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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라 : 소울 콜렉터 1권 (17화)
6. 보디가드 (3)
어찌되든 이젠 인간의 혼을 하나라도 지켜야 하는 상황이 됐다. 염리가 자신을 찾아내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훔쳐가게 된다면 그때야 말로 세기의 종말. 인간과 인간의 전쟁은 물론이고 악마와 신의 대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퇴마사들과 규합해야 한다.’
저승사자들과 퇴마사들은 서로 목표가 비슷한 긴밀한 관계였다. 공통적으로 악마를 퇴치하며 퇴마사들은 악령이나 혼 등을 잘 달래주고 이승에서 떠날 수 있게 만들어주며, 저승사자는 그 혼들을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저승사자들이 파업을 하고 있는 지금 아마 퇴마 일을 많이 해본 퇴마사들이라면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저승사자들이 본래의 일을 잘 안하고 있고, 오히려 인간들을 먹잇감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근신이 풀리면 퇴마 협회에 한 번 건의를 해봐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과연 저승사자들과 싸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한낱 인간이 어떻게 자신들의 혼을 입맛대로 다루는 저승사자들과 싸울 생각을 하겠는가.
‘이건 좀 고민해 봐야겠군.’
염라가 같이 나선다면 제아무리 저승사자들이라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을 테지만 정체를 숨겨야 하는 입장에서는 섣불리 나섰다간 일을 그르칠 수 있었다.
“염라 씨?”
갑자기 염라가 말을 멈추고 심각한 표정을 짓자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불렀다.
“아아, 미안.”
염라는 금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자꾸 잊고 있지만 그녀는 상당히 귀중한 카드 패였다. 조금만 가르치면 저승사자들에게 직접적인 건 몰라도 간접적인 피해 정도는 입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얼른 그녀가 성장해야 할 텐데, 자신이 너무 가르치는 게 부족한 걸까. 하기야 신들은 자연스럽게 알고 있는 걸 설명하려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저 대충 쓸 수 있을 거 같아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세요!”
“그래? 그럼 지금 하나 알…….”
염라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뚝 멈췄다.
“염라 씨?”
염라가 무서운 눈빛으로 갑자기 베란다를 너머에 옥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금비도 그의 시선을 따라 밖을 바라봤지만 파란 하늘, 하얀 구름 그리고 그 아래 네모난 건물만이 덜렁 있었다.
“뭘 보는 거예요?”
“아무래도 돌아가야 할 거 같네.”
그의 분위기가 차츰 무거워지자 금비도 느낀 게 있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염라의 옷을 꽉 잡았다.
“악마죠! 아니면 탐? 아니면 요새는 흔하지 않다는 악령인가요!”
염라는 고개를 홱 돌려 그녀를 노려봤다.
좀 전까지 흑진주 같은 검은 눈동자가 금색으로 변해 있었다. 숨을 멎게 만들 정도로 오싹한 금색의 눈동자. 마치 밤에 빛나는 늑대의 눈과 같은, 감정 하나 느껴지지 않는, 단지 눈빛만으로도 온몸을 짓누르는 느낌에 금비는 갑자기 주변의 공기가 사라진 느낌을 받으며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다.
“컥… 끅……!”
「집으로 돌아가라.」
숨을 쉬기 위해 발버둥 치던 그녀의 머릿속에 염라의 목소리가 무겁게 울려 퍼졌다. 마치 그녀는 최면이라도 걸린 듯 흐리멍텅한 눈으로 두 팔을 늘어뜨리더니 가방과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완전히 떠나가자 염라는 검은 코트를 단단히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한낮의 겨울의 날씨가 제법 매서웠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한기에 바람까지 불고 있어 눈이라도 내리지 않을까 싶을 지경이었다.
“후우… 나와라.”
염라가 아무도 없는 주택가 거리에 크지도, 작지도 않게 말하자 뚜벅, 하고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뚜벅―뚜벅―
“Excellent! 저승사자의 기운을 단번에 알아채고, 심지어 도망도 가지 않는다. 게다가 악마를 퇴치할 때 인간까지도 서슴지 않고 없애는 무자비함. 그건 본인이 인간이 아니거나 정신병을 앓고 있거나…….”
골목길에서 나온 남자는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로 씩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서구적인 외모를 가진 금발 벽안의 180cm를 훌쩍 넘는 남자. 머리에는 토끼라도 나올 듯 마술 모자라 불리는 탑 햇을 쓰고 있고, 몸에는 영국 신사라도 되는 냥 정갈한 양복에, 가슴에는 행커치프를 꽂아두고 있었다.
