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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라 : 소울 콜렉터 1권 (13화)


5. 발설지옥(拔舌地獄) (2)

“어디 가는 거예요?”
“일이 들어와서 말이지. 신부님이 직접 부탁한 거니 빨리 처리해줘야지.”
금비는 그를 쫓아가기 위해 걸음마를 떼지 못한 아기마냥 기어서 다가왔다.
“저, 저도……!”
“안 돼. 그쪽 기가 너무 약해졌어. 이대로 나가다간 수십 마리나 되는 탐이 달려들 텐데 내가 지켜줄 자신이 없어.”
물론 인간적인 선에서만. 수십 마리든 수백 마리든 지옥에 있는 악마가 아닌 이상 현계에 있는 모든 존재들은 염라 앞에선 툭 치면 억하고 죽는 파리 수준이었다. 다만 힘을 최대한 아껴야 하는 그의 입장에선 그녀를 지키면서까지 그 많은 탐들을 감당할 생각도, 자신도 없었고 시간조차 쓰기 싫었다.
“하지만…….”
뒷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가뜩이나 제대로 된 재능 하나 가진 거 없는데 노력이라도 해봐야 할 것 아닌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악마를 만난 뒤에 이렇게 된 거라니, 정말로 악마는 세상에 도움이 안 되는 존재들이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 알지? 그쪽이 어떤 마음인지는 알겠지만 무리하게 움직이면 더 안 좋아. 심지어…….”
염라는 말하다가 뚝 끊었다. 이 말은 하지 않는 게 좋겠지. 그녀에게 알려줘 봐야 기껏 맘 잡은 퇴마에 대한 환상은 깨질 테고 카드 패를 잃어버리게 된다.
금비는 갑자기 그가 말을 끊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라봤고, 염라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최근 두 건의 퇴마는 평화롭게 끝났다. 악마들을 모두 퇴치했으며 두 사람의 목숨을 살렸다. 하지만 염라의 퇴마는 원래 그런 게 아니었다.
“일전에 내가 하는 퇴마가 일반적인 퇴마와 다르다는 걸 기억하나?”
“그럼요. 그거 물어보려고 했었는데 까먹고 있었네요!”
“보통 퇴마는 악마들을 몸에서 쫓아내는 걸로 끝나. 믿음이 절실하거나 강력한 퇴마사들은 악마를 천국으로 보내버리지.”
“…천국이요?”
천국이라니. 악마들의 천국으로 보낸단 걸까, 아니면 말 그대로 진짜 천국으로 보낸다는 걸까. 전자면 이해하지만 후자면 도무지 이해 못할 소리였다.
“악마가 천국으로 가면 어떻게 될 거 같아?”
그의 말에 금비는 인상을 찌푸리고 으음, 하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회개당하고 말아. 악마의 본성이 사라지고 천사가 되지.”
그럼 좋은 거 아닌가? 천사는 좋은 거니까 악마에서 천사로 변한다면 금비는 자신도 악마가 돼서 회개 한 번 당해보고 싶은 생각조차 들었다.
“악마가 천사가 되길 원한다고 생각해?”
“아니에요?”
“가령… 음, 그래. 전지전능했던 신이 한낱 힘없는 인간이 된다 생각해 봐라. 좋을 거 같나?”
염라의 말에는 뼈가 있었지만 금비는 전혀 느끼지 못한 듯싶었다.
그녀는 그저 염라의 말에 그럴 수도 있구나, 말하며 한편으로는 이해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잘 이해가 안 가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럼, 천사보다 악마가 더 좋은 건가요?”
“아니, 좋다는 문제보다…….”
뭐 이리 이해가 느리지. 인간으로서의 관점의 차이인가 싶었다.
“비유가 조금 틀리긴 했네. 악마가 천사가 된다는 건 그때까지의 죄를 뉘우치는 정신 교육을 받는단 거야. 한 종교인이 무신론자들 붙잡아두고 쉬지도 못하게 하고 백년 정도 교리를 설파한다고 보면 되겠네.”
“힉…….”
그제야 단번에 이해가 간 건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치 바퀴벌레가 눈앞으로 기어가는 걸 본 것과 같은 혐오스러운 표정이었다.
신부님이 듣지는 않았겠지. 염라는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단 생각에 당연히 신부가 여기 있을 리는 없지만 고개를 휙휙 돌려 확인했다.
