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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엔드(HAPPY END) 5화
1. 걸어 둔 시간 (5)


“씨펄, 일을 잘한다고 해서 불러다 놨더니 할 줄 아는 것이 없어.”
인부들 사이에는 노인의 과거가 더럽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어디서 주먹 좀 쓴다는 무리가 뒤를 봐주고 있다는 말이 가장 유력했고, 그 뒤를 이어 전과 몇 범이라거나, 사실 부동산계의 큰손이라거나 하는 풍문이 떠돌았다.
지금 짓고 있는 으리으리한 빌딩이 뒤에서 돈 좀 크게 벌어 차렸다는 대부업체의 건물이었으니 소문은 기정사실처럼 되고 있었다. 뭐, 안 좋은 소문에 한해서는 대부분 사실이기도 했다.
고 영감이 그늘 밑에서 땀을 훔치고 있는 작업반장을 불렀다. 둘이 이야기를 하도록 내버려 두고는 교대로 늦은 점심을 먹고 있는 사람들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르바이트하는 대학생과 나이 많은 남자들까지 여럿이 모여 앉은 곳은 왁자지껄했다. 짬밥이 있는 고참 하나가 도시락 뚜껑을 열며 더딘 진도를 두고 거친 욕을 했다.
“일손이 부족한데 어떻게 빨리하느냔 말이야. 애들을 쓸 거면 몸 좋은 놈으로 골라 주질 않고…….”
남은 도시락 하나를 집어 들어 젓가락을 뜯다 잠깐 숨을 참았다. 고참이 투덜거리는 이유는 내게 있었다. 몇몇이 함께 눈을 흘겼다.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짜에, 체력도 힘도 좋지 않으니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노인의 소개로 들어오지 않았으면 작업반장 선에서 잘렸을 게 분명했다.
말없이 김치를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아무렇게나 밥과 반찬을 쓸어 넘기고 있자 옆에 있던 인부 하나가 슬며시 팔을 툭 치고 돈가스를 집어 갔다. 시발. 짜증을 낼 수도 없어서 입술을 꽉 닫고 있자 그가 실실 웃으면서 말을 걸어왔다.
“일은 할 만해?”
“네.”
“그래도 깡은 있는 모양이야. 하루 만에 엄마라도 부르며 도망갈 줄 알았더니.”
“거, 영감님이 불러온 사람이라잖아. 어디 뒤에서 한 가닥 하는 놈 아녀?”
“어이쿠, 그럼 미리미리 잘 보여야 하나?”
“잘 보일 놈이면 이런 곳에 안 오지!”
가시 돋친 농담에 다들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시멘트를 입에 부어 버릴까 보다.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노인이 슬그머니 다가와 어깨를 잡았다. 다들 시치미를 뚝 떼고는 아닌 척 다른 이야기를 왁자지껄하게 떠들었다.
노인이 흰자위가 도드라지는 눈으로 인부들을 쓱 훑어보더니 귓속말을 했다. 담배 고린내가 푹푹 풍겨서 비위가 상했다.
“자네는 오늘 야간이야.”
아까 작업반장과 나눈 이야기가 이것이었나 보다. 일주일 넘게 노가다를 뛰면서 야간작업은 처음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통보에 어깨를 굳혔다 서서히 풀었다. 결국 이 일을 하러 왔다. 긴장할 필요가 있을까, 씁쓸한 생각을 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파트 몇 채쯤 되는 대규모 공사는 아니었다. 조금 높은 건물 하나를 짓기 위해 굳이 야간에 일할 필요는 없었다. 밤에는 인공적으로 불을 밝히지 않아도 트럭이 몇 번만 더 왔다 갔다 하면 기초 뼈대 공사는 끝날 것이다. 그래서 해가 지면 다들 칼같이 집으로 돌아갔다. 노인만 빼고.
진짜 야간공사는 빛이 없어야 할 수 있었다. 회색 시멘트를 대충 찍어 발라 둔 건물 외관을 보았다. 밤이 깊어지면 바깥에서는 안쪽을 볼 수 없다. 일부러 그런 구조로 안전 가림막을 만들었다고 노인이 설명했었다.
“돈이나 많이 주세요.”
집세 내야지. 태연하게 중얼거리며 젓가락으로 식은 밥을 떠 흙바닥에 던졌다. 아까부터 침을 뚝뚝 흘리던 나이 많은 여자가 바닥을 기어와 밥 덩어리를 씹었다. 게걸스러운 장면을 흘금거리며 남은 밥을 먹었다.
