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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엔드(HAPPY END) 3화
1. 걸어 둔 시간 (3)


살아서 버티게 된 이유는 모른다. 죽을 뻔한 적은 많지만, 죽지는 않았다. 이상한 일이야. 손에 붙은 티끌을 털며 억지로 노인과 악수했다.
“밥이나 한 끼 먹을 텐가?”
“아니요.”
“바빠 보이진 않는데.”
“바쁩니다.”
낡은 의자를 책상에 끼워 넣으며 대답했다. 노인이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인 채 담뱃갑을 만지작거렸다.
“휴대폰 사러 갈 거예요.”
“휴대폰?”
“사회생활도 좀 해야죠.”
“집단생활이랑 안 맞는다더니?”
“집단이랑 사회는 좀 다르지 않나요?”
빈정거리며 컨테이너를 빠져나왔다. 바닥에 깔린 회색 철근이 발에 밟히는 소리가 굉음 같다. 뒤에서 괴물 같은 노인네가 친히 뒷짐을 지고 나와 인사를 건넸다.
“가는 길에 담배 하나 태울 텐가?”
“예에.”
통째로 넘겨주는 담뱃갑을 받으며 고개를 까딱 숙였다. 노인의 시퍼런 눈동자가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무겁게 훑고 떨어졌다.
“내일부터 나오게.”
“…….”
“바깥은 바깥대로 자네를 받아 주진 않을 것 같으니까.”
초 치고 자빠졌네.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흙먼지 날리는 길을 빠져나와 골목을 돌아 나갔다. 푸른색 트럭 하나가 막 골목을 빠져나오며 근처에 고여 있던 웅덩이의 흙탕물을 벽에 뿌렸다. 더러워진 벽을 쳐다보다 벽을 발로 콱 찼다. 부스스한 석회 먼지가 흩날렸다.
오늘따라 황사가 심한지 하늘이 누런빛이었다. 10년 전에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는데, 매일매일 서울의 공기는 점점 더 나빠진다고 한다. 이전에도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 있을까 농담을 했었는데. 이런 부분은 변화가 없다.
텁텁하고 온화한 봄 날씨에 코끝이 간질거렸다. 노인이 넘겨준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며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다 휴대폰 파격 할인이라는 믿음직스럽지 못한 전단이 붙어 있는 대리점으로 들어갔다. 점심시간이었는지 짜장면을 먹고 있던 두 사람 중 단발머리 여자 하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와이셔츠를 입은 남자는 자리에 앉은 그대로였다.
“안녕하세요, 잠시만요.”
여자는 입 안에 든 음식을 허겁지겁 씹어 삼키고 물을 마셨다. 입 주변은 여전히 군데군데가 새카만 색이었다. 식욕을 자극하는 배달 음식 냄새가 매장 전체에 퍼져 있었다. 천천히 하라고 손짓을 해 주고 상담용 의자에 앉았다.
“휴대폰 바꾸러 오셨나요?”
“아뇨.”
부정하자 아가씨의 얼굴이 흐려진다. 금방금방 드러나는 아쉬움에 재차 말을 얹었다.
“개통하러 왔어요.”
그제야 표정이 펴졌다. 개통한다는 말을 들었는지 그때까지 그릇에 고개를 박고 있던 남자가 일어나 아가씨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내가 할 테니 너는 가서 그릇이나 정리해.”
“아뇨, 제가…….”
“아, 내가 한다니까?”
남자가 눈을 부릅뜨며 으름장을 놓는다. 아가씨는 기가 죽었는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떨어트리고 식사를 하던 자리로 가서 신문지를 구기기 시작했다. 남자는 입 안에 사탕을 하나 넣고 굴리다 뱉고는 공손한 표정을 지었다.
“손님, 생각하신 휴대폰은 있으세요? 어떤 거로 봐 드릴까요?”
“아, 죄송한데―”
앞에 놓인 사탕 바구니에서 딸기 맛을 하나 꺼내 들었다.
“저 아가씨한테 개통할게요.”
“네?”
“저기, 아가씨 안 바쁘시면 개통 좀 도와주실래요?”
