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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영웅은 마왕이 되었다
4화
“역시 마왕에게는 마왕성이 있어야겠지. 하지만 벽돌을 쌓고 흙을 바르는 등 직접 노가다를 뛰지 않아서 다행이다.”
노가다 및 중노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시안이 명령어를 입력했다.
그의 발치에서 원을 그리는 커다란 빛이 뿜어졌다. 빛의 홀에서 천천히 무언가가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마왕이 거주하며 용사가 클리어해야 할 최종적인 던전. 마왕성이 그 주인공이다.
하지만 빛에서 솟아올라 자리를 잡은 마왕성을 본 시안의 표정이 고등학교 시절 자기 위로 중인 룸메이트와 눈이 마주쳤을 때처럼 싸늘하게 굳어졌다.
“이게 어디를 봐서 마왕성이냐. 단순한 천막이잖아!”
마왕성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마왕도 아닌 마왕 후보의, 그것도 레벨 1짜리를 위한 마왕성이기에 큰 기대를 갖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건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눈앞에 있는 마왕성은 성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붙이는 것이 민망한 수준의 단순한 천막이었다. 크기도 넓지 않다. 비교하자면 4인용 텐트 정도의 수준이며, 심지어는 짐승의 가죽과 뼈를 엮어 만든 것이다.
절로 얼굴을 가리게 만드는 참극이었다.
<시안의 마왕성 Lv1.>
마왕 후보 시안의 마왕성이다. 성이라고 부를 만한 요소를 갖추지 못했다.
가치 : 3
방비 : 1
효과 : 영토 내 아군의 어빌리티 1% 상승.
“이딴 거에 내 이름 가져다 붙이지 말란 말이야. 누가 보기라도 하면 나는 어떻게 살라고. 분명 혼자만의 비밀 아지트에 마왕성이라고 이름을 붙여 놓은 중2병 꼬맹이라고 놀림 받을 거야.”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만 싶었다.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흑역사가 생겨버렸다.
퀘스트가 완료되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경험치가 올랐다. 이번에는 레벨도 함께 올랐다.
PAO의 어빌리티는 플레이어의 직업 및 행동 패턴에 따라 자동으로 분배된다. 시안의 경우 마족에게 주어지는 보너스 혜택을 받은 덕분에 무려 세 개의 마력이 상승했다. 나머지는 체력과 정신력이 상승했다.
[마왕이 되기 위한 길, 그 세 번째∼! 두둥. 두둥.]
“아직도 뭐가 남아 있구나.”
[마왕이 되려는 자, 부하를 육성하라!]
<시나리오 퀘스트 발생!>
마왕이 되기 위한 세 번째 걸음 ― 난이도 F+
마왕이 되려는 자, 그 위대한 이름 아래 행동할 부하를 육성하라!
― 종속 마법으로 몬스터를 부하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한 마리의 몬스터를 부하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제야 사냥 관련 퀘스트인가.”
RPG라면 절대 빠져서는 안 될 꽃, 사냥 관련 퀘스트가 등장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냥이 아닌 포획 관련 퀘스트이지만 스트레스를 풀고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한 전투를 즐길 수는 있을 것이다.
하늘을 날 수 있는 왕눈이에게 물어보면 인근에 어떤 사냥감이 있는지 보다 쉽게 조사할 수 있겠지만, 진정한 모험을 즐기는 시안은 자신의 발로 직접 뛰어다니는 것을 선호했다.
산보라도 하듯 숲길을 걸으며 시안은 종속 마법이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고,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스킬창을 열람했다.
<종속 마법 ― 하급 1단계.>
마왕과 후보생을 위한 전용 마법으로 몬스터에 한해 상대를 종속시킬 수 있다. 종속시키는 상대의 등급과 상호간의 레벨 차이에 의해 성공 확률이 결정되며, 상대의 체력을 5% 미만으로 만들어야 포획을 시도할 수 있다.