“고수레인가?”
“네.”
“미신을 믿다니 특이하군.”
“여긴 공사장이잖아요.”
숨기려고 해도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오게 된다. 더위와 미세 먼지만큼 귀신들이 숨 막히도록 가득 채워진 공간이었다. 이전에 뭘 했던 곳인지 안 봐도 뻔했다.
“미신을 좀 믿어도 나쁠 것 없는 곳이죠.”
발치에 매달려 좀 더 달라고 구걸하는 아귀에게 다시 밥을 던져 주며 웃었다. 억지웃음이 뻔히 보이는 빈정거리는 말투에 고 영감이 은근히 물었다.
“여전히 적응이 어려운 모양이지?”
“…….”
“저런 단순한 놈들한테서도 못 버티잖아. 자네 인생이 딱 그 정도라네.”
노인이 지적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았다. 인생의 절반 가까이 감옥에서 보냈다. 그곳은 이와 벼룩이 뛰었고 그보다 더 자주 타인의 피가 튀었다. 사회에 나와서 쉽게 적응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인제 그만 먹고 일어나 일을 하라는 작업반장의 고함에 제대로 먹지도 못한 도시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인은 쭈그려 앉은 채 해괴한 얼굴로 웃었다.
“이따 뵙죠.”
“그래, 기대하고 있어.”
“고맙습니다.”
목장갑을 끼고 목재와 철근, 시멘트 포대가 가득 쌓인 곳으로 뛰어갔다. 빨리빨리 옮겨! 작업반장이 목에 핏줄을 세웠다. 인부들의 머리와 등을 손바닥으로 두들기며 험한 욕설을 퍼부었다. 무거운 시멘트 포대에 어깨가 눌렸다. 뼈마디가 욱신거렸다.
몇 번이나 왔다 갔다 뛰어다니며 자재를 옮기거나 엮어 둔 철골 구조에 올라타 자재를 묶었다. 위태롭게 작업하고 있다 보면 밑에서 트럭이 반복해서 물건을 쏟고 떠나는 걸 볼 수 있었다.
흙먼지가 풀풀 날렸고 작업복을 입은 몸은 땀으로 범벅이었다. 더러운 목장갑을 벗은 다음 눈을 닦았다. 오른쪽 눈에 티끌이 들어갔는지 따끔거렸다. 다들 마시고 던져둔 빈 생수병이 한쪽에 가득 쌓였을 때 고 영감이 나타나 작업의 끝을 알렸다.
하루치 일당을 받는 놈들이 먼저 돈 몇 푼을 손에 쥐고 떠났다. 소주에 복권이라도 사러 가자고 낄낄거리며 발걸음을 재게 놀린다. 정식으로 고용된 인부들도 어깨와 허리에 파스를 나눠 붙이며 수선을 떨었다. 벌써 저녁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정남향으로 짓고 있는 건물 반대편에 지는 해가 보였다. 검은 그림자가 곳곳에 깔리기 시작했다.
“씹,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어. 개 같은 새끼들.”
작업반장이 담배를 피우며 거친 욕을 했다.
대부업체가 보통 그렇듯 이 회사 역시 기원은 조폭이었다. 어디서 돈깨나 긁어모았다는 놈들은 사업을 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 있으면 손쉽게 멱을 땄다. 이들도 마찬가지로 대부업을 하면서 돈을 갚지 않는 놈이 있으면 처음에는 손가락을 자르고, 그래도 받을 게 없으면 내장을 뽑았다.
그 뒤에는 돈 될 만한 것을 싹싹 긁어낸 텅 빈 거죽만 시멘트와 섞어 땅에 묻어 버리면 된다. 시멘트 섞는 기계는 전기만 연결하면 손쉽게 몇 백 킬로를 갈아 버렸다. 그게 야간에 하는 공사였다.
오늘도 죽는다. 사람이, 이름도 모르는 시신이 지하에 묻힌다. 밑바닥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해야 할 일이 있는 법이다. 시체 유기, 은닉, 살인 공조, 사기와 협박…… 가장 더러운 죄.
“윤이원이라고 했나?”
“네.”
“자네는 왜 이런 일을 해? 고 영감 소개라더니, 너도 그쪽인감?”
누런 이를 드러내며 작업반장이 히죽 웃는다. 사람의 상처를 후벼 파기 위해 노력하는 비열한 얼굴을 보았다.
“네.”
“그쪽은 몇 년이나 했는데?”
손가락이 둥글게 구부러진다.
