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과거의 영웅은 마왕이 되었다
8화
불행 중 다행으로 문자의 배열 패턴만큼은 PPO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주었다.
“축소, 변형, 회전.”
사각형 모양의 마력 방패의 크기를 줄인다. 소모되는 MP의 양은 동일하므로 크기가 줄어든 만큼 강도는 증가했다. 줄어든 마력 방패를 변형시켜 밑변이 뚫린 원뿔을 만들었다. 심지어 완성된 원뿔의 마력 방패에 회전력까지 더해주었다.
머리도 보호해줄 수 없을 만큼 작은 마력 방패를 앞에 세운 시안은 두 번째 마법을 만들었다.
“암흑탄, 개조 마법 ― 지연 폭발, 폭발력 증가.”
이번에는 암흑탄이다. 비록 겉모습에 표가 나지는 않지만 암흑탄에도 두 번의 개조가 부여되었다.
마법사 플레이어가 그 행위를 목격했다면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이건 꿈이야!’라고 현실을 부정했을 것이다.
미르가 사용하는 개조 마법이 영창 과정에서 문자의 구성과 배열을 틀어주는 것으로 변화를 주어 완성된다는 것은 정평하게 나 있는 소문이다.
하지만 문자의 배열을 재구축하는 방법을 미르가 비밀로써 손에 꽉 쥐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방법을 알고 있다 해도 수천 개나 되는 마도 문자를 암기하고 그를 이용해 패턴을 변형시켜 긍정적인 효과를 이끌어내는 것은 시를 낭독하며 대학 수학을 암산으로 풀어내는 것만큼 엄청난 난이도를 자랑하는 행위이다.
수백 개가 모여 구성된 문자 배열 중에서 하나만 흐트러져도 결과가 바뀌는데, 그 구조를 근본까지 뜯어내고 해석하여 전투에서 사용하는 것은 오로지 최강의 PVP팀 미르의 쌍룡만이 가능한 묘기이다.
“자, PAO에서 선보이는 첫 번째 개조 마법이다. 이름은… 굴착하는 암흑탄 정도로 해두지.”
희열에 찬 미소를 짓는 시안의 손에서 암흑탄이 쏘아졌다.
그의 손에서 떠난 암흑탄이 마력 방패를 밀어냈다. 본디 충격이 가해지면 폭발하는 암흑탄이지만 폭발시간을 지연시켰기에 당장 터지지는 않았다.
암흑탄에 밀려 강제적으로 앞으로 나아간 마력 방패가 눈꽃 슬라임의 미간에 적중했다.
개조 마법으로 인해 드릴처럼 맹렬하게 회전한 마력 방패가 눈꽃 슬라임의 피부를 찢고 내부로 파고들었다. 눈꽃 슬라임의 내부에도 빛을 발하던 암흑탄이 평소보다 두 배는 강하게 폭발하며 내부를 진탕으로 만들었다.
개조 마법의 효과는 훌륭했다. 바람 맞은 나뭇가지처럼 바들바들 떠는 눈꽃 슬라임의 미간으로부터 체액이 흘러내렸다.
[쿠이이익!]
이번 공격으로 상당량의 체력이 빠졌기에 눈꽃 슬라임의 공격 패턴이 바뀌었다. 몸을 웅크린 눈꽃 슬라임이 한 차례 몸을 흔들자 사방으로 냉기가 퍼졌다.
<눈꽃 슬라임의 눈안개 스킬이 사용됩니다. 한기를 느낍니다. 이동속도가 30% 저하됩니다.>
“크윽!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속도 저하인가…….”
시안이 가장 싫어하는 속도 관련 디버프다. 게다가 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특전으로 인해 속성저항력을 가진 시안조차 이러한데 고블린들은 오죽하겠는가.
“키익! 추, 춥다. 게다가 몸을 움직이는 것이 힘들다.”
“정신 차려라! 키익, 여기서 자면 죽는다!”