숙련도가 높아지면 더 높은 체력의 몬스터를 포획할 수 있게 된다.
소모마력 : 50.
재사용 대기시간 : 30초.
스킬 설명을 정독하며 울창한 숲을 전진하던 그는 게임에 접속한 후 처음으로 몬스터와 조우할 수 있었다.
상대 몬스터는 5레벨의 몬스터 고블린이다. 코와 귀가 뾰족하고 이빨은 짐승의 것처럼 날카로우며 눈은 콩알만큼 작다. 피부색은 덜 익은 사과처럼 초록색이고, 팔다리는 앙상하며 덩치는 고작해야 1미터 남짓이다.
겨우 하반신을 가리는 가죽을 걸치고 있을 뿐이며, 무기는 녹이 슬어 두부조차 제대로 자를 수 있는지 의문이 드는 단검이 전부다.
“키이익! 인간!”
눈이 마주치자 고블린은 단검을 허공에 휘두르며 위협했다.
아무리 몇 주는 제대로 먹지 못한 아사 직전의 시체처럼 보이는 상대라고는 하지만 이곳은 레벨이 강함의 척도가 되는 게임의 세계. 그리고 상대는 시안보다 3레벨이 더 높은 몬스터다. 경계함이 마땅한 것이다.
하지만 시안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초월급 특전의 대상자인 그는 모든 어빌리티를 10씩 추가로 지급받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시안이라는 남자는 컨트롤을 누구보다 자신의 특기로 삼고 있는 플레이어다. 설사 특전이 없었다 할지라도 3레벨 차이정도야 컨트롤로 찍어 누를 자신이 있었다.
“첫 상대는 고블린인가. 그러고 보니 PPO를 할 때도 처음 사냥한 몬스터가 고블린이었던 것 같은데,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겠지.”
전혀 긴장할 가치가 없는 상대이므로 시안은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는 등 최상급의 여유를 부렸다.
“죽어라, 인간!”
교착 상태를 깨고 먼저 움직임을 보인 것은 고블린이었다. 고블린은 어정쩡한 자세로 단검을 휘둘렀다.
물론 PVP승률 81%를 자랑하던 미르의 시안이 이렇게 느리고 예리하지도 않은 어정쩡한 공격에 당해줄 리가 없다. 스치는 것조차 수치다.
“식상해. 대사도 행동도 너무 식상하다! 암흑탄!”
살짝 몸을 비틀어 공격을 회피한 시안은 다리를 걸어 고블린을 넘어뜨렸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머리부터 곤두박질 친 고블린의 뒤통수를 향해 하급 어둠 마법인 암흑탄을 발사했다.
암흑탄은 그렇지 않아도 캐스팅 시간이 짧은 하급 마법이다. 거기에 200%의 추가 보정을 받으니 캐스팅 속도가 없다시피 했다.
빛으로 구성된 기이한 문자. 흔히들 마도 문자라 부르는 것들이 한데 모여 만들어진 흑색의 띠가 시안의 손목을 휘감았다. 문자들이 강렬한 빛을 발했을 때 비로소 그가 사용한 마법, 암흑탄이 생성되었다.
직선의 궤적을 가지며 도중에 물체와 닿으면 폭발하는 성질을 가진 암흑탄은 고블린의 뒤통수에 닿는 순간 축구공만 한 폭발을 일으켰다.
비명을 지르는 고블른의 머리 위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치명타 적중! 급소의 공격에 성공하여 62의 대미지를 입혔습니다.>
단 일격에 상당한 체력이 빠져나갔다.
전투는 굉장히 일방적이었다. 고블린은 최선을 다했지만 시안이 쏘아낸 암흑탄 두 방이 각각 명치와 인중에 꽂혔다. 마지막으로 급소가 아닌 곳에 주먹질을 가함으로 체력을 5% 미만으로 만드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이, 인간! 강하다. 내 패배다!”
“고, 고블린! 약하다. 내 승리다!”
“따라하지 마라!”
