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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엔드(HAPPY END) 2화
1. 걸어 둔 시간 (2)


“……하재연?”
“네.”
기억 속의 소년은 시간이라곤 1초도 놓치지 않고 빨아들인 것처럼 훌쩍 자라 있었다. 얼굴을 전부 일그러뜨리며 울던 소년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가벼운 옷차림을 한 청년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십자가에 박힌 신의 모습과 같았다. 불안한 기분에 뒷걸음질을 치려다 맥없이 붙잡혔다.
“보고 싶었어요.”
끌어안긴 몸은 적당히 더웠다. 청년이 된 재연이 입은 하늘색 셔츠에서 서늘한 바람의 향이 났다. 아무 말 없이 눈을 깜박거렸다. 태양에 고스란히 방치된 시체를 안는 것같이 몸에 닿은 체온은 뜨거웠다.
아직도 눈앞에 선명하게 보이는 재연의 울던 얼굴. 그리고 그 기억보다 훨씬 건너편에 있는 것은…….
“형은 나 안 보고 싶었어요?”
어릴 적 앳된 모습이 아직도 조금은 남아 있는 얼굴이 눈을 반달로 접었다.
“어떻게…….”
“주영이 형한테 물어봤어요. 보고 싶어서.”
집들이 선물도 샀고. 재연이 옆에 있는 묵직해 보이는 노란색 마트 봉투를 들어 올리며 마저 말했다.
“차 한 잔 안 주나요?”
“…….”
“아니면 내가 끓여 줄 수도 있는데.”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닫았던 현관문을 다시 열었다. 건전지가 떨어져 가는지 경고음을 내며 느릿느릿하게 풀리는 도어록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거품이 터지지만 절대로 끓지 않는 물이 된 것 같았다.
재연이 현관 근처에서 머뭇거렸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 커다란 짐을 든 채 들어오지는 않는다. 신발을 한쪽 구석에 밀어 놓고 가볍게 손짓했다.
“……들어와.”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재연이 반색을 띄고 웃으며 한발 성큼 들어왔다. 엄밀히 말하자면 초대한 건 아니지만, 다짜고짜 기다리던 것치곤 예의가 있는 모양이다. 무거워 보이는 짐을 건네받기 위해 손을 뻗을 때 재연이 완전히 집 안으로 올라왔다. 갑자기 습기로 출렁거리던 집이 조용해졌다. 종이 위에 지우개질을 한 것 마냥 방금까지 집 안에서 들끓던 것들이 자취를 감췄다.
“깨끗하네요.”
가져온 짐을 구석에 내려 둔 재연이 좁은 방 안을 한 바퀴 빙 둘러보며 빙긋 웃었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얼떨떨한 기분을 숨기려고 굳어지는 얼굴을 문지르면서 바닥에 주춤 앉았다.
“뭐…….”
타인과 하는 대화는 여전히 어색했다. 집 안이 갑자기 지나치도록 좁게 느껴졌다. 공기도 희박했다. 불편한 자리였다.
“그래도 살기에 좋은 집은 아닌 거 같은데.”
“상관하지 마.”
“야박하게.”
재연이 작은 목소리로 투정을 부린다. 일방적인 친근함이 어색하기만 했다.
“출소한 건 어떻게 알았어?”
“감이죠. 슬슬 했겠다 싶었어요.”
“…….”
“괜찮아요, 나밖에 몰라요. 다른 애들이랑은 연락도 끊겼고.”
이상한 얼룩이 묻어 있는 누런 장판을 손톱으로 긁으며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재연이 조심스럽게 손을 잡아 왔다. 마디가 지나치게 굵지도 않았고, 길쭉하게 쭉 뻗은 손가락이었다. 손톱 주변도 거스름 없이 정갈하다. 굳은살이 박혀 거친 내 손과는 대조적이었다.
“나는 평범하게 지내고 있어요.”
“…….”
“그런데 이렇게 있으니 옛날 생각이 나네요.”
행복 고아원. 행복이라곤 조금도 남겨 주지 않았던 옛 터전의 이름을 조용히 읊어 보았다.
“형이 내 손을 잡고 자주 걸었죠.”