“아무튼 퇴마사들은 악마들을 천국으로 인도해. 하지만 난 악마들을 천국이든 지옥이든 어디도 못 가게 한다.”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눈앞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적의. 마치 거인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 위압감이 금비의 온몸을 짓누르는 듯했다. 또다시 속이 들끓으며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은 중압감에 금비는 입을 다물고 팔을 덜덜 떨며 애써 참아내고 있었다.
“존재 자체를 소멸시켜 버려. 난 다른 퇴마사들과 달리 악마를 없애 버리는 방법을 알거든.”
염라는 일전 악마에게 스스로 악마를 염라가 창조했다고 했었다. 그가 악마를 창조한 이유는 많은 신들이 떠들었으나 대표적으로 그가 신계를 차지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의 행보로 봐서는 그 소문도 사실이 아니었고, 염라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악마를 창조한 창조주답게 염라는 악마를 확실히 없애 버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저승사자들처럼 본연의 힘을 사용하면 쉬울 테지만 애초에 염라는 힘을 축적하는 중이었기에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고, 그가 선택한 방법은 인간들에게도, 그리고 악마들에게도 아주 잔인한 방법이었다.
금비는 그 사실을 듣기가 두려웠다. 도대체 뭐기에 이렇게 무서운 표정으로 말을 하는 것인가. 염라 또한 그녀가 겁먹었단 사실을 아는 듯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내가 가르치는 모든 건 실제 퇴마와 거리가 멀 거야. 그래도 내게 배울 건가?”
빤한 대답이었으나 염라는 한 번 더 물어보기로 했다. 그녀가 자신의 카드 패가 된 이상 그녀의 운명은 불 보듯 빤했으니까 거절 못할 걸 알고 있지만, 만약 그녀가 거절한다면 모든 퇴마에 대한 기억은 잊고 평범하게 살라고 당부하고 싶었다.
“할게요! 저 어차피 염라 씨 외에 아는 퇴마사도 없어요! 전 무교라서 어디 들어가기도 좀 그렇고요. 무속인이 되기도 싫어요, 그거 막 칼도 삼켜야 하고 그렇잖아요.”
칼을 삼키는 게 무서워서 무속인이 되기 싫다니. 이유야 어찌됐던 염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런 결정인가. 당연한 결과였기에 새삼 놀랍지는 않았지만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새파랗게 젊은 아이가, 애틋한 사랑을 하고 즐거운 우정을 나눠야 하는 아이가 신의 개인적인 일로 인생이 꼬이다니. 한편으로는 불쌍하단 생각이 들었다.
금비는 종교에 대해 말하다 생각난 듯 아, 하며 그에게 물었다.
“염라 씨는 종교가 뭐예요? 무속인이면 막 제사상도 있지 않나… 그렇다고 기독교는 아니신 거 같고, 불교…랑도 거리가 멀죠?”
“굳이 셋 중에서 고르라면 불교겠지. 밀교라고 알려나 모르겠네. 그쪽과 비슷한 술법이야.”
밀교라면 퇴마 공부 할 때 언뜻 본 기억은 있다. 마치 지금 금비가 배우고 있는 데바나가리 언어와 비슷한 말을 하며 주술을 외우는 것.
“아, 알아요! 막 이상한 그림 같은 문자에 이상한 주문이던데… 아모가 바이로차나… 막 그런 거?”
그녀가 말하는 것은 산스크리트어로, 그녀가 본 문자는 진짜 데바나가리 혹은 그의 시초인 아람 문자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관해서는 제대로 조사를 하지 않은 듯, 그저 염라가 그런 걸 외운다는 생각에 굉장히 신기하게 바라봤다.
“염라 씨도 외울 줄 알아요?”
“그럼.”
내가 쓰는 거니까. 신의 발음과 문자를 쫓아서 해보겠다고 한 것이 산스크리트어와 브라흐미 문자였기 때문에 염라는 그것보다도 더 고차원적인 주문을 외울 수 있었다. 그의 입장에선 그냥 평소 하는 말이지만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선 주문으로 들릴 것이다.
“나, 나도 가르쳐줘요!”
이미 배우고 있는데도 가르쳐 달라니, 염라는 바닥에 널브러진 종이들을 가리켰다.
“저거, 저것들만 읽고 말할 줄 알면 돼. 그러니까 우선은 쓰는 방법부터 익히게. 그럼 발음도 알려주겠네.”
“또, 또……말투 진짜 늙은이야.”
염라는 신경 끄라며 인상을 찌푸렸다.
금비는 꽃에 양분이라도 준 것처럼 기운이 샘솟은 학구열을 다진 표정으로 재빠르게 종이를 들어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염라는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바라봤다. 그리 오래 대화한 것도 아닌데 꽤 시간이 많이 흘러 버렸다.