“그건 승자의 마음이잖아. 어찌 되었건 가만히 있도록 해. 지금부터 종속 마법을 걸 테니까.”
무릎 꿇은 고블린을 한껏 약 올린 시안은 조건이 맞추어졌으므로 조속히 종속 마법을 사용했다.
시안의 손에서 쏘아진 흑색의 빛이 고블린의 심장 언저리에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블린이 살짝 몸을 움직이자 흑색의 빛은 맥없이 흩어져 버렸다. 종속 마법에 실패한 것이다.
“…네가 움직여서 실패한 거야. 아마도.”
“키익?!”
고블린을 노려보는 시안의 입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실 실패의 원인은 단순한 레벨의 차이로 인해 낮아진 확률 때문이다. 시안 역시 이를 알고 있었지만 모든 책임을 고블린에게 돌리고 화풀이를 했다.
고블린의 뒤통수를 걷어차 마무리를 지은 시안은 전리품을 챙겼다. 운이 없었는지 습득한 아이템이라고는 고블린 가죽 한 장이 전부였다.
시안은 실망하지 않고 곧장 다음 사냥감을 탐색했다.
약 5분 정도 숲을 돌아다닌 결과 두 번째 몬스터와 조우할 수 있었다. 이 근방에 서식지가 있는 것인지, 이번에 마주한 몬스터 역시 고블린이었다.
시안은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뽐내며 고블린을 제압해 종속 마법을 사용했다. 레벨 차이는 여전했으므로 불안함은 있었지만 다행이도 이번에는 성공적으로 종속 마법이 적용됐다.
고블린의 심장에 기이한 문양이 새겨졌다. 문양의 정체를 확인한 시안이 불쾌함에 얼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이건 내가 PPO시절 사용하던 문장이잖아. 뭘 멋대로 사용하고 있는 거야.”
신화 속의 뱀 우로보로스처럼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용 두 마리가 무한대를 의미하듯 겹쳐있는 문양은 다름 아닌 PVP팀 미르의 깃발이다.
시안은 멋대로 자신의 상징 문양을 결정해 버린 크로노스 사를 향해 여지없이 분노를 불태웠다. 이 문양은 파트너인 이향과 함께 할 때만 사용하기로 한 문장이며, 홀로 게임을 즐기고 있는 지금 사용해도 좋을 문양이 아니었다.
하지만 수단이 없었으므로 크로노스 사의 횡포에 놀아날 수밖에 없었다.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으려니 퀘스트가 완료되었다는 메지시가 나타났다. 동시에 여러 가지 소식이 담긴 메시지가 추가로 떠오른다.
<고블린을 종속시켰습니다. 병사로 활용이 가능합니다. 1의 통솔력이 사용되며, 고블린이 사망할 경우 통솔력을 돌려받습니다.>
<건축 명령어를 사용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몬스터를 사냥할 때마다 영혼 조각을 수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역소, 창고, 대장간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고블린 관련 건축물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건축인가…….”
별다른 감정이 담기지 않은 작은 음성으로 중얼거린 시안은 곧장 건축 명령어를 실행시켰다. 영토 밖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는 메시지가 나타났으므로 영토까지 이동해야만 했다.
<건축 가능 목록.>
일반 주택, 교역소, 창고, 대장간, 고블린 주택, 고블린 훈련소, 고블린 석상.
건축레벨은 1이었으며, 낮은 레벨 때문인지 건축 가능한 목록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창고는 물품을 보관하는 장소이고, 교역소는 상점의 역할을 해주었다. 대장간 역시 문자 그대로의 성능을 가졌다.
고블린 주택의 경우 휘하에 둘 수 있는 고블린의 수를 늘려주며, 훈련소의 경우 일정한 영혼 조각을 소모해 고블린 병사를 소환할 수 있다. 고블린 석상을 건설하면 일정 확률로 네임드 고블린이 탄생한다는 문구를 접할 수 있었다.
