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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엔드(HAPPY END) 6화
1. 걸어 둔 시간 (6)


‘넌 너무 어려.’
‘그렇게 어리진 않은데.’
‘대학생과 중학생의 차이는 엄청나거든?’
그놈의 대학생. 재연은 내 말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낡은 교복 재킷을 구겼다. 고집이 센 얼굴이 비뚤어진다.
‘그럼 내가 스무 살이 되면 만나 주세요.’
‘뭐?’
‘어려서 안 되는 거라면, 크고 나서 나랑 연애해요.’
‘왜 하필 나야? 예쁜 여자애들도 많잖아. 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거나…….’
‘형, 내가 바보야?’
하재연은 불쾌하면 말이 짧아졌다. 반항적인 사춘기 소년의 마음을 외면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삐딱하게 팔짱을 낀 채 짜증을 내는 재연의 얼굴을 보다 못해 백기를 들었다. 둘 사이에 이미 남자끼리는 ‘불가능’하다는 대답은 없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하재연은 날 때부터 호모 섹슈얼이었고, 나는 원장에 의해 남성성과 여성성의 구분이 희미해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과정이 어떻게 되었든 5년이 지난 후 우리는 각각 스물다섯과 스물이 되어 연애를 시작했다. 5년 사이에는 별일이 없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지만, 정식 교제는 나름대로 그때부터였다.
밤에는 위태로운 두 사람이 사랑과 욕망에 겨워 섹스를 하고, 낮에는 사이좋게 고아원의 재정을 관리하고 일을 도왔다. 스물아홉까지 삶은 평범하고 멀쩡했다.
‘나도 빨리 취직해야 하는데.’
학비 때문에 중간중간 휴학을 하는 바람에 아직도 졸업이 한참 남은 재연이 투덜거렸다. 아직도 앳된 티를 덜 벗은 얼굴이 귀엽다. 방긋 웃으며 최근 몇 년간 입양 갔던 아이들의 입적 서류를 정리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좀 더 놀아.’
‘형은 일찌감치 졸업하고 일하니까 그런 말 할 수 있는 거예요. 아, 나도 여기 취직…….’
‘월급 짜다. 부탁이니 다른 곳에서 많이 많이 벌어 와.’
‘쳇.’
후원으로 운영되는 소규모 고아원에서 직원을 늘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최저 임금도 못 받는 수준인데. 잔소리하면서 등을 내려치자 재연이 투덜거리면서 방 바깥으로 나갔다. 그제야 억지로 웃고 있던 얼굴을 조금 풀 수 있었다.
‘…….’
이번에 입양이 된 아이와 꽤 친했었다. 천금처럼 아끼던 토끼 인형을 두고 갔기에, 보내 줄까 싶어 양부모의 연락처로 전화했지만 둘 다 없는 번호라는 안내 음성만 나왔다. 이상해서 원장실에 있는 서류를 멋대로 뒤지다 통장을 발견했다. 처음 보는 원장 선생님 개인 명의의 통장이었는데, 입양 날짜와 같은 날 거액의 돈이 들어와 있었다. 후원금이나 개인 자금이라고 치기에는 액수가 컸다. 1억 2천…….
그 말고도 비슷한 액수가 뜸하게 입금되어 있었다. 전부 익숙한 날짜였다. 입양 날. 생각해 보면 입양된 형제자매들은 그 뒤로 고아원을 찾지 않았다. 편지에 답장도 없었다. 종종 양부모로 온 사람들이 어눌한 한국어를 쓰는 경우가 있었다. 화교나 연변 쪽 말투 같은…….
불신도 병이라더니, 홀로 농담을 건네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29년 만의 깨달음이었다.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
그날 밤 제 발로 원장의 방에 찾아갔다. 원장은 특별한 날도 아닌데 와 준 나를 보고 크게 기뻐했다. 오랜만에 착한 아이라고 칭찬을 하며 옷장에 가득 차 있던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꺼냈다. 느슨하게 묶인 푸른 리본 끝을 잡아 풀며 억지로 웃었다.
원장은 직접 입술에 색을 칠해 주었다. 붉은 립스틱, 분홍색 립밤. 뭐든 좋았다. 뺨을 물들이고 눈을 칠하고 여자 옷을 걸치고 구두를 신었다. 다 자란 남자가 이런 꼴을 하면 이상해 보일 텐데. 원장은 성인 남성을 인형처럼 다루며 기이할 정도로 절박한 얼굴로 콧김을 뿜으며 찬사를 내뱉었다.
‘착하다, 이제 다시 착해지기로 한 거니? 내가 큰일을 저지를 뻔했구나.’