눈에 뜨일 정도로 고블린들의 속도가 둔해졌다. 그나마 범위 바깥에 있던 궁수들이 열심히 활을 쏘고 있었지만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두 마리의 고블린이 눈꽃 슬라임의 입속으로 들어가 소화됐다. 창을 가진 고블린들이 일제히 찌르기를 시도했으나 속도가 느려진 까닭에 추진력이 붙지 않아 위력이 약하다.
눈꽃 슬라임의 구르기 한 번에 고블린들 사이에서 곡소리가 났다. 이대로 두면 기껏 레벨을 올려놓은 고블린들이 죄다 죽을 판국이다. 시안은 근접전을 시도했다.
기합을 내지른 시안의 주먹이 눈꽃 슬라임의 옆구리에 적중한다. 마법사이지만 특전으로 받은 어빌리티 덕에 제법 괜찮은 위력이 나왔다.
시안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암흑탄을 내던진다. 주먹이 꽂힌 장소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떨어진 암흑탄은 치명타로 적용됐다.
가장 위협이 되는 인물을 시안으로 지정한 눈꽃 슬라임이 몸을 굴리기 시작했다. 마력 방패로는 방어가 어려운 위력이다.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이동속도가 느려진 까닭에 회피가 난해하다.
작게 혀를 찬 시안은 허공에 몸을 띄운 후 본인을 목표로 암흑탄을 사용했다. 폭발의 반동으로 인해 그의 몸은 사정없이 내던져졌다.
“어우, 아파라.”
폭발 대미지는 마력 방패로 막았으나 흙바닥에 사정없이 내팽개쳐진 까닭에 제법 많은 HP가 소모되었다.
하지만 덕분에 슬라임의 구르기 공격을 회피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도 구르고 있는 눈꽃 슬라임을 향해 시안은 경이로운 영창 속도를 이용해 연속으로 암흑탄을 던져주었다.
“2번 분대!”
예상치 못한 충격에 비틀거리는 슬라임을 향해 다섯 개의 창이 꽂혔다.
세 마리가 생존해 있는 1번 분대도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으나 공격력이 부족하다. 화살이 다 떨어진 것인지 조금 전부터 화살 지원이 끊어져 있었다.
“화살이 없으면 칼질이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나중에는 밥도 떠먹여 달라 하겠네. 3번 분대, 발검!”
“키익! 발검한다!”
시안의 명령에 따라 활을 내려놓은 고블린들이 검을 뽑아들고 내달렸다. 한 자리에 서서 활만 당기고 있던 터라 체력에 여유가 있는 고블린들은 남들보다 배는 열심히 칼질을 했다.
그 결과 슬라임이 뒤집어졌다. 남아 있는 체력은 5% 남짓. 승리가 코앞이다.
하지만 시안은 모든 고블린들을 뒤로 물렸다.
“전원 후퇴. 자폭한다!”
슬라임은 뭣도 모르는 초보자들을 상대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키는 몬스터다. 이유는 하나. 체력이 소량 남았을 때 자폭을 한다는 것이다.
일반 슬라임의 자폭이야 어떻게든 몸으로 버틸 수 있는 수준이지만 네임드, 나아가서 필드 보스쯤 되면 결코 우습게 볼 수 없게 된다. 방패로 몸을 보호한 고블린 검사조차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고블린들이 열심히 발을 놀리고 있었으나 눈안개 스킬로 인해 이동속도가 느리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폭발에 휘말린 고블린들이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몸이 팽창한 눈꽃 슬라임을 지켜보며 초조한 마음에 손톱을 씹던 시안이 무의식적으로 하나의 스킬을 사용했다.
“종속 마법.”
설마 일반 몬스터도 아니고 필드 보스 몬스터가 쉽게 잡히겠냐는 생각에 사용한 마법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드라마보다 불가사의한 법이다.