단순히 새벽마다 엄마를 찾으며 깨는 재연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고아원은 방음 시설이 좋지 않았다. 한 사람이 울기 시작하면 다른 애들도 잠투정하며 깨어났으니 어쩔 수 없었다. 당시에는 나도 아직 어렸지만 형으로서 동생들을 돌봐야 했으니 반쯤은 책임감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복도를 길게 가로지르던 그 서늘한 공기가 싫던 것은 아니었다. 칭얼거리며 보채던 재연이 내 품에만 안기면 울음을 그치던 것도 좋았다. 형아, 어리광 섞인 음성이 사랑스러웠다. 사실은 특권처럼 누렸었다.
“그 복도 풍경이 아직 생각나요.”
재연이 가만히 내 어깨 위로 머리를 올려 온다. 옛날에는 품에 안아도 줬지만, 이제는 살짝 기대 오는 무게도 벅차다. 시간이 오래 지났다. 재연이 말한 것은 이미 퇴화한 기억이었다. 고작 12년이 아니다. 그보다 더 오래전의 기록이었다. 추억이 끝났으니 내게는 그때의 애틋함도 존재하지 않았다.
“매일 형을 생각했어요.”
그립다는 건 꿈에나 어울리는 말이었다. 옛날을 더듬으며 의심과 불신에 찬 시선으로 재연을 바라봤다.
“매일 밤.”
참 이상한 일이다. 교도소에 처박혀 있을 때는 연락 한 번 없었던 놈이 갑자기 찾아와서는 보고 싶었다며 열렬한 고백 타임이라니. 오래 살진 않았어도 이것저것 많이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바깥세상에 나왔다고 환대라도 해 주는 건가.
“아, 그럼 계속 생각하든가.”
괜히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재연이 선물이라고 가져왔던 봉투를 끌어다 열었다. 묵직한 봉투에는 커피나 티백, 주전부리가 잔뜩 들어 있었다. 가장 위에 있는 식빵 봉투를 열자 고소한 냄새가 났다.
“잼도 사 왔는데.”
“필요 없어.”
밋밋한 빵을 씹으며 빗물과 곰팡이가 얼룩진 천장을 바라보았다. 입 안과 목구멍이 금방 뻑뻑해졌다. 빵가루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꾹꾹 입 안에 빵을 뭉쳐 넣으며 손바닥으로 지저분한 바닥을 쓸었다. 걸레질을 했었는데도 손바닥이 금방 새까맣게 변했다.
싱크대에서 지저분해진 손을 씻는데 재연이 등 뒤에서 얼쩡거렸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른거리는 인기척이 신경 쓰인다.
“좀 앉아 있어.”
“음, 형이 서 있으니 불편해서.”
“내가 더 불편한데.”
생각하지도 못한 사람이 집까지 쳐들어온 덕에 가시방석인 건 이쪽이었다. 손에 걸린 물방울을 털며 등을 돌렸다. 전등을 반대로 짊어진 재연의 표정이 어두웠다. 아니, 그림자가 진 것뿐이다.
“형.”
흰 손이 뻗어와 목덜미 근처를 스치고 지나갔다. 소름이 끼쳐 어깨를 움츠리자, 검지와 중지로만 가볍게 빗장뼈 부근을 눌러 어깨를 펴게 만들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라 재연의 손을 쳐 냈다.
“갑자기 왜…….”
“참으려고 했는데.”
“응?”
“내가 오래 기다리긴 했나 봐요.”
까만 눈동자가 일렁거리더니 가까워졌다. ‘아, 새카맣다’라고 생각할 무렵 입술이 닿았다. 숨은 집 안의 습도만큼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끓을 듯 말 듯 갈팡질팡하던 물이 단숨에 부글부글 끓어 흘러넘쳤다. 고온의 물을 잘못 받아 낸 심장이 온통 화상을 입었다. 쓰라렸다.
“……너.”
지나치게 많은 말들이 무성의 소음이 되어 넘쳐흘렀다. 입만 벙긋거리며 얼어 있자 재연이 오묘한 표정으로 슬쩍 웃었다.
“강의 늦겠네.”
태연한 목소리가 툭툭 발치에 떨어졌다. 명치끝을 헤치고 칼날이 서늘하게 들어선 것 같았다.
“저 갈게요. 자주 봐요.”
홀로 만족스러운 얼굴이 순식간에 현관문을 열고 빠져나갔다. 녹슨 소리를 내며 닫히는 두꺼운 문 사이로 뼈 모양이 드러난 손가락이 보이더니, 서서히 집 안으로 미라같이 바짝 마른 몰골이 기어들어 왔다.