“5년? 6년?”
5년 좋아하시네. 자랑거리도 아닌 일에 헛웃음이 나왔다.
“12년이요.”
숨기지 않고 그대로 말하자 작업반장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12년? 쉰 목소리가 다시 한번 긴 세월을 읊었다.
“네.”
“거참. 고 영감만 세게 볼 게 아니었구먼.”
“별로요.”
“그쪽도 아주 화려한가 봐. 어이쿠, 이러다 내가 한 수 배워야 하는 거 아닌지 몰라.”
작업반장이 즐겁지 않은 농담을 건네며 트로트를 불렀다. 내 가슴에 사랑의 이름표를 붙여 달라는 구수한 노래가 흥얼흥얼 공사장을 채웠다. 뜻밖에도 노래 솜씨가 수준급이었다. 이제 곧 해야 할 일과 어울리지 않는 흥겨운 어조에 까마귀가 잠깐 앉았다 날아갔다.
아직도 자리를 뜨지 않고 미적거리던 인부 몇이 삼겹살과 소주 이야기를 했다.
“어이, 총각. 자네도 갈 건가?”
누군가 나를 부르며 손짓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내일 보자고.”
두 번 권유는 없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우르르 철수하는 인부들을 보며 다 식은 커피를 마셨다.
“일단 밥이나 먹자고.”
야간 공사를 목전에 두고 작업반장이 중국집에 전화를 걸었다. 강제로 안겨 주는 짜장면을 받아 나란히 중국 음식을 먹었다. 기름진 맛에 속이 느끼했다.
컨테이너에 비집고 앉아 TV를 보면서 시간을 얼마쯤 때웠을까, 바깥에서 자동차 타이어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어른거리는 불빛에 영감이 허리를 두들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야 왔구먼.”
컨테이너 문을 닫고 바깥으로 나가자 검은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운전석에서 덩치 큰 남자가 내리더니 트렁크를 열고 커다란 캐리어를 꺼냈다.
“차 실장님, 오셨습니까?”
“이번에도 잘 부탁하지.”
“아이고, 그러믄요.”
고 영감이 실실 웃으면서 커다란 캐리어를 덥석 받아 끌었다. 남자는 고 영감을 지저분한 벌레처럼 쳐다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누가 봐도 힘 좀 쓸 것처럼 단단하게 생긴 자였다.
“저 사람은 누구지? 처음 보는데.”
“아이고, 제가 미리 소개를 안 드리고. 어어, 윤이원이. 이리 와 봐라.”
신발을 찍찍 끌면서 영감의 옆에 가 섰다. 영감이 뒤통수를 눌러 강제로 허리를 숙이게 하였다. 한참 뒤에야 손에서 힘이 풀렸다. 뻐근한 상체를 들어 올리자 남자가 불쾌해 보이는 눈으로 내 얼굴을 훑어보고 있었다.
“저번에 말씀드린 놈입니다. 젊지만 쓸 만할 겁니다. 자자, 인사드려라. 차 실장님이시다.”
노인은 비굴할 정도로 간드러진 목소리를 냈다. 장단에 맞춰 고분고분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윤이원입니다.”
“……윤이원이라고?”
차 실장이 억세게 내 턱을 쥐더니 얼굴 구석구석을 살폈다. 똑같은 사람 눈인데 실장의 눈은 이상하게 번들거렸다. 이런 일을 하는 새끼들 눈은 다 똑같은가. 얼굴을 찡그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입을 꽉 다물었다.
“어이, 이 새끼는 어디서 만났지?”
“학교지요, 학교. 딱 배우기 좋은 곳 아닙니까.”
“흠.”
흉흉한 출신에 차 실장이 턱을 쓰다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영감이 말한 사람이니 일단 넘어가지. 하지만 이상한 소문이 새어 나가면 가만두진 않을 거야.”
어깨를 툭툭 치는 손끝에는 살의가 가득 담겨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네, 하고 대답했다. 그게 맘에 들었는지 남자는 더 이상의 추궁 없이 차에 올라탔다.
차가 떠나는 내내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며 비실거리던 노인이 히죽 웃으면서 건물 안으로 쑥 들어갔다. 자리에 남아 있는 캐리어를 끌어오라고 턱짓을 한 작업반장이 그 뒤를 따라갔다. 어깨가 씰룩거리는 게 졸개가 생기자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캐리어 손잡이를 잡았다. 생각보다 무겁지는 않았다.
“뭣 해, 빨리빨리 움직여.”