<눈꽃 슬라임을 종속시켰습니다. 병사로 활용이 가능합니다. 3의 통솔력이 사용되며 눈꽃 슬라임이 사망할 경우 통솔력을 돌려받습니다.>
<최초로 유일등급 몬스터를 종속시켰습니다. 통솔력과 공포가 각각 15씩 상승합니다.>
<높은 등급의 몬스터입니다. 12개의 성좌 중 하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성좌를 담당하게 된 몬스터는 특별한 힘을 갖게 됩니다.>
<슬라임 관련 건축물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 뭐야, 진짜 된 거야?”
자폭을 멈추고 점점 얌전해지는 눈꽃 슬라임을 보는 시안의 동공이 불신으로 흔들렸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눈꽃 슬라임의 옆구리에는 종속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어빌리티>
이름 : 없음(변경 가능)
레벨 : 9
직업 : 전투 슬라임(Rank ― 일반)
종족 : 눈꽃 슬라임 ― 유일
HP : 820
MP : 165
근력 : 10
마력 : 11
체력 : 41
정신력 : 11
민첩성 : 23
내구성 : 24
<소지 스킬>
눈안개, 거대화, 얼음 내성, 자폭.
필드 보스이자 유일 등급의 몬스터인 눈꽃 슬라임을 종속시켰다.
비록 필드 보스 버프로 인한 어빌리티 보정은 없지만 일반 고블린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몬스터다. 운이 좋았다고밖에는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다.
물론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고생을 했는데 경험치도 얻지 못했고, 전리품도 습득하지 못했으며, 최초 퇴치 보상 역시 물 건너가 버렸다.
하지만 아군으로 얻은 눈꽃 슬라임의 전투력은 그 모든 단점을 상쇄시킬 정도의 이득이 된다.
시안은 조속히 눈꽃 슬라임에게 첫 번째로 성좌라는 것을 부여했다.
<눈꽃 슬라임이 포식의 성좌를 갖게 되었습니다. 눈꽃 슬라임의 이름을 지어주세요.>
“라임.”
단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내뱉은 이름은 극도로 단순하여 바보가 아닌 이상 보자마자 이름의 유래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눈꽃 슬라임이 얼굴 가득 불만을 담고 어필했으나 연속해서 떠오르는 메시지에 정신을 집중한 시안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눈꽃 슬라임 라임이 마왕 후보인 시안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라임의 모든 어빌리티가 10씩 증가합니다.>
<성좌에 속한 몬스터가 사망할 경우 경험치를 소모해 부활시킬 수 있습니다.>
<눈꽃 슬라임 라임이 어빌리티의 일부를 헌상합니다. 라임이 소지한 가장 높은 어빌리티의 10%를 지원받습니다. 체력 4 상승.>
<폭식의 성좌.>
세상의 만물을 먹어치울 수 있는 권능입니다. 무언가를 먹어치웠을 경우 그것의 가치에 따라 몸집이 불어나며 그에 비례하여 체력과 내구성이 증가합니다. 불어난 몸집은 10초간 지속되며 무언가를 추가로 포식하면 효과가 중첩되고 지속시간은 초기화됩니다.
― 플레이어가 마왕으로 각성을 마쳐야만 사용 가능.
“이게 뭐야, 엄청나잖아.”
열둘이라는 인원 제한만 없었다면 아무나 데려다가 성좌의 일원으로 삼고 싶을 만큼 얻을 수 있는 효과들이 굉장했다. 사망한 몬스터를 부활시킬 수 있다는 점이 특히 이목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새롭게 얻은 스킬이 실로 감탄스럽다. 정식 마왕이 되어야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기분이 좋아진 시안은 만개한 꽃도 겸손하게 고개를 숙일 만큼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라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꾸익.]
라임 역시 고개를 주억거리며 마주 웃었다.
Chapter 2 ― 소향
어느덧 1주일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 약속의 날이 찾아왔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앞으로 30분가량이 남아 있을 뿐이다. 앞으로 30분 후, 유일한 라이벌이라 칭할 수 있는 그녀와의 싸움이 시작된다.