모든 건축물을 소환할 때 필요한 것은 석재나 목재 등 건축자재가 아니었다. 요구되는 것은 오로지 몬스터를 사냥함으로 얻을 수 있는 영혼 조각뿐이다.
플레이 특성상 인간 문명과 단절되어 있기에 소모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동전이나 지폐 따위가 아닌 영혼 조각이라는 생소한 단위의 화폐였다.
“화폐 대신 영혼이라는 것을 사용하게 되는 건가? 결국은 죽어라 사냥을 해야겠군.”
[시안 님! 시안 님∼! 큰일 났어요. 완전 큰일!]
전투를 벌이는 동안 모습을 숨기고 있던 왕눈이가 나타나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짖었다.
하늘로부터 나선을 그리며 내려온 왕눈이는 코알라처럼 그의 왼쪽 팔에 달라붙었다. 입고 있는 의복이 얇아 왕눈이의 감촉, 즉 외피에 싸인 눈알의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 거야.”
그 불쾌한 감각이 견디기 어려웠으므로 은근슬쩍 팔을 털어 왕눈이를 떨쳐낸 시안이 질문을 던졌다.
연인에게 버려진 사람처럼 애처로운 자세로 거짓 눈물을 훔치던 왕눈이가 바닥에 침을 뱉었다. 아니나 다를까, 끈적이는 침에 흠뻑 젖은 두루마리가 튀어나왔다. 퀘스트다.
<시나리오 퀘스트 발생!>
마왕이 되기 위한 마지막 걸음 ― 난이도 A
마왕이 되려는 자, 경쟁자를 꺾기 위한 사전 준비를 하라!
― 이곳 세계에는 당신을 제외하고 한 명의 마왕 후보가 존재합니다. 스스로와 세력을 성장시켜 경쟁자를 물리치세요.
― 1주일 후 특별한 필드가 생성됩니다.
[조금 전 새로운 마왕 후보가 나타났어요. 마신님께서는 1주일 후 두 후보 중에서 한 분을 골라 마왕의 왕관을 하사하신다고 했어요. 정말 열심히 해주셔야 해요. 패배한 쪽은 마왕 후보에서 박탈되고 평범한 마족이 되어버리니까요.]
왕눈이가 새롭게 던져준 시나리오 퀘스트는 시안을 설레게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경쟁자라는 단어가 사진을 찍은 듯 각막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신이 나서 떠드는 왕눈이의 설명 중 절반 정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시안은 PPO시절 미르의 일원으로써 이룩한 특전을 받아 마왕 후보가 되었다. 그렇다면 같은 미르의 멤버이기에 완벽하게 동일한 업적을 세운 그녀가 마왕 후보, 즉 경쟁자가 되었을 확률은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다.
진이향.
7천만 플레이어의 정점에 섰던 존재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등을 맡기고 함께해 왔던 유일무이한 파트너이다.
그녀가 이곳에 있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심장의 고동이 진정되지 않았다.
“설마 네가 PAO를 플레이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세상에서 유일한 호적수라 여기고 있는 그녀와의 전적은 50전 25승 25패. 완벽하게 무승부다.
시안은 지는 것을 싫어한다. 그리고 파트너이자 라이벌인 이향에게 패배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어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앞으로 남은 1주일. 전심전력을 다해 준비할 것을 다짐한 시안은 투지를 불태웠다.
“1주일 후란 말이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
시안은 광기마저 엿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새로운 사냥감을 찾아 나섰다.
플레이어간에 심장이 뛰는 고속 전투도 좋아하고 대형 몬스터를 상대로 한 숨 막히는 레이드도 좋아하지만, 그를 위한 과정 즉 노가다를 통해 캐릭터를 강하게 육성하는 것도 싫어하지는 않는다.
근방의 야생 고블린의 씨를 말리겠다는 각오로 당찬 걸음을 내딛는 시안의 배후에는 그에게 종속된 고블린이 짧은 다리를 열심히 놀리며 헐레벌떡 시안의 뒤를 쫓고 있었다.