“……네.”
다그치는 작업반장의 목소리에 캐리어를 질질 끌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컴컴한 공터에서 허리를 숙이고 앉아 지퍼를 열었다. 안에는 예상한 것처럼 시체가 들어 있었다. 이미 다 비워 낸 듯 움푹 꺼진 눈과 뱃가죽이 검은 실밥으로 듬성듬성 꿰매져 있었다. 천을 꿰맬 때나 쓰는 싸구려 실이 이 시체를 인간이 아니라 물건으로 다룬 것이라고 증명하고 있었다.
역겨운 놈들. 작업반장이 욕을 하며 콘크리트 배합기 전원을 켰다. 작은 사이즈의 기계는 평소에는 거의 쓰지 않았다. 용량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체 한 구를 집어넣기에는 알맞은 크기였다.
이미 뻣뻣하게 굳은 시체를 아무렇게나 쑤셔 넣고 모래와 시멘트를 삽으로 떠 넣었다. 기계가 돌아가면서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났다. 꽈드득 하는 소리도 났다. 뼈가 부서지고 살갗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두 번째 살인이었다. 이미 죽은 몸뚱이라고는 하지만 살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자기혐오가 기어 올라왔다. 구더기가 양심에 구멍을 숭숭 뚫으며 파먹고 들어갔다. 억지로 계속 기계가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작업반장도 고 영감도 말이 없었다.
믹스 작업이 끝난 기계를 끄고 안에 들어 있는 시멘트를 구멍 안에 붓는 것까지, 작업은 거의 다 홀로 해야 했다.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묵직하게 구부리고 있던 허리를 펴자 고 영감이 주머니에 뭔갈 찔러 넣고 등을 두들겼다.
“잘했어.”
“…….”
“앞으로도 그렇게 하는 거야.”
‘앞으로도 그렇게 사는 거야’라는 말로 들렸다.
“왜 대답이 없어?”
“……네, 감사합니다.”
전혀 고맙지 않았지만 그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었다. 두둑한 지폐가 잡혔다.

그날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했다. 눈에 핏발이 서고 목이 찢어질 것처럼 구토했다. 낡고 더러운 변기에 얼굴을 처박고 울었다. 타일 위를 슬금슬금 기어 온 뱀 같은 여자가 혓바닥으로 발목을 핥았다. 여자의 얼굴은 콘크리트 배합기에 밀어 넣어 죽인 시체와 닮아 있었다. 이 귀신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천장과 벽의 틈, 집안 곳곳 그 어디든 오늘 죽인 여자의 두 눈과 코와 입을 가진 것들이 붙어 나를 욕하고 있었다. 엉엉 울었다. 죽고 싶었다.
교도소에 있을 때 서주영이 면회를 왔었다. 왜 원장을 죽였냐고 물었다. 꿈을 꿨다고 대답했다. 원장이 나를 죽여서 이번엔 내가 그를 죽였다고 대답했다. 서주영이 다시 물었다. 그건 꿈이잖아.
아니야, 현실이었어. 나는 죽었어.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뒤로 깔딱 숨이 넘어간다. 눈이 타는 것 같다.
그래, 정신이 있을 때 생눈이 뽑혔다. 너무 아파서 온몸의 실핏줄이 다 터졌다. 살갗이 찢겼다. 아아, 죽고 싶다. 죽여 버리고 싶다.
후회가 찢어지도록 아프게 혈관을 핑핑 돌았다. 더 잔인하게 죽였어야 했다. 더 갈기갈기 찢어야 했다. 이미 불타 없어진 육신이라도 끼워 맞춰 다시 한번 죽이고 싶었다.
왜 괴로움은 산 자의 몫이어야 합니까, 아버지. 거울 틀을 내리쳤다. 정신없이 기억을 헤집었다.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

***

스무 살이 되어도 고아원에 남기로 했다. 내 자신이 바라기도 했고 원장도 바랐다. 돌봐 주던 어린아이들도 원했다.
원장은 나를 이상할 정도로 특별하게 아꼈다. 다섯 살에 고아원에 버려졌던 하재연과 달리 나는 갓난아기일 때부터 원장이 받아 길렀다. 젖도 떼지 못해 칭얼거리는 아이를 기르는 것은 상당한 인내가 필요했을 것이다. 갓난아이를 도맡아 길러 보고 난 뒤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원장에 대한 보은의 마음은 더욱 커졌다.