‘네?’
‘아니다, 아니야. 오랜만에 술도 마셔 볼까.’
싱글벙글 웃으며 원장이 맥주를 꺼냈다. 기분이 좋다고 마구 마시는 원장을 좀 더 꼬드겨 취하게 만드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술에 잔뜩 취한 원장을 부축해 침대에 올려놓고 휴대폰을 몰래 훔쳐보았다. 타인의 휴대폰을 마음대로 훔쳐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것도 하늘 같아 배반할 생각도 못 했던 사람의 것을.
지문인식 잠금이 걸려 있었다. 침을 꿀꺽 삼키고 술에 곯아떨어진 원장의 엄지를 버튼에 가져다 대 보안을 풀었다. 전화번호부를 훑어보다 입양 중개소라고 등록된 연락처를 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권 원장, 새벽에 어쩐 일이야?
들어 본 적 있는 어눌한 한국어였다. 원장의 몸부림에 침대 밑으로 흘러내린 이불보 끝을 손으로 꽉 쥐었다. 팔이 떨렸다.
-팔아 치운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전화야? 요즘 돈 쓸 일이 많나 봐? 뭐, 어린애들 구하는 곳은 널렸으니 우리야 좋지만…….
요즘 귀한 게 심장이야. 체력 좋은 애로 골라 봐. 전화 너머에서 상대는 신난 목소리로 인간의 장기에 값어치를 매기기 시작했다. 아, 목에서 피고름이 나오는 것 같았다.
-듣고 있어? 그런데 저번 애는 왜 그렇게 비쩍 꼴았…….
‘…….’
-권 원장? 여보세요? ……너 누구야?
코 고는 소리가 어느 순간 뚝 끊겨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침대를 돌아보았다. 원장은 침대 위에서 폭행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이불로 몸을 감싸고 덜덜 떨고 있었다. 살찐 몸이 도살 직전의 돼지처럼 보였다. 혐오와 배신감에 구역질이 나왔다.
‘이, 이원아.’
‘내 이름…….’
‘이원아, 아니야. 아니야. 응? 착하지?’
‘내 이름 부르지 마.’
두툼한 손가락이 어르기라도 할 것처럼 뺨으로 다가왔다. 휴대폰을 내던지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죽여 버리고 싶다. 아니야, 그 전에 알려야 했다. 여기는 고아원이 아니다. 사육장이었다.
원장실의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이원아! 원장이 살찐 비명을 질렀다. 헉, 헉. 늘 걸었던 짧은 복도가 너무 길었다. 한바탕 거세게 넘어지면서 무릎이 대판 깨졌지만 멈출 수 없었다. 혼자 쓰는 방문을 거세게 열어젖히고 들어가 서랍을 미친 듯이 뒤졌다. 신원 불명의 양부모들, 유령 회사 같은 소개소, 거액의 돈.
‘이원아, 내 아가. 아니야, 이건 오해란다.’
뒤따라왔는지 원장이 비참한 몰골로 설설 기며 방 안에 들어왔다. 믿고 싶지 않아 숨겨 두었던 서류를 꺼내 집어 던졌다.
‘당신이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어!’
‘오, 오해야. 정말로 내 말 좀 들어 보렴. 응?’
‘오해라고? 당신이, 어떻게, 우리를…… 나를, 어떻게…….’
숨이 막혔다. 가슴이 꺼질 것처럼 답답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로 죽음의 손을 잡고 걸었을 아이들을 생각하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형제였다. 소중한 가족이었다.
그게 내가 되었으면, 그게 만약 재연이었으면, 우리였으면……?
‘당신은 인간이 아니야. 쓰레기, 개자식.’
‘내, 내가 뭐든 할게. 제발, 제발…….’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두 손을 싹싹 모아 비는 원장을 보자 구토감이 일었다. 눈물은 내게서도 떨어지고 있었다. 원장은 소중한 존재였다. 그는 신이었다. 형제들의 아버지였다. 우리 모두의 아버지였다. 사고뭉치나 마찬가지인 아이들을 늘 끌어안고 귀애한다 말해 주었다. 그에게 귀한 것은, 우리의 몸 안에서 펄떡이고 있는 장기였을 뿐인데.
‘……자수해.’
‘워, 원아.’
‘자수해. 당신이, 직접 고백해.’
‘아…… 으으, 모, 못 해.’
‘내가 하기 전에 해. 하세요. 제발, 내가 당신을 죽이기 전에 하라고.’