아가씨의 흐린 얼굴이 확 밝아졌다. 꽃이 핀 것 같았다. 얼굴을 찡그리는 남자 앞에서 망설임 없이 일어나 다른 테이블 앞에 가서 앉았다. 그사이에 그릇을 치운 아가씨는 다 먹지도 못한 짜장면이 아깝지도 않은지 방글방글 웃으며 컴퓨터 키보드를 두들기고 서류를 꺼내 들었다. 그제야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휴대폰 개통은 빠르게 끝났다. 아가씨는 개통 선물이라며 케이스와 휴대폰 거치대 같은 것을 이것저것 챙겨 줬다. 자질구레한 것들이 잔뜩 들어 있는 종이 가방을 들고 바깥에 나와 근처 벤치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벤치에는 나무에서 떨어진 벚꽃 잎이 잔뜩 깔려 있었다. 그 아래를 몸통만 남은 귀신이 구르고 있었다. 발치에서 귀신이 앞니로 벚꽃을 갉작거리며 신발 코에 꽃 덩어리를 뱉었다. 예쁘네. 성의 없이 귀신이 뱉어 내는 꽃잎을 칭찬하며 휴대폰 버튼을 눌렀다. 외우는 번호가 있다는 게 어디야. 힘없이 빈정거리며 기계를 귀에 붙였다. 몇 번 신호음이 가더니 딱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 비서실장 서주영입니다.
벽이라도 두른 것처럼 단단하게 각진 목소리에 소름이 끼친다.
“야.”
-어?
“나거든.”
-윤이원?
“그래.”
갑자기 뭐가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 뒤를 이어서 꺄악, 하는 비명도 들렸다.
-으아아, 부끄러워! 수치스러워!
“…….”
병신 같은 새끼. 심하게 부산스러운 소음을 열심히 참고 또 참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진정했는지 비실비실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부끄러워라. 다음부터는 문자라도 먼저 보내 주지 않을래?
“도대체 뭐가 부끄러운데?”
-내 입으로 비서랬잖아. 으으, 부끄러워. 으으…….
“그러니까 그게 뭐가?”
자기소개 한 걸 가지고 부끄러워할 필요가 있나. 각 잡힌 목소리에 좀 소름 끼치긴 했지만. 닭살이 돋은 목덜미를 긁으며 불평하자 서주영이 뚱한 소리를 냈다.
-부끄러워. 수줍단 말야.
“미친놈이…….”
-너도 친구한테 자기소개 해 봐. 부끄러워.
“뭐. 안녕하세요, 열다섯 살에 인생 시궁창으로 말아먹고 교도소에서 12년쯤 가볍게 구른 사람입니다, 하고?”
별로 부끄럽진 않은데. 덧붙여 말하자 옆자리 벤치에 앉아 있던 사람이 갑자기 헛기침을 하더니 슬그머니 일어나 사라졌다. 노인 말대로 역시 세상 살기 힘든 경력이긴 하다.
-아니 뭐, 그 정도면 부끄러운 게 아니고 한심한 거 아닐까.
“……닥쳐.”
-하하, 뭐. 그래서 이거 네 번호야? 저장한다?
“응.”
-좋아, 나는 사장님이 부르셔서 끊는다. 퇴근하고 연락할게.
결국 5분짜리 통화에서 4분은 혼자 부끄럽다고 설치는 것만 들었다. 첫 전화라고 의미를 둔 건 아니지만 이렇게 쓸모없는 통화라니.
아무것도 없이 빈 액정을 가만히 보았다. 통신사에서 개통 문자가 몇 건 날아온 것 빼고는 조용했다. 당연한 일이다. 서주영에 이어 노인의 연락처를 저장하고 나니 다시 휴대폰이 쓸모가 없어졌다. 괜히 휴대폰을 산 걸지도 모른다.
잠시 생각을 하다 낯선 열한 자리 숫자를 떠올렸다. 노란색 마트 봉투에 같이 들어 있던 작은 쪽지. 잠깐 망설이고는 빠르게 숫자를 눌렀다. 이상하게 휴대폰이 뜨거웠다. 액정을 두들길 때마다 입술 위를 누르고 도망가던 온도 역시 생각났다. 남들보다 배로 더웠었다.
-형?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다짜고짜 들리는 말이 이거다. 무당이라도 되나, 어떻게 알아차렸지. 놀라서 눈만 깜박이고 있자 들뜬 목소리가 재차 울렸다.
-형, 제 번호 기억해 주셨네요.
“기억하라고 알려 준 거 아니었냐.”
-그건 맞죠. 아, 안 그래도 형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화가 와서 깜짝 놀랐어요.
“진부한 멘트 치지 마.”
안 보던 사이에 뭘 먹고 큰 것인지, 이쪽도 기가 막힌 성격으로 자랐다.
-정말이에요. 우리 운명 아닐까요?
“헛소리하지 마.”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은근한 목소리가 간질간질 귓불을 매만지는 것 같았다. 바람이 훅 불자 꽃잎이 와르르 떨어졌다. 아, 추워. 쌀쌀한 바람에 어깨를 움츠렸다. 바람이 뒤에서 불어왔다. 시야가 분홍색 벚꽃 빛으로 흠뻑 젖었다. 비현실적인 풍경이다. 꿈결처럼 흩어지는 꽃을 보는데 전화 너머에서 재연이 포만감이 느껴지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형이 내 눈앞에 있죠.