원장은 나를 방에 불러들여 무릎에 앉히고 온갖 세상 이야기를 해 주었다. 신문 기사를 펼쳐 놓고 부모를 토막 살인한 자식의 패륜적인 범죄, 부모가 자식의 목을 졸라 교살한 이야기, 더러운 이야기, 가식적인 이야기, 꿈과 사랑이 넘치는 이야기. 모든 것들을 가감 없이 읽어 주었다. 나는 원장이 해 주는 모든 이야기를 거르지 않고 들었다.
그런 끔찍한 범죄들은 아이가 듣기에 좋지 않다는 것을 인지할 수 없었다. 나는 너무 어렸었고, 주위에는 그걸 가르쳐 줄 제대로 된 어른도 없었다. 그냥 특혜를 받는다고 생각해 영광으로 여겨 몸을 사렸다. 은혜라는 이름의 목줄이 이미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원장이 시키는 것이라면 뭐든지 했다. 밤마다 방에 불려 가 가발을 쓰고 입술에 끈적거리는 립스틱을 발랐다. 치마를 입고 구두를 신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도대체 무슨 돈으로 사는 건지 모를 옷이었다. 프릴과 레이스가 잔뜩 달린 원피스와 빨간 리본 구두를 신고 원장의 앞에서 몇 번이나 빙글빙글 돌며 재롱을 부렸다. 원장은 나를 ‘예쁘다’고 칭찬했다.
변태적인 성행위를 하지는 않았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변태적인 행위였다. 밤늦게, 새벽까지 이어지는 기현상이 잘못되었다고 느낀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의 일이었다.
‘이제 더 이상은 하기 싫어요.’
‘왜?’
‘힘드니까요.’
남자아이가 여성복을 입기 위해서는 식단을 조절해야 했다. 살을 찌우는 건 엄금이었고, 또래 친구들처럼 근육을 키우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노출이 심한 옷이 많았기 때문에 몸에 흉터가 남지 않게끔 늘 신경 썼다.
가끔 과한 장난을 하다 얼굴에 상처가 생기면 원장은 엄청나게 화를 내며 나쁜 아이라고 욕했다. 부모에게 대드는 아이는 버려져야 한다는 말에 겁을 먹고 빌었다. 말을 듣지 않는 나쁜 아이가 되지 않기 위해 늘 가만히 앉아서 운동장을 구경만 했다.
착한 아이로 남고 싶기도 했지만, 친구들과 축구공을 차고 싶은 나이였다. 누구나 힘들다고 느낄 만한 일이었다. 원장이 나를 용서해 주길 바랐지만 그는 단칼에 뺨을 후려쳤다.
‘……나쁜 아이로구나.’
‘아버지.’
‘내 말을 듣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저는.’
‘시끄러워, 시끄럽다고!’
굳게 닫힌 방 안에서 원장은 주먹을 휘둘렀다. 이상했다. 왜, 겨우 치마를 입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건지. 두들겨 맞으면서도 알 수 없었다.
‘내가 너를 아꼈는데!’
잘못한 건가. 남자니까 여자 옷을 입지 않겠다고 한 것뿐인데, 큰 실수를 저질렀던 건가.
원장이 강요하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짓이라는 것을 머리가 굵어진 그때도 몰랐다. 늘 다정한 아버지였고 자애로운 신이었기 때문에 의심이 없었다. 마음의 그늘만 잡초처럼 무성해졌지 그것은 타인이 제거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폭력에 오래도록 길들여진 사람이 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원장도 결국 한 발짝 물러섰기 때문이다. 요구는 축소되었다. 원장의 생일, 크리스마스, 신년, 고아원 개원일, 또 몇몇 특별한 날에만 입어 달라고 부탁했다. 더는 존경하는 분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승낙했다.
1년에 단 몇 번의 재롱잔치였지만 여성복을 입어야 했기에 여전히 식단은 엄격했다. 대학생이 된 뒤에도 MT나 개강 파티에 참석하는 일이 드물었다. 밤 10시가 되기 전에 집으로 돌아오라는 원장의 명령이 있었고, 돌봐야 하는 동생들도 여전히 있었다.
그즈음 중학생이던 재연에게 고백을 받았다. 짙은 남색 교복을 입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떳떳하게 사귀자고 하다니.
당시에도 하재연은 예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고아원에 꽃이 피었네, 봉사 활동 온 누나들이 농담을 건넬 정도로 수련같이 예쁘게 피어난 사람이었다. 고백을 받던 순간에도 여자 옷은 재연이가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바보 같은 생각을 했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