증오와 사랑은 겨우 종이 한 장 차이였다. 자기혐오와 죄책감이 무거워 얼굴을 감싸 쥐고 하염없이 울었다. 어떻게 아버지, 당신이 우리에게…….
무릎을 꿇고 엎드린 원장의 앞에 같이 주저앉아 울었다. 차마 감싸 줄 수 없는 일이었다. 종신형을 면하기 어려운 범죄였다.
원장은 이틀 뒤 자수를 하겠다며 무서우니 같이 가 달라고 부탁했다. 마지막 부탁이라는 호소에 마음이 약해졌다. 그의 무릎에 앉아 보낸 세월이 길었고, 입술에 발랐던 건조한 립스틱은 아직도 덜 지워져 있었다. 입고 있는 하늘색 원피스와 장롱 안을 채운 옷들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더는 입을 일 없을 그 화려한 옷들은 전부 불태워 버려야지.
원장이 삶을 정리하기 위해 달라고 한 이틀은 허무했다. 원장은 나와 마주치기만 해도 덜덜 떨었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식사를 제대로 못 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고기 조각만 보여도 역겨워 구역질이 났다. 물을 마시면 피를 마시는 것 같아 전부 게워 냈다. 혹시나 원장이 도망칠까 봐 꼬박 이틀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버텼다. 다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봤지만, 억지로 괜찮다고 말하며 손사래 쳤다.
심신이 괴로웠던 건 나였는데 이상하게 하재연이 앓아누웠다. 알바에 시험 기간까지 겹쳐 마무리 짓는다고 무리를 한 모양이었다. 일을 마무리 지으려면 꼭 나가야만 했는데, 예쁜 얼굴이 시름시름 앓는 걸 보니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심한 열에 찬 물수건이 벌써 미지근해져, 결국 30분 넘게 재연의 머리맡에 앉아 수건을 갈아 주고 병간호를 했다.
‘형, 오늘 일 있다면서요. 안 나가?’
‘너 아픈데…….’
‘난 괜찮으니까, 얼른 다녀와요. 한숨 자고 나면 될걸.’
열에 들떠 붉어진 눈을 하고선. 마뜩잖은 얼굴을 숨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큰일을 앞두고 있어서 마음이 무거워 도망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은 원장을 붙잡고 시내로 나갔다. 원장은 마지막까지 증거를 담은 가방을 흘낏거리며 비굴하게 굴었다.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되겠니.’
‘용서요? 뭘? 내가요?’
원장이 용서를 빌어야 할 상대는 이미 죽어 세상에 없다. 우는 소리를 내며 푸들푸들 떨리는 늙은 얼굴이 가련하고 추했다.
‘나, 나도 널 용서했잖니.’
‘뭐라고요?’
‘나쁜 아이는 너잖아.’
‘지금 무슨 소리를…….’
‘봐주려고 했는데!’
원망이 뚝뚝 흐르는 눈동자가 나를 들짐승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뻔뻔한 헛소리에 기가 차 험한 욕을 삼켰는데, 갑자기 머리 뒤통수가 둔해졌다. 멍하게 뒷머리에 손을 갖다 댔더니 축축한 액체가 묻어났다. 그 뒤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럼, 이건 우리가 마음대로 해도…….’
‘네, 네, 그럼요. 상관없습니다.’
‘다음부턴 주의하라고. 멍청하게 들키면 우리도 곤란해.’
‘여기 돈. 세어 봐.’
‘하나, 둘, 셋…….’
머리가 너무 아파서 정신이 들었다. 눈이 떠지지 않았지만 귀로 소리는 들렸다. 27만 5천 원. 머리맡의 입이 시끄러웠다. 원장이 정확하게 말하던 그 액수가 이상하게 귀에 들어왔다. 원장은 뒤이어 담배와 술을 즐기지만 젊으니 쓸 만할 거라고 말했다. 누군가가 차가운 금속으로 내 눈꺼풀을 슬슬 비볐다.
‘아주 좋아, 너무 좋아. 예쁜 애를 작업하면 기분 최고지.’
낮은 목소리가 콧노래를 불렀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움찔거리는 몸을 보았는지 원장이 귓가에 속닥거렸다. 침이 튀었는지 귓가가 축축해졌다.
‘미, 미안하다.’
그는 울고 있었다.
‘하, 하지만 아가, 네가 나쁜 아이니까 어쩔 수 없어. 아, 아버지 말에 대들면 안 돼…… 너는 착했는데, 이제는 옷도 잘 입어 주지 않고…….’
‘뭐야, 변태 영감. 얘 데리고 인형 놀이했었어?’