4화
“역시 마왕에게는 마왕성이 있어야겠지. 하지만 벽돌을 쌓고 흙을 바르는 등 직접 노가다를 뛰지 않아서 다행이다.”
노가다 및 중노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시안이 명령어를 입력했다.
그의 발치에서 원을 그리는 커다란 빛이 뿜어졌다. 빛의 홀에서 천천히 무언가가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마왕이 거주하며 용사가 클리어해야 할 최종적인 던전. 마왕성이 그 주인공이다.
하지만 빛에서 솟아올라 자리를 잡은 마왕성을 본 시안의 표정이 고등학교 시절 자기 위로 중인 룸메이트와 눈이 마주쳤을 때처럼 싸늘하게 굳어졌다.
“이게 어디를 봐서 마왕성이냐. 단순한 천막이잖아!”
마왕성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마왕도 아닌 마왕 후보의, 그것도 레벨 1짜리를 위한 마왕성이기에 큰 기대를 갖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건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눈앞에 있는 마왕성은 성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붙이는 것이 민망한 수준의 단순한 천막이었다. 크기도 넓지 않다. 비교하자면 4인용 텐트 정도의 수준이며, 심지어는 짐승의 가죽과 뼈를 엮어 만든 것이다.
절로 얼굴을 가리게 만드는 참극이었다.
<시안의 마왕성 Lv1.>
마왕 후보 시안의 마왕성이다. 성이라고 부를 만한 요소를 갖추지 못했다.
가치 : 3
방비 : 1
효과 : 영토 내 아군의 어빌리티 1% 상승.
“이딴 거에 내 이름 가져다 붙이지 말란 말이야. 누가 보기라도 하면 나는 어떻게 살라고. 분명 혼자만의 비밀 아지트에 마왕성이라고 이름을 붙여 놓은 중2병 꼬맹이라고 놀림 받을 거야.”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만 싶었다.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흑역사가 생겨버렸다.
퀘스트가 완료되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경험치가 올랐다. 이번에는 레벨도 함께 올랐다.
PAO의 어빌리티는 플레이어의 직업 및 행동 패턴에 따라 자동으로 분배된다. 시안의 경우 마족에게 주어지는 보너스 혜택을 받은 덕분에 무려 세 개의 마력이 상승했다. 나머지는 체력과 정신력이 상승했다.
[마왕이 되기 위한 길, 그 세 번째∼! 두둥. 두둥.]
“아직도 뭐가 남아 있구나.”
[마왕이 되려는 자, 부하를 육성하라!]
<시나리오 퀘스트 발생!>
마왕이 되기 위한 세 번째 걸음 ― 난이도 F+
마왕이 되려는 자, 그 위대한 이름 아래 행동할 부하를 육성하라!
― 종속 마법으로 몬스터를 부하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한 마리의 몬스터를 부하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제야 사냥 관련 퀘스트인가.”
RPG라면 절대 빠져서는 안 될 꽃, 사냥 관련 퀘스트가 등장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냥이 아닌 포획 관련 퀘스트이지만 스트레스를 풀고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한 전투를 즐길 수는 있을 것이다.
하늘을 날 수 있는 왕눈이에게 물어보면 인근에 어떤 사냥감이 있는지 보다 쉽게 조사할 수 있겠지만, 진정한 모험을 즐기는 시안은 자신의 발로 직접 뛰어다니는 것을 선호했다.
산보라도 하듯 숲길을 걸으며 시안은 종속 마법이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고,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스킬창을 열람했다.
<종속 마법 ― 하급 1단계.>
마왕과 후보생을 위한 전용 마법으로 몬스터에 한해 상대를 종속시킬 수 있다. 종속시키는 상대의 등급과 상호간의 레벨 차이에 의해 성공 확률이 결정되며, 상대의 체력을 5% 미만으로 만들어야 포획을 시도할 수 있다.
숙련도가 높아지면 더 높은 체력의 몬스터를 포획할 수 있게 된다.