“신부님이 기다리시겠네.”
그의 혼잣말을 들은 금비는 하나 더 궁금한 게 생긴 듯 종이를 탁 내려놓고 그가 나가기 전에 불러 세웠다.
“아, 잠깐만요. 왜 신부님이 염라 씨한테 연락해요? 그쪽 종파는 따로 있는 거 아녜요?”
“퇴마사들끼리는 서로 조금씩 연결되어 있어. 서로 목표가 같다보니까 실력 좋은 퇴마사는 종파를 막론하고 부르거든.”
문득 금비는 엑소시스트 영화 중에서 무속인이랑 검은 사제들이랑 알고 지내는 걸 떠올리며 그렇구나, 하고 납득했다.
“웬만하면 여기서 나오지 마.”
“네… 네?”
무의식적으로 동의하던 그녀는 잘못 들었나 싶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내가 집에 와서 데려다 줄 때까지 나오지 말라고.”
“왜, 왜요?”
“설명했잖아. 그쪽이 지금 기가 약한 상태니까 탐들에게 쉽게 먹힐 거야.”
“아, 아아… 그, 그런데 이 집에 있으면 안전한 건가요?”
“퇴마사들의 집은 일종의 안전 가옥이거든. 교회나 절에 귀신들이 쉽게 침입하지 못하는 이유랑 같아. 일반 퇴마사들의 집에도 강력한 방어막이 쳐져 있지.”
워낙 잡귀, 혹은 그 이상의 존재들에게 민감했던 퇴마사들은 혹여나 자는 와중에, 혹은 관계된 가족들에게 해라도 끼칠까 귀신들은 못 들어오게 하는 방어막을 펼치고 있었다.
물론, 염라는 그것보다도 훨씬 더 수준 높은, 안전 가옥보단 성역에 가까운 방어막이었지만, 어쨌든 그녀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곳이었다.
뭔가 일이라도 있는 걸까. 그녀는 난색을 보이며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어디 가야하나?”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갑자기 염라와 멀어지려는 듯 몸을 슬금슬금 움직이며 눈치를 살살살 보는 것이었다. 저 반응, 염라는 익숙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몇 번이고 말하지만 그쪽한테 관심 없어. 내 취향에서 우선 억만 년쯤 떨어져 있다고. 예쁘거나 귀엽기만 한 건 오래전에 질렸어.”
“억만… 질렸…….”
포인트가 그곳은 아니었지만, 금비는 오히려 다른 것보다 자신이 질렸다는 거에 충격 먹고 있었다. 이래봬도 귀엽다는 소리를 많이 들으며 제법 고백도 많이 받아본 사람이었다. 어디 가서 꿇리지는 않는 외모라 생각하는데 염라가 단단히 못을 박자 헛웃음을 흘리며 소리쳤다.
“그, 그래도 혹시나 하는 거니까요! 그, 왜 남자들은 자제력이 없다면서…….”
소위 말하는 늑대가 될지 모르고, 심지어 그가 지금 나갔다가 밤에 돌아온다는 뉘앙스를 풍겼기에 혹시나 모르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내가 자제력이 없을 만큼 네게 번뇌가 들끓지는 않는데.”
해탈의 경지에 오른 신에게 자제력이라니. 다른 거라면 몰라도 여자와 자고 싶단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녀 수준의 미인은 이쪽 세계에 차고 넘치고, 막말로 악마들이 훨씬 매력적이고 예쁜 여자들이 많아서 염라가 보는 금비는 그저 귀여운 애완동물 수준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 저 요새 제 미모에 자신이 없어지거든요, 누구 덕분에!”
당당하게 말하는 그녀에게 염라는 당당하게 맞받아쳤다.
“다행이네. 어디 먹힐 만한 미모는 아닌 거 같은데…….”
“헐… 아 씨, 진짜……!”
금비가 분하다는 듯 난리를 피웠으나 그녀를 말리기는커녕 염라는 관심이 없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저 집에 있으라고 표현한 것뿐인데 갑자기 왜 이야기가 이렇게 이어지는지. 덕분에 아까운 시간이 계속 날아가고 있었고, 이러다간 끝도 없겠다 싶어 염라는 바쁘게 현관으로 걸어갔다.
“아아, 기다려요! 나 아직 이야기가… 읍!”
순간 금비는 구역질이 올라올 거 같은 기분에 입을 턱 막고 화장실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우욱!”
화장실 너머로 들리는 헛구역질 소리에 염라는 쯧쯧 고개를 흔들며 밖으로 나갔다.