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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영웅은 마왕이 되었다
2화
“그건 뭐야? 굉장히 특이하게 생긴 안경이네? 어찌 보면 몇 년 전에 유행하던 VR기처럼 생긴 것 같기도 하고.”
가상현실 접속 기기의 설명서를 확인하느라 여념이 없던 소율의 배후로부터 침착하고도 장난기 다분한 여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우아으아아! 깜짝이야!”
우스꽝스러운 비명을 토해내며 뒤를 돌아보니, 새까맣고 큼직한 눈동자가 시야를 가득 채운다.
조금 멀어지니 오뚝하게 솟은 코와 단아한 입술, 밝고 투명한 피부를 가졌으며, 갈색으로 물들인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는 20대 초반의 여성이 그리는 장난기 다분한 미소가 눈을 어지럽혔다.
검은색 트레이닝셔츠와 세트로 구성된 반바지로 무장한 그녀는 털털한 매력을 선보이는 것과 동시에 무방비하기도 했다.
나이는 스물하나로 소율과 동갑이며, 한날한시에 함께 태어난 쌍둥이 여동생 선율이다.
사전 예고는 고사하고 허가조차 구하지 않은 채 소율의 방 안에 침입한 그녀는 익숙하게 침대를 점령하고 드러누웠다. 마치 자기 방인 양 편안해 보인다.
“네 방은 왜 이렇게 더운 거야? 방금 목욕했는데 벌써 땀 나려고 해. 에어컨 틀어줘.”
“나도 그러고 싶은데, 에어컨이 파업을 선언해서 못해. 그보다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노크 좀 하고 다니지그래? 네가 갑자기 말을 거는 바람에 놀라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고.”
“하긴, 내 미모가 치명적이기는 하지. 혈육마저 유혹하는 미모라니, 이 업보를 어찌하리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데 어째서 대화가 통하지 않는 걸까…….”
언제나 그랬듯 필요 이상으로 기운이 넘치는 그녀를 상대하고 있자니 온몸의 진이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그보다 그 이상하게 생긴 안경의 정체는 뭐야? 네가 그렇게 물 만난 물고기처럼 기뻐하니까 괜히 나까지 궁금해지네. 응? 빨리 이 누나한테 설명해 봐.”
그녀는 몸을 뒤집어 엎드린 자세로 턱을 괸 채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나는 무슨……. 이 오빠가 지고한 인내심으로 아량을 베풀어 설명해 주도록 하지. 이건 최첨단 가상현실 접속 기기다. 캡슐형이던 구형과 달리 고글형이라 공간도 적게 차지하고 사용도 편리하지.
“아아, 그거였구나. 그보다 너 어지간히 돈이 많나 보다. 최신형 가상현실 접속 기기면 결코 싼값이 아니었을 텐데.”
“어머니한테 빌렸어. 요즘 돈 쓸 데가 많아서 지갑 사정이 여의치 못하거든. 물론 나중에 갚을 거야.”
“빌어먹게 철없는 아들 탓에 우리 엄마가 너무 고생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녀가 자연스럽게 내뱉은 말은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심장에 틀어박혔다. 치명상이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을 직시하고 아픈 가슴을 달래기 위해 베개를 휘둘러 그녀의 안면을 가격한다. 선율은 허둥대며 팔을 휘저어 방어에 집중했다.
“우아악! 무슨 짓이야! 내가 틀린 말 했어? 철부지, 백수, 게임 폐인! 한소율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문구 세 개잖아!”
“…….”
“솔직히 지금이니까 말하는데, 우리 엄마도 참 너무한다니까. 1년 전에도 게임 때문에 찔찔거리던 놈이 뭐가 그리 불쌍하다고 이렇게나 애지중지하는지 모르겠네.”
“…그만해. 나 HP 다 떨어졌어.”
폭격처럼 쏟아지는 인신공격의 향연에 도도하던 자신감이 꺾이고 기가 죽은 소율은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닫았다.