그게 시작을 알리는 것처럼 장판과 장롱 구석구석에서 벌레처럼 다시 불쾌한 것들이 들끓었다. 코앞으로 다가온 불청객이 불쾌한 손가락을 꺾으며 앞에서 입을 벌렸다. 입 안에 구더기가 가득했다. 한숨을 쉬며 그놈의 턱을 발로 걷어찼다. 최악이었다.

***

주영의 들뜬 목소리가 방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하재연이 찾아왔다고?”
“응.”
“그래서 이건, 걔가 사 온 거고?”
“응.”
주영이 커플 머그잔을 들어 올리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아, 같이 이상한 표정을 지어 줬다.
“너한테 뽀뽀도 했다고?”
“응.”
거리낄 것도 없으니 그대로 일러바쳤다. 주영의 입꼬리가 이상하게 꿈틀거렸다.
“나 요즘 그런 거 있나 봐.”
“뭐.”
“호모 레이더.”
웃기지도 않는다. 코웃음을 쳤더니 주영이 손가락으로 앉은뱅이 소반을 두들기며 열변을 토했다.
“진짜야, 요즘 내 주변은 게이뿐이야.”
“그러는 너는.”
“여자 얼굴 못 본 지 한참 된 거 같아……. 이러다 꿈에 남자가 나오면 어쩌지.”
“네 욕구 불만 스케일을 알고 싶진 않거든.”
쓸데없이 불쌍한 척하는 얼굴을 보며 혀를 찼다. 직장 상사가 주말 내도록 부려 먹어 애인한테 매번 차인다는 말은 너무 많이 들어 외울 정도였다.
“너무하시네. 피곤함을 불사하고 찾아온 내 열정이 보이지도 않냐.”
“안 보이니까 닥치고 커피나 마셔.”
면박을 주자 주영이 말없이 입술에 머그잔을 붙였다. 입술이 씰룩거리는 게 여전히 이 상황이 웃긴 모양이다. 하긴, 12년 만에 만난 사내자식이 다짜고짜 입술 박치기 하고 사라졌으니 황당하긴 매한가지였다.
“걔도 참 이상하네. 너랑 어울린다.”
“제발 그 입 좀 다물어.”
“안 돼. 나는 말도 못 하면 스트레스로 말라비틀어질 거야.”
주영이 다시 직장 상사가 사이코에 상상 이상의 변태라는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한 귀로 듣고 흘리고는 혼자 머리를 굴려 가며 고민했다. 내 삶은 원래부터가 이상했고 전부 비틀려 있었다.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어느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왜 바깥에 나오자마자 겪는 일이 이런 거지.
흘끗 곁눈질로 주영의 허벅지에 매달린 것을 보았다. 얼굴 절반이 없는 귀신 하나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달갑지 않은 눈웃음을 친다.
토할 것 같네. 얼른 커피로 입을 채우며 주영의 얼굴로 시선을 올렸다. 서주영은 자신의 몸 이곳저곳에 귀신이 얹혀 있는 것도 모르고 신나게 상사 뒷담을 하면서 커피를 두 잔째 축냈다. 재연이 들어왔을 때와 달리 집 안은 여전히 숨 막히게 많은 귀신들로 들끓고 있었다.
늘 자리가 비좁을 만큼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교도소에도 유달리 기가 강한 사람은 있었다. 범죄자들뿐이니 오히려 많은 편에 속했지만, 하재연처럼 깔끔하게 한 장소에 있는 귀신을 전부 밀어 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정말 이상하네. 조금 더 고민하고 있을 때 서주영이 할 말을 끝냈는지 드디어 이상한 몸짓을 멈추고 잔을 내려놓았다.
“일할 곳은 구했고?”
“응, 내일 소개받은 곳에 한번 가 보려고.”
“그렇군. 나도 알아보고 괜찮은 곳 있으면 소개해 줄게.”
“그래.”
주영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바닥에 앉은 채로 배웅하고는 머그잔 바닥에 조금 고여 있는 커피 믹스를 마저 마셨다. 단맛이 강하게 났다.
살인을 저지른 이후로 하재연을 만난 적이 없었다. 재판 중에 법정으로 찾아온 적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어릴 적 그를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더 애틋하게 돌봐 준 이유만으로 찾아왔다기엔 부족했다.
하물며 이성적인 사랑이라면 더욱 기이한 일이었다. 우리는 둘 다 남자였고, 성적인 접촉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적어도 내가 열다섯이던 과거에는.