소모마력 : 50.
재사용 대기시간 : 30초.
스킬 설명을 정독하며 울창한 숲을 전진하던 그는 게임에 접속한 후 처음으로 몬스터와 조우할 수 있었다.
상대 몬스터는 5레벨의 몬스터 고블린이다. 코와 귀가 뾰족하고 이빨은 짐승의 것처럼 날카로우며 눈은 콩알만큼 작다. 피부색은 덜 익은 사과처럼 초록색이고, 팔다리는 앙상하며 덩치는 고작해야 1미터 남짓이다.
겨우 하반신을 가리는 가죽을 걸치고 있을 뿐이며, 무기는 녹이 슬어 두부조차 제대로 자를 수 있는지 의문이 드는 단검이 전부다.
“키이익! 인간!”
눈이 마주치자 고블린은 단검을 허공에 휘두르며 위협했다.
아무리 몇 주는 제대로 먹지 못한 아사 직전의 시체처럼 보이는 상대라고는 하지만 이곳은 레벨이 강함의 척도가 되는 게임의 세계. 그리고 상대는 시안보다 3레벨이 더 높은 몬스터다. 경계함이 마땅한 것이다.
하지만 시안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초월급 특전의 대상자인 그는 모든 어빌리티를 10씩 추가로 지급받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시안이라는 남자는 컨트롤을 누구보다 자신의 특기로 삼고 있는 플레이어다. 설사 특전이 없었다 할지라도 3레벨 차이정도야 컨트롤로 찍어 누를 자신이 있었다.
“첫 상대는 고블린인가. 그러고 보니 PPO를 할 때도 처음 사냥한 몬스터가 고블린이었던 것 같은데,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겠지.”
전혀 긴장할 가치가 없는 상대이므로 시안은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는 등 최상급의 여유를 부렸다.
“죽어라, 인간!”
교착 상태를 깨고 먼저 움직임을 보인 것은 고블린이었다. 고블린은 어정쩡한 자세로 단검을 휘둘렀다.
물론 PVP승률 81%를 자랑하던 미르의 시안이 이렇게 느리고 예리하지도 않은 어정쩡한 공격에 당해줄 리가 없다. 스치는 것조차 수치다.
“식상해. 대사도 행동도 너무 식상하다! 암흑탄!”
살짝 몸을 비틀어 공격을 회피한 시안은 다리를 걸어 고블린을 넘어뜨렸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머리부터 곤두박질 친 고블린의 뒤통수를 향해 하급 어둠 마법인 암흑탄을 발사했다.
암흑탄은 그렇지 않아도 캐스팅 시간이 짧은 하급 마법이다. 거기에 200%의 추가 보정을 받으니 캐스팅 속도가 없다시피 했다.
빛으로 구성된 기이한 문자. 흔히들 마도 문자라 부르는 것들이 한데 모여 만들어진 흑색의 띠가 시안의 손목을 휘감았다. 문자들이 강렬한 빛을 발했을 때 비로소 그가 사용한 마법, 암흑탄이 생성되었다.
직선의 궤적을 가지며 도중에 물체와 닿으면 폭발하는 성질을 가진 암흑탄은 고블린의 뒤통수에 닿는 순간 축구공만 한 폭발을 일으켰다.
비명을 지르는 고블른의 머리 위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치명타 적중! 급소의 공격에 성공하여 62의 대미지를 입혔습니다.>
단 일격에 상당한 체력이 빠져나갔다.
전투는 굉장히 일방적이었다. 고블린은 최선을 다했지만 시안이 쏘아낸 암흑탄 두 방이 각각 명치와 인중에 꽂혔다. 마지막으로 급소가 아닌 곳에 주먹질을 가함으로 체력을 5% 미만으로 만드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이, 인간! 강하다. 내 패배다!”
“고, 고블린! 약하다. 내 승리다!”
“따라하지 마라!”