비 내리는 날의 하늘처럼 침울한 얼굴을 한 그는 방구석에 배치된 소파 위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최대한 편한 자세로 누운 소율은 어머니에게 선물 받은 고글 형태의 가상현실 접속 기기를 착용했다. 꽤나 비싼 물품인지 착용감도 뛰어나고 무게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설사 개량되었다 할지라도 1세대 가상현실 게임 PPO의 플레이어였던 소율에게 가상현실 접속 기기란 낯선 것이 아니다. 대충이기는 하지만 설명서도 읽었다.
때문에 헤매지 않고 기기의 우측에 위치한 전원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가상현실에 접속하시겠습니까? YES / NO>
눈앞에 문장이 떠오른다. 최근 PC게임에 몰두한 탓에 습관적으로 커서를 찾던 소율은 가까스로 가상현실 게임이 음성 입력 시스템을 적용하고 있음을 떠올리고 멋쩍은 미소를 흘렸다.
“YES.”
명령어를 입력하자 시야가 급속하게 어둠에 잠겼다.
귀를 덮는 기기에서 아주 미미한 음량을 가진 불가사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1세대에서도 사용된 이 소리는 사람의 의식을 강제로 수면 상태에 빠뜨린다.
“이보세요, 한소율 씨. 모처럼 내가 놀아주려고 했는데 게임만 할 생각이야? 아무리 가족이라지만 이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단단히 심술이 난 선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 같은 철부지이자 프로급 백수이며 대한민국 제일가는 게임 폐인은 불 꺼진 어두운 방 안에 틀어박혀서 게임을 해야 해. 그게 유일한 존재 의의니까. 현실에서 사는 것은 게임 폐인인 내게 전설급 퀘스트만큼이나 난이도가 높은 일이야.”
“삐쳤네, 단단히 삐쳤어. 이걸 또 어떻게 풀어줘야 하지? 이거야말로 신화급 난이도잖아.”
이마를 짚은 선율이 연거푸 한숨을 토해냈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너도 같이 PAO를 하는 게 어때? 구형이기는 하지만 내가 옛날에 쓰던 접속 기기가 하나 있으니까 그거 빌려줄게. 아, 하지만 PAO의 패키지를 다운로드 받아야 해. 당연히 비용은 알아서 하도록.”
“얼마 전에 옷을 많이 사서 지갑 사정이 빠듯해. 하지만 PPO의 경우도 인원 제한 때문에 못한 것뿐이지 싫어서 안 한 것은 아니니까, 어떻게 할까…….”
들려오는 그녀의 음성은 봄바람을 타는 나비의 날갯짓처럼 명랑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민들레 씨앗처럼 정처 없이 흔들리는 것을 보아 조금만 노력하면 금방 넘어올 것 같다.
“같이 팀을 이뤄서 게임을 하면 재미있을 거야. 이래 보여도 랭킹 1위였던 남자다. 남들이 모르는 정보를 이것저것 알려주지.”
게임은 혼자 하는 것보다 함께하는 편이 즐겁다. 더군다나 팀플레이를 강요하는 PAO는 함께 즐길 수 있는 지인이 많을수록 좋다.
“…솔직히 말이야.”
조심스럽게 운을 떼는 그녀의 음성에는 평소답지 않게 조금의 진중함이 담겨 있었다.
“나는 네가 그런 꼴을 당했으면서도 왜 가상현실 게임에 집착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어. 그 복수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거야? 나야 네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엄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내미 또 망가질까 봐 굉장히 걱정하고 계신다고.”
“중요하지, 그럼. 받은 은혜는 두 배로 갚고, 원한은 열 배로 돌려준다. 내 인생의 좌우명이라고.”
답변을 미리 준비하고 있던 것처럼 소율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쏟아냈다. 불투명한 고글에 가려진 그의 두 눈이 복수심으로 타올랐다.
“그 여자가 내게 1년짜리 트라우마를 안겨줬으니, 적어도 10년짜리 트라우마를 갚아줘야 성이 풀리겠어.”