좀 더 구체적인 사연이 있어야 재연의 행동을 납득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교도소 골방에 처박혀 벼룩과 씨름하던 지난 십여 년간 도대체 무슨 사연이 생길 수 있는 거지? 짚이는 구석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열다섯 살에 꿨던 꿈. 주영에게만 말했었던 꿈을…… 하재연도 꿨다면?
혹시나, 불확실한 가정이 머리 한구석을 때렸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재연이 찾아와 감성에 찌든 소리를 했지만 지난 12년간 연락 한 번 없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저 인과 관계가 강하게 얽혀 있어서 그런가. 인과라. 다듬지 않아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입 안을 깨물었다.
오래 기다렸다고 했지. 그때는 하재연 자신이 어렸기 때문에 12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뭐 이렇게 긍정적인 뜻으로 생각해 봐야 하나. 허벅지에 매달려 오는 귀신을 무릎으로 쳐 떨어트린 후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늪에 빠진 것처럼 장판이 질척거렸다.
그 꿈에서도 원장은 우리의 신이었다. 부모의 얼굴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있어 유일한 마음의 혈육, 아버지, 가족. 맹목적인 사랑이 눈을 가렸기에 아무도 고아원의 병폐를 몰랐을 것이다.
종종 고아원의 살림이 어려워지면 원장은 입을 줄이기 위해 한 명씩 입양을 보내곤 했다. 깔끔한 옷차림을 하고 인자한 인상을 지닌 양부모들이 찾아와 인사를 하고, 동생들을 데려갔다. 헤어지는 순간이 아쉬워 눈물바다가 되었던 것도 잠시였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그 아이가 없었던 것처럼 놀았다. 학교에 다니고, 모여서 퍼즐 맞추기를 하다 또 누군가를 떠나보냈다.
‘입양’이라.
고아원이 어려울 때마다 기적처럼 이루어지던 입양, 그 뒤로 이상하게 다시 유복해지던 생활. 기계적일 정도로 똑같은 패턴을 이상하게 생각할 만큼 우리 중 의심 많은 사람은 없었다. 그곳에서 일해 주던 보육 교사조차도 몰랐다. 우리는 원장의 품에서 세상의 악함과 타락을 모르도록 천진난만하게 자랐으니까.
가끔은 막 한글을 다 뗀 어린아이가, 가끔은 이미 중학생이 된 맏형들이 입양을 갔다. 그러나 나만은 늘 입양의 손길에서 벗어나 있었다. 원장은 나를 아꼈다. 이원이 너를 특히 사랑한다며, 예쁘고 가장 자랑스러운 아이라고 입을 맞추고 칭찬해 줬다. 자애로운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세상의 꽃과 달콤한 이야기를 들었다. 너는 내가 가장 아끼니 영원히 이 아비와 같이 살자고 속삭였다.
내 죄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얼굴을 가린 채 몸을 웅크렸다. 숨을 참자 헐떡거리는 심장 소리가 몸 안에서 깊숙하게 고였다. 슬금슬금 몸 위를 타고 넘어온 것이 혀를 할짝이며 귀에 속삭였다.
살인자, 악마, 죄, 낙인, 벌과 구원…….
보통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고아원을 떠났다. 다 큰 아이들을 계속 데리고 있기에 그곳은 너무나 작았고 볼품없이 가난했다. 하지만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고아원에 남았다. 원장 곁에서 고아원 살림을 꾸려 나가고, 자잘한 서류 작업을 처리하며 소소하게 용돈을 벌었다. 입양 기록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은 그때의 이야기였다.
서류를 집어 던지며 무섭게 화를 내는 내 앞에서 원장은 무릎을 꿇고 울면서 변명했다.
‘다 죽어, 다 굶어 죽을 바에야 하나만 죽는 게 낫지 않겠니. 응, 돈이 얼만데. 사람이 얼마나 귀한데…….’
우리를 품에 안고 귀하다 말해 준 것은 그런 뜻이었다. 원장의 말을 듣고 배신감에 휩싸였다. 말을 떼기 전에는 부모에게 버림받았다. 크고 나서는 믿었던 신에게 배신당했다. 나는 낭떠러지를 평지라고 생각하고 걸었나. 지나쳐 온 삶은 전부 비틀려 있었다. 결국은 구원받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구석진 곳에서 굳어 있는, 나이 든 노동자의 모습을 한 귀신과 눈이 마주쳤다. 잇몸이 시뻘겋게 전부 드러난 귀신이 뻐드러진 이를 딱딱 부딪치며 외쳤다. 나가, 걸어라. 뛰어라. 피를 흘리고 일을 해라. 정지된 머리를 때리는 거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어둠이 긴 밤이 오면 또 방 안에는 물이 고이는 것처럼 수많은 영혼이 찾아들겠지. 배 위에 마음대로 엉덩이를 깔고 앉아 사람을 괴롭히는 어린아이의 혼을 보며 손가락으로 장판을 두들기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바깥으로 나갔다.