조금 전부터 심장이 자신의 것이 아닌 듯 멋대로 요동쳤다. 그날 이후 무려 1년 만에 찾아온 격한 두근거림이 잔잔한 빗소리처럼 기분 좋게 느껴졌다.
“이런,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지.”
시안은 거점의 근처에서 무리를 지어 사냥을 하고 있는 휘하의 병력을 모두 불러보았다.
그의 부하는 고블린 열다섯 마리가 전부다. 눈꽃 슬라임 레이드를 하던 때처럼 검, 창, 그리고 활을 균등하게 나눠 갖고 있다.
장비의 상태도 제법 괜찮다. 대장장이 고블린을 쉬지 않고 닦달한 덕에 일반 고블린임에도 불구하고 필드에서 만나볼 수 있는 네임드 고블린만큼이나 우수한 무장을 갖추게 되었다. 이 정도면 이미 고블린이라 부르는 것이 무안하게 느껴질 수준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유일 등급의 몬스터인 눈꽃 슬라임까지 매섭게 눈을 부라리고 있다. 이 정도 수준의 병력이라면 동일 레벨의 플레이어 30명 정도는 무리 없이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이만한 준비를 하고도 불안함이 강하게 남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최강의 PVP팀 미르의 한 축을 담당하던 그녀와의 결투가 아닌가.
“더 이상 수중에 영혼 조각은 남아 있지 않아.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어.”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보았으나 불안한 마음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수능 시험을 볼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가슴이 떨리고 싱숭생숭하다.
초조함을 이기지 못한 시안이 괜히 죄 없는 라임의 볼살을 만지작거리며 촉감에 열중하고 있으려니 하늘로부터 왕눈이가 날아왔다. 왕눈이는 촐랑거리며 시안의 정면에 있는 고블린의 머리 위에 안착했다.
[시안 님! 드디어 약속의 때가 되었습니다.]
“알고 있어. 준비는 만전이다.”
진중한 표정을 한 시안이 괜히 소매를 걷어 올리며 말했다. 각오는 충분하다 못해 넘쳐흘렀다.
[그러면 마신님이 준비하신 공간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승리조건은 단 하나. 경쟁자인 마왕 후보를 쓰러뜨리는 겁니다. 시안 님. 승리할 자신은 있으시죠?]
“당연하지.”
[경기장에는 수호자가 있습니다만, 마왕 후보쯤 되는 두 분께는 그리 어렵지 않은 상대일 겁니다. 그럼 문을 열도록 하겠습니다!]
호기롭게 소리친 왕눈이가 바닥을 향해 침을 뱉었다.
“…하!”
그를 본 시안의 표정은 구겨진 영수증 종이마냥 일그러졌다. 짜증으로 가득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엄숙하던 분위기가 단번에 싸구려로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슨 기승전침이냐고. 어째서 너는 모든 것이 침으로 시작해서 침으로 끝나는 거야?”
구시렁거리는 시안의 불만과 별개로 왕눈이가 내뱉은 침은 하나의 불가사의한 현상을 발생시켰다.
주변의 땅이 격하게 위아래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간신히 서서 중심을 잡으며 정면을 응시하던 시안은 땅을 뚫으며 솟구치는 거대한 석재 문을 만나볼 수 있었다. 백색의 문짝에는 흑색의 기이한 도형들이 가득 그려져 있다.
무언가 특별한 행위를 하지도 않았는데도 문이 열렸다. 육중해 보이는 외견과 달리 일말의 현상은 굉장히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활짝 열린 문 너머에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에는 어둠이 가득하며,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크기의 별들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대지는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마치 우주의 한 가운데에 만들어져 있는 자그마한 땅덩어리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이 장소가 마왕 후보들을 위한 경기장, 시공의 틈새입니다. 자, 시안 님. 앞으로 나아가세요. 저 너머에서 시안 님의 경쟁자인 또 다른 마왕 후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8화
불행 중 다행으로 문자의 배열 패턴만큼은 PPO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주었다.