장난처럼 내뱉은 그 말에는 반박을 불허하는 단호함이 담겨 있기도 했다. 그의 강철과도 같은 고집을 꺾을 방법을 선율은 알지 못했다.
“하여간 똥고집이라니까. 네가 손해지 내가 손해야? 으휴, 저런 게 내 쌍둥이라니, 내가 더 창피하네. 마음대로 하든가! 하지만 또 엄마 가슴에 못 박으면 가만 안 둬. 그땐 가족이고 뭐고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한껏 툴툴거린 선율은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마음이 없다는 듯 등을 돌려 방에서 퇴장해 버렸다.
선율 덕분에 지난 1년간 잊고 지내던 이름이 떠올랐다.
지금으로부터 수년 전, 세계 최초 다이브식 가상현실 게임 PPO에서 7천만 명에 달하는 경쟁자들을 제치고 최정상에 우뚝 섰던 미르라는 이름을 한순간에 밑바닥 없는 낭떠러지에 밀어 떨어뜨린 그 이름이, 그 미소가 떠올라 절로 기분이 불쾌해졌다.
“흥, 마음대로 할 거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한마디를 끝으로 소율의 의식은 새까만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 * *
<플레이어 한소율. 로그인 완료. 성공적으로 다이브를 마쳤습니다. 가상현실 Project Another Online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플레이어 한소율의 PPO(Project Pangea Online) 접속기록을 확인합니다. PVP팀 미르에 소속된 100 Level의 아바타 ‘시안’을 확인합니다. 개발사인 크로노스의 정책에 따라 해당 아바타가 가진 업적에 따른 특전을 부여합니다.>
<모험 및 레이드 분야에서 전설적인 기록을 남겼습니다.>
<도전의 탑 분야에서 초월적인 기록을 남겼습니다.>
<총합 초월적인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는 전무후무한 기록입니다. 기록 등급에 따른 보상이 지급됩니다.>
<고대의 영웅. 어둠 마법사 ‘소율’의 기록을 불러들입니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온갖 메시지가 떠올랐다. 소율이 휘휘 손을 휘두르니 메시지들은 나타날 때처럼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메시지가 사라지고 잠깐의 고요함이 있은 후, 갑작스러운 빛이 쏟아졌다. 막 잠에서 깨어나 창으로부터 쏟아지는 아침햇살과 마주했을 때보다 더 눈부신 빛이 절로 미간을 찌푸리게 한다.
주변의 풍경이 서서히 변했다. 빛으로 가득하던 공간은 어둠이 드리운 장소로 바뀌었다. 유일하게 빛이 있는 장소에는 검을 닮아 예리함을 품은 십자가가 위치해 있다.
‘어라?’
영문 모를 전개에 소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디 최초로 접속하면 PAO의 홍보 영상이 짧게 스쳐 지나간 후 본격적으로 게임이 시작된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서 재생되기 시작한 영상은 어디를 어떻게 봐도 PAO의 홍보 영상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의문에는 아랑곳 않고 영상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공간의 중심부에 한 남자가 있다. 새하얀 백발과 붉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백의를 입은 채 손발이 구속되어 있었다.
나이는 10대 후반으로 보이며, 신장은 그리 크지 않다. 준수한 외모이기는 하지만, 무턱대고 잘생겼다기보다는 어린 시절의 순박함이 남아 있는 외모다.
방 안에 존재하는 사람은 소년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높은 곳에 위치한 좌석을 차지하고 앉은 수많은 사람들이 싸늘한 눈으로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율은 이 장소가 어떤 장소인지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죄지은 자를 심판하는 장소다.
“지금부터 배신자에 대한 심판을 시작한다.”
낮고 중후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리며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드러난 얼굴은 PPO에서 소율이 사용하던 아바타 ‘시안’이었다. 그를 본 소율은 헛숨을 삼켰다.
“어둠 마법사 시안은 12성좌의 일원인 탐욕을 치기 위한 31인의 용사 중 하나로 선별되었으나 동료들을 배신하고 신기를 소지한 채 잠적하여 전쟁을 패배로 이끌었다.”
