튼하기는 했지만 별로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생자가 생기다니. 이향이 녀석이라면 이 정도 상대는 가뿐하게 처리했을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조금이라도 소모를 줄여서 유리한 조건을…….”

<경쟁자가 수호자에게 쓰러졌습니다. 승리하셨습니다.>

“…응?”
갑작스럽게 나타난 메시지가 계산에 열중하던 시안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가격했다.
메시지를 정독하는 시안의 표정은 기대하던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갔는데 관람을 마치고 나오던 관객의 입에서 나온 영화의 결말을 들었을 때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무려 1분 이상을 멍하니 시스템 메시지를 응시하던 시안이 겨우 반응을 보였다.
“이게 뭔 개소리야!”
그것은 폭주였다.
PPO에서 시안과 동일한 수준의 업적을 세운 플레이어는 오로지 이향, 한 사람뿐이다. 그것은 마왕 후보로 선택된 플레이어가 그녀 외에 다른 사람일 수가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이향이 누구인가. 무려 7천만 플레이어 중 정상에 우뚝 섰던 최고이자 최강인 플레이어다.
희대의 천재.
게임의 신.
컨트롤의 귀재.
이 모든 별명들은 이향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고 있다.
그녀는 강하다. 이깟 석재 골렘 따위는 세력의 도움 없이 단신으로 일그러뜨릴 수 있는 그런 실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녀가 석재 골렘 따위에게 패해 결투장에 들어서지도 못하고 패배의 고배를 마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줄줄이 소시지처럼 연이어 나타난 메시지는 이 모든 것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임을 강제로 인식시켰다.

<승자인 마왕 후보 시안에게 마신의 축복이 내립니다. 마왕으로 각성을 시작합니다. 통솔력이 20 상승합니다.>
<각성을 위해서는 100의 공포가 필요합니다.>
<패자는 마왕 후보에서 탈락해 평범한 마족이 되었습니다. 패자와 계약을 통해 군신의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계약을 제안하시겠습니까?>

“아아, 그래. 제안한다!”
시안은 분노에 몸을 맡긴 채 소리를 내질렀다.
분노 탓에 시스템에서 말하는 계약에 일체의 흥미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그토록 기대하고 있던 결투를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린 그녀에게 철저한 응징을 하는 것뿐이었다.
시안의 정면으로 빛의 입자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빛의 입자는 가녀린 체구를 가진 여성의 형태를 만들어낸다.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 진이향!”
화가 머리끝까지 난 시안은 그녀가 제대로 형상을 취하기도 전에 목청껏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연이어 나타난 시스템 메시지가 다시 한 번 시안의 뒤통수를 때렸다.

<패자가 계약을 받아들였습니다. 앞으로 플레이어 소향은 플레이어 시안에게 소속됩니다.>
<두 사람이 함께 전장에 설 때 모든 어빌리티가 10% 상승합니다.>

“…소향이라고?”
당연히 그녀일 것이라던 예상과 달리 표기된 상대방의 이름은 익숙하면서도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이름이었다.
서서히 빛이 사라지고, 그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주저앉아 있는 것은 한 명의 가녀린 소녀였다. 윤기가 흐르는 백색의 머리카락은 하나로 묶어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허리까지 닿을 만큼 길다.
눈망울은 사슴처럼 커다랗고 애교가 넘친다. 어색한 듯 웃고 있는 입술은 건강한 빛깔을 머금고 있으며, 흑색 일통의 가죽 옷에 가려진 자그마한 체구는 보호 본능을 자극한다.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갖춘 이 소녀에게는 경국지색, 화용월태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시안은 이 사랑스러운 소녀의 정체를 알고 있다. 이향의 한 살 터울의 여동생 진소향이다.
“뭐야, 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야?”
“에헤헤, 소율 오빠, 오랜만.”
그녀는 순진무구하게 웃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