“축소, 변형, 회전.”
사각형 모양의 마력 방패의 크기를 줄인다. 소모되는 MP의 양은 동일하므로 크기가 줄어든 만큼 강도는 증가했다. 줄어든 마력 방패를 변형시켜 밑변이 뚫린 원뿔을 만들었다. 심지어 완성된 원뿔의 마력 방패에 회전력까지 더해주었다.
머리도 보호해줄 수 없을 만큼 작은 마력 방패를 앞에 세운 시안은 두 번째 마법을 만들었다.
“암흑탄, 개조 마법 ― 지연 폭발, 폭발력 증가.”
이번에는 암흑탄이다. 비록 겉모습에 표가 나지는 않지만 암흑탄에도 두 번의 개조가 부여되었다.
마법사 플레이어가 그 행위를 목격했다면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이건 꿈이야!’라고 현실을 부정했을 것이다.
미르가 사용하는 개조 마법이 영창 과정에서 문자의 구성과 배열을 틀어주는 것으로 변화를 주어 완성된다는 것은 정평하게 나 있는 소문이다.
하지만 문자의 배열을 재구축하는 방법을 미르가 비밀로써 손에 꽉 쥐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방법을 알고 있다 해도 수천 개나 되는 마도 문자를 암기하고 그를 이용해 패턴을 변형시켜 긍정적인 효과를 이끌어내는 것은 시를 낭독하며 대학 수학을 암산으로 풀어내는 것만큼 엄청난 난이도를 자랑하는 행위이다.
수백 개가 모여 구성된 문자 배열 중에서 하나만 흐트러져도 결과가 바뀌는데, 그 구조를 근본까지 뜯어내고 해석하여 전투에서 사용하는 것은 오로지 최강의 PVP팀 미르의 쌍룡만이 가능한 묘기이다.
“자, PAO에서 선보이는 첫 번째 개조 마법이다. 이름은… 굴착하는 암흑탄 정도로 해두지.”
희열에 찬 미소를 짓는 시안의 손에서 암흑탄이 쏘아졌다.
그의 손에서 떠난 암흑탄이 마력 방패를 밀어냈다. 본디 충격이 가해지면 폭발하는 암흑탄이지만 폭발시간을 지연시켰기에 당장 터지지는 않았다.
암흑탄에 밀려 강제적으로 앞으로 나아간 마력 방패가 눈꽃 슬라임의 미간에 적중했다.
개조 마법으로 인해 드릴처럼 맹렬하게 회전한 마력 방패가 눈꽃 슬라임의 피부를 찢고 내부로 파고들었다. 눈꽃 슬라임의 내부에도 빛을 발하던 암흑탄이 평소보다 두 배는 강하게 폭발하며 내부를 진탕으로 만들었다.
개조 마법의 효과는 훌륭했다. 바람 맞은 나뭇가지처럼 바들바들 떠는 눈꽃 슬라임의 미간으로부터 체액이 흘러내렸다.
[쿠이이익!]
이번 공격으로 상당량의 체력이 빠졌기에 눈꽃 슬라임의 공격 패턴이 바뀌었다. 몸을 웅크린 눈꽃 슬라임이 한 차례 몸을 흔들자 사방으로 냉기가 퍼졌다.
<눈꽃 슬라임의 눈안개 스킬이 사용됩니다. 한기를 느낍니다. 이동속도가 30% 저하됩니다.>
“크윽!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속도 저하인가…….”
시안이 가장 싫어하는 속도 관련 디버프다. 게다가 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특전으로 인해 속성저항력을 가진 시안조차 이러한데 고블린들은 오죽하겠는가.
“키익! 추, 춥다. 게다가 몸을 움직이는 것이 힘들다.”
“정신 차려라! 키익, 여기서 자면 죽는다!”