재판관으로 보이는 남자가 선언함에 따라 고요하던 공간이 순식간에 시장 바닥처럼 소란스러워졌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이 선명하게 귀에 꽂혔다.
“싸우는 것이 두려웠던 걸까요? 용사답지 못한 행동이군요.”
“덕분에 큰일이 날 뻔했습니다. 만약 신들께서 친히 강림하지 않으셨다면 이 대륙은 어떻게 됐을지…….”
“그랬다가는 세계가 멸망했겠지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군요.”
점점 커져 가던 웅성거림은 재판관의 망치가 세 번 소리를 퍼뜨림에 따라 진정되었다.
쏟아지는 책망과 질책의 시선 속에서도 시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정면을 응시할 뿐이다. 그 표정에는 어떠한 감정의 파편조차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대는 최후의 순간 전장에서 도망치는 우를 범하였다. 이는 사형에 처함이 마땅하나, 그대는 지난 시간 평화를 위하여 많은 공로를 세웠다. 그 업적을 감안해 형을 낮추어 영구적인 추방을 명령한다. 앞으로 그대의 이름은 모든 국가로부터 배척받을 것이다.”
그의 망치가 휘둘러지며 심판이 내려졌다.
화면이 바뀌었다. 어두운 방 안은 아무것도 없는 메마른 황야가 되었다. 갈색의 누더기에 가까운 망토를 두른 시안은 묵묵히 황야를 걸었다.
그런 시안의 어깨 위로 붉은 눈의 까마귀 한 마리가 내려앉는다. 살짝 벌어진 부리 안에 상어처럼 몇 겹으로 이루어진 날카로운 이빨이 엿보인다.
까마귀는 시안의 귓가에 대고 간사하게 속삭인다.
[어리석은 용사여, 악마에게 무릎 꿇은 용사여, 그분의 총애를 받으라. 기뻐하라, 용사여. 신께서 너를 택하셨다. 준비하라. 모든 마(魔)의 왕이 될 준비를……!]
2화
“그건 뭐야? 굉장히 특이하게 생긴 안경이네? 어찌 보면 몇 년 전에 유행하던 VR기처럼 생긴 것 같기도 하고.”
가상현실 접속 기기의 설명서를 확인하느라 여념이 없던 소율의 배후로부터 침착하고도 장난기 다분한 여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우아으아아! 깜짝이야!”
우스꽝스러운 비명을 토해내며 뒤를 돌아보니, 새까맣고 큼직한 눈동자가 시야를 가득 채운다.
조금 멀어지니 오뚝하게 솟은 코와 단아한 입술, 밝고 투명한 피부를 가졌으며, 갈색으로 물들인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는 20대 초반의 여성이 그리는 장난기 다분한 미소가 눈을 어지럽혔다.
검은색 트레이닝셔츠와 세트로 구성된 반바지로 무장한 그녀는 털털한 매력을 선보이는 것과 동시에 무방비하기도 했다.
나이는 스물하나로 소율과 동갑이며, 한날한시에 함께 태어난 쌍둥이 여동생 선율이다.
사전 예고는 고사하고 허가조차 구하지 않은 채 소율의 방 안에 침입한 그녀는 익숙하게 침대를 점령하고 드러누웠다. 마치 자기 방인 양 편안해 보인다.
“네 방은 왜 이렇게 더운 거야? 방금 목욕했는데 벌써 땀 나려고 해. 에어컨 틀어줘.”
“나도 그러고 싶은데, 에어컨이 파업을 선언해서 못해. 그보다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노크 좀 하고 다니지그래? 네가 갑자기 말을 거는 바람에 놀라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고.”
“하긴, 내 미모가 치명적이기는 하지. 혈육마저 유혹하는 미모라니, 이 업보를 어찌하리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데 어째서 대화가 통하지 않는 걸까…….”