“저승사자…로군.”
염라는 금안을 빛내며 서구적인 외형의 남자와 마주섰다.
“설마 이런 모습으로 계실 거라곤 예상을 못했습니다, My King.”
남자가 탑 햇을 까딱 거리며 웃어 보이자 염라는 작은 키로 그를 올려다보며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대왕을 만났으면 예를 표해야지. 네가 누군지 밝혀라.”
저승사자는 여부가 있겠냐는 듯 모자를 벗으며 신사적인 인사를 표하며 그에게 고개를 푹 숙였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소인, 트릭이라고 하옵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왜 그런 모습을…….”
황송은 개뿔. 염라는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황홀하고 공포스러울 정도로 번뜩이는 금안으로 가만히 트릭의 눈을 응시하더니 싸울 의지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던 건지 염라가 눈을 깜빡이자 적기가 가득했던 금안이 사라지고 다시 흑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무래도 저승에서의 모습은 눈에 띄니까. 전혀 의심을 사지 않게끔 변한 거지.”
“그렇군요. 그 말씀대로… 그간 추적조들이 꼬리조차 잡지 못했습니다.”
“내 위치를 알게 된 건 내가 지옥으로 보낸 선물 때문이었나?”
“아, 그 악마 말입니까? 하하, 염리님께서도 무척 당황하셨습니다.”
그때의 일이 떠오르는 듯 트릭은 쿡쿡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갑자기 한 악마가 염라대왕을 발견했다며 지옥에서 난리쳤던 그 일. 감히 염리님을 데려오라며 건방지게 말해 저승사자들에게 두들겨 맞은 그 하급 악마를 떠올리던 트릭은 그게 아니라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 미천한 놈이 대왕님의 소재를 알려주기도 했지만 염라 님께서 옥새를 사용했다는 소식에 대왕님의 위치를 알게 된 겁니다.”
옥새는 금비를 구할 때 악마를 지옥으로 보냈던 특이한 능력을 지닌 그의 도구였다. 유일하게 모든 차원을 넘나드는 도구로 염라가 가고 싶은 곳이라면 그곳이 신들이 사는, 소위 신계라 부르는 천국이든, 악마들이 사는 지옥이든, 아니면 그의 고향인 저승이든 어디든 갈 수 있는 것이었다.
“…뭐?”
옥새를 사용해서 잡힌 거라니. 옥새의 힘을 감지하는 어떤 시스템이라도 있는 것일까. 염라의 기억으로는 저승은 그런 문물 같은 게 존재하지 않았다. 시대상으로 보면 거의 고려나 조선쯤의 시대에 정착해서 수수하게 살아가는 곳인데 트릭의 말을 생각해보면 염라가 아는 저승과 지금은 현저하게 다르단 뜻이었다.
“이런, 대왕님이 계셨을 때와 지금의 저승은 많이 다른 세상입니다. 이곳처럼 기술이 발달해 모든 게 편리한 생활이 되었지요. 고작 일 년 새… 라고는 하지만, 그만큼 염리님이 잘해주신 거죠. 옥새의 위치를 찾은 것 또한 그 선진 문물 중 하나랍니다.”
옥새를 사용하면 그 위치가 드러나는 기술을 만들어냈기에 염라가 이 주변 어딘가에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그래서 트릭 본인이 왔다며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군. 그런데 왜 여태껏 가만히 있었지?”
“이 주변에 옥새를 사용했다는 정보만 있었을 뿐, 대왕님이 지금처럼 모습을 바꾸고 계셨으니 몰랐지요. 더군다나 이름이 염라라니… 솔직히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계실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가끔 신의 이름을 따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있었으니 그중 하나라고 생각했을 뿐이죠.”
즉, 염라의 계획은 반쯤 성공한 것이었다. 일부러 이름도 제대로 안 바꾸고 너무 티 나게 보였기에 오히려 의심을 사지 않았던, 그 계획이 성공했었는데 어째서 그는 염라가 이곳에 있는 걸 확신했던 걸까.
“그럼… 어떻게 알아낸 거지? 결계가 쳐져 있는 이 집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내게 정확한 적의를 보낸 걸 확인했는데.”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죠. 한 Lady의 도움이 컸습니다.”