눈에 뜨일 정도로 고블린들의 속도가 둔해졌다. 그나마 범위 바깥에 있던 궁수들이 열심히 활을 쏘고 있었지만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두 마리의 고블린이 눈꽃 슬라임의 입속으로 들어가 소화됐다. 창을 가진 고블린들이 일제히 찌르기를 시도했으나 속도가 느려진 까닭에 추진력이 붙지 않아 위력이 약하다.
눈꽃 슬라임의 구르기 한 번에 고블린들 사이에서 곡소리가 났다. 이대로 두면 기껏 레벨을 올려놓은 고블린들이 죄다 죽을 판국이다. 시안은 근접전을 시도했다.
기합을 내지른 시안의 주먹이 눈꽃 슬라임의 옆구리에 적중한다. 마법사이지만 특전으로 받은 어빌리티 덕에 제법 괜찮은 위력이 나왔다.
시안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암흑탄을 내던진다. 주먹이 꽂힌 장소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떨어진 암흑탄은 치명타로 적용됐다.
가장 위협이 되는 인물을 시안으로 지정한 눈꽃 슬라임이 몸을 굴리기 시작했다. 마력 방패로는 방어가 어려운 위력이다.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이동속도가 느려진 까닭에 회피가 난해하다.
작게 혀를 찬 시안은 허공에 몸을 띄운 후 본인을 목표로 암흑탄을 사용했다. 폭발의 반동으로 인해 그의 몸은 사정없이 내던져졌다.
“어우, 아파라.”
폭발 대미지는 마력 방패로 막았으나 흙바닥에 사정없이 내팽개쳐진 까닭에 제법 많은 HP가 소모되었다.
하지만 덕분에 슬라임의 구르기 공격을 회피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도 구르고 있는 눈꽃 슬라임을 향해 시안은 경이로운 영창 속도를 이용해 연속으로 암흑탄을 던져주었다.
“2번 분대!”
예상치 못한 충격에 비틀거리는 슬라임을 향해 다섯 개의 창이 꽂혔다.
세 마리가 생존해 있는 1번 분대도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으나 공격력이 부족하다. 화살이 다 떨어진 것인지 조금 전부터 화살 지원이 끊어져 있었다.
“화살이 없으면 칼질이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나중에는 밥도 떠먹여 달라 하겠네. 3번 분대, 발검!”
“키익! 발검한다!”
시안의 명령에 따라 활을 내려놓은 고블린들이 검을 뽑아들고 내달렸다. 한 자리에 서서 활만 당기고 있던 터라 체력에 여유가 있는 고블린들은 남들보다 배는 열심히 칼질을 했다.
그 결과 슬라임이 뒤집어졌다. 남아 있는 체력은 5% 남짓. 승리가 코앞이다.
하지만 시안은 모든 고블린들을 뒤로 물렸다.
“전원 후퇴. 자폭한다!”
슬라임은 뭣도 모르는 초보자들을 상대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키는 몬스터다. 이유는 하나. 체력이 소량 남았을 때 자폭을 한다는 것이다.
일반 슬라임의 자폭이야 어떻게든 몸으로 버틸 수 있는 수준이지만 네임드, 나아가서 필드 보스쯤 되면 결코 우습게 볼 수 없게 된다. 방패로 몸을 보호한 고블린 검사조차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고블린들이 열심히 발을 놀리고 있었으나 눈안개 스킬로 인해 이동속도가 느리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폭발에 휘말린 고블린들이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몸이 팽창한 눈꽃 슬라임을 지켜보며 초조한 마음에 손톱을 씹던 시안이 무의식적으로 하나의 스킬을 사용했다.
“종속 마법.”
설마 일반 몬스터도 아니고 필드 보스 몬스터가 쉽게 잡히겠냐는 생각에 사용한 마법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드라마보다 불가사의한 법이다.