언제나 그랬듯 필요 이상으로 기운이 넘치는 그녀를 상대하고 있자니 온몸의 진이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그보다 그 이상하게 생긴 안경의 정체는 뭐야? 네가 그렇게 물 만난 물고기처럼 기뻐하니까 괜히 나까지 궁금해지네. 응? 빨리 이 누나한테 설명해 봐.”
그녀는 몸을 뒤집어 엎드린 자세로 턱을 괸 채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나는 무슨……. 이 오빠가 지고한 인내심으로 아량을 베풀어 설명해 주도록 하지. 이건 최첨단 가상현실 접속 기기다. 캡슐형이던 구형과 달리 고글형이라 공간도 적게 차지하고 사용도 편리하지.
“아아, 그거였구나. 그보다 너 어지간히 돈이 많나 보다. 최신형 가상현실 접속 기기면 결코 싼값이 아니었을 텐데.”
“어머니한테 빌렸어. 요즘 돈 쓸 데가 많아서 지갑 사정이 여의치 못하거든. 물론 나중에 갚을 거야.”
“빌어먹게 철없는 아들 탓에 우리 엄마가 너무 고생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녀가 자연스럽게 내뱉은 말은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심장에 틀어박혔다. 치명상이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을 직시하고 아픈 가슴을 달래기 위해 베개를 휘둘러 그녀의 안면을 가격한다. 선율은 허둥대며 팔을 휘저어 방어에 집중했다.
“우아악! 무슨 짓이야! 내가 틀린 말 했어? 철부지, 백수, 게임 폐인! 한소율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문구 세 개잖아!”
“…….”
“솔직히 지금이니까 말하는데, 우리 엄마도 참 너무한다니까. 1년 전에도 게임 때문에 찔찔거리던 놈이 뭐가 그리 불쌍하다고 이렇게나 애지중지하는지 모르겠네.”
“…그만해. 나 HP 다 떨어졌어.”
폭격처럼 쏟아지는 인신공격의 향연에 도도하던 자신감이 꺾이고 기가 죽은 소율은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닫았다.
비 내리는 날의 하늘처럼 침울한 얼굴을 한 그는 방구석에 배치된 소파 위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최대한 편한 자세로 누운 소율은 어머니에게 선물 받은 고글 형태의 가상현실 접속 기기를 착용했다. 꽤나 비싼 물품인지 착용감도 뛰어나고 무게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설사 개량되었다 할지라도 1세대 가상현실 게임 PPO의 플레이어였던 소율에게 가상현실 접속 기기란 낯선 것이 아니다. 대충이기는 하지만 설명서도 읽었다.
때문에 헤매지 않고 기기의 우측에 위치한 전원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가상현실에 접속하시겠습니까? YES / NO>
눈앞에 문장이 떠오른다. 최근 PC게임에 몰두한 탓에 습관적으로 커서를 찾던 소율은 가까스로 가상현실 게임이 음성 입력 시스템을 적용하고 있음을 떠올리고 멋쩍은 미소를 흘렸다.
“YES.”
명령어를 입력하자 시야가 급속하게 어둠에 잠겼다.
귀를 덮는 기기에서 아주 미미한 음량을 가진 불가사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1세대에서도 사용된 이 소리는 사람의 의식을 강제로 수면 상태에 빠뜨린다.
“이보세요, 한소율 씨. 모처럼 내가 놀아주려고 했는데 게임만 할 생각이야? 아무리 가족이라지만 이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단단히 심술이 난 선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 같은 철부지이자 프로급 백수이며 대한민국 제일가는 게임 폐인은 불 꺼진 어두운 방 안에 틀어박혀서 게임을 해야 해. 그게 유일한 존재 의의니까. 현실에서 사는 것은 게임 폐인인 내게 전설급 퀘스트만큼이나 난이도가 높은 일이야.”
“삐쳤네, 단단히 삐쳤어. 이걸 또 어떻게 풀어줘야 하지? 이거야말로 신화급 난이도잖아.”