“그건 승자의 마음이잖아. 어찌 되었건 가만히 있도록 해. 지금부터 종속 마법을 걸 테니까.”
무릎 꿇은 고블린을 한껏 약 올린 시안은 조건이 맞추어졌으므로 조속히 종속 마법을 사용했다.
시안의 손에서 쏘아진 흑색의 빛이 고블린의 심장 언저리에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블린이 살짝 몸을 움직이자 흑색의 빛은 맥없이 흩어져 버렸다. 종속 마법에 실패한 것이다.
“…네가 움직여서 실패한 거야. 아마도.”
“키익?!”
고블린을 노려보는 시안의 입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실 실패의 원인은 단순한 레벨의 차이로 인해 낮아진 확률 때문이다. 시안 역시 이를 알고 있었지만 모든 책임을 고블린에게 돌리고 화풀이를 했다.
고블린의 뒤통수를 걷어차 마무리를 지은 시안은 전리품을 챙겼다. 운이 없었는지 습득한 아이템이라고는 고블린 가죽 한 장이 전부였다.
시안은 실망하지 않고 곧장 다음 사냥감을 탐색했다.
약 5분 정도 숲을 돌아다닌 결과 두 번째 몬스터와 조우할 수 있었다. 이 근방에 서식지가 있는 것인지, 이번에 마주한 몬스터 역시 고블린이었다.
시안은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뽐내며 고블린을 제압해 종속 마법을 사용했다. 레벨 차이는 여전했으므로 불안함은 있었지만 다행이도 이번에는 성공적으로 종속 마법이 적용됐다.
고블린의 심장에 기이한 문양이 새겨졌다. 문양의 정체를 확인한 시안이 불쾌함에 얼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이건 내가 PPO시절 사용하던 문장이잖아. 뭘 멋대로 사용하고 있는 거야.”
신화 속의 뱀 우로보로스처럼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용 두 마리가 무한대를 의미하듯 겹쳐있는 문양은 다름 아닌 PVP팀 미르의 깃발이다.
시안은 멋대로 자신의 상징 문양을 결정해 버린 크로노스 사를 향해 여지없이 분노를 불태웠다. 이 문양은 파트너인 이향과 함께 할 때만 사용하기로 한 문장이며, 홀로 게임을 즐기고 있는 지금 사용해도 좋을 문양이 아니었다.
하지만 수단이 없었으므로 크로노스 사의 횡포에 놀아날 수밖에 없었다.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으려니 퀘스트가 완료되었다는 메지시가 나타났다. 동시에 여러 가지 소식이 담긴 메시지가 추가로 떠오른다.
<고블린을 종속시켰습니다. 병사로 활용이 가능합니다. 1의 통솔력이 사용되며, 고블린이 사망할 경우 통솔력을 돌려받습니다.>
<건축 명령어를 사용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몬스터를 사냥할 때마다 영혼 조각을 수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역소, 창고, 대장간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고블린 관련 건축물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건축인가…….”
별다른 감정이 담기지 않은 작은 음성으로 중얼거린 시안은 곧장 건축 명령어를 실행시켰다. 영토 밖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는 메시지가 나타났으므로 영토까지 이동해야만 했다.
<건축 가능 목록.>
일반 주택, 교역소, 창고, 대장간, 고블린 주택, 고블린 훈련소, 고블린 석상.
건축레벨은 1이었으며, 낮은 레벨 때문인지 건축 가능한 목록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창고는 물품을 보관하는 장소이고, 교역소는 상점의 역할을 해주었다. 대장간 역시 문자 그대로의 성능을 가졌다.
고블린 주택의 경우 휘하에 둘 수 있는 고블린의 수를 늘려주며, 훈련소의 경우 일정한 영혼 조각을 소모해 고블린 병사를 소환할 수 있다. 고블린 석상을 건설하면 일정 확률로 네임드 고블린이 탄생한다는 문구를 접할 수 있었다.