<눈꽃 슬라임을 종속시켰습니다. 병사로 활용이 가능합니다. 3의 통솔력이 사용되며 눈꽃 슬라임이 사망할 경우 통솔력을 돌려받습니다.>
<최초로 유일등급 몬스터를 종속시켰습니다. 통솔력과 공포가 각각 15씩 상승합니다.>
<높은 등급의 몬스터입니다. 12개의 성좌 중 하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성좌를 담당하게 된 몬스터는 특별한 힘을 갖게 됩니다.>
<슬라임 관련 건축물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 뭐야, 진짜 된 거야?”
자폭을 멈추고 점점 얌전해지는 눈꽃 슬라임을 보는 시안의 동공이 불신으로 흔들렸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눈꽃 슬라임의 옆구리에는 종속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어빌리티>
이름 : 없음(변경 가능)
레벨 : 9
직업 : 전투 슬라임(Rank ― 일반)
종족 : 눈꽃 슬라임 ― 유일
HP : 820
MP : 165
근력 : 10
마력 : 11
체력 : 41
정신력 : 11
민첩성 : 23
내구성 : 24
<소지 스킬>
눈안개, 거대화, 얼음 내성, 자폭.
필드 보스이자 유일 등급의 몬스터인 눈꽃 슬라임을 종속시켰다.
비록 필드 보스 버프로 인한 어빌리티 보정은 없지만 일반 고블린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몬스터다. 운이 좋았다고밖에는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다.
물론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고생을 했는데 경험치도 얻지 못했고, 전리품도 습득하지 못했으며, 최초 퇴치 보상 역시 물 건너가 버렸다.
하지만 아군으로 얻은 눈꽃 슬라임의 전투력은 그 모든 단점을 상쇄시킬 정도의 이득이 된다.
시안은 조속히 눈꽃 슬라임에게 첫 번째로 성좌라는 것을 부여했다.
<눈꽃 슬라임이 포식의 성좌를 갖게 되었습니다. 눈꽃 슬라임의 이름을 지어주세요.>
“라임.”
단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내뱉은 이름은 극도로 단순하여 바보가 아닌 이상 보자마자 이름의 유래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눈꽃 슬라임이 얼굴 가득 불만을 담고 어필했으나 연속해서 떠오르는 메시지에 정신을 집중한 시안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눈꽃 슬라임 라임이 마왕 후보인 시안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라임의 모든 어빌리티가 10씩 증가합니다.>
<성좌에 속한 몬스터가 사망할 경우 경험치를 소모해 부활시킬 수 있습니다.>
<눈꽃 슬라임 라임이 어빌리티의 일부를 헌상합니다. 라임이 소지한 가장 높은 어빌리티의 10%를 지원받습니다. 체력 4 상승.>
<폭식의 성좌.>
세상의 만물을 먹어치울 수 있는 권능입니다. 무언가를 먹어치웠을 경우 그것의 가치에 따라 몸집이 불어나며 그에 비례하여 체력과 내구성이 증가합니다. 불어난 몸집은 10초간 지속되며 무언가를 추가로 포식하면 효과가 중첩되고 지속시간은 초기화됩니다.
― 플레이어가 마왕으로 각성을 마쳐야만 사용 가능.
“이게 뭐야, 엄청나잖아.”
열둘이라는 인원 제한만 없었다면 아무나 데려다가 성좌의 일원으로 삼고 싶을 만큼 얻을 수 있는 효과들이 굉장했다. 사망한 몬스터를 부활시킬 수 있다는 점이 특히 이목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새롭게 얻은 스킬이 실로 감탄스럽다. 정식 마왕이 되어야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기분이 좋아진 시안은 만개한 꽃도 겸손하게 고개를 숙일 만큼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라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꾸익.]
라임 역시 고개를 주억거리며 마주 웃었다.
Chapter 2 ― 소향
어느덧 1주일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 약속의 날이 찾아왔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앞으로 30분가량이 남아 있을 뿐이다. 앞으로 30분 후, 유일한 라이벌이라 칭할 수 있는 그녀와의 싸움이 시작된다.