Lady? 염라는 눈썹을 꿈틀 거리며 설마, 하고 숨을 삼켰다.
“맞습니다, 검은 단발머리의 Lady. Very cute하더군요. 설마 대왕님의 첩입니까?
트릭이 혀를 뱀처럼 날름거렸다. 염라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일반적인 여자일 텐데… 그녀가 나랑 관련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일반적? 하하, 그런 여자가 마치 남자에게 꼬리치는 것 마냥 탐들을 질질 끌고 다니고, 저승사자가 유혹하는 미혹술에 안 넘어간다고요?”
역시 옥새까지 써서 구해준 게 실수였군. 아무래도 악마와 접촉했던 시간이 길었던 탓에 그녀는 저승사자들 수준의 주술은 먹히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면역이 생겨 버렸다.
그런 특이한 체질인데 염라가 사는 곳 근처인데다가, 염라는 설마 금비가 자신을 찾을 거란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녀가 자신을 도울 카드라는 생각에 저승사자들에게 이렇게 쉽게 꼬리가 밟힐 거란 생각도 못했다.
도울 카드라고 생각했던 게 왜 이리 사사건건 방해하는지. 염라는 주먹을 꾹 쥐며 자신을 자책했다.
“게다가 관련이 없다면 대왕님 집에 들이지 마셨어야지요. 왜요, 오랜만에 현계에 내려오시니 여자들 보고 번뇌가 끓어오르십니까? 하긴 대왕님과 하룻밤 보낸 여자들은 하나 같이 황홀함을 잊을 수 없다고, 혹시 그 Cute한 Lady도…….”
“한 번만 더 지껄여라.”
어느새 염라가 긴 곤봉을 트릭의 목에 대고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트릭은 그 위협에서도 여유로운 듯 피식 웃으며 손등으로 가볍게 그의 곤봉을 밀쳐냈다.
“잡담은 이쯤하고… 염리님께서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신계로 돌아갈 생각 없으시냐고요.”
염라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곤봉을 쥔 손에 힘을 꽉 넣었다.
“…염리는 언제나 늘 같은 말을 하는군. 나는 늘 같은 대답을 했지.”
“그 말씀은…….”
“이번에도… 같은 대답이다.”
염라의 눈을 바라보던 트릭은 쿡 하고 웃으며 고개를 위아래로 한 번 흔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염라 님이 갖고 계신 옥새…….”
쉬이익―!
“……!”
“죽여서라도 가져가겠습니다!”
방금 전까지 적의 한 번 보이지 않은 남자가 순식간에 염라와 거리를 좁혀 거의 목을 향해 날카로운 카드를 찔러 넣고 있었다. 미처 그 속도에 반응하지 못했던 염라는 당황한 낯빛을 가리지 못하고 뒤늦게 몸을 빼고 있었다.
“늦었습니다!”
날카로운 카드 끝에 그의 목이 쑥 들어가고 있었다.
‘젠장, 여기서 싸우면 다른 저승사자들도 몰릴 텐데!’
염라가 이를 꽉 물며 눈을 질끈 감은 그때.
「대왕님!」
그의 머릿속에서 청량한 여성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쿵―!
트릭이 쥐고 있던 카드가 공기 중으로 날아가며 염라와 트릭 사이로 지면을 박살낼 듯한 강한 충격과 흙먼지가 자욱하게 퍼져 나갔다.
“윽, 뭐야?”
트릭은 갑자기 폭탄처럼 터진 흙먼지에 뒤로 물러났고, 염라는 코를 막고 흙먼지 중앙에 서 있는 한 인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목소리는…….’
흙이 잔뜩 묻어 빛을 바란 망토, 종아리까지 길게 내려온 검은 머리카락과 함께 바람에 흩날려 망토 사이로는 아름다운 굴곡을 가진 여성의 가냘픈 나체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고, 망토 속에서 나온 팔은 가냘픈 체형과 대비될 정도로 크고 동물의 털이 가득한 짐승의 발과 같아보였다.
여성은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듯 눈에는 생기 하나 없는 눈과 차가울 정도로 무뚝뚝한 표정으로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염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인형 같은 얼굴에 가는 눈썹에서부터 광대뼈까지 칼로 그은 듯 안타까울 정도로 길게 새겨진 상처.
여성은 블랙홀 같은 눈동자로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대왕님. 당신의 충실한 종, 사라메야… 이곳에 당도했습니다.”