편하게 쉬어서는 안 되는 죄인이었다. 아직도 갚아야 하는 빚이 수억 수천의 금화가 되어 발밑에 깔려 있었다. 아직은 인간이다. 일하고, 살아야 했다. 최소한 죽음이 직접 등 뒤에 올라타기 전까지는.

***

갓 만든 따끈따끈한 통장과 카드를 들고 구인·구직이라는 노란 팻말이 커다랗게 붙은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갔다. 컨테이너 안에 있는 낡은 소파 옆에는 전기히터가 돌아가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소파 위에 누운 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노인이 흘끗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뻘겋게 켜진 기계의 불빛 탓인지 눈이 덩달아 붉었다. 이마 위에 깊은 주름살이 패여 있었다.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도도하게 굴더니, 고까운 얼굴이구먼.”
“누가요, 제가요?”
도도하다고. 코웃음을 치면서 미닫이문을 닫아걸었다. 비닐 가죽이 벗겨지고 삭은 스펀지가 드러난 의자를 빼 걸터앉았다. 노인이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지가 풀풀 날린다. 거만하게 의자 등받이를 팔로 끌어안은 채 몸을 흔들자 삐걱거리는 스프링 소리가 났다.
“일자리를 찾는 거냐?”
쌀쌀한지 위에 낡은 작업복을 껴입은 노인이 담배 필터를 손톱으로 누르며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개털이니까요.”
“여전히 약질 못해. 자네 정도면 학교 안에서도 잘 살 수 있었어.”
“아하…… 아시다시피 집단생활은 영 편하지 않아서요.”
점잖은 체하는 말투에는 가시가 있다. 노인이 손을 덜덜 떨며 담뱃재를 털었다.
“그래서 그 꼴을 당하며 살았던가?”
“꼴이란 게 정확하게 뭐죠?”
“공사 아니겠나.”
공사라. 순식간에 입술이 비틀렸다. 골방의 놈들은 평소에는 내 존재를 잊고 지냈지만 눈에 띄면 그날 기분에 따라 공사를 시작했다. 교도소의 음지에서 이루어지는 공사란 대부분 잔인했다. 폭력, 강간, 고문.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살았지만 가끔은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었다. 하물며 그게 교도소를 옮겨 다니며 10년 넘게 이어졌다면.
“끝까지 버티다니 지독하군.”
“그래서 저한테 연락처를 알려 주신 것 아닌가요.”
“맞아. 자네가 독특한 사람이라는 건 익히 알았지.”
눈앞의 남자는 벌써 70이 넘은 노인이다. 살인 및 사기죄로 복역을 하던 이 노인은 늙은 몸으로도 알력 싸움에서 이긴 자였다. 교활한 세 치 혀와 사람의 목숨으로 교도소 안에서도 돈을 벌었다.
“이번에는 무엇을 시킬까?”
노인이 가래를 뱉으며 웃었다. 그의 가랑이 사이에서 무릎을 꿇고 빵을 구걸하며 성기를 빨았던 과거가 있다. 네발로 기어 다니며 시키는 대로 오물에 머리를 처박고 개의 울음소리를 흉내 내 가며 목숨과 식량을 빌어먹었다.
그는 인격적이지 않은 행위을 군말 없이 행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고, 출소 전에 자신의 연락처를 건넸었다. 아마 지금도 교도소에서 하던 것과 비슷한 일을 하며 지내고 있겠지. 더러운 곳에서, 더 더러운 인생을 위해.
“그렇지, 공사를 해 보는 건 어떤가?”
“나쁘지 않네요.”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공사 대상으로 지정되고 제정신으로 복역을 마치는 사람은 드물다. 그간 두들겨 맞으며 배운 해사한 미소를 짓고 얌전하게 앉아 있자, 얼굴을 빤히 보던 노인이 담배를 끄며 긍정했다.
“좋아, 일자리를 소개해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