“그러니까 형이 내 눈앞에 있죠.”
무선의 전파로 연결된 목소리와 실제 목소리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설명해 보자면, 온도가 노골적이다. 천천히 휴대폰을 내리고 등 뒤를 돌아보았다. 놀랍지는 않았다. 조금 전부터 주변이 조용했으니까. 발치에 있던 몸통 귀신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불과 두 번째지만 이런 감각을 쉽게 잊을 리가 없다. 흰 셔츠에 까만 바지를 단정히 차려입은 재연이 휴대폰을 든 채 웃고 있었다.
“날씨 좋네요.”
“…….”
“아닌가?”
“뭐, 그래.”
재연이 자연스럽게 옆에 걸터앉아 손바닥으로 쓸어 낸 꽃잎을 훅 불었다. 공기에서 부드러운 향이 났다. 솜사탕이라도 사 먹어야 할 거 같은 날씨네요. 그의 손가락이 시원시원하게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솜사탕을 바람개비와 섞어 몇 개 꼽아 둔 낡은 기계가 보인다. 더러운 토시를 낀 아저씨가 그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헛소리를 다 한다 싶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여긴 왜 있어?”
“지나가던 길이었는데요.”
“거짓말하고 있네.”
대학교라곤 근처에 하나도 없는 곳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고? 코웃음을 치자 은근한 미소를 흘리며 재연이 옆구리에 엉겨 붙었다.
“정말인데요. 이쪽에 볼일이 있었어요.”
“무슨 볼일?”
“이런저런 볼일이죠. 형은요?”
“일자리 구하느라.”
“아아, 여기 근처에서 일해요? 무슨 일?”
“공사.”
재연은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 대신 조금 가까이 파고들었다. 옆에서 전해지는 나긋한 온기를 타고 가벼운 체향이 느껴졌다. 간질거리는 무슨 향을 닮았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독특하고 좋은 향이다. 상쾌하고 포근했다. 가벼운 걸 보니 사향은 아니고, 편백나무 향도 아니고, 이게 뭐더라? 봄꽃 같기도 하고.
꿈속에서도 하재연은 특별하게 목욕 제품이나 향수를 챙겨서 쓰지 않는데도 가까이에 있으면 향을 맡을 수 있었다. 전혀 단 향이 아닌데도 달콤하다고 생각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할 때마다 어릴 적 좋아하던 딸기잼 파이 과자처럼 졸음이 한 겹씩 바삭하게 겹쳐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찾아온 춘곤증에 몸이 늘어졌다. 귀신이 들끓는 집에서는 시끄러워서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조용하다는 게 이런 거였지.
형, 자요? 재연이 옆에서 속닥거린다. 그 언어조차 이름 모를 향이 실려 있었다. 달콤하다. 입에 머금어야 할 것 같아서 숨을 들이켰다. 가물가물 흩어지는 정신을 모으려고 애썼지만 결국에는 점점 머리가 무거워졌다.
하재연이 옆에 있었던 탓인지 짧은 잠은 시끄럽지도, 조악하고 잔인하지도 않았다. 나긋나긋하고 조용했다. 오랜만에 그리웠던 꿈속의 꿈을 꿨다.

나는 고아원 사무실에서 얼마 전 입양이 끝난 아이의 서류를 정리하다 기지개를 쭉 켰다. 나긋나긋한 봄바람이 조금 열린 창문 사이로 살랑거렸다. 벌써 날씨가 이렇게 따뜻하네. 계절의 변화를 새삼스레 느끼며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낮은 건물 아래에 벚꽃이 만개해 있었다.
나무 그늘 아래서 소꿉장난을 한다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이 귀엽다. 재잘거리는 목소리와 꽃바람이 날리는 풍경에 마음마저 화창해지는 날씨였다. 창가에 서서 담배를 물고 있으니 재연이 들어왔다.
‘형, 바빠요?’
‘아니.’
어차피 방해할 거면서 괜히 물어보긴. 창틀에 대충 담배를 내리누르며 까딱까딱 손짓했다. 재연의 얼굴이 확 밝아져서 가까이 다가왔다. 다 커서는 여전히 어리광이 심하다. 넓은 등을 토닥토닥 쓰다듬어 주자 재연이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갑자기 왜?’
‘낮잠 자다가 안 좋은 꿈을 꿔서…….’