6. 보디가드 (3)
어찌되든 이젠 인간의 혼을 하나라도 지켜야 하는 상황이 됐다. 염리가 자신을 찾아내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훔쳐가게 된다면 그때야 말로 세기의 종말. 인간과 인간의 전쟁은 물론이고 악마와 신의 대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퇴마사들과 규합해야 한다.’
저승사자들과 퇴마사들은 서로 목표가 비슷한 긴밀한 관계였다. 공통적으로 악마를 퇴치하며 퇴마사들은 악령이나 혼 등을 잘 달래주고 이승에서 떠날 수 있게 만들어주며, 저승사자는 그 혼들을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저승사자들이 파업을 하고 있는 지금 아마 퇴마 일을 많이 해본 퇴마사들이라면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저승사자들이 본래의 일을 잘 안하고 있고, 오히려 인간들을 먹잇감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근신이 풀리면 퇴마 협회에 한 번 건의를 해봐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과연 저승사자들과 싸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한낱 인간이 어떻게 자신들의 혼을 입맛대로 다루는 저승사자들과 싸울 생각을 하겠는가.
‘이건 좀 고민해 봐야겠군.’
염라가 같이 나선다면 제아무리 저승사자들이라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을 테지만 정체를 숨겨야 하는 입장에서는 섣불리 나섰다간 일을 그르칠 수 있었다.
“염라 씨?”
갑자기 염라가 말을 멈추고 심각한 표정을 짓자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불렀다.
“아아, 미안.”
염라는 금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자꾸 잊고 있지만 그녀는 상당히 귀중한 카드 패였다. 조금만 가르치면 저승사자들에게 직접적인 건 몰라도 간접적인 피해 정도는 입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얼른 그녀가 성장해야 할 텐데, 자신이 너무 가르치는 게 부족한 걸까. 하기야 신들은 자연스럽게 알고 있는 걸 설명하려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저 대충 쓸 수 있을 거 같아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세요!”
“그래? 그럼 지금 하나 알…….”
염라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뚝 멈췄다.
“염라 씨?”
염라가 무서운 눈빛으로 갑자기 베란다를 너머에 옥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금비도 그의 시선을 따라 밖을 바라봤지만 파란 하늘, 하얀 구름 그리고 그 아래 네모난 건물만이 덜렁 있었다.
“뭘 보는 거예요?”
“아무래도 돌아가야 할 거 같네.”
그의 분위기가 차츰 무거워지자 금비도 느낀 게 있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염라의 옷을 꽉 잡았다.
“악마죠! 아니면 탐? 아니면 요새는 흔하지 않다는 악령인가요!”
염라는 고개를 홱 돌려 그녀를 노려봤다.
좀 전까지 흑진주 같은 검은 눈동자가 금색으로 변해 있었다. 숨을 멎게 만들 정도로 오싹한 금색의 눈동자. 마치 밤에 빛나는 늑대의 눈과 같은, 감정 하나 느껴지지 않는, 단지 눈빛만으로도 온몸을 짓누르는 느낌에 금비는 갑자기 주변의 공기가 사라진 느낌을 받으며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다.
“컥… 끅……!”
「집으로 돌아가라.」
숨을 쉬기 위해 발버둥 치던 그녀의 머릿속에 염라의 목소리가 무겁게 울려 퍼졌다. 마치 그녀는 최면이라도 걸린 듯 흐리멍텅한 눈으로 두 팔을 늘어뜨리더니 가방과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완전히 떠나가자 염라는 검은 코트를 단단히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한낮의 겨울의 날씨가 제법 매서웠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한기에 바람까지 불고 있어 눈이라도 내리지 않을까 싶을 지경이었다.
“후우… 나와라.”
염라가 아무도 없는 주택가 거리에 크지도, 작지도 않게 말하자 뚜벅, 하고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뚜벅―뚜벅―
“Excellent! 저승사자의 기운을 단번에 알아채고, 심지어 도망도 가지 않는다. 게다가 악마를 퇴치할 때 인간까지도 서슴지 않고 없애는 무자비함. 그건 본인이 인간이 아니거나 정신병을 앓고 있거나…….”
골목길에서 나온 남자는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로 씩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서구적인 외모를 가진 금발 벽안의 180cm를 훌쩍 넘는 남자. 머리에는 토끼라도 나올 듯 마술 모자라 불리는 탑 햇을 쓰고 있고, 몸에는 영국 신사라도 되는 냥 정갈한 양복에, 가슴에는 행커치프를 꽂아두고 있었다.