조금 전부터 심장이 자신의 것이 아닌 듯 멋대로 요동쳤다. 그날 이후 무려 1년 만에 찾아온 격한 두근거림이 잔잔한 빗소리처럼 기분 좋게 느껴졌다.
“이런,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지.”
시안은 거점의 근처에서 무리를 지어 사냥을 하고 있는 휘하의 병력을 모두 불러보았다.
그의 부하는 고블린 열다섯 마리가 전부다. 눈꽃 슬라임 레이드를 하던 때처럼 검, 창, 그리고 활을 균등하게 나눠 갖고 있다.
장비의 상태도 제법 괜찮다. 대장장이 고블린을 쉬지 않고 닦달한 덕에 일반 고블린임에도 불구하고 필드에서 만나볼 수 있는 네임드 고블린만큼이나 우수한 무장을 갖추게 되었다. 이 정도면 이미 고블린이라 부르는 것이 무안하게 느껴질 수준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유일 등급의 몬스터인 눈꽃 슬라임까지 매섭게 눈을 부라리고 있다. 이 정도 수준의 병력이라면 동일 레벨의 플레이어 30명 정도는 무리 없이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이만한 준비를 하고도 불안함이 강하게 남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최강의 PVP팀 미르의 한 축을 담당하던 그녀와의 결투가 아닌가.
“더 이상 수중에 영혼 조각은 남아 있지 않아.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어.”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보았으나 불안한 마음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수능 시험을 볼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가슴이 떨리고 싱숭생숭하다.
초조함을 이기지 못한 시안이 괜히 죄 없는 라임의 볼살을 만지작거리며 촉감에 열중하고 있으려니 하늘로부터 왕눈이가 날아왔다. 왕눈이는 촐랑거리며 시안의 정면에 있는 고블린의 머리 위에 안착했다.
[시안 님! 드디어 약속의 때가 되었습니다.]
“알고 있어. 준비는 만전이다.”
진중한 표정을 한 시안이 괜히 소매를 걷어 올리며 말했다. 각오는 충분하다 못해 넘쳐흘렀다.
[그러면 마신님이 준비하신 공간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승리조건은 단 하나. 경쟁자인 마왕 후보를 쓰러뜨리는 겁니다. 시안 님. 승리할 자신은 있으시죠?]
“당연하지.”
[경기장에는 수호자가 있습니다만, 마왕 후보쯤 되는 두 분께는 그리 어렵지 않은 상대일 겁니다. 그럼 문을 열도록 하겠습니다!]
호기롭게 소리친 왕눈이가 바닥을 향해 침을 뱉었다.
“…하!”
그를 본 시안의 표정은 구겨진 영수증 종이마냥 일그러졌다. 짜증으로 가득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엄숙하던 분위기가 단번에 싸구려로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슨 기승전침이냐고. 어째서 너는 모든 것이 침으로 시작해서 침으로 끝나는 거야?”
구시렁거리는 시안의 불만과 별개로 왕눈이가 내뱉은 침은 하나의 불가사의한 현상을 발생시켰다.
주변의 땅이 격하게 위아래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간신히 서서 중심을 잡으며 정면을 응시하던 시안은 땅을 뚫으며 솟구치는 거대한 석재 문을 만나볼 수 있었다. 백색의 문짝에는 흑색의 기이한 도형들이 가득 그려져 있다.
무언가 특별한 행위를 하지도 않았는데도 문이 열렸다. 육중해 보이는 외견과 달리 일말의 현상은 굉장히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활짝 열린 문 너머에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에는 어둠이 가득하며,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크기의 별들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대지는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마치 우주의 한 가운데에 만들어져 있는 자그마한 땅덩어리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이 장소가 마왕 후보들을 위한 경기장, 시공의 틈새입니다. 자, 시안 님. 앞으로 나아가세요. 저 너머에서 시안 님의 경쟁자인 또 다른 마왕 후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