‘저, 정말 예뻤는데…… 예쁘다고 내 말도 들어 주지 않는 거니. 너는 나쁜 아이야. 그렇지만 걱정 말아. 재연이는 아직 착하니까, 네가 멀리 갔다고 이야기해 줄게.’
안 돼. 하재연의 이름을 듣는 순간 죽음이라는 것이 적셔 들어오고 있었다. 원장을 조금이나마 믿었다. 믿고 있었다. 그가 죄의 무게 앞에서는 굴복할 거라고. 그러나 원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팔았다. 27만 5천 원. 1억 2천도 아니야. 겨우 27만 5천 원!
그는 살기 위해 나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사랑한다고 말했으면서, 자수하겠다고 했잖아. 도망쳐야 한다고 본능적으로 생각했을 때 두 눈이 있던 부위가 미친 듯이 아파 왔다.
‘아아아아악!’
‘어이쿠, 조심, 조심.’
‘으아. 하, 아아악!’
‘흔들렸잖아. 예쁘게 뽑아 주려고 했는데 너무 많이 찢어졌네.’
눈이 타는 듯 뜨거웠다. 어떤 말로도 서술할 수 없을 만큼 아팠다. 입이 찢어지도록 벌리고 비명을 질렀지만 아픔이 가시지 않았다. 온몸이 산 채로 찢어지고 있었다. 서늘한 금속이 몸 구석구석에 꽂혀 들어가는 것 같았다. 묶인 채로 미친 듯이 펄떡거리며 뛰었다.
‘역시 어른들이 잘 버틴단 말이야. 어린 애들은 쇼크사 하니까…… 아아, 역시 마음에 드네.’
고통에 정신을 잃었다 고통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어디가 뒤틀린 것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는데도 참을 수 없었다. 누가 그냥 단칼에 죽여 주었으면 좋겠다. 살아 있다는 것이 더 괴로웠다. 다 쉰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 희미한 음성이 생각났다.
빨리 돌아와요, 형. 침대에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괜찮다고 말하던 재연을 생각했다.
누가 나 좀 살려 줘. 제발, 살려 주세요.
‘심장, 간, 췌장…… 힘줄, 피부 조직, 혈관, 피까지. 아직 한참 많이 남았어, 응? 힘내.’
‘빨리해, 아파하잖아. 저러면 아무것도 못 쓴다고.’
‘아, 그래야지.’
손톱이 바닥을 긁었다. 너무 아팠다. 재연이가 보고 싶었다. 좀 더 살아 있고 싶었는데…… 부모에게 버려졌다고 세상에서도 버려질 수는 없잖아. 나도 사라지는 거야? 안 돼. 재연아. 혹시 재연이도 똑같은 일을 겪게 된다면.
나는 멍청했으며 나약하고 힘이 없었다. 순진무구하고 철이 없었다. 현실과 배반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나약한 믿음이 더 많은 형제들을 죽게 만들 것이다.
‘시, 신…….’
입 안에서 어금니가 깨졌다. 혀를 잘못 물어 피거품이 입 안에서 튀었다.
‘신이시여…….’
처음으로 원장이 아닌 실체 없는 신을 찾았다. 살려 주세요. 이렇게 살기 위해 내가 태어나진 않았잖아요. 신이시여, 나를 구하시고 죄 많은 이들을 벌하소서. 이 죄를 벌할 수 있다면, 혼과 육을 바치겠습니다.
이름 없는 신에게 올리는 마지막 기도가 끝나갈 때 묘한 음성이 들렸다. 사악한 목소리였고, 따뜻한 온도였다. 둥근 구슬처럼 투명했다. 몸을 덮던 고통이 일시에 전소하는 것처럼 시간이 멈췄다.
「살려 줄까.」
이게 무슨 소리일까.
「살려 줄까, 원아.」
너무 아파서 미쳐 버린 게 아닐까.
「이번 삶을 포기한다면, 다음 생에서 너는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많은 부와 운을 가지게 된단다.」
그런 게 있었으면 일찍 줘야지. 조소하는 사념의 귓가에 대고 목소리가 다른 선택지를 속삭였다.
「하지만 살고 싶다면 다른 방법을 택해도 된단다. 」
어떻게?
「시간을 돌리겠니?」
시간을 돌려?
「미래의 부귀영화를 모두 포기하고 과거로 돌아가는 거지.」
그건 좀…… 끌리는데. 재밌는 이야기다. 동화책이나 영화 속에 자주 나온 타임머신을 생각하며 웃었다. 미쳐서 환상을 겪는 걸까. 낄낄거리며 목소리에게 계속 이야기하라 재촉했다.