“저승사자…로군.”
염라는 금안을 빛내며 서구적인 외형의 남자와 마주섰다.
“설마 이런 모습으로 계실 거라곤 예상을 못했습니다, My King.”
남자가 탑 햇을 까딱 거리며 웃어 보이자 염라는 작은 키로 그를 올려다보며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대왕을 만났으면 예를 표해야지. 네가 누군지 밝혀라.”
저승사자는 여부가 있겠냐는 듯 모자를 벗으며 신사적인 인사를 표하며 그에게 고개를 푹 숙였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소인, 트릭이라고 하옵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왜 그런 모습을…….”
황송은 개뿔. 염라는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황홀하고 공포스러울 정도로 번뜩이는 금안으로 가만히 트릭의 눈을 응시하더니 싸울 의지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던 건지 염라가 눈을 깜빡이자 적기가 가득했던 금안이 사라지고 다시 흑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무래도 저승에서의 모습은 눈에 띄니까. 전혀 의심을 사지 않게끔 변한 거지.”
“그렇군요. 그 말씀대로… 그간 추적조들이 꼬리조차 잡지 못했습니다.”
“내 위치를 알게 된 건 내가 지옥으로 보낸 선물 때문이었나?”
“아, 그 악마 말입니까? 하하, 염리님께서도 무척 당황하셨습니다.”
그때의 일이 떠오르는 듯 트릭은 쿡쿡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갑자기 한 악마가 염라대왕을 발견했다며 지옥에서 난리쳤던 그 일. 감히 염리님을 데려오라며 건방지게 말해 저승사자들에게 두들겨 맞은 그 하급 악마를 떠올리던 트릭은 그게 아니라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 미천한 놈이 대왕님의 소재를 알려주기도 했지만 염라 님께서 옥새를 사용했다는 소식에 대왕님의 위치를 알게 된 겁니다.”
옥새는 금비를 구할 때 악마를 지옥으로 보냈던 특이한 능력을 지닌 그의 도구였다. 유일하게 모든 차원을 넘나드는 도구로 염라가 가고 싶은 곳이라면 그곳이 신들이 사는, 소위 신계라 부르는 천국이든, 악마들이 사는 지옥이든, 아니면 그의 고향인 저승이든 어디든 갈 수 있는 것이었다.
“…뭐?”
옥새를 사용해서 잡힌 거라니. 옥새의 힘을 감지하는 어떤 시스템이라도 있는 것일까. 염라의 기억으로는 저승은 그런 문물 같은 게 존재하지 않았다. 시대상으로 보면 거의 고려나 조선쯤의 시대에 정착해서 수수하게 살아가는 곳인데 트릭의 말을 생각해보면 염라가 아는 저승과 지금은 현저하게 다르단 뜻이었다.
“이런, 대왕님이 계셨을 때와 지금의 저승은 많이 다른 세상입니다. 이곳처럼 기술이 발달해 모든 게 편리한 생활이 되었지요. 고작 일 년 새… 라고는 하지만, 그만큼 염리님이 잘해주신 거죠. 옥새의 위치를 찾은 것 또한 그 선진 문물 중 하나랍니다.”
옥새를 사용하면 그 위치가 드러나는 기술을 만들어냈기에 염라가 이 주변 어딘가에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그래서 트릭 본인이 왔다며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군. 그런데 왜 여태껏 가만히 있었지?”
“이 주변에 옥새를 사용했다는 정보만 있었을 뿐, 대왕님이 지금처럼 모습을 바꾸고 계셨으니 몰랐지요. 더군다나 이름이 염라라니… 솔직히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계실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가끔 신의 이름을 따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있었으니 그중 하나라고 생각했을 뿐이죠.”
즉, 염라의 계획은 반쯤 성공한 것이었다. 일부러 이름도 제대로 안 바꾸고 너무 티 나게 보였기에 오히려 의심을 사지 않았던, 그 계획이 성공했었는데 어째서 그는 염라가 이곳에 있는 걸 확신했던 걸까.
“그럼… 어떻게 알아낸 거지? 결계가 쳐져 있는 이 집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내게 정확한 적의를 보낸 걸 확인했는데.”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죠. 한 Lady의 도움이 컸습니다.”