아, 역시나. 하재연은 어릴 적부터 악몽에 자주 시달렸다. 늘 새벽마다 깨서 울음을 터트리더니, 커서는 악몽만 꾸고 나면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달려오곤 했다. 낮잠이면 짧은 시간이었을 텐데도 얼마나 시달렸는지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하다. 목덜미에 이마를 문지르며 앓는 소리를 내는 재연의 몸을 가만히 끌어안았다. 조금 더운 체온과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조금씩 입술이 목덜미를 타고 흐른다. 이놈이 또 한낮부터 판을 벌이려고 하네. 버릇 나쁜 놈의 어깨를 찰싹 때리자 안긴 채로 키득키득 웃는다. 명랑하게 휘어지는 눈을 보며 잔소리를 하는 대신 먼저 입술을 붙였다. 보드라운 숨결이 입 안에 가득 찼다. 목덜미와 뺨을 쥐고 몸을 붙여 온다. 마음이 무더워졌다.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
창백한 세상이었다.
잊으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순간 목 안에서 모래알 같은 비명이 울리려다 꺼졌다. 벤치에 눕혀진 몸을 일으켰다. 머리 아래 재연의 것으로 보이는 점퍼가 곱게 개켜져 있었다. 조금 떨어진 나무 옆에서 분홍색 솜사탕을 손에 쥔 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와 솜사탕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아니, 어울리지 않다 못해 이상했다.
태양 빛에 몸을 따라 그려진 선이 환하게 빛이 난다. 지금 당장에라도 눈을 감으면 다시 꿈속의 세상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순진무구한 세상으로. 눈을 감은 채로 빛을 받고 있던 재연이 느리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하얗고 짙었다.
“깼어요?”
눈을 뜬 재연이 손을 흔들며 아는 체를 해 온다. 담배 맛과 섞이면 이상할 텐데 부드러운 솜사탕을 뜯어 먹는 얼굴은 달콤함에 취한 것처럼 보였다.
“……오늘은 강의 없어?”
소용없는 말을 하자 재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은 오전 강의뿐이었어요.”
아무 문제없다고 대꾸한 재연이 손가락에서 담배를 털어 냈다. 분홍색 솜사탕을 다시 크게 뜯어 먹는 남자의 얼굴에 기억 속 소년이 덧씌워졌다. 벚나무 아래에서 단 과자를 먹는 모습이 천진난만했다.
다 먹은 솜사탕 막대를 쓰레기통 안에 넣고는 경쾌하게 걸어온다. 산뜻할 정도로 잘생긴 얼굴에 꿈속의 얼굴이 희미하게 겹쳐졌다.
“아, 날씨 좋네요. 어디 구경이라도 갈까요? 배는 안 고파요?”
“별로.”
“그렇다면 좀 더 앉아서 꽃구경이라도 할래요? 여기도 경치가 참 좋네요.”
꿈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였던 건 기억이 난다. 하지만 얼마나 사랑했던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내 선택에 하재연이란 인간이 차지했던 비중 정도는 기억난다. 그렇게 많이 사랑했었나. 의아하다.
운명이라면 만났을 때 최소한 심장이 두근거리기라도 할 텐데. 눈앞에 선 하재연은 기이하게도 사랑스럽다기보단 공포에 가까운 상징물이었다. 손가락을 타고 가늘게 올라오는 소름을 애써 숨겼다.
“형, 표정이 이상하네요.”
솜사탕 탓인지 재연에게서 좀 더 짙은 단 향이 났다. 뻗어 오는 손가락을 피하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이상하니까.”
집에 무턱대고 찾아와 입을 맞추고 사라졌다. 낯선 번호일 텐데도 전화한 사람이 나라는 걸 바로 알았다. 사람이라면 어디보다 많은 서울인데 중심지도 아닌 외곽의 어느 동네 공원 근처에서 나를 찾았다. 우연을 가장할 수 없는 일이었다.
끈질기게 쫓아오는 손을 잡아 내리며 말하자, 하재연이 별소리를 다 듣는다는 것처럼 재미있어하며 웃었다.
“이상하다고요?”
“그래.”
“그렇게 치면…….”
입을 여는 재연의 표정은 여전히 웃음이 걸려 있었는데도 스산했다. 바람도 없었고 햇볕은 여전히 따뜻한 날씨였는데도.
“형의 지나온 인생도 이상하잖아요?”
재연이 치열한 난투를 벌인 뒤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초조하고 불안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한 그가 재잘거렸다.
“이제 시작인데 너무 물러서지 말아요. 어차피 형은 앞으로도 전진밖에 할 수 없을 텐데.”