이마를 짚은 선율이 연거푸 한숨을 토해냈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너도 같이 PAO를 하는 게 어때? 구형이기는 하지만 내가 옛날에 쓰던 접속 기기가 하나 있으니까 그거 빌려줄게. 아, 하지만 PAO의 패키지를 다운로드 받아야 해. 당연히 비용은 알아서 하도록.”
“얼마 전에 옷을 많이 사서 지갑 사정이 빠듯해. 하지만 PPO의 경우도 인원 제한 때문에 못한 것뿐이지 싫어서 안 한 것은 아니니까, 어떻게 할까…….”
들려오는 그녀의 음성은 봄바람을 타는 나비의 날갯짓처럼 명랑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민들레 씨앗처럼 정처 없이 흔들리는 것을 보아 조금만 노력하면 금방 넘어올 것 같다.
“같이 팀을 이뤄서 게임을 하면 재미있을 거야. 이래 보여도 랭킹 1위였던 남자다. 남들이 모르는 정보를 이것저것 알려주지.”
게임은 혼자 하는 것보다 함께하는 편이 즐겁다. 더군다나 팀플레이를 강요하는 PAO는 함께 즐길 수 있는 지인이 많을수록 좋다.
“…솔직히 말이야.”
조심스럽게 운을 떼는 그녀의 음성에는 평소답지 않게 조금의 진중함이 담겨 있었다.
“나는 네가 그런 꼴을 당했으면서도 왜 가상현실 게임에 집착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어. 그 복수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거야? 나야 네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엄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내미 또 망가질까 봐 굉장히 걱정하고 계신다고.”
“중요하지, 그럼. 받은 은혜는 두 배로 갚고, 원한은 열 배로 돌려준다. 내 인생의 좌우명이라고.”
답변을 미리 준비하고 있던 것처럼 소율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쏟아냈다. 불투명한 고글에 가려진 그의 두 눈이 복수심으로 타올랐다.
“그 여자가 내게 1년짜리 트라우마를 안겨줬으니, 적어도 10년짜리 트라우마를 갚아줘야 성이 풀리겠어.”
장난처럼 내뱉은 그 말에는 반박을 불허하는 단호함이 담겨 있기도 했다. 그의 강철과도 같은 고집을 꺾을 방법을 선율은 알지 못했다.
“하여간 똥고집이라니까. 네가 손해지 내가 손해야? 으휴, 저런 게 내 쌍둥이라니, 내가 더 창피하네. 마음대로 하든가! 하지만 또 엄마 가슴에 못 박으면 가만 안 둬. 그땐 가족이고 뭐고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한껏 툴툴거린 선율은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마음이 없다는 듯 등을 돌려 방에서 퇴장해 버렸다.
선율 덕분에 지난 1년간 잊고 지내던 이름이 떠올랐다.
지금으로부터 수년 전, 세계 최초 다이브식 가상현실 게임 PPO에서 7천만 명에 달하는 경쟁자들을 제치고 최정상에 우뚝 섰던 미르라는 이름을 한순간에 밑바닥 없는 낭떠러지에 밀어 떨어뜨린 그 이름이, 그 미소가 떠올라 절로 기분이 불쾌해졌다.
“흥, 마음대로 할 거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한마디를 끝으로 소율의 의식은 새까만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 * *
<플레이어 한소율. 로그인 완료. 성공적으로 다이브를 마쳤습니다. 가상현실 Project Another Online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플레이어 한소율의 PPO(Project Pangea Online) 접속기록을 확인합니다. PVP팀 미르에 소속된 100 Level의 아바타 ‘시안’을 확인합니다. 개발사인 크로노스의 정책에 따라 해당 아바타가 가진 업적에 따른 특전을 부여합니다.>
<모험 및 레이드 분야에서 전설적인 기록을 남겼습니다.>
<도전의 탑 분야에서 초월적인 기록을 남겼습니다.>
<총합 초월적인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는 전무후무한 기록입니다. 기록 등급에 따른 보상이 지급됩니다.>
<고대의 영웅. 어둠 마법사 ‘소율’의 기록을 불러들입니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온갖 메시지가 떠올랐다. 소율이 휘휘 손을 휘두르니 메시지들은 나타날 때처럼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메시지가 사라지고 잠깐의 고요함이 있은 후, 갑작스러운 빛이 쏟아졌다. 막 잠에서 깨어나 창으로부터 쏟아지는 아침햇살과 마주했을 때보다 더 눈부신 빛이 절로 미간을 찌푸리게 한다.