“언니, 정말이지? 정말 PPO의 특전 나한테 주는 거지? 나중에 딴소리하면 안 돼. 그랬다가는 다 큰 처녀가 떼쓰면서 엉엉 우는 모습을 보게 될 거야.”
“너도 참 끈질기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널 믿게 만들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더 이상 게임 같은 거 하지 않을 거야.”
출근을 위해 연한 쥐색의 정장을 갖춰 입고 화장을 하는 이향의 주변을 알짱거리던 소향은 결국 그녀의 분노가 담긴 주먹에 머리를 쥐어 박히고 말았다.
전혀 가감이 없었기에 무심코 억 소리가 나오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좋았던 소향은 마냥 웃었다.
원피스 형태의 잠옷을 입고 있는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즉석에서 춤을 췄다. 거울 너머로 그 모습을 본 이향이 못 볼 것을 봤다며 눈을 감았다.
“뭐 하는 거야?”
“기쁨의 춤을 추고 있어. 언니가 5년간 PPO를 하고 있을 때 나는 손가락만 빨면서 지켜보고 있었잖아. 내가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언니는 몰라.”
“아, 그래. 도대체 뭐가 그렇게 부러웠는데?”
화장을 마친 그녀는 귀걸이를 착용하며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질문했다. 전혀 흥미 없지만 마지못해 물어본다는 그런 태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향은 세상을 다 가진 얼굴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헤헤.”
대답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를 불쾌함이 이향의 미간을 찌푸려지게 만들었다.
“…짜증나는 얼굴이네.”
칼로 후비듯 한마디를 내뱉은 이향은 구두를 신고 인사도 없이 집을 나섰다. 그래도 마냥 좋다고 웃으며 두 손을 흔들어 이향을 배웅한 소향은 자신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드디어, 드디어, 소향이가 갑니다.”
그녀는 이향에게 물려받은 구식의 캡슐형 가상현실 접속 기기에 뛰어들었다. 구식이라지만 당시에는 가장 비싼 걸로 구매했기에 좌석은 편안하고 관리를 잘했기에 망가진 곳도 없고 쾌적하다.
내부에 안치된 고글을 착용한 그녀는 접속 버튼을 누른다. 그러자 캡슐의 뚜껑이 닫히며 공간이 밀폐되고 짙은 어둠이 찾아왔다.
그렇게 소향은 생애 처음으로 가상 세계에 다이브했다.

<플레이어 진소향. 로그인 완료. 성공적으로 다이브를 마쳤습니다. 가상현실 Project Another Online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플레이어 진이향이 본인 계정의 특전을 양도했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아, 네?”
가상현실 게임을 처음 접하는 그녀는 연속적으로 떠오르는 시스템 문구에 놀라 어벙한 대답을 내뱉고 말았다.
하지만 시스템은 그녀의 질문을 대답으로 인식하고 진이향이 양도한 특전을 그녀에게 적용시켰다.

<고대의 영웅, 빛 마법사 ‘이향’의 기록을 불러들입니다.>

새로운 메시지가 떠오른 직후 그녀의 눈앞에 어둠이 찾아왔다. 한 치 앞도 구분하기 어려운 어둠에 그녀는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다행이도 시간이 흐를수록 주변이 서서히 밝아졌다. 어둠 속에서도 유난히 밝은 장소가 있었다. 그곳에 한 여성이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자상한 느낌이 드는 갈색의 단발머리를 가진 성숙한 느낌의 여성이 누구인지 소향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하나뿐이고 사랑하는 가족, 진이향이 그 주인공이다.
“언니…….”
소향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녀를 부른다. 그 부름에 화답하듯 이향의 아바타는 고개를 들었다.
“어째서 울고 있는 거야?”
소향의 질문은 그녀에게 닿지 못했다. 초점 없는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이향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향의 주위에는 수많은 소년, 소녀들이 배 위에 가지런히 손을 모은 채 똑바로 누워 있었다. 머리가 이향에게 향하도록 누운 그들은 이향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고 있다.
그 수는 보이는 만큼만 헤아려도 족히 수백에 이르렀다. 혈색 없이 창백한 소년, 소녀들의 손발가락은 고사하고 눈꺼풀마저 미동이 없다. 숨을 쉰다면 으레 오르내려야 할 흉부조차 마찬가지다.
“저게 뭐야… 토할 것 같아.”
불쾌한 감각이 목구멍까지 차고 올라왔다. 당장이라도 토악질을 하고 싶었다. 만연하는 죽음의 기운이 그녀의 정신을 괴롭혔다.
어디선가 날아온 흑색의 까마귀 한 마리가 이향의 어깨 위에 앉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이향의 귓가에 기다란 부리를 가져간 까마귀가 섬뜩한 음성으로 속삭인다.
[가련한 용사여, 안타까운 용사여, 그분의 총애를 받으라. 기뻐하라, 위선자여. 신께서 너를 택하셨다. 준비하라. 모든 마(魔)의 왕이 될 준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