뭘 알고 있는 거야? 묻고 싶었지만 냉정한 표정에 얼어붙어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하재연이 우울한 배역을 맡은 사람처럼 느리게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웃으세요, 형.”
갑작스러운 사형 선고를 받은 기분이었다. 재연이 가볍게 뺨에 입을 맞추고 떠났다. 입술이 닿았던 뺨에 꿀로 된 샘이 솟는 것처럼 지독하게 단 향기가 났다. 입을 틀어막은 채 숨을 참았다. 현기증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발밑으로 꺼지기를 반복했다.

***

그날 밤, 새로운 악몽을 꿨다.
출소하는 날이었고, 주영과 술집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며칠 전과 똑같이 두부김치과 어묵탕에 소주를 마시다 우연히 하재연과 조우했다. 웃는 얼굴로 포장마차에 들어오던 그는 윤이원이라는 사람을 본 순간 더는 웃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본래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딱딱하게 굳은 낯빛.
재연은 혐오를 숨기지 않고 걸어와 내 멱살을 틀어쥐었다.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윤이원.’
훌쩍 큰 남자의 입에서 나온 언어가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나를 겨냥했다.
‘재연아, 아니…… 얘는.’
주영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정작 목이 졸리는 나는 태연했다. 10년이 넘었는데도 단숨에 알아보다니 눈썰미가 좋군, 그런 생각이나 했을 뿐이다.
‘어딜 뻔뻔하게 기어 나와.’
‘하재연, 놔!’
‘주영이 형, 형도 제정신이야? 이 새끼는, 교도소에서 죽어야 했어.’
아름다운 얼굴이 험악한 욕설을 지껄이며 저주했다. 새파란 살기를 흘리는 눈동자가 말없이 쏘아붙이고 있었다. 살인자, 악마 같은 새끼. 당연하다. 모든 사람이 나를 악마이며, 괴물 이라고 소리 질렀다.
서주영은 성격이 꽤 좋은 편이라, 당시 고아원에서 지냈던 형제들과도 간간이 연락하고 있었다. 그러니 언젠간 내가 출소했다는 소문이 새어 나가 마주칠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그곳의 누구든 나를 보는 그 순간 목을 조를 것이다. 원장의 숨통을 끊었던 것처럼 단숨에.
‘거기서 문드러져 죽어야 했다고.’
꿈이라서 그런가, 목이 졸려도 생각보다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재연의 손으로 죽는다니 기쁜 일이었다. 아니다, 사실 이게 바라던 결과물이었다. 갑자기 누군가 죄를 사해 준다거나, 아무것도 아닌 죄인 양 무시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한 짓은 결코 구원이 아니었고, 정의도 아니었다.
이대로 단숨에 내리쳐졌으면. 영혼까지 불에 뚝뚝 녹아내렸으면.
‘더러워.’
이를 뿌드득 가는 재연은 예쁘게 성장해 있었다. 그의 반듯한 입술과 콧대를 보자 생각이 났다. 갓난쟁이일 때부터 살았던 나의 집. 죽음의 문턱에서도 자애로운 줄 알았던 우리의 아버지, 신. 재잘거리는 아이들. 수많은 악귀가 스며들어 있었던 고아원의 허전한 터. 불꽃처럼 터졌던 원장의 방. 하재연을 인생에서 처음 만났던 순간. 행복에 미쳐 활짝 웃자 재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때 나는 아홉 살이었다. 모두 깊은 잠에 빠지고 난 뒤라 발소리를 죽이고 홀로 긴 복도를 따라 걸었다. 낡은 건물은 비만 내리면 엄청나게 습했다. 뒤뜰 개천에서 나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시끄러웠다. 꿱꿱 울긴. 입술에 남은 질척한 립스틱을 손등에 닦아 지우려고 애쓰던 중에 옅은 울음소리를 들었다. 불쾌한 표정이 금세 달라붙었다.
또 누가 악몽을 꾸고 우는 걸까. 어린아이들은 이불보에 오줌을 싸는 건 예삿일이었고, 툭하면 새벽에 자지러지며 일어났다. 복도에 듬성듬성 들어찬 방문마다 귀를 댔다. 방은 옹알이 소리도 없이 조용했다. 착각인가. 아니면 괴담으로 들었던, 불우해 목매달아 죽었다는 여자의 귀곡성인가.
몇 안 되는 방문을 하나하나 다 열어 보다 소리의 근원이 바깥에서 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먼지 낀 창문의 잠금장치를 열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하루살이가 날아다니는 가로등은 먼지로 머리통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초여름에 어울리지 않는 긴팔을 입은 어린아이가 문 앞에서 목청껏 울고 있었다. 망설이다 바깥으로 나가 잠긴 고아원 대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