모든 건축물을 소환할 때 필요한 것은 석재나 목재 등 건축자재가 아니었다. 요구되는 것은 오로지 몬스터를 사냥함으로 얻을 수 있는 영혼 조각뿐이다.
플레이 특성상 인간 문명과 단절되어 있기에 소모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동전이나 지폐 따위가 아닌 영혼 조각이라는 생소한 단위의 화폐였다.
“화폐 대신 영혼이라는 것을 사용하게 되는 건가? 결국은 죽어라 사냥을 해야겠군.”
[시안 님! 시안 님∼! 큰일 났어요. 완전 큰일!]
전투를 벌이는 동안 모습을 숨기고 있던 왕눈이가 나타나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짖었다.
하늘로부터 나선을 그리며 내려온 왕눈이는 코알라처럼 그의 왼쪽 팔에 달라붙었다. 입고 있는 의복이 얇아 왕눈이의 감촉, 즉 외피에 싸인 눈알의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 거야.”
그 불쾌한 감각이 견디기 어려웠으므로 은근슬쩍 팔을 털어 왕눈이를 떨쳐낸 시안이 질문을 던졌다.
연인에게 버려진 사람처럼 애처로운 자세로 거짓 눈물을 훔치던 왕눈이가 바닥에 침을 뱉었다. 아니나 다를까, 끈적이는 침에 흠뻑 젖은 두루마리가 튀어나왔다. 퀘스트다.
<시나리오 퀘스트 발생!>
마왕이 되기 위한 마지막 걸음 ― 난이도 A
마왕이 되려는 자, 경쟁자를 꺾기 위한 사전 준비를 하라!
― 이곳 세계에는 당신을 제외하고 한 명의 마왕 후보가 존재합니다. 스스로와 세력을 성장시켜 경쟁자를 물리치세요.
― 1주일 후 특별한 필드가 생성됩니다.
[조금 전 새로운 마왕 후보가 나타났어요. 마신님께서는 1주일 후 두 후보 중에서 한 분을 골라 마왕의 왕관을 하사하신다고 했어요. 정말 열심히 해주셔야 해요. 패배한 쪽은 마왕 후보에서 박탈되고 평범한 마족이 되어버리니까요.]
왕눈이가 새롭게 던져준 시나리오 퀘스트는 시안을 설레게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경쟁자라는 단어가 사진을 찍은 듯 각막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신이 나서 떠드는 왕눈이의 설명 중 절반 정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시안은 PPO시절 미르의 일원으로써 이룩한 특전을 받아 마왕 후보가 되었다. 그렇다면 같은 미르의 멤버이기에 완벽하게 동일한 업적을 세운 그녀가 마왕 후보, 즉 경쟁자가 되었을 확률은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다.
진이향.
7천만 플레이어의 정점에 섰던 존재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등을 맡기고 함께해 왔던 유일무이한 파트너이다.
그녀가 이곳에 있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심장의 고동이 진정되지 않았다.
“설마 네가 PAO를 플레이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세상에서 유일한 호적수라 여기고 있는 그녀와의 전적은 50전 25승 25패. 완벽하게 무승부다.
시안은 지는 것을 싫어한다. 그리고 파트너이자 라이벌인 이향에게 패배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어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앞으로 남은 1주일. 전심전력을 다해 준비할 것을 다짐한 시안은 투지를 불태웠다.
“1주일 후란 말이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
시안은 광기마저 엿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새로운 사냥감을 찾아 나섰다.
플레이어간에 심장이 뛰는 고속 전투도 좋아하고 대형 몬스터를 상대로 한 숨 막히는 레이드도 좋아하지만, 그를 위한 과정 즉 노가다를 통해 캐릭터를 강하게 육성하는 것도 싫어하지는 않는다.
근방의 야생 고블린의 씨를 말리겠다는 각오로 당찬 걸음을 내딛는 시안의 배후에는 그에게 종속된 고블린이 짧은 다리를 열심히 놀리며 헐레벌떡 시안의 뒤를 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