「첫 번째 선택을 한다면 너는 윤회를 거쳐 다시 태어날 거란다. 아름답고 평온한 인생을 살겠지. 공기는 달고, 햇볕은 온화하고 부유하며 축복받은 날을 지내게 될 것이다. 억울한 건 한순간이지 않을까. 원장도 언젠가 죽어 죗값을 치를 거고, 다음 생에는 자신이 지은 죄만큼 고통받는단다. 별개로 너는 아름다운 미래를 가지게 될 거야.」
재연이는? 목소리는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또 다른 선택지가 있지. 말한 대로 시간을 돌리는 거야. 복록을 지불하고, 지옥 불을 견뎌내 네가 가진 업을 치르면 다시 생을 반복할 수 있단다. 남들은 가질 수 없는 기회를 가지니 너는 모았던 복록을 전부 대가로 써 버릴 거고, 미래는 비참해지겠지. 그래도 좋다면 시간을 돌릴 수 있게 해 주겠다.」
과거로 가면 재연이는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아도 될까. 아이들이 입양이라는 이름 아래에 팔려 가 장기를 떼어 내고 버려지지 않아도 될까. 원장이 원하는 대로 꼭두각시 같은 삶을 살지 않아도 될까. 그 전에 원장을 내가 미리 죽여 버린다면.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맞아, 눈이 뽑혔지. 고통스러웠다. 뱃가죽이 산 채로 열렸다. 날카로운 것으로 피부를 긁었다. 췌장과 심장을 들어낼 것이라고 말했다. 세상의 고통을 전부 끌어모아 목을 조르는 것처럼 아팠다.
사랑한다고, 누구보다 아낀다는 말에 헌신하는 종처럼 여성의 옷을 입고 화장을 했다. 입지 않으면 죄를 지었다고 때렸다. 그런 비뚤어진 모습도 사랑했습니다, 아버지.
그 맹목적인 마음은 헐값에 팔렸다.
「선택하렴. 타인의 행복과 자신의 불행에 대해서.」
불구덩이에서 태워지는 듯한 아픔을 되새기며 이를 악물었다. 돌아간다면 똑같은 후회를 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다시 돌아갈래.
「네가 비참해져도?」
돌아가면 내 미래가 비참해진다고? 내게 미래는 이미 없는데?
날 선 대답에 목소리의 주인이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불쾌하고 난처한 웃음이었다.
뽑혀 나가 텅 비었던 눈이 서서히 차올랐다. 찢어진 복부가 붙고 장기가 생기자, 도깨비가 채찍을 내리치며 바닥을 기라고 소리를 질렀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허름하고 좁은 고아원의 방 안에 누워 있었다. 오래 썼던 낡은 이불이 손에 잡혔다. 천천히 몸을 확인했다. 말랑말랑한 손바닥과, 벽에 얌전히 걸린 중학교 교복이 보였다. 그대로 뛰쳐나와 아래층에 있는 주방에 들어가서 칼을 꺼냈다. 식칼의 나무 손잡이는 느슨하고 미지근했다. 복도는 맨발이 부딪칠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숨 막히는 살의, 이것은 환희였다.
햇살에 건물이 이글이글 타오르다 겨우 식어 가던 여름날 밤이었다. 고아원에 불이 났다. 아니, 정확하게는 불을 붙였다. 겨울에 쓰고 남은 난로 기름을 부어 만든 불은 금방 건물 전체로 번졌다.
잠을 자다 뛰쳐나온 상급생들이 아이들을 막는다고 몸싸움을 벌이는 소리가 소란스러웠다. 아직 나오지 못한 사람이라며, 내 이름이 불릴 때마다 비명이 들렸다.
‘형, 원이 형!’
내 이름을 부르며 재연이 오열하는 소리가 창문을 타 넘고 들렸다. 그 여린 목소리에 잃어버린 지난날의 심상이 잠깐 일었다 사그라들었다.
울부짖는 비명은 불타는 소리보다 더 컸다. 창문을 통해 건물 아래를 내려다보다 불붙은 커튼을 잡아 쳤다. 바깥의 시끄러운 소리가 조금 가려졌다.
멀리서 소방차가 달려오고 있었지만, 화마는 이미 건물 전체를 뒤덮고 난 뒤였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었고,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방 안에는 나무와 고무, 플라스틱 타는 지독한 냄새가 가득했다. 이제 이곳에는 단둘뿐이다. 짐승이길 선택한 나와, 눈앞의 짐승.
원장의 발목과 연결된 한쪽 손목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길게 늘어진 줄은 중간 쯤 무너진 가구에 깔린 채로 반쯤 불에 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