주변의 풍경이 서서히 변했다. 빛으로 가득하던 공간은 어둠이 드리운 장소로 바뀌었다. 유일하게 빛이 있는 장소에는 검을 닮아 예리함을 품은 십자가가 위치해 있다.
‘어라?’
영문 모를 전개에 소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디 최초로 접속하면 PAO의 홍보 영상이 짧게 스쳐 지나간 후 본격적으로 게임이 시작된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서 재생되기 시작한 영상은 어디를 어떻게 봐도 PAO의 홍보 영상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의문에는 아랑곳 않고 영상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공간의 중심부에 한 남자가 있다. 새하얀 백발과 붉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백의를 입은 채 손발이 구속되어 있었다.
나이는 10대 후반으로 보이며, 신장은 그리 크지 않다. 준수한 외모이기는 하지만, 무턱대고 잘생겼다기보다는 어린 시절의 순박함이 남아 있는 외모다.
방 안에 존재하는 사람은 소년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높은 곳에 위치한 좌석을 차지하고 앉은 수많은 사람들이 싸늘한 눈으로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율은 이 장소가 어떤 장소인지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죄지은 자를 심판하는 장소다.
“지금부터 배신자에 대한 심판을 시작한다.”
낮고 중후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리며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드러난 얼굴은 PPO에서 소율이 사용하던 아바타 ‘시안’이었다. 그를 본 소율은 헛숨을 삼켰다.
“어둠 마법사 시안은 12성좌의 일원인 탐욕을 치기 위한 31인의 용사 중 하나로 선별되었으나 동료들을 배신하고 신기를 소지한 채 잠적하여 전쟁을 패배로 이끌었다.”
재판관으로 보이는 남자가 선언함에 따라 고요하던 공간이 순식간에 시장 바닥처럼 소란스러워졌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이 선명하게 귀에 꽂혔다.
“싸우는 것이 두려웠던 걸까요? 용사답지 못한 행동이군요.”
“덕분에 큰일이 날 뻔했습니다. 만약 신들께서 친히 강림하지 않으셨다면 이 대륙은 어떻게 됐을지…….”
“그랬다가는 세계가 멸망했겠지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군요.”
점점 커져 가던 웅성거림은 재판관의 망치가 세 번 소리를 퍼뜨림에 따라 진정되었다.
쏟아지는 책망과 질책의 시선 속에서도 시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정면을 응시할 뿐이다. 그 표정에는 어떠한 감정의 파편조차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대는 최후의 순간 전장에서 도망치는 우를 범하였다. 이는 사형에 처함이 마땅하나, 그대는 지난 시간 평화를 위하여 많은 공로를 세웠다. 그 업적을 감안해 형을 낮추어 영구적인 추방을 명령한다. 앞으로 그대의 이름은 모든 국가로부터 배척받을 것이다.”
그의 망치가 휘둘러지며 심판이 내려졌다.
화면이 바뀌었다. 어두운 방 안은 아무것도 없는 메마른 황야가 되었다. 갈색의 누더기에 가까운 망토를 두른 시안은 묵묵히 황야를 걸었다.
그런 시안의 어깨 위로 붉은 눈의 까마귀 한 마리가 내려앉는다. 살짝 벌어진 부리 안에 상어처럼 몇 겹으로 이루어진 날카로운 이빨이 엿보인다.
까마귀는 시안의 귓가에 대고 간사하게 속삭인다.
[어리석은 용사여, 악마에게 무릎 꿇은 용사여, 그분의 총애를 받으라. 기뻐하라, 용사여. 신께서 너를 택하셨다. 준비하라. 모든 마(魔)의 왕이 될 준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