Lady? 염라는 눈썹을 꿈틀 거리며 설마, 하고 숨을 삼켰다.
“맞습니다, 검은 단발머리의 Lady. Very cute하더군요. 설마 대왕님의 첩입니까?
트릭이 혀를 뱀처럼 날름거렸다. 염라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일반적인 여자일 텐데… 그녀가 나랑 관련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일반적? 하하, 그런 여자가 마치 남자에게 꼬리치는 것 마냥 탐들을 질질 끌고 다니고, 저승사자가 유혹하는 미혹술에 안 넘어간다고요?”
역시 옥새까지 써서 구해준 게 실수였군. 아무래도 악마와 접촉했던 시간이 길었던 탓에 그녀는 저승사자들 수준의 주술은 먹히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면역이 생겨 버렸다.
그런 특이한 체질인데 염라가 사는 곳 근처인데다가, 염라는 설마 금비가 자신을 찾을 거란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녀가 자신을 도울 카드라는 생각에 저승사자들에게 이렇게 쉽게 꼬리가 밟힐 거란 생각도 못했다.
도울 카드라고 생각했던 게 왜 이리 사사건건 방해하는지. 염라는 주먹을 꾹 쥐며 자신을 자책했다.
“게다가 관련이 없다면 대왕님 집에 들이지 마셨어야지요. 왜요, 오랜만에 현계에 내려오시니 여자들 보고 번뇌가 끓어오르십니까? 하긴 대왕님과 하룻밤 보낸 여자들은 하나 같이 황홀함을 잊을 수 없다고, 혹시 그 Cute한 Lady도…….”
“한 번만 더 지껄여라.”
어느새 염라가 긴 곤봉을 트릭의 목에 대고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트릭은 그 위협에서도 여유로운 듯 피식 웃으며 손등으로 가볍게 그의 곤봉을 밀쳐냈다.
“잡담은 이쯤하고… 염리님께서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신계로 돌아갈 생각 없으시냐고요.”
염라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곤봉을 쥔 손에 힘을 꽉 넣었다.
“…염리는 언제나 늘 같은 말을 하는군. 나는 늘 같은 대답을 했지.”
“그 말씀은…….”
“이번에도… 같은 대답이다.”
염라의 눈을 바라보던 트릭은 쿡 하고 웃으며 고개를 위아래로 한 번 흔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염라 님이 갖고 계신 옥새…….”
쉬이익―!
“……!”
“죽여서라도 가져가겠습니다!”
방금 전까지 적의 한 번 보이지 않은 남자가 순식간에 염라와 거리를 좁혀 거의 목을 향해 날카로운 카드를 찔러 넣고 있었다. 미처 그 속도에 반응하지 못했던 염라는 당황한 낯빛을 가리지 못하고 뒤늦게 몸을 빼고 있었다.
“늦었습니다!”
날카로운 카드 끝에 그의 목이 쑥 들어가고 있었다.
‘젠장, 여기서 싸우면 다른 저승사자들도 몰릴 텐데!’
염라가 이를 꽉 물며 눈을 질끈 감은 그때.
「대왕님!」
그의 머릿속에서 청량한 여성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쿵―!
트릭이 쥐고 있던 카드가 공기 중으로 날아가며 염라와 트릭 사이로 지면을 박살낼 듯한 강한 충격과 흙먼지가 자욱하게 퍼져 나갔다.
“윽, 뭐야?”
트릭은 갑자기 폭탄처럼 터진 흙먼지에 뒤로 물러났고, 염라는 코를 막고 흙먼지 중앙에 서 있는 한 인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목소리는…….’
흙이 잔뜩 묻어 빛을 바란 망토, 종아리까지 길게 내려온 검은 머리카락과 함께 바람에 흩날려 망토 사이로는 아름다운 굴곡을 가진 여성의 가냘픈 나체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고, 망토 속에서 나온 팔은 가냘픈 체형과 대비될 정도로 크고 동물의 털이 가득한 짐승의 발과 같아보였다.
여성은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듯 눈에는 생기 하나 없는 눈과 차가울 정도로 무뚝뚝한 표정으로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염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인형 같은 얼굴에 가는 눈썹에서부터 광대뼈까지 칼로 그은 듯 안타까울 정도로 길게 새겨진 상처.
여성은 블랙홀 같은 눈동자로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대왕님. 당신의 충실한 종, 사라메야… 이곳에 당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